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87화 (287/298)

외전 4화. 의심암귀(疑心暗鬼)

오늘도 철산 관아는 시끌시끌했다.

평소처럼 향청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향반들이 모여들어 아전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글쎄, 저잣거리에 오입질하러 의주까지 가는 양반이 있다는 얘기가 돌지 뭡니까. 그 이야기에 대해 아시는 분, 계십니까? 아랫것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요?”

“사실일 걸세. 얼마 전 내 집에 그 사람이 찾아왔었거든. 생각보다 멀쩡하게 생겼던데 왜 그러고 사는지 모를 일이네.”

정체 모를 길손을 비꼬며 배좌수가 입꼬리를 뒤틀자, 향반들이 모인 자리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리에 오가는 이야기는 분명 배 좌수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요새 한양으로 중원과 강남, 그리고 저기 멀리 서역 오랑캐의 것까지 온갖 부가 모여든다니, 그런 쓸 데 없는 짓을 하러 다니는 경반(京班, 한양에 거주하는 양반)도 있나 보지요?”

“글쎄, 그야 모를 일이지. 아무리 그래도 제대로 된 양반이 여색을 탐하러 압록강까지 걸음을 옮기겠냐, 이 말이야.”

“하하, 좌수 나리 말이 옳습니다. 경반 놈들이 아무리 나라의 권력과 재력을 독점하고 있다고는 하나, 멀쩡한 경반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배 좌수에게 알랑방귀를 끼는 향반은 허 별감이었다.

홀아비가 된 배 좌수에게 누이를 시집보내 대를 이을 아들을 셋이나 낳게 한 후로,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며 고을의 온갖 이권을 꿀꺽해왔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유력한 두 향반 가문의 결합 결과, 그들의 세력은 전임 철산부사도 함부로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철산 백성들이 나그네에게 스스럼없이 두 사람의 욕을 꺼낼 정도로, 두 처남 매부는 이 근방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아, 경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신임 도호부사는 누구라 하던가? 이번에는 우리 향반들의 말을 순순히 잘 들어줄 사람이 와야 할 텐데.”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한양에서 보내준 소식으로는 전동흘이라는 무반(武班)이라 하더군요. 무관치고 술과 여색을 밝히지 않는 자가 없을 테니, 전임 부사와는 달리 구워삶기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전임 부사처럼 약한 주제에 고집만 센 사람이 오면 안 될 텐데 말이야. 부사쯤 되는 사람이 속에서 치미는 화기를 못 견뎌 횡사하다니, 그게 말이나 될 소린가? 핫핫.”

자리에 다시 비웃음이 퍼져나갔다. 감히 왕의 대리자인 수령을 저리 함부로 비웃는 것을 보니, 철산에서 수령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전임 부사의 죽음은 향반들의 텃세와 관련이 없지 않으리라.

“저기 한양에서도 말이야. 그러면 안 되는 법이지. 우리 향청을 어떻게든 꺾으려고 경재소를 철폐하더니, 이제는 향청의 향반들더러 저기 아전들이나 하는 일을 하라고? 나 참.”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본래 향청이란 사또가 함부로 나랏일을 하지 못하도록 조언하고 견제하도록 만들어진 조직이 아닙니까. 이 고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또 마음대로 철산을 좌지우지하게 둘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허 별감 자네 말이 맞네. 얼마나 나라에서 그리 함부로 칼을 휘둘러댔으면, 이제는 웬 향교에서 노니는 떨거지 향반들이 우리 향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않은가. 나 원.”

“이럴 때일수록 저희는 똘똘 뭉쳐 이권을 내려놓지 말아야 합니다. 신임 부사가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이 어떻게든 기를 죽여 우리 뜻에 따르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옳소! 그 말이 맞소!

동의하는 목소리가 철산도호부 관아의 동헌에 울려 퍼졌다. 이 시기 향반 세력을 억누르려 조선 조정이 시행한 여러 정책들은, 오히려 철산의 향반들이 똘똘 뭉치게 된 계기가 되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그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 관아 주변에서는 공기의 흐름이 바뀌고 있었다. 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갑자기 온몸의 솜털이 쭈뼛 일어서는 기분을 느낄 정도였다.

“어, 좌수님. 저 놈은 뭡니까?”

“무엇이 말인가?”

패거리에 끼어 웃고 떠들던 향반 하나가 관아의 솟을대문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웬 사내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서 있었다.

괜히 그 향반이 정색을 하고 배 좌수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사내가 서 있는 자리는 평범한 땅바닥이 아닌, 기와를 올려 치켜세워진 처마 위였으니까.

“뭐, 뭐야. 저놈?”

“이 대낮에 도적놈이라도 든 건가? 아니, 그런데 저건 양반의 행색인데?”

“저놈, 얼굴에 뒤집어쓴 것은 대체…….”

아무 것도 모르는 향반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끼어있던, 한양에서 유행하는 소설을 즐겨 읽던 향반 몇몇은 뒤통수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좌수 나리. 지금 무언가 일이 단단히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일단 몸을 피하시는 게…….”

“자네는 또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말인가? 저 미친 작자가 뭐 어쨌기에?”

“그것이……. 제가 읽은 이야기에서는…….”

허구라 여겨지는 소설 속 이야기를 좌수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다. 덕분에 말을 꺼낸 향반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애를 먹고 있었다.

한편 솟을대문 위, 호랑이 복면 아래에 드러난 입꼬리에는 심술궂은 미소가 올라붙기 시작했다. 도포자락 한가득 바람을 맞으며 관아 주위를 둘러본 그의 눈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짐승 복면을 뒤집어 쓴 채 담장 아래 웅크리고 있는 그의 부하들이 비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제대로 해낸 모양이군……. 상대가 부패한 수령이 아니라 향청의 송사리들인 것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흠, 흠.

혼란에 빠진 동헌을 바라보며, 복면을 쓴 괴인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이번에야말로 삼세번, 그동안 풀지 못했던 울분을 한 번에 풀어낼 차례였다.

“아, 아. 철산 관아에 머물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고한다……!”

괴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범대가리를 통째로 삶아먹은 듯 우렁찼다.

포효하는 호랑이 앞에서 사람은 오줌을 지리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고 하던가. 분주히 꿈틀거리던 철산 관아의 움직임이 순간 통째로 멎었다.

“이미 조사는 모두 끝났다. 전원 내 명에 따라 처분을 기다리라……!”

다시 한번 포효를 쏟아놓은 괴인은, 얼음처럼 굳은 향반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를 찾고는 중얼거렸다.

넌 이제 X됐어. 이 새끼야.

“반항할 생각 따윈 마라! 주상 전하의 명을 받든 어사가 명한다……!”

이번엔 잊지 않았다. 그의 손에 잡혀 쳐들린 마패는 찬란히 주인의 위엄을 뽐냈다.

그것을 신호로 하여 관아 주위에서 몸을 낮추고 있던 부하들이 담장을 훌쩍 뛰어 넘었다. 그들이 목표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은,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짐승 무리를 보는 듯했다.

“……암행어사 출두야!”

***

“어찌하여 그러신 겝니까! 대체 어째서!”

“미안하다, 아들아. 나는 정말로 그 아이가 그렇게 될 줄은…….”

아무리 그동안 망나니 행세를 하고 다녔다지만, 청년은 차마 아비를 칠 수 없었다. 자식에게 씻지 못할 죄를 저지른 아비가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구걸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쾅.

청년이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방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몇 번이고 같은 자리를 후려친 탓에 청년의 주먹은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들아…….”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아버지쯤 되시는 분이 뒷일 따윈 생각하지 않으신 겝니까? 그렇게 주도면밀하신 분께서요?”

“……나도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동안 네가 장가를 가지 않은 핑계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고, 또 너는 심양에서 돌아와서 과거 준비를 하면서도…….”

“그놈의 과거, 과거! 저는 아버지를 위해 성균관까지 기어들어갔지만, 아버지가 저를 위해 해주신 것은 고작 이런 것입니까? 내가 무엇을 원했는지,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 아시고 계셨으면서…….”

청년의 아비는 잠시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의 아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말이 아니라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에 가까웠음에.

“나는 그저…… 그저 그 아이가 뱃속에 품은 손녀를 핑계로 네 앞길을 막을까봐……. 너는 이제 큰일을 해야 하지 않느냐……. 과거에도 급제했고, 이제 함께 귀국하신 세자 저하의 눈에 들어 입신양명할 일만…….”

“그깟 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혼전임신이 무어라고! 그깟 내 혼인이 무엇이라고! 혼인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 따위가 대체 무엇이라고!”

“…….”

“아버지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게 그 사람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그 사람이 저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청년의 눈에서는 숫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들이 처참하게 날뛰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비는 그저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아들아. 나는 그저 정실 자리는 탐내지 말라 경고만 하려 했던…….”

“으아아아아아아!!!”

귀신의 형상을 하고 울부짖던 청년은, 문짝을 걷어차 박살 내더니 어디론가 뛰쳐나가 종적을 감췄다. 그가 주먹으로 내리찍은 사랑방 구들장에는 깊고 어두운 구멍이 상처처럼 나 있었다.

그 후, 청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벗의 경사에 참석해 축하를 전한 후, 압록강을 건너가 오랜 세월 동안 조선에 돌아오지 않았다. 증광시에 급제해 충분히 벼슬을 내려받을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

촤악.

기절해 있던 죄인의 몸에 서늘한 기운이 쏟아졌다.

차갑게 젖은 옷이 온몸에 달라붙기 시작하자 죄인의 눈꺼풀은 슬슬 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린 배 좌수는 이번이 두 번째 기절이었다는 사실을 겨우 떠올려냈다.

하루에 두 번이나 정신줄을 놓아버려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금은 서슬 퍼렇게 몰아붙이는 괴인에게 질려 혼이 나갔었고, 첫 번째는 왜 기절했었더라?

“죄인, 빨리 정신을 차리지 못하나? 또 한 번 조선통보 맛을 보고 싶은 모양이지?”

“히, 히익!”

그 모습을 본 배 좌수는 기절했던 이유를 떠올려냈다. 지금 괴인의 손에 들린 저 엽전이 원인이었다. 주위에 나뒹굴고 있던 장작개비에 박힐 정도로 무서운 위력을 가진 흉기.

게다가 엽전을 맞고 기절한 사람은 배 좌수만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괴인을 향해 달려나간 다른 이들이 머리통을 부여잡고 쓰러지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어느새 그 역시 정신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처럼 손목을 휘두르려는 괴인을 보고, 배 좌수는 반사적으로 팔을 올리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이미 형틀에 꽁꽁 묶여 심문을 당하는 중이었다.

“내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하지 마라. 네놈에게 물을 것이 차고 넘치니까.”

“어사또 나리. 소인은 그것이…….”

“또 변명이냐? 그 입 닥치고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하는 게 좋을 게다. 아니면, 또 기절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서늘한 질책이 동헌 위에서 날아들었다. 그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은 배 좌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기절한 사이에 잊어버린 모양인데, 다시 말해주지. 네놈이 지금 가장 먼저 심문을 받는 이유는, 네놈이 저지른 흉악한 죄를 논하기 위함이다. 이제 기억이 나나, 좌수 배무룡?”

“아……. 아닙니다! 어사또 나리! 소인이 감히 어찌 그런 흉악한 일을 저질렀겠습니까! 그것은 전부 음란한 짓을 저지른 딸년들이 스스로…….”

“끝까지 잡아뗄 생각이군. 뭐, 좋아. 너 같은 놈들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을 보았다는 듯, 동헌마당에 침을 탁 뱉은 어사는 어딘가를 향해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짐승탈을 쓴 사내들 사이에서 벌벌 떨고 있던 늙수그레한 노비 하나가 어사의 앞으로 나섰다.

“배무룡의 노비 꺽쇠. 네가 아는 것을 곧이곧대로 말하라.”

“…….”

“저자가 기절하기 전 증언했던 것도 다시 말해야 할 것이다. 저 흉악죄인은 아직도 자신이 저지른 죄를 깨닫지 못한 모양이니.”

호랑이 탈을 쓴 어사에게서 정체모를 위압감을 느꼈는지, 늙은 노비는 다시 한번 진저리를 치더니 자신이 목격한 일에 대해서 증언하기 시작했다.

배씨 집안의 장녀, 장화가 실종된 후 애기씨를 찾아 주변을 수색한 이가 바로 꺽쇠라 불린 노비였다. 방금은 배 좌수가 증언 도중 난동을 부려 중단됐지만, 그는 저수지 주위에서 발견한 애기씨의 물건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이 봇짐이 정녕 그날 저수지 근처에서 발견한 물건이 맞으렷다?”

“예! 어사또 나으리! 쇤네가 어찌 나으리께 거짓을 고하겠습네까? 분명 그 봇짐 안에 든 물건은 전부 애기씨의 물건이 맞습네다.”

“그건 다른 노비들에게 확인해보면 분명히 확인될 일이지. 방자, 당장 봇짐을 들고 배무룡의 집으로 가 진상을 확인하도록!”

“옛. 어사 나리!”

어사의 명을 받은 방자는 곧 병사 몇 명과 함께 노비를 데리고 관아 밖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배 좌수는 숨통이 조여오는 느낌에 팔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그,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씀이십니까? 어디로 간지 모르는 딸년이 떨어뜨리고 갔을지도 모르는 물건 아닙니까?”

“그래? 아비 된 이가 딸의 행방을 모른다……? 내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다른데?”

“예?”

“배무룡, 그거 아나? 우리 총통위 병사들은 옆 나라에서도 따라올 자들이 없을 정도로 물에 친숙하거든. 그리고 어제, 내가 지휘하는 병사들이 저수지에서 시신 한 구를 건져 올렸다.”

어사의 호랑이 탈 위로 냉기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배 좌수를 비롯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순간 얼어붙을 정도였다.

“망자가 원한을 잔뜩 품고 있었는지, 물속에 빠진지 오래되었을 시신이 마치 잠시 잠들어 있던 것 같더군. 그게 누구일 거라 생각하나, 배무룡?”

“서, 설마…….”

“맞아. 네놈의 실종된 맏딸, 장화였다.”

관아 주위에 몰려든 백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 말도 안 되는 드라마는 백성들이 곧바로 받아들이기에는 시작부터 너무나 막장이었다.

“네놈이 어디로 간지 모른다던 딸이, 수면 아래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이 말이야!”

어사의 호통이 동헌마당을 쩌렁쩌렁 울리자, 배 좌수의 낯빛은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추악한 아비의 입은 끝끝내 변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그…….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습니다, 어사또 나리. 딸년이 음탕한 짓을 저질렀기에 여러 번 책망한 적이 있었는데. 집을 나간 후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결을 선택한 모양이군요.”

“…….”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철산 인근에 모범이 되어야 할 명문가의 가주로서 딸년에게 약간의 질책을 했을 뿐인데요. 일이 그렇게 되다니 참…….”

핫.

배 좌수의 변명이 끝나자마자 어사에게서 코웃음이 흘러나왔다. 담장 너머 백성들에게서도 야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역겹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허물을 질책하자 딸이 가출해 스스로 깊은 물에 몸을 던졌다라……. 배무룡, 지금 네놈의 죄목을 하나 추가한다. 상감마마의 대리자인 나를 기만한 죄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치아를 지그시 악문 어사가 말을 씹어뱉었다. 마치 혐오스러운 무언가를 보기라도 한 것 같은 태도였다.

“기만이라니요! 제가 어찌 감히!”

“배무룡, 무언가 이상하지 않나? 방금 내가 진위를 확인하러 방자 손에 들려 보낸 봇짐은 꽤나 꼼꼼히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물건이었다. 저수지에 몸을 던질 사람이, 저렇게 뒷일을 염려하듯 행동한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나?”

“……!”

“네놈이 꾸민 거짓을 깨부술 증좌는 그걸로 끝이 아니다. 이게 무엇인지 아나?”

계속해서 말을 잇던 어사는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웬 작은 비단주머니와 상자였다.

“네놈은 모르겠지만 건져 올린 시신은 목에 웬 조그마한 주머니를 달고 있었다. 그 안에는 은자 하나와 은편 여럿이 담겨있더군.”

“그, 그것이…….”

“죽으러 가는 사람이 그토록 재물을 챙긴다? 네놈도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겠지? 그리고…….”

하얗게 질린 배 좌수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보고 다시 한번 코웃음을 친 어사는, 이번에는 꺼내들었던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상자를 외면했다. 어사의 손에 들린 상자 안에는 기괴한 모습의 살덩이가 담겨 있었다.

“이게 무엇인지는 그쪽이 가장 잘 알 테지? 네놈이 정신을 잃었던 사이, 우리 병사들이 네놈의 후처에게서 압수해온 물건이니까.”

“그것은……. 딸년이 혼전임신으로 품었던 아이를 낙태한 증좌…….”

백성들 사이에서 경악이 서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어사는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뚜껑 위에 얌전히 놓더니, 곧바로 품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장도(粧刀)를 뽑아들었다.

칼날이 허공을 가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주인의 칼솜씨가 남달랐는지, 어사의 손에 들린 작은 칼은 뚜껑에 상처 하나 입히지 않은 채로 증거를 반으로 갈라놓았다.

“내 태중의 태아에게서 이토록 거무스름한 변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

“이걸로 다른 사람들은 속여 넘길 수 있었겠지만, 나한테도 그게 먹힐 거라는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을 거다. 편한 데에서 유생 놀이나 한 네놈들과는 달리, 나는 내 창고 구석에서 이런 쥐새끼들을 숱하게 봐온 사람이거든.”

“그, 그걸 어떻게……!”

“쥐새끼를 잡아 껍질을 벗겨 뭉개놓으면 알아채지 못할 줄 알았나? 그걸로 순진한 딸을 협박해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내 눈은 못 속이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른 어사는 슬며시 자신의 호랑이 탈에 손을 올렸다. 방금까지 차갑게 식어있던 어사의 손길이 차오른 감정 탓에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가면을 완전히 벗기 전, 어사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지만 그것을 목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앞에서 눈알을 굴리는 뻔뻔한 죄인을 향한 것이 아닌, 너무나 안일하고 무력했던 과거의 자신을 향한 것.

어사는 그렇게 천천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이윽고 관아 일대는 자그마한 충격에 휩싸였다.

“어, 어……?”

“이제 깨달았나? 그날 저택에 들렀던 길손이 누구였는지?”

가면을 벗은 탓에 햇빛에 눈이 시릴 텐데도, 불길이 타오르는 어사의 눈빛은 앞에 묶인 죄인을 향해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밝혀진 어사의 정체를 지켜보는 백성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들 중 몇몇은 이미 가짜 신분으로 위장한 어사를 고을에서 접한 적이 있었기에, 그 충격이 더 큰 모양이었다.

“배무룡, 네놈은 그날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됐다. 내 모든 의심은 네가 꺼낸 한 마디 거짓말에서 시작했으니까.”

“나, 나리……!”

불타기 시작한 것은 어사의 눈빛만이 아니었다. 어사가 짓는 모든 표정에 불타오르는 분노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뒤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행수는 문득 옛일 하나를 떠올렸다. 언제나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주인이 이성을 잃고 분노로 타올랐던 어느 날의 일을.

“지금부터 본격적인 심문을 시작하지. 기한은…… 네놈이 저지른 죄를 모조리 불 때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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