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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88화 (288/298)

외전 5화. 네가 바라던 모습 그대로

죄인은 그날의 공개심문에서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순식간에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을 보고 일이 잘못된 것을 직감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은 어사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날 자정 무렵 독방에 수감 중이던 죄인을 누군가가 방문했는데, 다음날 날이 밝자 죄인이 모든 죄를 실토한 것이다.

“제…… 제가 그런 것이 맞습니다.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나리…….”

죄인의 눈 아래는 어제와 달리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몸을 떨어대는 것이, 마치 맹수 앞에 놓인 먹잇감을 보는 듯했다.

한편, 예정된 대로 뒤이어 다른 죄인들을 심문하던 어사는 분위기에 맞지 않게 이따금씩 하품을 흘리곤 했다. 어사의 위엄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행동 탓에, 가끔 죄인들도 동헌 위에 앉은 어사를 우두커니 올려다볼 정도였다.

젊은 시절의 마포나루 창고에서, 그리고 어젯밤 감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충신과 행수만이 알고 있었다.

***

얼마 후, 충신은 동헌에서 웬 덩치 큰 사내와 마주앉아 있었다. 그가 문서를 읽으며 이따금씩 던지는 질문에 충신은 청산유수로 답했는데, 사내는 대답을 들을 때마다 감탄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치 경국대전을 통째로 삼키신 듯한 대답이군요. 보통 급제한지 조금 된 관료 분들은 업무와 관계없는 내용은 금방 잊곤 하는데요. 의정부에서 율법을 다루실 일이 있으셨습니까?”

“업무와 관계없는 내용을 잊는다라……. 그랬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하하.”

소속 상관없이 임금에게 전방위로 굴려졌던 과거를 떠올리며, 충신이 입가에 쓴웃음을 띄웠다.

수령의 상징인 구군복을 두른 것을 보니, 충신에게 맞장구를 치는 사내가 바로 신임 철산 부사인 듯했다.

“게다가 전하의 총신답게 일처리가 매우 빠르시군요. 저는 제가 부임하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내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저도 실은 전 부사와 함께 쉬엄쉬엄 일처리를 할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동안 조금 마음이 바뀔 만한 계기가 있었거든요. 이렇게 된 거, 전 부사가 심양 생활 초기에 저를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해주십시오. 핫핫.”

“이야기가 그렇게 됩니까? 하하. 내 그때 강 사인과 친분을 쌓길 정말 잘했습니다!”

신임 부사와 암행어사,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 사이에 친밀한 대화가 오가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철산 부사 전동흘은 세자와 대군이 심양에서 볼모로 잡혀있을 때, 배종무관으로 종사하며 충신과 이미 안면을 텄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렇게 이어질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실 나는 심양에서 좌찬성 대감과 강 사인을 처음 봤을 때부터 예사 사람이 아니란 생각을 했었습니다.”

“갑자기 아부를 해오시면 곤란합니다. 성근과는 동향 사람이라 접근하신 거고, 저와는 술자리에서 친해지신 사이 아닙니까?”

“하하. 이거 참, 강 사인의 기억력은 여전하군요? 심양관 주방에서 술 한 병 슬쩍했다가 걸렸던 일이 떠오릅니다.”

“나랏일을 할 때는 안 그러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이 철산 고을에 다시 한 번 마패가 번쩍이게 될 테니까요. 핫핫.”

사실 충신이 철산의 폐단을 이렇게 빨리 적발해낼 수 있었던 것은 전동흘의 협력 덕분도 컸다.

행수가 따로 준비한 정보와 협력자 외에도, 전동흘이 따로 모은 정보를 추가로 받아왔기에 이렇게 빠른 대처가 가능했던 것이다.

덕분에 부사의 일까지 도맡아 했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충신에게, 전동흘은 술 한 잔 거하게 사겠다며 웃음소리로 동헌을 가득 채웠다. 충신이 조사한 은결 현황 덕분에 철산 일대에는 방전법이 더 빠르게 도입될 수 있게 되었다.

“이거야 원……. 사실 어사로 온 것이 강 사인이 아니었다면 부임 초기부터 꽤나 고생할 뻔했습니다. 나야 병사를 다루고 싸움에 임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수령이 되어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은 아직도 영 어색한지라…….”

“이미 호남에서 수령 자리를 경험하고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약한 말씀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나는 환곡으로 이미 한 번 실수를 한 몸이어서요. 그리고 제가 있던 고을은 은결 문제도 이리 심각하지 않았는데, 철산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사람의 욕심이란 참…….”

평안도에서 걷히는 세금은 중앙으로 가지 않고 현지에서 사용된다. 국경 방위와 사신 접대를 위해 쓰이는 비용이 워낙 많았던 만큼, 추가비용을 들여 한양으로 옮기는 대신 현지에서 거둔 세금을 그대로 쓰도록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안도 전체를 관할하는 평안 감사면 모를까, 한양의 조정은 이곳에서 걷는 세금에 대해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덕분에 향반의 세력이 강했던 철산에서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고 세금을 회피하는 땅이 상상외로 많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전동흘이 충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당연했다. 충신이 조사한 서류를 받아들며 연신 고개를 숙이던 전동흘은 갑자기 다른 생각이 났는지 진저리를 쳐 댔다.

“게다가 은결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그 일 말입니다. 어찌 인두겁을 뒤집어쓰고 재산 때문에 자식을…….”

“……저도 그건 충격이었습니다.”

“아, 이런. 괜한 이야기를 꺼냈군요. 강 사인께서도 그 일을 그리 마음에 두실 줄은 몰랐습니다.”

“기분 좋은 일은 결코 아니니까요. 물론, 제가 없었더라도 전 부사가 사건을 잘 해결하셨겠습니다만…….”

자리에 흐르던 분위기가 갑자기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며칠 전부터 배 좌수가 자백하기 시작한 이야기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비가 자식을 해친 것만으로도 흉악한 일인데, 그렇게 인륜을 해쳐가며 살인을 저지른 목적이 가문의 명예와 재산 때문이라니. 게다가 추가 조사가 이어지면서, 이번 살인사건에 후처와 이복동생도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집안사람 여럿이 자식 하나를 죽이려 든 사건. 이만큼 끔찍한 일은 두 사람도 살면서 접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산전수전 겪은 관리 둘이 이토록 착잡해 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이러고 있을 틈이 없습니다. 전 부사.”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죄에 따른 형벌은 어떻게 결정해야 옳겠습니까?”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의거해 처분해야겠지요. 부모가 자녀를 죽이거나 형이 아우를 죽였을 때, 그 범위가 흉악하고 참혹한 경우에는 모두 때려죽인 행위에 관한 규정으로 논한다. 답이 명확한 사안이 아닙니까.”

“형전(刑典)의 내용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고 계시군요.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피해자 배장화의 살인을 주도하고 모의한 좌수 배무룡은 참형, 살인에 직접 가담한 아들 배장철도 참형, 증좌를 조작해 피해자를 몰아간 후처 장 씨는 유배형에 처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들의 옆자리에는 총통위에서 따라나온 방자가 앉아있었는데, 충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적어내려가는 그의 손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그나마 감정을 숨기는데 능숙한 두 관리와는 달리, 나랏일이 낯선 방자는 마음의 동요가 심한 듯했다.

그렇게 죄인들의 처분을 정한 후, 자리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을 깨고 겨우 입을 먼저 연 사람은 충신이었다.

“전 부사, 사실 저는 이번 사건을 장계에 정리해 올릴 때, 무엇이라 요약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머릿속에서 ‘명예 살인’이라는 네 글자가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너무 마음 상해하지는 마십시오. 만약 강 사인이 철산으로 암행을 오지 않았더라면, 저수지에 몸을 던졌던 아우도 저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사람답게 살라 가르치는 성리학이 오히려 사람의 목을 죄는 도구로 쓰인 것을 보게 되니 마음이 착잡할 수밖에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강 사인, 어떤 맑은 물이라도 고이면 썩기 마련입니다. 무관인 내가 언급하긴 조심스럽지만, 성리학 역시 크게 다를 건 없겠지요.”

전동흘의 마지막 말이 충신의 마음에 강하게 들어와 박혔다. 충신이 성리학에 회의감을 느꼈던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성균관 시절부터 그는 성리학에 대해 쭉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 충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전동흘은 가볍게 손뼉을 치더니 그에게 위로를 건넸다.

“그래도 나는 이 나라의 미래를 그리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내 임무는 변경에서 군사를 기르고 백성들을 다독이는 것. 나도 내 임무를 다하고, 강 사인도 조정에서의 임무를 다하면 이런 일도 언젠가는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아…….”

“힘내십시오. 이렇게 기죽어 있을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분명 철산 고을의 잘못을 바로잡았으니까요. 이번 일에 관해서는 충분히 가슴을 펴도 됩니다.”

전동흘의 위로를 듣자, 충신의 머릿속에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어사이자, 조선제일상이자, 좋은 벗을 둔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래된 약속 하나를 지킬 수 있게 된 듯했다.

***

“어찌 그리 끔찍한 일이…….”

얼마 후, 암행에서 돌아온 충신에게 장계를 받아 읽던 임금은 경악을 내뱉었다. 임금의 눈에도 밀무역이나 은결 이야기보다는 비극적인 자매의 이야기가 먼저 눈에 띈 모양이었다.

“헌데, 너는 어떻게 이 사건의 진실에 이토록 빨리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냐? 이 정도의 악질이라면 자신의 죄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아야 정상일 터인데.”

“그거야 약간의 경험과 기술이…… 아, 아니옵니다, 전하. 실은 범인을 처음 독대했을 때 한 가지 심증을 굳혔기 때문이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가설을 세워 한 가지씩 증명해 나간 후, 범인을 몰아치니 그는 반박할 것을 찾지 못했사옵니다.”

“심증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부부의 취향은 닮기 마련인가. 어느새 임금은 암행 보고 대신 충신의 탐정 이야기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죄인은 제 정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한 가지 중대한 거짓을 꾸며냈나이다. 죄인의 말로는 여식들의 외가가 단절되어 몸을 의탁할 곳이 없다 했으나, 그것이 피해자의 증언과 어긋났던 것이옵니다.”

“호오…….”

“신은 그 미묘한 어긋남에서 이번 사건에 재산 문제가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사옵니다. 그리고…….”

장화와 홍련의 외가가 대가 끊어졌다던 배 좌수의 말은 거짓이었다. 친모가 일찍 사망한 후 자매에게는 외가의 존재를 필사적으로 숨겨온 모양이었지만, 실제로는 자매의 외삼촌이 멀쩡히 살아있었던 것이다.

아비에게 목숨을 위협받던 장화가 은자에 봇짐까지 준비해 가출을 감행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몸을 피할 외가가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서 알아낸 모양이었다. 아마 그녀를 오래 모셔온 노비가 참다못해 비밀을 폭로했을지도.

하지만 그녀는 운이 없었다. 딸이 가출한 사실을 알아낸 배 좌수는 자식들까지 동원해 딸의 뒤를 쫓았고, 저수지 인근에서 뒤를 잡힌 장화는 자살로 위장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아우인 홍련은 언니가 가출하기 전 외가에 대해 말해준 것을 기억하고 있었사옵니다. 하지만 홍련 역시 어린 여인의 몸으로 아비의 횡포에 맞서기는 불가했고, 결국 반강제로 자결해야하는 상황에 몰린 것이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때맞춰 저수지에 도착했던 네가 살려냈다…….”

“예. 그렇사옵니다. 그리고 그 후 일어난 사건은 장계에 적힌 그대로이나이다.”

이마를 잔뜩 찌푸린 임금의 시선이 다시 한번 장계를 훑었다. 홍련이라는 여인의 신변을 외가에 부탁했다는 마지막 구절에 한번 더 이르러서야, 이제 임금도 철산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완벽히 파악이 끝난 듯했다.

“내가 네 재주를 높이 산 것은 오래 되었지만, 판관 일조차 이리 잘해낼 줄은 몰랐구나. 강 사인. 수고가 많았다.”

“과찬이시옵니다, 전하.”

“이번 사건은 내 나라에서 절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분명하다. 네가 장계 말미에 적은 제안 역시 무겁게 고려해보도록 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암행을 다녀오고 얼굴에 서린 어둠이 조금 짙어진 충신을 보며, 임금은 괜히 마음이 안쓰러웠다. 아끼는 신하에게 휴가를 겸해 암행을 보냈건만, 쉬기는커녕 생각 이상의 문제를 들고 돌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번 암행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전에게도 이것은 단순한 선물이 아닐 듯했다. 더 생생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방자의 선발까지 신경을 썼건만, 이토록 무거운 결과가 돌아올 줄이야.

다음 날, 중궁전에서 밤늦게까지 중전과 이야기를 나눈 임금은 아침 일찍 좌찬성과 그의 소실을 대궐로 불러들였다. 그 둘은 조선 제일의 인쇄소 사장, 그리고 이웃나라까지 주름잡는 대작가이기도 했다.

***

구파발 근처에 위치한 이말산, 봉분들이 모여 있는 산자락에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이곳은 한양 도성 밖 십리, 세상을 뜬 자들의 공간.

사내는 이곳을 자주 찾은 듯, 그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됐다. 향아. 이제 만족하냐.”

사내는 소매에서 책 한 권을 꺼내들어 영전에 바쳤다. 책의 표지에는 ‘강어사(御使)전’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전하께서는 이번 일을 널리 퍼뜨려 백성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품게 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교조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성리학의 폐단을 다스리기 위해 여러 대책을 강구하겠다 하셨지. 아…… 이건 네게 너무 재미없는 이야기일까.”

펄럭.

사내의 독백에 대답하듯,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책장을 넘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의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아른거리기 시작한 사내의 시야에는 그보다 조금 높은 곳에 살고 있는 여인 한 명이 비치고 있었다. 심양으로 떠나는 그를 화장이 번지는 것도 모르고 눈물로 배웅하던, 그 시절의 곱디고운 정인이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급제해서 관직에도 올랐다. 중한 나랏일을 수행하며 네가 즐겨 읽던 이야기의 주인공도 되어 봤다. 그리고…….”

사내가 입에 담은 것은, 압록강을 건너가 방황하던 시절 그에게 뒤늦게 전해졌던 서찰이었다.

그 서찰은 실은 그녀가 깜빡 잊고 부치지 못한 편지에 불과했지만, 그동안 흔들리던 사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기둥이기도 했다.

‘……심양관에서 한 나랏일 이야기를 전하던 네 글귀가 가장 즐거워 보였어. 꼭 조정에 들어가서 네 뜻을 펼쳐줘. 너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될 사람이니까……’

‘……나, 너 없는 사이 즐거운 취미가 생겼어. 소설이라는 건데, 허구의 이야기지만 꽤나 재밌더라고. 어느 소설은 딱 봐도 주인공이 내가 아는 분이시던데, 아마 우리 서방님도 언젠가는 그런 곳에 실릴 날이 올까……?’

그는 편지의 모든 구절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 사내는 그녀의 뜻을 어기며 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선물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널 닮은 우리 예쁜 딸, 네가 바라던 대로 잘 자라서 곧 시집간다. 벗을 잘 둬서 그런지, 홀아비 밑에서 자란 며느리도 흔쾌히 받아주겠다 하더라.”

기쁜 소식을 전하던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비석에 손을 얹었다.

거칠거칠한 비석에서는 한 줌의 체온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계속해서 한없이 차가운 돌덩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제 너와의 약속도 모두 지켰으니, 나는 네가 바라던 그 모습으로 계속 살아가련다. 그래야…… 너도 기뻐할 테니까.”

그렇게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비석을 쓰다듬던 사내는 잠시 후 석양을 등지고 무덤가를 떠났다. 사내가 쓰다듬던 부분이 닳고 닳아 움푹 팬 비석만이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

“좋아. 행수, 준비됐나?”

“그…… 이번에는 젊은 놈을 데려가라 그리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럴 수는 없지. 행수만큼 적당하고 힘 잘 쓰는 사람은 없으니까. 핫핫.”

그 사이 세월이 또 흘렀지만,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모습은 변하지 않은 듯했다. 이번에도 중대한 임무를 맡은 충신은 행수를 끌고 먼 길을 나서기를 선택했다.

다만 지금 행수가 주인에게 밀리는 기색을 보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충신 일행은 익숙한 육로가 아닌, 해로를 거쳐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이었으니까.

아마 지금 행수의 옆구리를 조금이라도 푹 찌르면 역겨운 액체가 튀어나오게 될지도.

“상단에서 도방 자리 차지한지 오래 됐다고 너무 빠진 거 아냐? 이래서 사람은 일선에서 조금씩은 굴러봐야 된다니까?”

“이런 상황에서 멀쩡한 도련님이 이상하신 것 같습니다만……. 보통 사람이 긴 항해를 처음 겪게 되면 저처럼 맛이 가는 게 정상이라고 선장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내가 이상하다니? 원래 사람은 시련을 겪다보면 강해져야 정상인 거야. 거, 한수 놈도 매번 그러지 않냐. 사람은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고.”

다 늙어서 주인에게 근성론을 강의 받고 있는 행수의 입이 댓발 튀어나왔다. 불만이 가득 찬 것이 분명했으나, 충신은 그것을 평소처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갑판 위에서 웬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그 함성의 정체가 수평선 너머로 목적지가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챈 충신은, 멀미로 늘어진 행수의 목덜미를 잡아채고는 갑판 위로 신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 영감, 오셨습니까? 저기 바타비아가 보입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 선장, 바타비아 항에 입항하는 데까지는 얼마나 걸릴 예정인가?”

“이 정도 거리면 아마 반나절이면 넉넉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대하십시오. 바타비아는 꽤나 흥미로운 동네니까요.”

미지의 세상을 마주한 충신의 입가에 보기 좋은 미소가 얹혔다. 마치 새 장난감을 받은 어린아이와 같은 웃음이었다.

“기대하라고? 바타비아 정도로는 택도 없다!”

“택도 없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언젠가 하란타까지 가고 말 거다! 고작 바타비아 방문에 기대를 걸었다가는, 아마 그곳에서는 심장이 터져 버리지 않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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