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신부수업
다음날, 우희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그녀의 집에서 분가해 나간 집이 그녀의 목적지였다.
사실 이 집은 발걸음을 들여놓기가 조금 꺼려지는 장소였다. 겉은 멀쩡한 기와집이었으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부터 무언가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희가 들어선 이 방이 가장 집주인의 취향이 아주 듬뿍 반영된 공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온 탓인지, 집주인은 분위기에 눌려있는 우희를 향해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들었다.
“웬일이니? 네가 이 집에 제 발로 들어설 줄은 몰랐는데?”
“그게…… 제가 새언니를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알아. 그렇게 고양이 앞에 선 생쥐 같은 꼬락서니 하지 말고 긴장이나 좀 풀렴.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그런 모습은 남편과 똑같구나, 어쩜.”
집주인은 잔뜩 얼어있는 우희를 나무라듯 달래며 자리에 앉혔다.
나름 그녀를 배려한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우희의 긴장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은 이 사람과는 궁합이 지지리도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낯선 실내 장식에서 오는 이질감 때문일까, 아니면 평소에 방 안에서 쓰지 않던 탁자와 의자에 앉아서일까, 우희는 지금 이 자리가 굉장히 불편했다.
“저런, 이 방이 불편한 모양이구나. 어쩜 좋아. 이제 곧 익숙해져야 할 텐데.”
“네?”
“아니, 아니야. 흘려들으렴. 그냥 혼잣말이니까.”
집주인의 뜻 모를 말에, 우희의 몸은 점점 더 긴장으로 굳어갈 뿐이었다.
아무래도 괜히 올케를 찾아온 것 같았다.
아무리 조언이 필요하다곤 해도,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게 찾아온 이유가 뭐지? 귀여운 시누이 님?”
“그, 그게…… 오라버니와는 잘 지내시죠?”
“그럼. 당연히 잘 지내지. 네 오라비만한 사내는 다이칭 구룬 전역을 뒤져봐도 없을 텐데, 그런 사내가 내 것이니 잘 지낼 수밖에 없지 않겠니?”
겉으로는 서로 안부를 묻는 훈훈한 장면이었지만, 우희의 눈에는 앞에 앉은 올케가 마치 혀를 날름거리는 뱀처럼 비치고 있었다.
조선 이름 김동아, 청나라 이름으로는 아이신기오로 동고.
청나라 친왕의 딸인 그녀는 어릴 적부터 우희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높은 신분이랍시고 함부로 굴었던 건 또 아닌 것이, 어머니나 노비를 대할 때도 조심스러웠던 그녀가 유독 어린 우희에게만 좋지 않은 기억을 남겼던 것이다.
‘우아앙! 오라버니! 어디 가!’
‘우희야, 그게…….’
‘길산이는 나를 호위해줘야 한단다. 오늘도 어디 멀리 나갔다 올 일이 있거든.’
총통위나 학당에 다녀온 길산이 평소처럼 어린 동생과 놀고 있으면, 어디선가 동아가 나타나 그를 가로채갔다. 집에만 있기 갑갑하다는 핑계로 그녀는 한양 인근의 명승지나 구경할만한 곳을 자주 다니곤 했는데, 그때마다 우희는 오라비를 내줘야 했다.
길산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때마다 순순히 동아의 말을 따랐다. 그 꼴을 참다못한 우희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고자질도 해봤지만, 고향을 떠나 적응이 힘들 테니 배려해줘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어머, 너는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구나. 볼이 금방 부루퉁해져서는.”
“그게 아니라…….”
“알아. 네 오라비를 내가 빼앗아갔다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너도 이제는 알아야 할 때가 아니니. 남녀 사이의 일에 네가 눈치가 없었다는 것을.”
그건 우희도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그저 예전에 받은 충격 때문에 무의식중에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당시 어린 우희의 눈에는, 별당 구석에서 이뤄진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이 동아가 길산의 얼굴을 강제로 끌어당겨 뜯어먹는 모습으로밖에 비치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어머니나 친구들에게서 들은 것이 있어, 그녀도 그 사건의 전말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강렬한 기억이 만들어낸 거부감이 아직 남아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예전 이야기는 그렇다 치고. 나만 보면 머리털을 세우던 시누이께서 몸소 이곳을 찾아온 이유가 궁금한데. 혹시 다이칭 구룬 이야기가 궁금해서 찾아온 거니?”
“갑자기 청나라요? 궁금해서 찾아온 건 맞지만…….”
“아, 아니다. 내가 말이 헛나온 모양이구나. 그럼 무엇이 궁금한 거니?”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동안 변한 건가.
동아는 오늘따라 이해가 안 가는 말을 우희에게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빈틈을 보인 시누이 덕분에 우희의 긴장감은 다소 누그러들었다.
우희가 긴장을 털어내고 던진 질문은 어제 세자빈에게 한 것과 같았다. 올케 역시 혼인 때문에 태어난 곳에서 멀리 떠나온 사람인 것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심지어 마음만 먹으면 남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한양에 뿌리를 내린 상황.
“……재미있는 질문이네, 그거.”
질문을 듣자, 동아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들었다. 시누이에게서 예상외의 질문을 받은 것이 꽤나 즐거운 듯했다.
“답은 간단해. 어차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봐야 황족들 사이에 껴서 숨도 못 쉴게 뻔했거든. 그런 곳에 돌아가 봐야 뭐하겠어. 어차피 집안은 양자로 들어간 도르보가 잇고 있고.”
“그렇군요. 저는 새언니가 고향땅에 돌아가고 싶으실 줄 알았어요.”
“틀린 말은 아냐. 조선은 그전까지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어머니의 나라일 뿐이었으니까. 지금 방 안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어차피 도르곤의 유산을 물려받아 사는 데는 지장이 없고, 청나라와 무역도 활발해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으니 불편한 점은 없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멀쩡한 신혼집을 돈을 들여가며 청나라 풍으로 꾸민 이유가 다 있을 것이었다.
어머니도 낯선 나라로 시집가 다 겪었던 일이라며, 말을 마치고 창밖을 바라보는 동아의 눈에는 고향을 그리는 향수가 감돌고 있었다.
괜히 올케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듯했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걸 물은 탓에 그만…….”
“네가 죄송할 게 뭐 있니.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었지. 우리 잘생긴 신랑 얼굴을 그놈의 변발로 망가뜨릴 수는 없지 않겠니? 다이칭 구룬에서는 한인들도 전부 머리를 밀게 하고 있는데, 조선인이라고 예외로 봐 주겠어?”
“네?”
의외의 대답이었다. 방금까지 감정에 잠겨있던 동아는 어디로 간 듯했다.
“네는 무슨. 너, 그럼 바라보고 설레지도 않는 사람의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어…… 언니…….”
“아, 너한테는 너무 자극이 강한 이야기였나. 하긴, 남편의 출신이 그렇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미 다른 계집이 채간 후였을 거야. 암.”
오히려 홀어머니만 모시고 조선으로 귀국한 덕분에, 자신 마음대로 혼인을 결정할 수 있어 좋았다며 동아가 말을 이었다.
갑작스러운 올케의 돌변에 우희는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잘생겼지. 머리도 좋지. 출셋길은 열려있지. 다른 사내들처럼 각시를 함부로 대하지도 않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말이면 안 듣는 법이 없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인 줄 알지. 이만한 낭군감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생각하니?”
“……그건 그렇네요…….”
“네가 혼인 이야기로 상담을 해온 김에 말하는 건데, 내가 쓴 방법, 나쁘지 않다? 미리 훗날이 기대되는 사내가 있으면 침을 발…… 아니 점찍어놓고 때를 기다리는 거지.”
아버지에게 적은 한 번 넘어뜨리면 끝이라는 교훈을 배웠다는 동아의 말은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희는 그제서야 동아가 두 살 연하의 길산을 왜 그리도 데리고 다녔는지 알 수 있었다.
“잘 들으렴. 좋은 낭군을 얻으려면 스스로 싸워 얻어내는 방법이 제일이란다. 그리고 사내는 계집 하기 나름이고. 물론, 네가 나처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들지만 말이야.”
“저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요…….”
“어차피 영상 대감이 정해준 혼처로 대충 시집가고 말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너, 그래서는 나중에 행복하기 어려울 걸? 애정 없는 혼인도 모자라, 낭군이 다른 여자에 눈독이라도 들이면 어떡하게?”
“축첩이야 흔하잖아요. 저는 그래도 아내로서 할 일만 다하면 된다고 생각…….”
“너희 아버님 같은 경우는 정말 드문 경우야. 나는 살면서 처첩간의 사이가 저리 좋은 걸 본 적이 없단다. 너희 어머님 두 분이 아버님뿐만 아니라 서로를 지극히 사랑해야 가능한 이야기라고.”
우희는 그동안 자신이 너무 생각을 놓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혼인은 인륜지대사 중 하나인데, 좋아하는 공부만 하다보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생각으로 아무 고민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이제 와서 고민해봐야 늦었나.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너희 아버님께서는 네가 원하지 않는 혼인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으실 분이니까.”
“그걸 언니가 어떻게 아세요?”
“그야 우리 신랑과 혼인할 때 내게 말씀하신 게 있으니 그렇지.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에게도 그러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딸의 혼사에 대충 임하시겠어?”
“그런…… 가요?”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조금씩 바뀌어보도록 해. 네가 무슨 유생도 아니고 과거공부 하듯 학문만 파서 뭐하려고. 나처럼 좋은 아내가 되려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란다.”
동아의 손가락이 침상 위에 펼쳐진 바느질감을 향했다. 그렇게 물려받은 재물이 많으면서, 제 신랑 몸에 걸치는 옷가지는 전부 스스로 지어 입힌다더니 정말인 듯했다.
“아니면 내가 아이 잘 낳는 법이라도 가르쳐 줄까? 아들 쌍둥이에 막내딸까지 낳은 새언니를 믿어보렴. 일단 밤에 신랑 옷고름부터 먼저…….”
“아니, 아니에요! 저한테는 너무 일러요!”
“얘는……. 지금부터 제대로 알려줄 테니 하란타에서 들여온 양모 옷감이나 한 필 구해다주렴. 그걸로 우리 신랑 방한복이나 지어주게. 그럼 역시 합구(合口)부터 가르쳐야 하나……?”
갑자기 파도처럼 몰아치기 시작한 19금 용어들에 우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먼저 위로 올라가는 게 좋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아무래도 동아가 순진한 시누이를 놀리는데 제대로 맛 들린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문밖에서 들려온 인기척 덕에 다행히도 짓궂은 올케의 공격은 그쯤에서 마무리되었다.
“누님, 저 잠시……. 어라?”
안방에 고개를 들이민 것은 길산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던 듯, 길산의 잘생긴 눈매가 미묘하게 커져 있었다.
“우희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새언니만 보면 기겁을 하던 녀석이.”
“그게…… 조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원하던 답은 대강 얻은 것 같지만요.”
“그러냐? 다행이구나. 나는 두 사람 사이가 언제까지 그럴지 걱정…….”
둘 사이에 오가던 대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안쪽 자리에 앉아있던 동아가 콧소리를 내며 길산에게 다가갔기 때문이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을 감지한 우희는 작은 한숨과 함께 인기척을 죽이려 애써야 했다.
“어서 오세요, 서방님. 헌데 이 시간엔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누님이 싸주신 낮것을 깜빡했지 뭡니까. 그냥 밖에서 사먹을까 하다가 그만큼 맛있을 게 떠오르지 않아서 군관도감 강의 나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어머……, 그렇다고 집까지 들르실 필요는 없었는데……. 사람을 보내셔도 됐잖아요.”
“그야……. 알면서 물어보시는 겁니까, 누님?”
우희는 그동안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길산은 결코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쥐여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남편은 아내 하기 나름이라 강변하던 올케는…….
그건 그렇고, 두 사람이 몽글몽글하게 바꿔놓은 분위기는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우희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빠진 사이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것을 택했다.
“잘 되면 잊지 마세요, 아가씨! 청나라에서 돌아오시거든 꼭 말씀드린 하란타 물건 구해다 주셔야 해요!”
어느새 말투와 호칭까지 바꿔 부르는 올케를 보며, 우희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는 집으로 향했다. 이런 형태의 혼인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본인은 절대 올케를 따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헌데 그렇게 집에 돌아온 후, 우희의 머릿속에 이상한 점 하나가 쓰윽 떠올랐다.
웬 청나라?
***
“앗, 이판 대감?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내 벗과 누이의 양자에게 안부를 묻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래, 내가 어제 자택으로 보낸 선물은 잘 복용했는가, 종사관?”
“선물…… 이요? 아, 설마 저희 집으로 복분자 소쿠리를 보내신 분이 이판 대감이셨습니까? 너무 잘 먹었습니다. 몸에도 좋은 것 같더군요.”
“그래. 그러면 된 거야. 몸에 보탬이 되었다니 다행이네. 나도 그랬었거든.”
“가, 감사합니다. 헌데 ‘나도’라니요? 그리고 소관에게 어째서……?”
조회가 끝난 후, 인정전을 지키고 있던 길산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이조판서 김좌명이었다.
아무리 인척이라지만 이판쯤 되는 분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산딸기를 보내주었는지 길산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이유가 밝혀진 것은 조금 시간이 흐른 후였다. 우희가 올케에게 들은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털어놓았고, 그 이야기가 이모부인 좌명에게까지 들어갔던 것이다.
그것은 선조대왕의 손녀분께 비슷한 일을 당했던 좌명이, 같은 처지인 후배에게 힘내라는 의미로 마련한 작은 선물이었다. 괜히 귀한 복분자를 한 소쿠리나 보냈겠는가.
***
그날 밤. 우희의 어머니는 딸을 안채로 불러들여 잠자리를 펴게 했다. 딸이 학당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너도 어느새 다 컸구나. 네 아버지께서 하란타에 다녀오시고 내 품에 안긴 너를 보며 눈물지으시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아버지가요? 헤헤.”
“어찌 고관대작의 딸을 집 밖으로 내돌리냐는 비난을 듣고도 여학당에 다니고 싶다는 네 소원을 들어주신 분이다. 지금 엄격하게 대하신다고 섭섭하게 생각해선 안 될 것이야.”
“알아요. 어릴 때 아버지가 퇴궐하시고 돌아오실 때마다 무등 태워주신 것 정도는 저도 기억하고 있다고요. 지금도 말수만 줄어드셨지 하고 싶은 건 다 해주시는 걸요.”
엄마 품 안에서 철없이 떠들어대는 딸을 보며, 하연은 조용히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그 미소 한 구석에는 묘한 쓸쓸함이 숨어있는 듯했다.
“어, 엄마?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아니다. 그러고 보니 우희 너, 어제오늘 안 다니던 곳을 다녀왔다던데, 너야말로 무슨 일 있는 것 아니더냐.”
“아, 그게 아버지께서 이제부터 혼인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말씀하신 이후로 조언을 들으러 다녔었어요. 세자빈 마마와 올케한테 다녀왔는데, 생각보다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 두 분한테는 어째서……?”
“아버지 말씀으로는 제가 멀리 계신 귀하신 분께 청혼을 받았다던데요? 그래서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 분들한테 여쭤보러…….”
이 영감이 진짜.
어머니 입에서 나온 낯선 단어에, 우희는 하던 말도 멈추고 하연을 쳐다보았다. 본인도 모르게 입에서 빠져나온 말이었는지, 어머니도 꽤나 당황한 듯했다.
“아, 아니다. 아버지께서 오랜만에 농담이라도 할 기분이 나신 모양이구나.”
“그거, 농담이었어요? 그럼 저는 이틀 동안 헛고생을…….”
“헛고생은 아닐 게다. 그분들에게서 들은 귀한 경험담은 어떻게든 네게 도움이 될 게야.”
“그런가요? 아, 참. 그 말씀을 들으니 궁금한 게 있어요.”
“궁금한 것?”
오랜만에 어머니와 같이 자게 되어 들뜬 우희는, 세자빈과 올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부 신나게 털어놓았다. 이야기 중간마다 어머니에게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이야기를 풀길 잘한 듯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엄마는 도대체 아버지의 어디가 마음에 드셨어요? 그때는 그냥 한미한 집안 출신의 성균관 유생이셨다면서요.”
“그래도 네 아버지는 당시에 소과 양시에서 장원을 하신 분인데, 단순한 유생은 아니셨지.”
“그래도요. 엄마 같은 분이면 더 좋은 집안에 시집가실 수도 있었던 거 아니셨어요? 아버지를 노처녀라 불리는 나이까지 기다리셨다면서요.”
후훗.
과거를 더듬던 하연의 코에서 부드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낭군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는 일이 꽤나 즐거운 듯했다. 잠들어 있던 그의 억센 팔뚝에 끌어 안겨 심장이 두근거렸던 시절이라도 떠올리는 걸까.
“그야 좋은 가문은 흔하디 흔하지만, 네 아버지 같은 분은 한 사람 뿐이었으니까.”
“아버지가요?”
“그럼.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부터 자신보다 상대를 배려하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겠다고 진심으로 말해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단다. 그것도 술에 만취했다 낯선 곳에서 일어났을 때 말이지.”
“오호…….”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이 사내라면 나와 내 아이를 언제까지고 지켜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더구나. 그리고 그 확신은 틀리지 않았지. 네 아버지는 심양에서 몇 년을 계시면서도 나와 맺은 언약을 잊지 않고 지켜주셨거든.”
아버지가 보인 의외의 모습에 우희의 입에서 가벼운 탄성이 튀어나왔다. 하연은 그런 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말을 이어갔다.
“네게도 혼인할 상대가 생긴다면, 이 어미는 부디 너희 아버지 같은 사람을 만났으면 한단다. 배려심 많고 책임감 강한 사내, 너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극복해낼 수 있는 사내 말이야.”
“그런 사람이 정말 있을까요?”
“그럼, 있고말고. 우리 우희는 반드시 그런 사내에게 시집갈 수 있을 게다.”
딸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하연이 속삭였다.
***
며칠 후, 우희에게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 도착했다. 여느 때처럼 아버지에게 아침 문안을 올리러 사랑채로 들었을 때였다.
“……제가 북경에요?”
“그래. 소규모 사신단이 북경에 다녀올 일이 생겼는데, 마침 네 올케가 오랜만에 친정에 다녀오고 싶다고 부탁했거든. 바다도 잔잔할 시기라 해로를 이용하기도 좋고.”
“그래서 그 틈에 저도 끼어서……?”
“무리일 것 같으면 거절해도 좋다. 아무리 편한 길이라고는 하나 여행은 고된 법이다. 그리고 낯선 곳을 방문하는 것도 어떤 이에게는 고통으로…….”
“아니오! 저 갈래요! 한 번 꼭 가보고 싶었어요!”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지만, 우희는 타국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 소녀였다. 작은엄마 요안의 영향도 있었고, 무엇보다 청에서 들여온 서적과 온갖 문물들을 보고 그곳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지 오래였던 것이다.
“그러하냐……? 그리 빨리 결정할 필요는 없는 문제인데. 조금 더 심사숙고하고 결정해도 좋을 일이다.”
“그런가요? 음…… 그럼 조금 더 고민해보고 답을 드릴게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우희는 마지못해 더 생각해보겠다 말을 꺼냈지만, 이미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어떤 결론이 내려질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하연의 입가에는 다시 쓸쓸한 미소가 새겨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