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91화 (291/298)

외전 8화. 상상도 못한 정체

“……팔기는 이제 전 구사가 카간의 직할로 들어오게 되었군요. 잘 하셨습니다. 오보이 같은 자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태사와 저번에 논했던 그대로였소. 공자께서 이르시길,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명의 왕이 없는 법이라. 그 말 앞에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지.”

“그동안은 팔기가 구사 어전 개인의 사병에 가깝긴 했지요. 카간께서 직접 그렇게 나오시는데 역적이 아니고서야 반기를 들 자는 없을 것입니다.”

“선대 카간께서 이미 버이러들의 권력을 박탈한 상태라 반항은 그리 크지 않았소. 물론 태사가 나를 따르지 않던 구사를 혼쭐낸 것도 도움이 됐지. 이제 구사 어전, 잘안 장긴, 니루 장긴이라는 명칭도 도통, 참령, 좌령으로 아주 바꿔버릴 생각이오.”

자금성 건청궁에 위치하고 있는 황제의 업무 공간.

이곳에서 강희제는 동쪽에서 온 귀한 손님을 맞아들였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는 황제는 마치 의지할 대상을 찾은 듯 기뻐하고 있었다.

지금 자리에서 오가는 대화는 팔기군에 관련된 이야기인 듯했다. 그동안 각 기의 기주에게 분산되어 있던 권력을, 황제 한 명에게 집중시켰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제 팔기도 스스로의 체질을 개선할 생각을 해야겠지. 조선군이 강군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나, 그렇다고 소수의 병력에게 대패한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소.”

“제가 전대 예친왕에게 들은 바로는, 입관 이후로 팔기의 질이 급속도로 하락했다고 들었습니다. 한조를 상대로 전쟁을 계속 수행했음에도 그 추세를 멈출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태조무황제께서 아이신기오로를 일으켜 세우실 때 함께했던 정예병들은 생을 다했고, 입관 후 새로 태어난 팔기의 후예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말안장 위에서 살아가는 선대의 삶과는 거리가 있으니까. 당시와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팔기를 이대로 세습제로 유지한다면 앞으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것입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니까요. 카간께서 고생이 많으실 듯합니다.”

“그래서 전 예친왕이 그랬던 것처럼 구사 하나를 골라 전원 화기를 사용하는 부대로 운영하는 방안도 고려중이오. 만약 태사가 고려로 돌아가지 않고 내 밑에서 작위와 벼슬을 받고 일했으면 이미 그 계획이 진행 중이었을지도 모르지.”

황제는 팔기의 질적 하락을 꽤나 염려하고 있었다. 도르곤이 예전에 자신의 잘안 하나를 조총수 부대로 운용했듯 아예 기(旗) 하나를 조총수가 주력인 부대로 운용하려는 뜻도 비췄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조선이 청에 팔아먹을 카드가 한 장 더 늘어나는 셈일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제 할아비가 그랬듯, 황제는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인재를 탐냈다. 조선에서 온 정승은 뼈가 들어있는 농담을 손사래를 치며 웃음으로 무마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럼 팔기 이야기와 식량 지원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내 태사를 지금 굳이 북경으로 부른 이유는 따로 있소. 태사도 사신에게 들었으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

“제 딸아이 말이군요. 어쩌다 그것이 카간 손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선에 계신 아주머니뻘 되는 황족이 보내주셨지. 아주 마음에 들었소. 여인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오. 그것도 스물도 안 된 소녀의 솜씨라…….”

황제는 손에 들린 종이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종이에서 익숙한 딸의 필체를 확인한 아비는 그저 난감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제 부족한 재주를 이어받았는지 딸아이가 학문에는 조금 소질이 있긴 합니다. 다만 그것을 높이 봐주신 것은 감사한 일이나, 굳이 카간께서 북경으로 부르실 일까지는…….”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오, 태사. 그래, 따님은 북경에 무사히 도착했소?”

“오는 길에 멀미를 조금 하긴 했으나 아주 건강합니다. 어제도 제가 붙여준 호위와 함께 북경 거리의 서점을 뒤지고 다니더군요.”

그 말을 듣자, 황제가 입가에 띤 미소가 더 짙어졌다.

‘아차…… 내가 실언을 한 것인가.’

정승은 마음속으로 머리를 싸잡으며 방금 저지른 실수를 후회했다. 원래는 딸이 정숙한 여인처럼 보이지 않도록 꾸며낸 말이었는데, 상대가 학문에 조예가 깊은 강희제라는 사실을 깜빡 잊은 듯했다.

“더욱 마음에 드는군. 그럼 태사는 내게 한 약속을 지켜 주셔야겠소.”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마침 오늘 조회에서 체인각(體仁閣)의 학사들에게 고려에서 온 사신들을 응대하라 명한 참이오. 아마 내일은 그곳이 비어있겠지.”

“설마, 카간……. 제 딸에게 단순히 자금성 구경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딸을 지키려는 정승의 촉이 민감하게 움직였다.

황제는 정승에게 ‘딸에게 자금성 구경을 허락할 테니 사신 편에 동행시키라’는 명을 내렸었다. 지금까지는 주위 사람들에게 정승의 딸을 평가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명령이라 생각했으나, 오늘 만나보니 황제의 의도는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꼿꼿하게 등을 세우고 있던 정승의 상체가 미세하게 뒤로 밀려났다. 황제는 그 미묘한 동작에서 풍기는 거부감을 읽어내고 어리둥절하다는 듯이 되묻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오, 태사? 내가 약조를 어길 사람으로 보이오?”

“카간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제 딸을 직접 만나신다는 것은 곧 강제로라도 후궁으로 들이시겠다는 뜻. 카간과 독대한 여자가 어찌 다른 혼처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리가. 너무 앞서나가셨소, 태사. 내일 다이칭 구룬의 카간이 체인각에 행차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이 말에 별로 믿음이 가지 않거든,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해도 좋소.”

“……정말이십니까?”

“태사, 내가 아직 어리긴 하나 엄연히 한 나라의 황제인 몸이오. 내 이름을 걸고 한 맹세가 그리 가벼울 리가 없지 않소.”

대답이 너무나 단호했던 탓에, 감히 황제를 의심했던 정승은 조금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하긴, 나이에 걸맞지 않은 조숙함으로 국정을 능수능란하게 운영하고 있어서 그렇지, 그는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하지만 정승은 모르고 있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방심했다가는 황제의 명석한 두뇌에 놀아나기 너무나 쉽다는 것을.

이미 그동안 청나라 관료들은 전부 한 번씩 당해본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으로 돌아간 지 조금 된 정승이 그 사실을 알기는 어려웠다.

***

“우와……. 아버지, 이게 다 책이에요?”

“목소리를 낮추거라. 남의 나라 궁궐에 들어오는 행운을 누렸으면 예의 정도는 지킬 줄 알아야지.”

“아…… 앗. 저도 모르게 그만…….”

낯선 건물에 들어선 우희의 입은 벌어진 채로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아버지에게 빌고 빌어 쉬는 날 궁녀 차림을 하고 궐내각사의 장서각에 들어가 감탄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곳에 보관된 책들은 규모부터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우희를 뒤에서 지켜보는 정승은 헤벌쭉 한 아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가 봐도 딸바보 그 자체였지만, 딸이 철들고 나서는 그것을 숨기고 훈육하느라 꽤나 애를 쓴 모양이었다.

“와, 이건 처음 보는 책인데? 이거, 혹시 북경에 머무는 동안 빌려갈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황제께서 허락하셨다. 학사들이 업무에 쓰느라 표시해 놓은 책만 제외하면, 북경에 있는 동안 얼마든지 빌려가도 좋으시다는구나.”

“정말요? 우와……. 황제 폐하, 생각보다 꽤 좋으신 분일지도…….”

‘고작 이런 걸로 내 딸의 마음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지.’

기뻐하는 딸을 보며, 정승은 속으로 몰래 중얼거렸다.

그는 지금 상황을 자신을 혼맥으로 얽어매기 위해 황제가 세운 계략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황녀와 정승의 늦은 혼사가 틀어지면서, 황제는 그의 딸에게 국혼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었다.

황제는 그 제약을 돌파하기 위해 딸을 북경까지 초대해가며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듯했으나, 책과 공부만 좋아했지 남자에는 관심도 둔 적이 없는 우희가 그런 그물에 걸려들 리가 없었다.

벌컥. 그때, 모든 인원이 물러나고 부녀 둘만 남아있던 체인각의 출입문이 갑자기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려국에서 오신 태사님, 계십니까?”

“내관? 갑자기 무슨 일이오?”

“카간께서 급한 국사를 보고받으셨다면서 태사님의 도움을 구하고 계십니다. 빨리 건청궁으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카간께서? 그럼 딸아이는…….”

“걱정 마세요, 아버님. 마침 저희 부부가 여기 있잖아요.”

동아가 열린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며 외쳤다. 황제의 명을 받아 안내역을 맡았다가, 체인각에 와서는 책에는 관심이 없다며 건물 밖에서 제 남편과 자금성 풍경을 감상하던 며느리였다.

“누구신지…….”

“나는 아이신기오로 동고, 전대 예친왕 전하의 딸이자 화석군주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뭐, 내가 여기 있는데 문제라도 있나?”

“아니, 아닙니다……. 저는 그저 위에서 태사님을 모셔오라는 명령만을 받은지라…….”

“들으셨죠, 아버님? 내관이 난감해하잖아요. 어서 카간께 가보세요.”

무언가 꺼림칙하긴 했지만, 황족인 동아와 길산이 지키고 있다면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사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정승은 전령을 따라 카간이 기다리고 있다던 건청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정승이 떠나고 잠시 후, 멀리서 사람 하나가 체인각에 접근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동고와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니, 그는 이미 다이칭 구룬의 화석군주님과 안면이 있는 사람인 듯했다.

***

“그게 그렇게 재밌어?”

콰당. 책상에 앉아 책에 코를 박고 있던 우희가 화려하게 뒤로 넘어갔다. 정신을 시구에 집중하고 있던 사이 귓가에 들려온 웬 낯선 목소리 때문이었다.

“누, 누구…….”

청나라 관복을 차려입은 소년이 넘어진 우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원래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묘한 분위기 탓에 우희는 자신도 모르게 소년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고마워. 근데…… 넌 누구니? 설마 날 여기서 쫓아내려고……?”

“나는 여기 체인각에서 근무하는 사람이고, 그럴 생각은 없어. 위에서 이야기도 다 들었고.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 와 봤는데 책을 너무 집중하면서 읽고 있길래.”

“다행이다……. 그런데 이 나이에 관복을 차려입고 있네? 이게 말로만 듣던 소년급제자?”

“어…… 그런 셈이지. 이상해?”

“아니, 대단해. 되게 머리가 좋나보다, 너.”

자신도 모르게 우희는 소년의 겉모습에 시선이 쏠렸다.

우희도 아버지를 닮아 조선 여자치고는 키가 꽤 큰 편이었는데, 소년은 그녀보다도 조금 더 컸다.

젖살이 아직 희미하게 남은 얼굴에는 군데군데 마마를 앓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관모로 가려진 이마는 넓어 보였고, 코와 눈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정감가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렇게 말없이 소년을 바라보고 있던 우희의 머리에 갑자기 어떤 깨달음 하나가 떠올랐다. 자신은 청나라 말이나 명나라 말을 한 마디도 모르는데, 이 소년과 지금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너 방금 조선말 쓴 거 맞지? 혹시 예전 난리 때 끌려갔던 사람의 후손이니?”

“아. 조선말은…… 아는 조선인한테서 조금 배웠어. 나, 정황기 출신이거든.”

“정황기? 아아, 호포대 출신들한테 배운 모양이구나. 그런 것 치고는 되게 유창한데? 많이 친한 사람한테 배웠나봐?”

“으응……. 뭐 그렇지.”

“그렇구나……. 조선 밖으로 나오니 또래 사내애랑 이야기도 해보고, 기분이 이상하네.”

별 것 아닌 질문이었음에도 소년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눈치 없는 우희에게는 그리 이상하게 비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비슷한 나이의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신기했던 우희는, 남의 일터를 어질러놓았다는 생각에 그것을 만회하려고 정신이 팔려 있었다.

상대가 자신의 실수에 별 반응이 없는 것을 본 소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이렇게 된 거, 네가 두고 갔다던 물건, 같이 찾아줄까? 둘이 찾으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거야.”

“둘이서?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왜냐면…… 네가 읽고 있는 그 책이 내가 두고 간 물건이거든.”

“이거? 당음통첨(唐音統籤)?”

“응. 그게…… 내가 당나라 시대 한시를 한데 모아 편찬하는 작업을 맡고 있거든. 그래서 그래.”

한시(漢詩)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우희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우희가 학문을 공부하면서 가장 푹 빠져 있던 것이 한시를 읽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창작에도 재미를 붙여,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은 시의 감평을 부탁하고 다니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뻗치자, 우희는 앞에 선 명석한 소년에게 자신의 재주를 평가받고 싶다는 발칙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게 정말 네가 지은 시라고?”

우희가 외우고 있던 자작시를 읊어주자, 소년의 표정이 변했다.

사실, 그 내용이 훌륭하기도 했지만 소년의 표정이 변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럼! 보이는 사람마다 칭찬하던걸? 다른 나라 사람의 눈에는 어떤지 궁금했어.”

“솔직히 말하자면…… 믿을 수 없을 정도야. 네가 정말로 지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뭐야? 지금 내가 남의 걸 내 것처럼 썼다 이거야?”

“아니 아예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자, 내 말을 조금 더 들어봐.”

갑자기 진실을 의심받은 우희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입가에 띤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이윽고, 우희를 천천히 진정시킨 소년은 한 가지 제안을 덧붙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화가 잔뜩 난 상태였지만, 이상하게도 소년의 제안에는 우희가 거부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하자. 내가 운을 불러줄 테니. 네가 일곱 글자씩 써서 네 구절로 된 절구(絶句)를 하나 짓는 거야. 이건 어때?”

“여기서 즉흥으로 한시를 지어보라고? 좋아. 그 도전, 받아들이겠어.”

“정말? 그럼…… 이 글자를 운자(韻字)로 써서 한번 네 능력을 입증해보라고.”

소년이 펼쳐져 있던 책장의 한 글자를 가리켰다.

변할 변(變)자였다.

코웃음을 친 우희는 소매를 걷고는 소년이 대령한 지필묵으로 칠언절구를 구성하는 스물여덟 글자를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 천천히 한시가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본 소년의 얼굴이 천천히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인생약지여초견(人生若只如初見)하면, 하사추풍비화선(何事秋風悲畵扇)한가. 등한변각고인심(等閑變却故人心)이며, 각도고심인역변(却道故心人易變)이라.”

“인생이 첫 만남과 같다면, 어찌 가을바람은 화선(畵扇, 그림이 그려진 부채)를 슬프게 하는가? 매정한 임 까닭 없이 마음을 바꾸며, 사랑은 원래 쉬이 변하는 것이라 말하네.”

“오, 너도 제법인데? 그것만 보고 바로 조선말로 번역한 거야?”

“대단한 시야. 이거, 한나라 성제에게 사랑받았던 반첩여(班婕妤)의 시를 소재로 썼구나. 게다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훌륭한 시를 써내다니, 정말로 대단해. 그리고…….”

소년은 얼굴을 붉힌 채 우희가 써내려간 시에 감탄을 늘어놓았다. 글쓴이의 의도를 알아챈 좋은 독자가 진심으로 칭찬을 보내자, 우희의 어깨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곧바로 소년이 시의 핵심을 찌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거, 사랑시처럼 보이지만 날 비꼬는 거구나. 맞지?”

“어? 그걸 어떻게…….”

“겉으로는 사랑하던 이에게 내쳐진 사람의 한탄처럼 보이지만, 처음 만난 자리에서 네가 지은 한시를 칭찬하기는커녕 의심을 품고 마음이 변한 나를 놀리는 거잖아. 이거, 참.”

어린 나이에 자금성에서 일하는 천재에게는 우희의 글재주가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충격을 받은 우희는 입을 벌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소년은 그걸 알아채고도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워하는 듯했다. 그걸 보고 치솟았던 혈압이 내려간 우희는 그제서야 자신이 남의 나라 궁궐까지 와서 시비를 걸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아……. 미안. 그게…….”

“아냐, 괜찮아. 내가 먼저 잘못한 일이니까. 그리고 네 글재주, 정말 뛰어나단 걸 인정할게. 그 대신…….”

“그 대신?”

“이 시는 내가 가져도 되지? 정말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소년의 얼굴에서는 아직도 붉은 기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걸 본 우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 이걸로 방금 있었던 일을 묻어버리는 게 이득이기도 했고.

그때였다. 갑자기 체인각의 출입문을 작게 두어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그제서야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아차, 시간이 다 되어버렸네. 그럼 오늘 있었던 일은 책임지고 비밀로 해 줄게. 만나서 반가웠어. 조선에서 온 아가씨.”

“어, 그래……. 나도 반가웠어. 소년 관리님. 일 때문에 들렀는데도 나랑 한시 이야기를 하면서 어울려줘서 고마워.”

“아니야. 내게도 꽤나 즐거운 시간이었거든. 하하.”

다음에 볼 때는 절대 의심하지 않겠다며, 소년은 우희의 손에서 잊고 간 물건이라던 책을 받아들었다. 그가 등을 돌려 문밖으로 사라지려 할 때, 우희는 무언가 잊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 너 말야. 이름이 뭐야?”

“이름? 그건 왜?”

“그냥……. 너처럼 대단한 사람이면 언젠가 중원 전역에 이름을 떨칠 텐데, 나중에 그런 사람이랑 만난 적이 있다고 자랑이나 할까 싶어서.”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입술을 쭈뼛거리는 우희의 모습이, 분명 본심을 숨긴 게 분명했지만 소년은 그것을 상관하지 않았다.

시원스럽게 웃음을 터뜨린 소년은 약간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나는…… 음…… 금현엽(金玄燁)이야. 아, 조선식으로 읽으면 김현엽이 되려나.”

“뭐야. 만주족인 줄 알았더니, 이름을 보니 또 아니네? 진짜 조선사람 후손 아니야?”

“으음……. 말하자면 복잡한 사연이 있어서.”

정말로 이러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겠다며 호들갑을 떤 소년은, 우희에게 눈을 찡긋하고 마지막 인사를 보내더니 체인각 밖으로 사라졌다. 우희는 뒤늦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지만, 사실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가 사라진 뒤, 능글맞은 올케가 무언가를 숨긴 듯한 표정을 짓고 실내로 들어왔다. 곧이어 잘못된 명령을 받은 내관 탓에 헛걸음을 했다고 불평하는 아버지가 돌아온 덕분에, 자금성 구경은 예정대로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

“뭐? 그게 사실이냐?”

그날 제발이 저린 우희는 저녁에 아버지를 찾아가 체인각에서 있었던 일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예법 상 또래 남자와 함부로 말을 섞어서는 안 되는 법인데, 그 일을 숨기자니 괜히 양심이 찔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우희를 혼내기는커녕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희에게 소년의 인상착의와 이름을 전해 듣고는 깊은 한숨만 한 차례 내쉬었을 뿐이었다.

“아버지…….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아니다……. 내가 너무 방심했구나…….”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염려와는 달리, 우희의 첫 외국여행은 그 이후로 아무런 문제없이 막을 내렸다.

자신이 책임지고 비밀로 해주겠다더니, 소년 관리가 꽤나 약속을 잘 지킨 듯했다.

***

북경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해, 우희는 그녀에게 들어왔던 청혼이 누구에게서 들어온 것인지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집에 웬 커다란 선물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걸 그렇다고…….”

“죄송합니다, 태사님. 카간께서 워낙 엄하게 당부하신 일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연을 들으신 국왕 전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라…….”

“뭐요? 주상 전하께서?”

잠시 한양을 비웠던 사이 기습적으로 청나라에서 도착한 선물에, 그녀의 아버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삼킬 뿐이었다.

그 선물의 정체는 수레 여러 대에 담겨 전해진, 산더미 같은 책이었다.

그리고 민폐처럼 전해진 첫 번째 선물더미의 맨 위에는 그날 체인각에서 우희가 읽었던 당음통첨(唐音統籤)이 웬 낯선 비단주머니와 함께 놓여 있었다.

「驪山語罷清宵半 夜雨霖鈴終不怨

何如薄幸錦衣郎 比翼連枝當日願」

(여산에서의 굳은 맹세 허사가 되고, 밤은 깊어만 가는데

밤비가 내는 방울 소리에 애절한 마음 부쳐도 끝내 원망치 않았네.

어찌 매정하오. 내 아름다운 임이여.

우리 약속은 그 옛날 비익조와 연리지 되길 원했던 당현종과 양귀비의 언약만 못한가.)

비단주머니에서 나온 한시는 황제가 직접 지어 하사한 것이라 했다. 그것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우희는 어떤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처음 보았음에도 묘하게 익숙한 시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황제가 보낸 구절이 자신이 북경에서 지었던 칠언절구의 뒤에 이어져 아름다운 짝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그것은 원래 우희가 자신을 의심하는 상대를 비꼬려 지었던 시였다. 하지만 장난기 가득 담겼던 시는 황제의 손길이 더해지자 훌륭한 사랑시로 변해 이곳까지 날아왔다.

두근.

그 순간, 우희는 처음으로 왼쪽 가슴에 달콤한 통증을 느꼈다.

소년 관리, 아니 소년 황제가 보낸 제안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

다이칭 구룬 최초의 조선인 귀비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녀와 관계있는 이들이 살아있는 동안, 조선과 청나라는 대등한 관계에서 상부상조를 이어갔다.

황제는 귀비를 매우 아껴 그녀가 머물던 승건궁(承乾宮)에 거의 매일같이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밤늦게까지 서로의 학식을 나누기를 즐겼던 두 사람은 서로를 소년 관리, 고려 소저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그 전말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그렇게 하늘이 정해준 명을 다한 후, 그녀는 후손에 의해 황후로 추존까지 되지만 그것은 조금 훗날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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