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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92화 (292/298)

외전 9화. 수선화, 흐드러지다

긴 겨울이 지나가고 보드라운 솜털과 함께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한 봄의 일이었다.

이곳은 왕비가 머무는 창덕궁 대조전에 딸린 어느 전각.

온갖 서류 사이에서 금빛이 흐르는 쪽찐 머리가 갸우뚱거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히…… 히익!”

다가선 궁녀가 인기척을 내자, 궁중에 어울리지 않는 호들갑과 함께 푸른 눈동자가 번쩍 떠졌다. 궁녀는 주책없이 침까지 흘려가며 졸던 모습을 전부 목격했지만, 평소처럼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

“내가…… 얼마나 잤어?”

“낮것 드시고 이 각 정도요. 춘곤증이 버티기 어렵긴 하죠?”

혹시 작성하던 내수사 서류가 번지지는 않았는지 후다닥 확인한 요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졸면서 책상에 머리를 몇 번 박았는지, 서류에 적힌 글씨가 이마에 그대로 묻어 있는 것을 본인만 모르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본 궁녀는 푸근한 웃음을 띠고는 천에 물을 묻혀 꼼꼼하게 요안의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에 마음이 상했는지, 동갑내기 상전의 얼굴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하란타 다녀오시고 다시 예전처럼 일하시려니 고단하신가 봐요. 이렇게 피곤해하시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요.”

“이게 다 중전마마께서 일을 두 배로 주시니까……. 아니, 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지. 흠, 흠.”

“그러게 누가 잠까지 줄여가면서 세자 저하의 남녀상열지사를 그렇게 쓰래요? 그렇게 열심히 썼으면 걸리지나 말지.”

“누가 그럴 줄 알았나……. 그냥 두 분의 처지가 안타까워서 쓴 거였단 말야.”

요안은 세자와 헨리에트의 이야기를 중전에게 압수당한 것에 대해 아직도 분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혀 동갑으로 느껴지지 않는 상전의 얼룩을 마저 지우며, 궁녀는 예전에 일어났던 비슷한 일을 떠올렸다.

요안이 심양에서 돌아온 세자빈 아래에서 일을 시작한 것은 궁녀가 갓 궁에 들어왔을 무렵이었다. 그렇게 처음 말을 튼 것이 언제였더라, 어쨌건 그즈음부터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친해진 두 사람은 서로를 가장 친한 벗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심하게 졸진 않았잖아요? 요새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 그게……. 들어봐. 나…….”

엿듣는 사람은 없는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본 요안이 궁녀의 옷섶을 잡아당겼다. 이윽고 요안에게서 전달된 은밀한 속닥거림은, 그것을 들은 궁녀의 얼굴마저 새빨갛게 물들이고 말았다.

“정말요? 드디어?”

“그래. 하란타에서도 안 넘어오시던 분이 글쎄…….”

요안이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던 선생과 혼례를 올린 것은 조금 된 일이었다. 문제는 네덜란드까지 단둘이 다녀왔음에도 그동안 아무런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는 것.

반쯤은 남편의 문제였으나, 반쯤은 아내의 문제기도 했다. 예판 대감이 요안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것은 이성을 향한 애정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하긴, 여인의 눈으로 봐도 동생처럼 보이는 친구가 그리 쉽게 이성으로 보였겠냐만.

오죽 답답했으면 요안이 평생 이런 일과는 관련이 없을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을까. 하지만 궁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그게 문제의 전부가 아니었다. 요안 역시 너무나 좋아하는 언니가 남편의 정실인 탓에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생 같은 친구는 드디어 돌파구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요안의 시시콜콜한 불만을 그저 들어주기만 할 수밖에 없었던 궁녀는 그것만으로도 기쁠 뿐이었다.

“중전마마께서 알려주신 방법이 효과가 있었나보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러게……. 나, 정말 마마를 섬기길 잘한 것 같아. 마마가 아니었다면 선생님과 맺어질 수도, 이렇게 행복해질 수도 없었겠지?”

“그럼요. 궁녀들의 처우도 이만큼 개선해주시고, 은퇴한 궁녀들도 더 이상 살아있는 시체처럼 살아가지 않을 수 있게 만들어주신 분이 중전마마이신걸요.”

“하……. 이럴 때가 아니지. 갑자기 졸음이 싹 가신 것 같아. 마마께서 맡기신 일을 마저 해야겠어. 그게 가장 큰 보은이 될 테니까.”

갑자기 힘이 솟아난 듯 활기차게 일을 다시 시작하는 친구를 보며, 궁녀는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자신이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어낸 친구가 부럽기도 했고, 그날 중전과 있었던 즐거웠던 일화가 떠오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

“당장 예판을 중궁전에 들라 해라! 멀쩡한 여인을 아내로 들여놓고는 감히!”

“아이고, 마마. 진정하세요. 아무리 아끼는 아이의 일이라고는 하나 이러시면 전하께서도 곤란해지십니다.”

요안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중전은 불같이 화를 냈다.

분노한 중전이 격한 감정을 쏟아내자, 두 여인은 고개를 조아린 채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궁녀가 친구와 함께 중전에게로 불려갔던 날이었다.

“하지만 지밀상궁! 아무리 급박한 일 때문에 맺어진 인연이라고는 하나, 이래서는 안 되는 법이지! 내 직접 예판에게 해명을 듣고야 말 것이야!”

“아이고, 마마. 화부터 가라앉히시고 차분히 생각해보세요. 이 이야기를 가져온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이러셔서는 아니 됩니다.”

“먼저 가져왔던 사람? 아아……. 그렇지, 참. 내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군.”

세자빈이 되어 입궁했던 시절부터 쭉 모셔왔던 지밀상궁의 만류에, 중전은 겨우 화를 가라앉힌 듯했다. 오가는 대화를 들어보니 자신들이 불려오게 된 원인은 따로 있는 듯했지만, 지금에서는 그것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예판만의 잘못은 아니다, 요안아. 그건 너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겠지.”

“송구합니다, 마마. 저는 그게…….”

“이렇게 복잡한 가정사를 너 스스로 해결하긴 어려웠겠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정부인(貞夫人, 정2품 관료의 아내)이 자신만 바라보는 지아비에게 소실의 일을 대놓고 강요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그건……. 그 말씀이 옳으신 것 같습니다, 마마.”

“하긴, 그러니 내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겠지. 뭐, 나야 예판에게 빚을 지우게 되는 셈이니 이제 와서 그만둘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방금 중전이 불같이 화를 냈던 탓에, 아직도 요안은 엎드린 채로 벌벌 떨고만 있었다. 아마도 지금 사태가 전부 자신의 탓인 양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오가던 대화를 지켜보던 궁녀는 요안과 관련된 상황이 대강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중전에게 이번 상황을 고한 사람이 누구인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해 볼까?”

중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요안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엎드려있던 요안을 천천히 일으켜 세우고는, 떨고 있는 요안의 턱을 향해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예판의 잘못도 크지만, 네 잘못이 조금 더 크지 싶구나, 요안아.”

“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너도 화씨지벽(和氏之璧)의 고사를 알고 있겠지? 아무리 네가 품은 보물이 진귀하더라도, 이토록 꽁꽁 숨기고 있으면 둔한 사람은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법이다.”

중전의 손길이 요안의 몸 곳곳에 뻗치기 시작했다. 고운 피부 사이 은근히 드러난 주근깨, 대충 모양만 내 잔머리가 튀어나온 쪽, 먹물 자국으로 잔뜩 얼룩져있는 손가락, 일하느라 편하게 입은 옷가지까지.

아마 궁녀가 중전의 입장이었다면 이마를 잡지 않았을까. 조선에서 제일 높으신 여인에게 차림새로 혼나기 시작한 요안은 넋이 빠져나간 듯했다.

집에서도 이러고 다니냐는 중전의 질문에, 요안은 쉽사리 답을 꺼내지 못했다. 대신 평소에는 그러지 않는다는 변명이 튀어나왔는데, 오히려 중전에게 감찰상궁이 품행검사를 할 때만 빠져나갔던 것이냐며 혼이 나고 말았다.

“나 참, 성균관 유생들도 이만큼 짙은 먹 냄새를 풍기지는 않을 것이다.”

검사를 모두 마친 중전은 이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요약했다. 평소 자신의 충고를 귓등으로 흘리던 요안이 떠오른 궁녀는 이 말을 듣고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벌 받는 자세로 굳어버린 요안을 두고, 중전은 지밀상궁을 다시 곁으로 부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중전이 요안을 향해 다시 입을 연 것은 잠시 후였다.

“마침 잘 됐다. 선대왕 전하의 삼년상을 마치거든 우리 첫째 공주도 시집을 보내게 될 텐데, 그 연습의 대상이 되어주려무나.”

“연습이라니요, 마마?”

“쉿. 거기까지. 지밀상궁. 내가 무얼 부탁할지 알고 있지?”

“즉시 필요한 것 일습을 대령하겠습니다, 마마.”

***

타탁. 탁.

웬 사내의 모습이 밤늦은 창덕궁을 갈랐다. 임금에게 갈리다 겨우 퇴근한 후, 웬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고 금군을 따라 다시 입궁해야 했던 불운한 사내였다.

“헉…… 헉……. 전하께 고하거라! 부르셨던 사람이 도착했다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사내는 곧바로 중궁전으로 안내되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사내가 임금의 침전이 아닌 중궁전으로 안내되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겠지만, 임금 부부의 금슬을 감안하면 이것은 숨 쉬듯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중궁전에 발을 들인 사내는 곧바로 얼어붙고 말았다.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내 이런 사소한 일로 한수 너를 야밤에 부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전하……. 어째서?”

“핫핫. 아랫사람의 일을 살피는 것도 모름지기 지존의 책무가 아니겠느냐. 어떠냐, 우리 중전의 솜씨가.”

중전이 꾸며놓은 함정에 제대로 빠진 사내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요안이 이틀 동안 소식 없이 귀가하지 않기에, 사내는 평소처럼 그녀가 중전이 시킨 업무 탓에 야근이라도 하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중한 죄를 저질렀다는 말을 들고 급히 입궁했는데, 이런 상황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백의 시에서 백석벽안(白晳碧眼: 흰 살결 푸른 눈)이라 묘사한 그대로가 아닙니까. 예판이 저리 말없이 시선만 돌리는 모습은 오랜만에 봅니다, 전하.”

“핫핫. 그러게 말이오, 중전. 당신 말대로 사람은 조용히 옆을 지키는 이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때가 많은 것 같소. 물론, 나는 그런 적이 없지만 말이오.”

“아이, 전하도 참…….”

깨가 쏟아지는 임금 부부의 대화는 이미 사내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중년이 다 되어서까지 임금을 자신에게만 붙잡아놓은 중전의 몸단장 솜씨는 실로 대단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잘 빗어 곱게 묶은 황금빛 머리칼, 한 듯 안 한 듯 옅게 어우러진 화장, 몸에 꼭 맞아 몸매를 드러내는 옷,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기, 그리고 바다같이 푸른 눈동자까지.

굳어있던 사내의 마음을 흔들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다.

“원래는 전하의 힘을 빌려 그 이상의 명령을 내리려 했으나……. 더 이상 소첩의 역할은 필요하지 않겠군요, 전하.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 같소. 이대로 예판더러 아내를 데리고 퇴궐하라 명하면 되지 않겠소? 그리고 그 뒤에는…….”

임금의 입술을 가볍게 손끝으로 튕긴 중전은, 곧이어 퇴궐해도 좋다는 지시를 두 사람에게 내렸다. 그렇게 얼이 빠진 사내가 자신의 아내를 이끌고 중궁전을 나서려 하던 때였다.

“아 참, 오늘 일을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네, 예판. 자네가 감사해야 할 사람은 자네 집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뜬금없는 말이었다. 조선에서 가장 존귀한 두 분이 가정사에 개입한 탓에 혼이 나간 사내는 이 말의 진의를 집에 도착한 후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잠깐, 그 말씀은……. 그럼 어째서 중전마마께서 직접 나서신 것입니까?”

“그야 당연히, 재미있으니까.”

“예……?”

“예판 같은 사람의 이런 풋풋한 모습을 보는 것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아니 그렇습니까, 전하?”

아내의 말에 박장대소를 터뜨린 임금을 뒤로하고, 중전은 중궁전을 떠나는 부부에게 밤길을 조심하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사실 중전의 염려는 조금 쓸데없는 것이긴 했다. 예조판서댁 세 사람의 사이는 예나 지금이나 돈독하기 그지없었으니까.

***

“이제 좀 어떠냐. 괜찮아졌느냐.”

“네, 이제 좀…… 멀쩡해진 것 같아요.”

“미안하다. 내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일인데, 앞으로는 이런 일이 절대 없을 게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요안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내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끌어안으며 복잡한 웃음을 지었다.

남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요안에게도 그런 사내의 마음이 느껴진 듯했다. 천천히 사내를 향해 고개를 치켜든 요안의 얼굴에 사랑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너무나 행복한걸요.”

“…….”

“오늘 중전마마께 제대로 배웠으니, 앞으로도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할게요. 그리고…….”

어린 아내의 말이 기특했는지, 사내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꿈결을 거니는 것처럼 어질어질한 정신을 다잡으며, 요안은 다음번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낭군을 별채로 이끄리라 다짐했다.

분명 지금 상황은 요안이 평생 꿈꿔왔던 것이었다. 너무 행복했기 때문일까, 그녀의 입에서는 평소에는 꺼내지도 못했을 말이 너무나 쉽게 나가고 말았다.

“……저, 선생님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언니처럼요.”

“그래……. 함께 노력하다 보면 곧 소식이 있을 게다. 내 힘써 보마.”

“약속하신 거예요? 죽어도 잊으시면 안 돼요?”

요안이 기뻐하는 모습은 사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실 그가 이토록 늦게 요안을 안은 이유는 꾸미지 않은 외모 때문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진정한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하는 요안 앞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안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사내의 손길이 천천히 아내의 손으로 향했다. 그는 섬세하게 요안의 손가락 하나를 펼치더니, 그곳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맞댔다.

처음 그녀를 제자로 마주했던 순간부터, 사내는 그녀와 했던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녀가 먹물을 뒤집어썼던 날 했던 약속 또한, 오랜 시간을 두고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약속한다. 죽어서도 잊지 않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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