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93화 (293/298)

에필로그 (1)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서까래도, 대들보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도배 잘 된 천장과 불이 꺼진 LED 조명 뿐. 유리창으로 스며든 아침햇살에 눈이 따가웠다.

나는 정말로 현대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아직도 얼얼한 이마에 손을 얹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역사가 분명 변했을 텐데도 기숙사 시설은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나마 1인 1실인 것이 차이인가.

세면대에 받은 찬물에 얼굴을 담그자 엉켜있던 머릿속이 그나마 정리되는 듯했다. 이곳은 어디이며,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어제 저녁 있었던 일들은…….

‘선배님이랑 같이 교양 듣는 후배잖아요! ‘조선 중흥기의 민담과 설화’ 수업이요!’

기억을 되짚기 시작하자 익숙한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분명 어제 기억의 일부를 되찾고 기숙사로 돌아오기 전, 그녀는 눈물자국이 잔뜩 남은 얼굴로 내게 연락처를 남기고 어딘가로 떠나갔다.

만약 어제 내가 본 것이 착각이 아니라면, 그녀와의 인연이 시대를 초월해 이어지게 된 것이라면……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차라리 조선시대에 떨어져 호랑이에게 쫓기던 시절이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당장 살아남는다는 급박한 목표라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어사를 만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할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으니까.

아마 빙하 속에 잠들었다 현대에 깨어난 캡틴 아메리카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래도 슈퍼히어로에게는 곧 지구를 구하라는 임무라도 주어졌지만, 평범한 내게 그런 대단한 퀘스트가 주어질 리가 없었다.

“아…… 저거…….”

답답한 마음에 주위를 돌아보는데,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익숙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글러브와 야구공이었다.

다만 내가 알던 것과는 모양이 조금 달랐는데, 아마 소현세자에게 캐치볼을 가르쳤던 것의 나비효과일지도.

캡틴이 샌드백을 치며 착잡한 마음을 달랬듯, 혼자 공이라도 던지면서 마음을 정리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공이나 잡아볼까 하는 생각에 발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딩 딩 딩~ 굿모닝~ 빠빠빠 빠 빠 빠빠빠빠 굿모닝~

이 지겨운 모닝콜은 이 세계에도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군대 기상나팔이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인가.

주머니에서 알람으로 미친 존재감을 발산하는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원 역사보다는 기술이 조금 진보한 듯 세 단계로 접혀 펼치면 태블릿 크기가 되는 녀석이었는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1교시 수업 10분 전」

아, 맞다.

나는 더 이상 조선시대 선비가 아니라,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

간신히 지각을 면했다.

숨을 헐떡이며 출입문 옆 장치에 스마트폰을 가져다대자, 화면에 학번과 함께 정시출석이라는 네 글자가 떠올랐던 것이다. 기숙사와 수업이 열리는 한국학관이 가까워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100퍼센트 지각이었다.

다행히도 강의실에는 얼굴을 아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기억이 아직 전부 돌아오지 않은 지금, 이 수업이 1교시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 오늘부터는 여러분들이 기대하던 주제로 들어갑니다. 바로 인조부터 광종까지 활동했던 실존 인물을 근거로 창작된, 범 어사 설화인데요. 여러분들이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에는 사실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이 깊숙이…….”

그렇게 그녀의 옆자리를 찾아들어가 앉았을 때, 강단 위에서 신이 난 목소리로 강의를 시작한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깐, 범 어사 설화? 설마 이거 내 이야기?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화면에 뜬 강의내용을 다시 읽어봤지만, 틀림없이 그 내용이 맞았다. 호랑이 가면 쓰고 마패 들고 벌였던 그동안의 깽판들.

세월이 흐른 탓인지 내용이 바뀐 것도 있었지만, 확실히 내 이야기가 맞았다. 춘향전의 모티프가 된 암행어사는 내 스승님 한 분뿐이고, 수령에게 빠따질을 할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은가.

“……아주 유쾌한 이야기죠. 역사 과목에서 이분을 배울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죠? 정말 보통 성격이 아니셨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이 소설은 실제에 기초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록에 남아있는 안한수의 행적으로 교차검증이…….”

세상에, 수백 년이 지난 후 이렇게 접하게 되다니. 내 이야기가 소설이 되어 널리 퍼졌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헌데 그렇게 감상에 잠겨있던 사이, 강의실 곳곳에서는 연이어 한숨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뭔가 반응이 이상한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야 이제부터 지겨운 이야기 시작이니까 그렇죠, 선배님. 교수님 박사 논문 주제가 호랑이 어사 설화라던가? 이 파트만 들어가면 TMI가 넘쳐난다고 악명이 자자해요.”

그러니까, 저 엄격 근엄 진지해 보이는 교수가 나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땄다 이거지?

기분이 묘했다. 후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것을 제정신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지 않겠는가. 아니, 보통은 이런 기회조차 없어야 정상이긴 한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교수는 벌써부터 시동이 걸린 것처럼 쉴 새 없이 단어를 쏟아내고 있었다. 강의가 지루해진 것을 감지한 다른 학생들의 표정도 점점 굳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강의가 귓등으로라도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혼잣말에 응답해준 그녀 덕분에, 황녀를 닮은 그녀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고민했던 내용은 전부 쓸모가 없어지고 말았다는 점.

“아, 그런가요? 그런데 왜 굳이 이걸 듣는 거예요? 이렇게 다들 한숨까지 쉬어댈 정도면서?”

“그야 저 교수님 별명이 A 폭격기니까 그렇죠. 학점 앞에 뭐가 더 필요하겠어요.”

“아…….”

“이크, 교수님 이쪽 보신다.”

그 순간, 나는 강의실의 분위기가 급변한 것을 감지했다. 방금까지 배경음으로 시끄럽게 들리던 교수의 목소리도 어느새 들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 체육 특기생?”

“…….”

“거기 안한수 학생. 내 말 안 들리나?”

이쪽으로 시선을 돌린 교수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에, 내 뒤에 앉은 누군가를 부르나 싶었다. 하지만 교수가 부른 사람은…… 나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뭐? 체육 특기생?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우리 수업에 체육 특기생이 자네 말고 또 있나?”

주위를 둘러봤지만 교수의 말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저 깐깐해 보이는 교수는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잠깐. 안한수? 원래 내 이름은 이게 아니었는데, 언제 개명당한 거지?

“지난해 정기전에서 노히트 노런으로 틀어막아준 건 좋다 이거야. 나는 개인적으로 야구부 에이스 안한수의 팬이긴 하지만, 지금은 수업시간 아닌가?”

“네, 네……?”

“평소에는 조용히 강의를 듣더니, 오늘따라 왜 수업에 집중을 못 하지? 오늘 주제가 우리 학교의 창립자여서 그런가? 아니면 동명이인이어서?”

“아, 교수님……. 그게 아니라…….”

정기전? 노히트 노런? 에이스?

나도 모르게 대답과 함께 오른쪽 팔을 들어올렸다. 팔은 어떠한 통증도 없이 부드럽게 어깨 위로 올라갔다. 마치 조선시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동시에 머릿속에서 기억의 조각들이 또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 아무래도 이 세상에서는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야? 수업에 질문이라도 있다는 건가?”

“아…… 그게…… 그렇습니다. 제가 이 주제에 대해서는 조금…… 관심이 있어서요.”

하지만 교수에게는 그 행동이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혼란스러워진 머리 탓에 겨우 변명을 대 봤지만, 그것을 들은 교수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사태는 더 꼬여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호오……. 자네가? 그럼 관심이 있는 주제니 오늘 강의도 열심히 들었겠군? 그럼 방금 내가 강의한 내용에 대해서도 답을 할 수 있을 테고?”

“어……. 네, 아마도요.”

조선에 떨어지기 전, 졸업 직전까지 대학교를 다녔지만 이렇게 강의실 분위기가 자유로운 적이 있었던가? 아마도 역사가 바뀌면서 학부 강의 분위기도 바뀐 것 같았다.

교수는 아직도 의심이 풀리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어떻게든 이 상황을 넘길 수 있을 듯했다. 강의실 한쪽 벽을 전부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화면에는 분명 ‘남원에서 채록한 범 어사 설화’라는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으니까.

“그럼 첫 번째 질문, 범 어사 설화가 처음으로 등장한 ‘춘향전’의 등장인물, 이몽룡은 두 명의 암행어사를 모티프로 하여 형성된 인물이다. 그 중 암행어사 출두 이전 서사를 따온 사람…….”

교수의 질문은 너무 쉬웠다. 정답은 너무나 그립고도 친숙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때문일까. 질문에 대답하는 내 혀는 마구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거야 대사간 영감…… 아니 성이성이죠. 저때 사간원 사간으로 계실 때였나. 아마 야간에 인조가 불러내서 남원으로 보냈던 걸로 아는데 장티푸스 걸려서 고생을 많이 하셨었죠.”

“……!”

“아, 저 책 사진은 ‘안선비전’이네요. 저거 나중에 탈춤이랑 굿놀이로도 나왔는데, 그때는 호랑이탈을 뒤집어 쓴 어사가 아니라 진짜 호랑이가 어사가 된 이야기로 바뀌었던가…….”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졌다.

낯선 세상에 떨어져서 친숙한 예전 세상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누구나 나처럼 투 머치 토커가 되는 게 당연했다.

나를 바라보는 교수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남원에서 겪었던 쓸 데 없는 기억들을 꽤나 많이 쏟아놓은 상태였다.

다만 문제는 방금 강의에 나온 내용만 말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 그래도 덕분에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의심에서 벗어난 것 같긴 했다.

“호오……. 그건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최신 연구인가? 생각 외로 학구열이 뛰어난 학생이었군. 이름을 따온 분의 일대기여서 그런가?”

“아…… 별 말씀을요…….”

“그래도 수업시간에 떠들면 안 되네. 자, 그럼 강의를 계속하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강단으로 돌아가는 교수를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지루한 수업이 시작되자 주변에서는 다른 의미의 한숨들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가 수많은 이본(異本)을 만들어내며 지금까지 전해져 온 이유는 여러분도 짐작이 가능하실 겁니다. 백성들이 자신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 어사라는 존재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존경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요새 정치인들이라는 놈들은…….”

수업은 그렇게 계속 진행되었다.

나는 총 75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남이 나를 찬양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무런 티도 내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아마 이 중에 내 진짜 정체를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수치스러워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나는 교수의 주의를 제대로 끌어버린 듯했다.

그것도 좋지 않은 의미로.

“예? 그러니까 그 말씀은…….”

“언제든 좋으니 한번 내 연구실로 찾아오게. 학생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아서 말이야.”

수업이 끝난 후의 일이었다. 나를 강단으로 불러낸 교수는 홍타이지가 떠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게……. 제가 체육특기생이라……. 아마 훈련도 있을 거고…….”

“아, 야구부 감독은 걱정 안 해도 되네. 나랑 조금 아는 사이거든. 내 수업 듣는 야구부 에이스와 얘기 좀 하겠다는 부탁 정도는 들어줄 사이라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내 이름이 안한수가 아니었을 때 김 교수에게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나는 아직도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을 하고 있는 교수에게서 뒷걸음질 쳐 물러나야 했다.

***

하지만 그날 수업 시간이 아주 쓸모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어떠한 사실을 접하는 순간, 머릿속에 잠들어있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과 수업시간에 자연스럽게 접촉한 것은 분명 이득이긴 했다.

“아니, 뭐 이렇게 바뀐 거야. 세상에.”

나는 지금 ‘삼백기’라는 건물에 있었다. 삼백기 박물관에서 토막 난 마패를 봤다던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나를 자연스럽게 이 건물로 안내했던 것이다.

원래 중앙 광장 옆에 위치해 있던 이 건물은 ‘백주년 기념관’을 줄여 백기라 불리던 건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김육이 세운 그 빌어먹을 학당이 대학의 전신이 된 이 세상에서는 창립 350주년 기념관, 줄여서 삼백기라 불리는 모양이었다.

“바뀌어요?”

“아,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이에요.”

“풋, 무뚝뚝한 줄만 알았더니 이런 면도 있네요, 선배님. 몰랐어요.”

아차. 황녀를 닮은 그녀가 옆에 있는 이상 말조심을 했어야 했다. 그녀에게 혼자 떠드는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지 않길 기도하며, 나는 천천히 박물관의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기념관의 여러 층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박물관은 웬만한 국립박물관과 규모가 비슷했다.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에 따르면 이 박물관은 ‘그 학당’의 창립부터 현대까지 관련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바뀐 미래를 전반적으로 대강 훑어보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지 않을까. 굳이 그녀가 이곳으로 이끌지 않았더라도 나는 분명 이 박물관을 방문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나저나 저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우리 학교 출신 위인들이 되게 많았네요. 괜히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부심을 부리실 만했어요.”

“조선시대부터 성균관과 나란히 인재를 배출하던 교육기관이니까요. 그럴 만도 하죠.”

박물관으로 통하는 입구의 양옆에 펼쳐진 벽에는 역사에 업적을 남긴 졸업생과 교직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졸업생 이름으로만 벽 한 쪽을 다 채우다니, 아무래도 내가 뿌린 씨앗은 생각보다 큰 나비효과를 불러온 듯했다.

벽의 앞부분에서 길산과 만중, 석주의 이름을 찾아낸 나는 그제서야 역사를 바꾸었다는 실감이 제대로 들기 시작했다. 윤휴와 유형원의 이름도 눈에 띄는 것을 보아 이들도 교직원 자격으로 벽면에 이름을 새긴 듯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 근처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찾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