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
“박요안……. 안우희…….”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이 눈높이에 새겨져 있었다. 마치 내가 발견하기를 기다린 것처럼.
나를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을 이곳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 검색해보니 여학당 출신이시네요. 그곳도 우리 학교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곳이니, 이분들 이름이 여기 있어도 이상하진 않네요.”
“여학당이……?”
“에이, 장난치지 마세요. 선배. 아까 교수님도 놀라게 하셨던 분이 새내기 때 듣는 교양에서 가르치는 걸 모르실 리가 없잖아요.”
의외로 역사가 취향이었을 줄은 몰랐다며, 그녀는 해맑은 웃음을 띠었다. 그 웃음에 눈을 맞추기 머쓱해 시선을 돌리자, 박물관 입구에 적힌 대학의 역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말년에 만중이 조선에도 유럽식 대학 제도를 도입하려 애를 쓰긴 했었지. 내 밑에서 갈리면서도 틈틈이 노력한 보람이 있어, 조선 최초의 박사가 노력한 일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결실을 맺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최초의 대학이 조선에 생겨나 지금까지 이어졌고, 그래서 ‘그 학당’이 학교의 전신이라 여겨지는 듯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종합대학으로 거듭나며 탑골에 있던 여학당까지 흡수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갑자기 팔뚝에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멍하니 서 있던 내가 답답했는지, 그녀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여기 보세요. 그 두 분과 관련된 유물이 있네요.”
황녀를 닮은 이에게서 전생의 가족들을 소개받는 기분은 꽤나 묘했다.
그녀가 말한 곳을 쳐다보자, 요안의 첫 작품인 <열녀김씨전>, 그리고 딸과 관련이 있는 서책 하나가 유리 안에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
“전당시(全唐詩)…….”
“아, 그 분은 유명한 분이에요. 청나라 황제에게 시집가서 차기 황제를 낳으셨거든요. 황제와의 로맨스가 워낙 유명해서 대륙에서도 몇 번이고 드라마로 만들어졌어요. 최근에 나온 건 현대인이 빙의하는 내용이었던가? 그리고…….”
꽤나 좋아하는 주제였는지, 그녀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드라마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나는 다른 곳에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다행이다……. 나는 또…….”
“네? 선배, 이런 로맨스물도 좋아하세요?”
로맨스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늘 모략과 음모가 넘치는 황궁에 딸을 시집보내놓고 걱정하지 않는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우희가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었다. 황제가 딸의 거처에 매일같이 방문해 아들딸을 여럿 낳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우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먼 조선에 있는 나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 버렸으니…….
그래도 다행인 것은, 딸은 황제의 귀비가 되어 행복한 삶을 살아간 모양이었다. 생전 강희제와 수많은 한시를 남겼고, 따로 대륙에 전해지는 한시를 모아 시집을 편찬했다는 설명이 눈에 들어왔다.
“와……. 이건 처음 알았네요. 가족끼리는 닮는다더니 정말로 그런가 봐요. 이분이 코레네스크의 시초였다니…….”
“조선인의 첫 네덜란드 방문 이후, 수많은 도자기와 그림이 유럽으로 전해졌다. 그와 동시에 네덜란드에 유학 중이던 김만중이 많은 조선 문학을 번역해 유럽에 소개했다…….”
“처음에는 귀족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조선 소설은 헨드릭 하멜의 조선방문기가 출판되면서 일반 계층에도 폭발적으로 유행했다……. 그리고 이 책이 동서양의 문학이 교류된 첫 번째 사례라네요.”
안내판에 적힌 내용을 따라 읽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웬 낯선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코레네스크(Coréenesque)……? 프랑스어를 해석하면 조선 스타일이라는 뜻인데…….
아무래도 내가 틔워놓은 물꼬가 생각 외로 크게 날개를 펄럭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선 문화가 유행하던 현상을 가리키는 단어가 새로 생겨날 리가 없지 않은가.
벌어지려는 입을 억지로 닫으며 다른 안내판에 눈길을 돌렸다. 유리창 옆에 위치한 안내판에는 사진 세 개가 붙어 있었다. 하나는 자매결연학교인 레이던 대학 동양문화학부에 설치된 만중의 흉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낯선 화풍으로 그려진 산수화였다.
“이게 고흐의 그림이라고?”
도자기를 포장하는데 사용되었던 판화가 후대 네덜란드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익숙한 산수화를 모작한 고흐의 초기 작품들을 바라보며, 나는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위에는 이미 한번 본 적 있었던 초상화 사진이 있었다. 내가 네덜란드에 방문했을 때, 빌렘이 선물로 제작해 준 나와 요안의 초상화였다.
코가 찡해졌다. 문득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비취 비녀를 꽂은 소녀, 이 그림 덕분에 조선 소설이 더 잘 팔렸다는 이야기도 있네요. 베르메르가 남겨놓은 스케치 속 미녀가 작가라는 입소문이 돌자, 판매량이 급상승했대요.”
“세상에…….”
“아, 그 이야기는 여기도 있네요. 이 물건의 주인이 범인이었나 봐요.”
그런 내 속을 알 리 없는 그녀가 옆 전시대로 발걸음을 옮기며 종알거렸다. 그곳에는 놓여있는 물건 역시 익숙한 인물의 것이었다.
“봉림대군…….”
“……사절단으로 떠난 네덜란드에 가족과 함께 정착해 상주외교관으로 활동했다. 현지에서 프룀(오얏)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사를 차려 활동비용을 조달하는 한편, 조선 문화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이런 뒷사정은 재미있네요.”
“노년에는 영국에서 일어난 명예혁명에 가담해 조─란 관계에 기여하고 윌리엄 3세(빌렘 2세)로부터 작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이 무슨…….”
네덜란드를 떠나기 전 일어난 사소한 사고 탓에 빌렘이 천연두 면역을 가지게 된 이후, 원 역사와 달리 장수하게 될 빌렘이 명예혁명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다는 예상은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봉림대군이 가담했을 줄이야.
연도를 보니 내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문득 라위터르와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떠올라, 입맛이 씁쓸해졌다.
“아, 김만중. 이분은 알아요. 네덜란드에서 교환학생 온 친구가 말해줬어요. 그쪽에서도 유명한 사람이라고.”
“네덜란드에서 유명해요?”
“네. 최초의 동양인 박사이자 유능한 번역가, 그리고 현대적인 감각의 소설가였다고 적혀있네요. 그 친구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요.”
아마 현대적인 감각의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지금 전시대 안에 놓인 유물,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때문일 것이다. 원 역사에서와 달리, 유럽물이 든 만중이 쓴 두 소설은 완전히 하렘 소설과 아침드라마 그 자체였던 기억이 났다.
만중과 네덜란드인 아내 사이에서 난 아이들은 대대로 서양을 상대하는 외교관으로 활동한 모양이었다. 자신은 조정에서 죽어라 갈렸으니, 아마 자식들은 조정에서 갈리는 대신 조금이라도 자유로운 삶을 살길 바란 것일까.
“이분은 우리 학교를 설립한 분과 절친한 친구셨나 보네요. 최초로 상업용 인삼 재배 성공, 복식부기 및 선진 금융시스템 수입, 말년에는 왕실에서 파견된 상주외교관을 보좌해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다 사망…….”
“아…….”
그곳에서 꽤나 즐거우셨나 보군요, 사형.
서양식 유화로 그려진 충신의 초상화가 유리창 너머로 나를 반겼다.
조선에서는 귀찮다며 초상화 한 번 그리지 않던 사람이, 네덜란드에서는 활짝 웃는 표정의 초상화를 남긴 것이 아이러니했다.
늘 제멋대로였던 사형은 마음속에 짐 하나를 늘 얹고 살아가고 있었다. 먼 이국땅에서는 짊어졌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나저나, 이런 분이 어째서 끝까지 독신으로 사신 걸까요? 유서 깊은 가문의 양반에, 능력도 좋으셨고, 이 시절에 이렇게 높은 벼슬까지 하셨던 분이 말이에요.”
“그건…….”
“결혼은 안 하셨는데 족보에 오른 딸이 있는 건 또 신기하네요. 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건지…….”
내가 그의 뒷사정을 알게 된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 충신은 낙향한 나를 찾아와 그동안 숨겼던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았다. 어째서 거대한 상단을 일군 사람이 그것을 물려줄 아들을 낳기는커녕 혼인조차 하지 않았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은 충신은, 어머니를 닮아 갈색 눈에 갈색 머리칼을 한 대군을 따라 네덜란드로 떠나갔다. 그 이후로 그가 조선 땅을 밟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민감한 이야기를 남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충신은 그의 슬픈 사연을 좌명과 나에게만 털어놓았던 터다. 그 이야기는 이대로 역사 속에 묻히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묘한 감회에 사로잡혀 있던 사이, 그녀는 어느새 옆 전시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의 흥미가 다른 곳으로 금방 옮겨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 이때부터 진풍그룹이 시작된 거구나. 두 가문이 하나로 합쳐져 본관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진풍이었다니…….”
“진풍그룹?”
그 옆 전시대가 유난히 큰 이유가 있었다. 학교에 아낌없이 기부금을 전달한다던 재벌가에서 유물을 잔뜩 기증한 듯했다.
“네. 여기 삼백기 건물도 진풍그룹에서 지어준 걸걸요. 350년 전 성근학당 시절부터 함께한 인연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니 놀랍긴 하네요. 이런 거, 별로 관심 없었는데.”
“진주 강씨와 청풍 김씨…….”
“의외로 잘 아시네요? 설마 이번 드래프트에서 가고 싶은 구단이 JP라든가?”
이상한 의심이 날아왔지만 얼버무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내가 처음 보는 재벌 이름의 유래를 알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성균관 시절부터 가장 친했던 벗이 진풍그룹이라 불린 재벌가의 시조였기 때문이다.
충신의 딸과 좌명의 아들인 석주가 혼인하면서 두 가문은 하나가 되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잘 이어 내려온 듯했다.
하긴, 조선 전역을 꽉 잡고 있던 최고의 상단과 상업에 밝은 명문가 집안이 결합했으니 그 시너지가 오죽했을까. 다만 그것이 이런 결과로 내려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일정…….”
그랬다. 가장 큰 전시대의 주인은 좌명이었다. 유리 너머로 비치는 초상화에 놈의 잘생긴 얼굴이 그대로 담겨 있는데, 몰라볼 수 있을 리가.
“와…… 옛날 사람인데 되게 잘생겼네요. 실제로 보면 어땠을까요.”
어땠긴, 귀하신 분께서 어릴 때 점찍어서 남편으로 잡아갈 정도였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의심을 살 수는 없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꾹 눌러 참았다.
아무래도 기부금을 잔뜩 낸 덕분인지, 좌명의 업적은 꽤나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특히 내 후임 영의정이 되어 활약했을 시기의 업적이 많았는데, 내가 안심하고 조정을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다 좌명 덕분이긴 했다.
경신대기근이 닥쳤을 때 일만 하다 과로로 숨졌던 좌명의 원래 운명을 생각하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놈은 아버지 김육을 닮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성실하게 일했고, 고마운 처남 덕분에 나는 늘 큰 짐을 덜 수 있었다.
“아, 이 시는…….”
“아는 것인가요?”
“네. 제가 입학할 때 쳤던 시험에 나왔었거든요. 기출문제에서 적중했다고 좋아했는데, 여기 박물관에 소장된 책에서 나온 줄은 몰랐어요.”
전시대 벽면에는 좌명이 말년에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 한 수가 새겨져 있었다. 먼저 세상을 뜬 벗들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한시는 대학입학시험에 몇 번이고 출제될 정도로 명시(名詩)라 평가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왜 내게는 그 내용이 나와 충신의 욕으로 읽히는 것일까. 죽을 때까지 새 왕의 노예로 혹사당해야 했던 좌명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좌명의 전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를 두고, 나는 옆 전시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 쪽을 흘끗 바라본 그녀에게서 아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그런데…… 왜 아드님은 잘생긴 외모를 이어받지 못하셨던 걸까요. 조금 안타깝네요.”
“……본인에게도 트라우마였을 거예요.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선배는 마치 직접 만나봤던 사람처럼 이야기하시네요. 헤헤.”
당연히 직접 만나봤지. 내가 가르쳤던 녀석인데.
이번 전시대의 주인은 석주였다. 좌명의 아들이어서 그런지 녀석의 전시대도 규모가 꽤 큰 편이었다.
녀석이 산적을 닮은 외모를 호랑이를 닮았다고 애써 포장한다며, 길산이 농담을 섞어 이야기했던 기억이 났다. 정작 길산은 석주에게 그럼 암행 나갔을 때 호랑이 가면을 쓸 필요가 없겠다며 빈정대다가 한 대 얻어맞은 모양이었지만.
“하지만 외모랑 달리 권모술수에 능한 타입이었나 보네요. 을병대기근 시기 조정이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은 김석주 덕분에 가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니.”
원 역사에서도 석주는 권모술수에 능했다. 그 때문에 노론과 소론은 갈라졌고, 남인은 석주의 음모로 대다수가 숙청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미래를 아는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삼촌의 첩에게 주먹질을 해 이빨까지 부러뜨렸던 망나니 석주는 이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능력을 그대로 살려 세자의 수족으로 본분을 다했다.
실무형 관료였던 아버지 좌명과 달리, 석주는 세력을 휘어잡고 관리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때문에 나는 조정을 떠나기 전 처조카인 석주에게 모든 것을 전수했고, 석주는 노회한 송시열을 상대로 조정의 주도권을 잡아 보이며 내 기대에 부응했다.
“그리고 마지막 이분은……. 복장을 보니 장군이셨나 보네요. 꽤나 훈훈하게 생기셨는데요?”
“아마 제가 알기로 청나라 공주님과 결혼하신 분일 거예요.”
“오…… 그런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하긴, 공주님도 반할 만하네요. 이런 외모에 무관이니 근육도 많았을 거고…….”
그리고 마지막 전시대의 주인공은…… 원 역사의 도적이자 내 유일한 수제자 겸 양자였다.
아마 도적 장길산은 이 역사에서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대체역사 소설에서나 나올까.
“이분은 17세기 최고의 장군으로 평가받으신대요. 육지와 바다를 가리지 않고 큰 활약을 보였다……. 얼굴값 톡톡히 하셨네요.”
길산의 소개글 첫줄에 해군사관학교 1기라고 적혀있는 것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아무래도 군관도감은 근대화를 거쳐 사관학교로 발전한 모양이었다.
녀석이 본격적으로 사령관으로 활약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아마도 내가 북경 인근에서 팔기를 박살낸 뒤 군 일선에서 물러난 직후였던 것 같다. 녀석은 재능이 있었고, 좋은 스승들에게서 배운 덕분에 전장에서 그 재능을 살리는 법을 알고 있었다.
특히 다시 남하를 시작한 러시아를 알바진에서 격파한 것과, 세력을 키워나가던 준가르를 원정길에서 박살낸 것이 길산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말년에는 심양 일대에서 봉기해 조선으로 남하한 청나라 반란군 세력을 안주성 인근에서 박살내는 노익장까지 보였다고 했다.
“흐음……. 확실히 청나라 공주님이 사람 보는 눈이 있으셨던 모양이네요.”
“사람 보는 눈이요?”
“조선에 쳐들어온 적을 막아내고, 두만강 너머를 평정한 공도 있으시지만, 아무래도 청나라의 원군으로 온갖 적들을 쓰러뜨린 업적이 눈에 띄니까요.”
그럴 듯한 생각이었다. 대기근을 넘기기 위해 청나라의 식량 지원과 군사력을 교환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은 나였지만, 그것을 전장에서 실천한 것은 길산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동아가 그럴 생각으로 길산을 유혹한 것은 아니었다. 그건 어린 시절부터 두 사람을 지켜본 내가 보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에이……. 설마요.”
“너무 나간 생각인가요, 헤헤. 요새 너무 멜로 영화를 많이 본건가?”
“뭐, 대단한 아버지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재밌는 이야기였어요.”
“그렇죠?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죠? 하긴, 그러고 보니 저도…….”
무엇인가를 말하려던 그녀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어쨌건 길산은 전장에서 경신대기근 때 지원받은 값어치를 훨씬 뛰어넘은 활약을 해 주었다. 그로 인해 강희제는 잊지 않고 수십 년 후 또 다른 대기근이 닥쳐왔을 때도 잊지 않고 식량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물론, 강희제가 가장 총애하는 귀비인 우희의 역할도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희제가 황실 재정에 무리가 갈 정도로 조선을 지원한 탓에 제2의 고려천자 소리를 들었다는 설명을 보자, 나도 모르게 작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하……. 다들 잘 해내 주었구나.”
내가 사라진 사이 이 사람들이 있어 조선은 거듭된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역사를 이렇게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나 혼자만의 힘이 절대 아니었다.
“아, 알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그 시절 안한수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네요. 전시관을 따로 구분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물론 진풍그룹에서 지원한 것도 있겠지만요. 그리고…….”
가볍게 손뼉을 친 그녀가 깨달은 점을 말하기 시작했다. 뒤에 이어진 말에서 나와 관련된 유물들은 성근기념관이라는 건물에 따로 전시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가요?”
“네, 강의시간에 교수님이 17세기의 설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신 이유가, 이때가 망해가던 조선이 새로운 동력을 얻어 열강으로 탈바꿈할 기초체력을 쌓은 시기라고 하셨거든요. 기억나시죠?”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하나 깨닫고 말았다.
“아 그렇…… 잠깐, 열강이요?”
“네, 열강이요. 교수님이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이 시기부터 축적됐다고 하셨잖아요.”
“대한…… 제국?”
잠깐. 그러고 보니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그녀에게서 황실이라는 단어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역사의 방향을 이만큼 틀어놓았으면, 후대의 역사는 더더욱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의 등 뒤로 펼쳐져 있는 나머지 전시관들에는 그 역사들이 담겨있을 것이 분명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바꿔놓았지만 나는 모르는 역사라니.
몇 걸음만 더 걸으면 그것을 직접 내 눈으로 볼 수 있다. 심장이 슬슬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