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3)
“어이, 거기 학생들! 폐관시간 다 됐어요!”
갑자기 분위기를 깨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경비원이 다급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기념관으로 들어올 때 입구 안내 데스크에 앉아있던 사람이었다.
“아, 깜짝 놀랐다면 미안해요. 마음이 급해져서 그만.”
“괜찮습니다. 그런데 폐관시간이 다 되다니요? 지금은 아직 오전인데요.”
“공지를 못 보셨나본데, 오늘은 박물관을 오전만 운영하거든요. 간단한 공사 때문이라니 양해 부탁드려요.”
경비원이 들이민 종이에는 위에서 내려온 듯한 공문이 인쇄되어 있었다.
주말 전 간단한 시설보수 겸 유물 점검을 위한 조기 폐관이라…….
“어쩔 수 없죠. 먼 곳도 아니니 나중에라도 오면 되는 거고요. 알겠습니다.”
“아이고,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와주세요.”
궁금증 해소가 미뤄진 건 좀 답답했지만, 이 정도야 참을 수 있었다. 정 궁금하면 기숙사에 돌아가서 위키라도 찾아보면 될 일이고.
하지만 이 자리에는 나보다 더 실망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 나와 박물관에서 눈을 빛내던 그녀였다.
“왜 그리 시무룩해 있어요?”
“아, 그게……. 다른 전시관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리고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요, 헤헤.”
“시간이요? 그러고 보니 벌써…….”
“저, 사실 조금 있다 다음 교시 수업 있거든요. 아마도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선배.”
아쉬워하는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떠올랐다. 내가 없는 과거를 살피던 시간 동안 그녀도 즐거워 보여서 다행이었다.
“참, 선배는 오후에 야구부 훈련 있으시죠? 선배도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훈련요?”
맞다. 나 그러고 보니 대학야구 선수였었지.
훈련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머리에 망치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이 가해졌다. 분명 평일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훈련을 받는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아, 아차!”
“거 봐요. 그럴 줄 알았다니까. 선배는 옆에서 챙겨줄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완전 늦었네요. 지금 뛰어가도 늦을…….”
뒤이어 떠오른 훈련장 위치로 막 뛰어가려던 찰나, 내 손목을 그녀가 낚아챘다. 분명 강하지 않은 힘이었지만 마치 수갑이라도 찬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만요. 그냥 가시면 안 되죠.”
“에……예?”
“선배 궁금증을 해결해드리려고 후배가 이렇게 시간까지 썼는데 이러시기예요, 정말?”
아니, 방금 전시관에서 본인도 신나 계시던 거 아니었어요?
“음…… 내일은 과외가 있으니까 안 되고, 모레가 좋겠네요. 선배, 기숙사 사시죠? 그럼 제가 수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학교에 와 드릴 테니까‥….”
“모레요?”
“네, 모레요. 그날 밥 사주세요. 맛있는 걸로다가.”
왠지 비슷한 일이 예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상태기도 했고.
내 승낙을 받자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띠더니, 그제서야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아무래도 선배의 주머니를 터는 것이 목표였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전공수업을 들으러 가야겠다며 호들갑을 떠는 그녀에게 작별을 고하던 때였다.
머릿속에 갑자기 궁금증 하나가 떠올랐다.
“저, 혹시 일요일 밥 약속 때문에 말인데요.”
“네. 혹시 이제 와서 안 된다는 말을 하시려는 건…….”
“아니, 그건 아니에요. 혹시 못 드시는 메뉴가 있나 해서요. 예를 들면 파인애플 피자라든가…….”
왜 하필 그 음식을 입 밖으로 냈을까.
분명 내가 그날 본 황녀의 머리끈은 헛것이 아니었을 텐데.
하지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쾌활한 그녀는 그저 웃으며 질문에 대답할 뿐이었다.
“하와이안 피자요? 당연히 잘 먹죠!”
“…….”
“사람들이 왜 그걸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맛만 좋은데. 무슨 피자 근본주의자처럼 그걸 먹느니 굶겠다지를 않나, 어떻게 피자를 이렇게 모독할 수 있냐며 꿍시렁거리지를 않나…….”
역시.
***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기숙사를 나섰다. 투수로서 빼먹으면 안 되는 아침 러닝을 겸해 달라진 서울 구경을 할 생각이었다.
삼십 분쯤 이동했을까, 횡단보도를 몇 번이고 건넌 내 눈에 첫 번째 목적지가 들어왔다. 문제는 내 머릿속에 있던 풍경과 눈에 비치는 광경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 성벽이 그대로 있잖아?”
서울의 동대문인 흥인지문은 원래 큰 도로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흥인지문은 여전히 성벽으로 된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수도를 방위하고 있었다. 성벽 하나만큼은 조선시대 기억에 남아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어째서……? 이러면 서울 시내 교통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마치 내 질문에 답하듯, 그제서야 한양도성의 자세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처럼 성벽이 완전히 이어진 모습은 아니었다, 다만 성벽을 통과하는 도로와 도로 사이에 건물 대신 성벽이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을 뿐.
한양도성은 아직도 조선 시대의 한양 경계를 그대로 방문객에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 이러면 도심 개발을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성문은 개방되어 있었지만 도보로만 통과할 수 있었다. 차는 흥인지문 양옆 50m 가량을 우회해서 난 도로를 통해서만 도성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듯했다.
빠르게 뛰어 흥인지문을 통과했다. 아무래도 어제 저녁 내내 스포일러를 참아가며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린 보람이 있을 듯했다.
“여기는 흥인지문입니다. 600년 넘게 우리나라의 수도를 지켜온 성문이지요. 근대화 과정에서 한양도성을 철거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왕기가 빠져나간다는 이유로 허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후대에 포장도로를 내느라 훼손한 부분을 복원, 지하화하는…….”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벌써부터 성문 위에서 관광객을 안내하는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문을 통과해 도성에 진입하자, 성문 앞에 펼쳐진 거대한 광장에는 관광객들이 이미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이 시간부터 벌써? 아무래도 이 세상의 서울은 원 역사보다도 더 발달한 관광지인 모양이다.
그렇게 가이드의 목소리를 따라 도성 내부의 모습을 확인하러 흥인지문 위에 올랐을 때였다.
“아니……?”
나도 모르게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하지만 눈을 비벼도 보고, 오래 감았다 떠 보기도 했지만 눈앞에 들어오는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러분들이 보고 계신 특별구역은 1910년부터 황명에 따라 황궁을 넘볼 수 있다는 이유로 일정 높이 이상의 건물 건축이 금지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제국의회에서 특별법을 제정, 일정한 건축양식을 지키는 설계에 한해 재건축이 허용되었지요. 그 결과가 이것입니다!”
“오오! 시간이 멈춘 곳 같다는 평가가 그대로구먼! 요심도에서 구경 온 보람이 있어!”
“연해도로 떠나기 전, 내 어릴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여……. 살아있길 잘했어…….”
무언가 외국어 억양이 섞인 한국어를 쓰는 노인들을 뒤로 하고, 나는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마치 거대해진 북촌 한옥마을이 내 눈 앞에 펼쳐진 듯했으니까.
도성 내부, 줄잡아 3분의 1 이상 되어 보이는 공간은 아직도 조선시대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아마도 청계천과 저 멀리 보이는 경복궁을 경계로 한 지역은 멀리서 보면 내가 살던 17세기의 모습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을 정도였다.
“잠깐, 그러면……?”
게다가 한양 도성 지역이 이 정도로 달라졌다면, 대체 다른 곳은 어떻게 변했단 말인가? 그리고 역사는?
이 세상에 떨어진 첫날, 그녀의 입에서 황실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왔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다. 아무래도 나는 그런 큰 스포일러를 당하고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
그대로 흥인지문을 통과해 종로를 걷는 동안, 나는 마치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예전에 비해 깔끔하게 포장된 길이 조금 넓어지고 건물이 묘하게 현대적인 한옥으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내가 매일같이 출근하던 한양의 구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운종가는 관광객을 상대로 운영하는 상점과 호텔로 가득 차 있었다. 피맛골 뒷골목에는 유흥가와 음식점이 여전히 즐비했다. 그리고 세책점 자리에는 진풍그룹의 서점이, 그 학당 자리에는 모교를 운영하는 재단의 사무실이 들어서 있었다.
“아니, 제국이라며. 제국의 심장이 고작 이 정도 규모로 감당이 되나?”
최첨단을 달리는 시대와는 달리 과거의 규모에 멈춰 있는 공간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곰곰이 답을 생각해보면, 예전 수도 인근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거나, 다른 부도심을 건설하는 방법 등으로 도심의 기능을 분산시키는 방법도 있긴 했다.
그 가설을 뒷받침하듯, 한옥 너머 서쪽에는 예상한 그대로 마천루의 숲이 펼쳐져 있었다. 도성 내부에서도 개발이 허용된 곳은 고층 빌딩을 지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바로 스마트폰으로 역사를 검색해보면 답이 나올 일이었지만, 나는 최대한 그것을 뒤로 미루는 것을 택했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정보를 한꺼번에 받아들였다가는 정신이 나갈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고민하던 사이, 내 걸음은 어느새 종로를 전부 지나 광화문 앞을 거닐고 있었다. 그곳에는 폐허만 남아있던 경복궁이 원 역사 이상으로 번듯하게 복구되어 서 있었다. 광화문만 봐도 눈으로 직접 보았던 자금성에 비교할 만한 규모였다.
“여긴 들어갈 수 있나 보네?”
방금 지나쳐온 창덕궁과 달리, 경복궁은 휴일 없이 매일 관광객의 출입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근위대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창덕궁은 일부 구역을 제외하면 개방되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고 했다. 아직도 황실이 거주하고 있다나.
어차피 개방된 궐내각사와 인정전 구역은 전생에서도 토 나오게 다녔던 곳이라, 굳이 그 이상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 아침에 진행된다는 수문장 교대 의식만을 구경하고 잽싸게 다시 종로 거리로 빠져나왔었다.
“……그 위에 휴대폰을 올려놔 주세요. 그리고 잠시 기다리시면…….”
“……됐나요?”
“네, 학생이시군요.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여기 안내책자…… 도 받아 가시고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어디서 뵈었던 얼굴 같아서요. 묘하게 익숙하신데…….”
광화문 내부는 거대한 건물과 다를 것이 없었다. 매표소에는 개량한복을 입고 쪽찐 머리를 한 직원이 손님을 맞고 있었는데, 초록색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은 걸 보니 상궁 복장이 모티프인 듯했다.
“어쨌건 처음 방문이시면 들어가자마자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 경복궁 역사관을 먼저 방문하시는 걸 추천드릴게요. 경복궁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넵. 친절한 안내, 감사합니다.”
직원이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것이 신경 쓰였다.
기분 탓인가, 주변이 조금 웅성거렸던 것 같기도 한데.
어쨌건 나는 직원의 추천대로 바로 근정전이 보일 경복궁 내부로 향하는 대신, 광화문 2층에 위치한 역사관을 방문하기로 했다. 모든 문화재는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적당한 뉴비용 선행학습은 탐방에 나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경복궁 역사관에 처음 발을 디딘 나를 반겨준 사람은 낯익은 인물이었다.
“형님…….”
어째서 임금 앞에서는 그리도 입에 붙지 않던 형님이란 말이 여기서는 잘도 나오는 것인지.
소현세자, 아니 이제는 성조대왕이라 불러야 하나.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그의 어진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거대한 궁궐을 재건할 수 있도록 국력을 키운 왕이 역사관 입구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문화재를 방문한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에게 대략적인 역사를 알려주기 위한 공간이니까.
“호총…… 호포대 복장…… 훈민정음 활자…… 이건 네덜란드 수출용 샘플로 만든 이화(李花)문 도자기고…… 아니, 여기도 마패가 있네? 다른 사람 건가?”
아마도 임금 이후의 왕과 황제들에 관련된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는 공간이라 그런지, 전시관에 보관된 유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유물 하나하나는 임금의 치세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상징하는 것들이라, 관람에는 그리 문제가 없는 듯했다.
천천히 그리운 과거를 생각하며 역사관을 돌았다. 지금만큼은 관복을 입고 사모를 쓴 조선의 신하 안한수로 다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렇게 성조대왕의 전시 공간을 한 바퀴 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임금의 치세 마지막을 상징하는 유물 자리, 그곳에는 오래된 목판과 지도가 보관되어 있었다.
“하긴, 조선이 한반도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던가.”
지도에는 두만강 이북과 연해주 일부가 한반도와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내가 강희제와의 담판으로 얻어냈고, 그 이후에도 남명과 청 사이를 오가며 외교관으로서 고생한 결실이 지도 안에 담겨 있었다.
아마 이 지도가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아까 흥인지문에서 관광객이 입에 담았던 요심도, 연해도라는 지명이 어디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