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4)
만주.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울림인가.
사실 만주는 내가 있던 17세기에는 점령해서 좋을 것이 그다지 없는 땅이었다. 소빙기의 낮은 기온과 전근대 기술로 개발이 어려운 토지 상태가 겹쳐, 청에 완전히 복속되지 않은 일부 유목민족만 떠돌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강희제가 흔쾌히 거주권과 출입권을 넘겨줬지. 명목은 대기근 당시 굶는 함경도 백성들이 두만강 건너 땅에서 감자라도 재배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한 거였지만…….”
만주족들은 압록강 너머 만주 땅을 자신들의 성역으로 여겼지만, 두만강 너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성지란 누르하치의 근거지 흥경, 그리고 만주족이 본격적으로 흥성하기 시작한 심양, 마지막으로 만주족의 시조가 태어났다 전해지는 영산(靈山) 백두산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가능한 일이긴 했다. 압록강 이북은 이미 명나라 시절부터 국경이 확정되기도 했고, 아무리 최정예군을 빌리는 대가라 해도 쓸 만한 땅을 덥석 넘길 나라는 없을 테니까.
아직 경계가 확실하지 않던 두만강 일대는 그렇게 새로운 국경이 정해졌다. 지도에 적힌 연도를 보니 내가 죽고 수십 년 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맺어진 조약으로 두만강 이북의 삼강평야 일대와 남부 연해주가 조선의 영토로 인정받은 듯했다.
“백두산에 정계비가 세워진 건 똑같네. 재밌는 건 정계비의 토문강이 원 역사처럼 두만강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진짜로 송화강 지류를 가리키는 게 되어버리다니, 참.”
이것으로 내가 모르는 역사를 처음 접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전시관부터는 정말로 내가 모르는 역사들이 가득할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전시관 한쪽 벽면에서 나를 인자하게 내려다보는 임금을 뒤로 하고, 나는 옆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경복궁에도 방문객이 몰리기 시작했는지, 아래층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슬슬 들리고 있었다. 딱 관람하기 좋은 타이밍에 온 것 같았다.
“광종…….”
내가 모신 임금은 성조(聖祖), 그의 뒤를 이은 세자는 광종(光宗).
임금이 사망한 후 묘호를 정할 때는 그가 생전에 이룩한 업적을 고려해 짓는다. 성스러울 성(聖)은 클 태(太), 높을 고(高), 세상 세(世)와 비기는 최고의 업적을 세운 군주에게 붙이는 묘호다. 나라를 다시 일으킨 군주에게 붙이는 조(祖)는 말할 것도 없다.
그만큼 훌륭한 임금에게만 붙일 수 있는 묘호였지만, 성조라는 묘호가 정해질 때는 조정에서 아무런 반대 의견도 나오지 않았다. 호란 이후 무너졌던 조선을 일으켜 세우고, 치세 말년에 있던 경신대기근까지 훌륭히 이겨낸 왕에게 이견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원래 자신의 묘호를 빼앗긴 것을 강희제는 알려나. 중국 대륙이 반으로 갈라졌음에도 여전히 성군의 자질을 잃지 않았던 그의 묘호가 궁금해졌지만, 그것은 나중에 알아봐도 될 일이었다.
“선대의 업적을 훌륭히 이으신 모양이군요.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내가 모르는 노년의 제자가 그림 안에 있었다. 접한 적 없어 낯선 광종이란 묘호는 그의 업적을 한 줄로 요약해 내게 알려주었다.
그래도 빛날 광(光)을 묘호로 받은 것을 보니, 아버지의 업적을 계승해 나라의 내실을 잘 다진 모양이었다.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 예고했던 을병대기근도 최소한의 외부 지원만으로 훌륭히 막아냈다.
아버지와 함께 볼모로 끌려간 청에서 자라, 왕족 최초로 네덜란드에도 다녀오고, 경신대기근에 온 힘을 쏟은 아버지에게 대리청정을 명받고…… 세자 시절부터 고생만 한 왕이었다.
그런 이가 나 없이도 훌륭히 기대 이상의 업적을 세웠으니, 대견함에 나도 모르게 과거의 안한수로 돌아갈 수밖에.
“그리고…… 제가 말씀드렸던 것 또한 잊지 않으셨고요. 아버님께서 네덜란드에 다녀오고 싶어 하셨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넓은 곳을 보고 개화한 전하의 식견이 지금 이 나라의 주춧돌이 되었군요.”
초상화에서 대답이 날아올 리 없건만, 나는 내 제자에게 끊임없이 칭찬을 보냈다.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미래를 그가 믿고 실천해준 덕분에, 임금과 내가 기반을 닦아놓은 조선이 본격적으로 멸망의 미래에서 벗어나 부흥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그 결과물이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전시관 한가운데 놓여있는 것은 웬 기계였다.
기억을 더듬어보건대, 18세기 초반에 나온 뉴커먼 식 증기기관인 듯했다. 그 옆에는 광종의 치세 말년에 영국에서 들여온 물건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저 스스로도 수십 년 후의 일을 적으며 과연 이것을 전하께서 믿으실까 생각했었는데…….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입니다. 정말 그대로 따라 주셨군요. 감사하게도.”
두 번의 대기근을 겪으면서, 조선에는 유랑민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힘으로 대기근을 완전히 무력화할 수는 없었으니까. 아무리 어사를 파견해 부조리를 진압해도, 결국 먹고 살기 위해 땅을 팔고 유랑하는 백성들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한양과 벽란항 인근으로 몰려들었다. 임금노동으로 입에 풀칠을 할 수 있고, 해외에서 들여온 식량이 가장 쉽게 풀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신대기근 때 한 차례 농촌의 질서가 무너졌다. 아마 을병대기근 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발전하는 네덜란드를 직접 눈으로 보고 오신 전하께서도 같은 판단을 내리셔서 다행이었습니다만.”
다행인 것은 대기근을 맞았음에도 조선 조정이 쌓아온 재정이 튼튼했다는 것. 세자 시절부터 광종을 보좌한 석주와 만중의 주도로, 그때부터 남아돌기 시작한 노동력은 다른 산업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이미 내가 살아있을 때부터 감자, 고구마, 땅콩의 도입으로 식량 부담이 줄어들면서 인삼, 담배, 차, 목화 같은 특용작물 재배가 활성화된 지 오래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민들의 땅을 인수한 대지주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산업의 발달을 자극하게 되었다.
외부에서 유입된 학문이 지배층의 의식을 바꾼 결과일까. 이전부터 슬슬 활성화되던 광업 역시 변혁이 시작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개인에게 광산 개발 허가를 본격적으로 내준 것은 경신대기근 이후부터였는데, 무역량이 폭증하면서 귀금속의 수요도 늘어나 광업 또한 급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에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떡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라……. 네덜란드에서 선진 제도를 도입하느라 고생한 사형이 섭섭하겠네. 물론 이 시기부터 생산수단이 전근대의 모습을 벗어났다는 것이 크긴 한데…….”
광종은 내 조언을 기억하고 18세기 초반 영국에서 뉴커먼이 증기기관을 발명하자마자 그것을 도입해 광산에 고이는 물을 퍼내는 데 쓴 듯했다. 안내판에는 ‘전대 시절부터 공들여온 금속가공기술이 증기기관을 역설계하고 복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마지막 전시대에는 국보로 지정된 그림의 복제화가 걸려있었다. 겸재 정선이 여행길에 들른 어느 광산을 그린 풍경화였는데, 그림 한구석에는 광산 바깥에서 분해되어 수리중인 증기기관이 존재감을 뽐냈다.
“완전 이거 산업혁명 초기의 모습 그 자체잖아. 내가 일부러 유출한 미래지만, 정말로 이렇게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얼떨떨한데……,”
마지막으로 내 제자에게 안녕을 고하자, 그제서야 나는 조선의 신하 안한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옆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내 눈에 다음 임금의 어진이 들어왔다.
여기부터는 아예 모르는 얼굴이 어진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혈통이 섞여서 그런지 임금의 잘생긴 외모가 먼저 눈에 띄었다.
“혹시 그래서 묘호에 꽃부리 영(英) 자를 쓴 건가? 아니, 헨리에트 공녀의 유전자가 한 단계 건너뛰고 발현한 건 또 신기하네.”
그는 요절한 아버지를 대신해 세손 신분으로 즉위한 광종의 손자였다. 아무래도 광종이 70세를 넘어 장수하는 바람에 중간에 낀 아들은 빛을 보지 못한 것일까.
그의 묘호를 본 기억이 있었다. 방금 만주에 처음으로 조선의 영역이 칠해진 지도를 보았을 때였다. 아무래도 두만강 너머 영유권이 인정된 것은 이때였던 모양이었다.
“강희제가 말년이었던 때구나. 이때까지 우희가 살아있었다니……. 무언가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시기네.”
이번 전시관의 한가운데에는 웬 작은 비석이 서 있었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이게 백두산정계비의 축소 모형인 듯했다.
내가 섬겼던 임금의 증손자와 노년의 강희제 사이에 맺어진 조약으로, 연해도라 명명된 땅은 그렇게 조선의 영토가 되었다. 아마 나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시기는 이때가 마지막인 듯했다.
“여기서부터는 슬슬 기계들이 많이 등장하네. 홍제천에 놓은 수차 하나와 네덜란드 장인들로 시작했던 공업이 이렇게 발달할 줄이야, 하하.”
모양과 형태는 내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나는 어떤 용도로 만들어진 기계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광업이 발달하고 증기기관이 동력으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기계였다.
“오륜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생산된 면화를 기반으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섬유사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오륜도? 아, 대만이 아예 이때부터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구나.”
아마 대기근 때 발생한 유민들이 대거 새로운 땅으로 이주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유민들을 써서 군산 일대를 간척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인 듯했다. 그렇게 대만과 호남에 잔뜩 재배된 목화는, 새로운 산업의 재료로 이용되었다.
실을 뽑는 방적기와 옷감을 짜는 방직기. 앞에 놓인 두 기계는 조선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출발점 그 자체였다.
옆에 설치된 안내판에는 <왕정농서>에 실린 송나라 시절의 방적기와 영국인 존 케이의 나는 북(Flying shuttle)을 기반으로 발명된 기계라고 적혀 있었다. 이때부터 조선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듯했다.
“이 시점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으면 황제국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지. 조선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강희제 다음 황제까지는 친조선 행보를 보였을 테니 외세의 위협도 없었을 테고.”
우희를 청나라로 시집보낸 건 그러려는 목적이 절대 아니었는데……. 본인이 좋아 시집간 일이 이렇게 눈덩이가 굴렀을 줄은 딸 스스로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야 조선과 그닥 어울리지 않았던 제국과 열강이라는 단어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슬쩍 넘겨다본 옆방에는 달걀 모양의 제철로가 전시되고 있었는데, 도가니 제법으로 소량 생산하던 강철이 양산되면서 본격적인 산업혁명이 진행된 것은 아마도 다음 왕의 치세부터인 듯했다.
“좋아. 그럼 마저 남은 역사를 보러 가볼까.”
조금 지끈거리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머리가 견딜 만했다. 아직까지는 내 상상력의 범주 안에서 역사가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막 옮겨놓으려던 찰나였다. 옆 전시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음은 점점 내가 있는 전시관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와! 신기한 기계다!”
“조용, 조용히 하라니까, 얘!”
이런 X…….
왜 역사가 바뀌었는데 어린놈들의 개념이 없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까.
정신과 신체는 다시 20대로 돌아왔지만, 살아온 세월이 있다 보니 나도 꼰대가 된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금방 타이르겠습니다.”
“아…….”
꼬마의 뒤를 따르는 엄마가 안타까운 모습으로 내게 거듭 사과를 전하는 바람에 화낼 타이밍도 놓쳤다. 별로 화는 안 났지만 다른 관람객도 있을 테니 주의 정도는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야, 인마!”
꼬마의 엄마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다음, 짐짓 화난 척하며 겁을 주었다.
“뭐, 뭐야? 헉!”
이쪽을 돌아본 꼬마의 안색이 변했다. 덩치 큰 형들에게 꼼짝 못하는 것은 시대불문 말썽꾸러기들의 공통점이었다.
“공공장소에서는 예절을 지켜야지! 그리고 어머니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뭐하는 짓이야!”
“……!”
헌데, 꼬마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녀석은 푹 눌러쓴 커다란 모자를 들어 올려 내 쪽을 보더니, 갑자기 입을 딱 다물고는 나를 향해 쪼르르 달려오기 시작했다.
뭐지? 그 와중에 꼬마의 모자에 박혀있는 커다란 S자가 보였다.
눈에 익은 폰트였다.
“어, 형…… 설마…….”
“설마 뭐? 얼른 어머니한테 잘못했다고 말씀드려!”
“형, 혹시 야구 안 하세요? 성근대 투수 안한수 아니에요?”
꼬마의 입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제서야 녀석의 모자가 대학야구팀 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 그게…….”
“맞네! 형, 여긴 웬일이에요? 오늘은 경기 없어요?”
꼬마는 마치 속사포처럼 말을 쏘아댔다. 녀석을 바라보느라 무릎을 굽히고 있던 내가 얼버무리던 사이, 녀석은 제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내 머리에 씌워보고는 확신을 가진 듯했다.
“맞네! 모자 벗고 있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모자 씌워보니 중계에서 보던 그대로잖아요!”
“내 이름을 어떻게……?”
“어떻게 몰라요! 몇 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대학야구 최고의 투수! 올해 대학리그도 우승했고, 저번에 대군주배 대회에서는 프로팀한테도 완봉승을 거뒀잖아요!”
엥? 내가? 그리고 대군주배는 또 뭐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작 대학야구 선수에 이렇게 관심을 가진다고?
“어? 안한수?”
“진짠가 봐! 야, 여기 와봐! 여기 말야……!”
옆 전시관에서 새로 넘어온 꼬마 역시 내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또 한 녀석은 다른 곳에 있던 친구들을 불러내기까지 했다. 성조의 전시관을 떠날 때, 아래층에서 들려왔던 소음은 이 녀석들이 원인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나둘씩 튀어나온 야구광 꼬마들은, 나를 둘러싸고는 한참을 괴롭혀댔다.
결국 나는 그날 경복궁 방문을 거기서 접을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어디서 뵈었던 얼굴 같아서요. 묘하게 익숙하신데…….’
내 얼굴을 본 직원이 왜 고개를 갸웃거렸는지,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그나마 모자를 벗으면 인상이 꽤 달라져서 꼬마들에게는 지금 들킨 모양이었지만, 끝까지 녀석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쪽 세상에선 대학 스포츠가 꽤나 활성화되어 있었다. 마치 원 역사의 미국 대학 농구나 대학 풋볼(NCAA)이 프로 이상의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아마도 김만중 덕분에 대학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대학 스포츠의 역사가 프로 스포츠보다 훨씬 길어진 것이 원인인 듯했다. 그리고 성조대왕 시절부터 내려온 캐치볼 덕분에 야구가 그중에서도 인기가 탑이라나.
어쩐지, 어제 확인해본 계좌에 수상할 정도로 잔액이 빵빵하더라니.
역사가 변해 내가 금수저가 된 게 아니라, 따로 수입이 생길 곳이 있었던 거였다. 아마 기숙사를 잘 뒤져보면 의류 스폰서와 맺은 계약서가 튀어나올지도.
***
그렇게 꼬마들에게 한참을 시달리고 경복궁에서 물러나온 나는 갈 곳을 찾지 못했다. 길가의 상점에서 산 마스크로 겨우 얼굴을 가린 건 좋은데, 그 후로 딱히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젠장……. 나는 그냥 조용히 바뀐 역사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럴 거면 그냥 기숙사로 돌아가 온라인으로 나머지 역사를 확인하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재미없는 일이 아닌가.
그때, 웬 높은 건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동대문에서 가이드에게 들은 바로는 이 근방은 궁궐을 넘볼 수 있는 건물의 건축이 금지되었다고 들었는데?
“아…….”
하지만 나도 모르게 다가간 건물의 입구에서, 나는 감히 황궁의 담장 너머를 엿볼 수 있는 건물이 세워질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식은 황제의 권위보다 높이 쌓여야 마땅하다.」
이곳은 흥원(興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황제의 치세에 건설된 황립 도서관이었다.
저런 명언을 수도 한가운데에 새긴 것을 보니, 조선왕조의 명군은 방금 내가 확인한 세 사람에서 끝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여기라면 남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나머지 역사를 훑어볼 수 있을 듯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도서관 안으로 옮겨놓는 사이, 나는 도서관 부지가 원래 군관도감이 있었던 자리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