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97화 (297/298)

에필로그 (5)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아기는 태어난 지 반 년쯤 되면 지혜열을 앓는다던가. 아무래도 어제 갑자기 들어온 지식들이 뇌에 과부하를 일으킨 듯했다.

“으……. 몸까지 으슬으슬하네. 어제 강바람을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런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던 황립 도서관. 그곳에서 나는 달라진 역사를 그대로 읽고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확인하러 공공자전거를 빌려 타고 한강까지 다녀왔었는데…….

“하, 진짜 큰일이다, 이거. 이런 걸 하나씩 접할 때마다 이렇게 고생해야 되는 건가?”

샤워기 아래에서 뜨거운 물을 잔뜩 맞고 나니, 머리를 울리는 고통은 다소 가라앉았다. 이 정도면 다행히도 점심에 있는 약속은 펑크를 내지 않아도 될 듯했다.

“조선시대처럼 한 방에 지식을 넣어주면 뭐가 덧나서 말이야. 하긴, 그랬으면 몇 시간 동안은 아예 바닥을 뒹굴었어야 했겠구나.”

어차피 이렇게 알지 못할 누군가에게 불만을 토로해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몸을 적당히 수건으로 닦고, 나는 책상에 설치된 모니터를 켜고 스마트폰을 거치대에 결합했다.

“이쪽의 나는 확실히 야구에 미친놈이었나 보다. 어째 그렇고 그런 동영상들은 하나도 없고 죄다 투구분석, 타자분석 영상뿐이냐.”

하긴, 이 정도로 했으니 대학야구를 지배할 수 있었겠다만.

모니터에 떠오른 익숙한 바탕화면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날짜별로 투구폼을 체크하는 영상과, 다음 경기 상대를 분석하는 자료만이 폴더 하나에 그득 들어차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보려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주말 대학리그는 얼마 전 끝이 났고, 당분간 연습경기를 제외하면 실전은 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위키에도 전통적인 이름을 쓰는구나. 어제 도서관에서 본 그 이름이네.”

짙은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던 원래 세상의 위키와는 달리, 이쪽 세상의 위키는 조선 임금의 어기(御旗) 색깔인 짙은 자주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모교를 상징하는 색도 같은 색이었는데, 아마 황실과의 인연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리라.

위키의 이름부터가 흥원(興元)이라는 황제의 연호에서 따왔으니 당연한 건가. 어제 방문했던 도서관을 지은 그 황제의 연호 말이다.

“좋아. 그럼…… 복습을 시작해 보실까.”

그때나 지금이나 신뢰도는 높지 않지만, 대략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위키 만한 것이 없었다.

어제 도서관에서 확인한 후대의 역사를 되새기기 딱 좋을 것이다.

“어디 보자……. 분류, 19세기 조선의 역사…… 이거군. 대한제국─청 영토 분쟁.”

어제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서울에 관광을 온 노인들에게서 들은 연해도라는 지명은 강희제 말년에 국경을 새로 정하며 편입된 지역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나머지 하나, 요심도라는 지명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던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도(道) 작명법을 떠올려보면 대강 유추는 되긴 했다. 하지만 그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1800년대 조선과 청의 마찰로부터 시작해 대한제국이 설립된 1860년 이후 대한제국과 중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만주국 사이에 벌어진 영토 분쟁…….”

지금은 한번 접한 내용이라 괜찮은 거지, 어제 저 내용을 책에서 확인했을 때는 말 그대로 망치로 머리를 맞은 줄만 알았다.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원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역시, 외교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말은 변하지 않는 진리구나. 두 국가가 완전히 평등한 위치에서 윈─윈하는 관계일 수는 없으니까.”

내가 모셨던 임금의 치세부터 끈끈했던 조─청 관계는 강희제에 이르러 최고조를 찍었다.

강희제가 오보이를 베고 막 친정을 시작해 불안정했던 시절, 오삼계는 남명의 병력을 이끌고 청에 점령당했던 사천을 탈환한 후 한중 일대까지 진출한다. 강희제는 급히 팔기를 규합해 남명군을 사천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나, 전쟁을 끝내지는 못했다.

“그 사이에서 내가 고생했지. 남경에서는 한간(漢奸, 한족의 배신자) 소리를 듣고, 북경에서는 팔기를 박살 냈으면 구원군 정도는 보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원성을 듣고.”

이런 일로 쓸 데 없이 양국의 국력이 소진되면 식량 가격만 올라가는 일이기에, 경신대기근을 앞둔 조선은 반드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양국 조정에 쌓아온 인맥을 총동원하고, 마침 경신대기근 직전 중국 대륙에도 사소한 기상이변이 몰아닥치면서, 나는 겨우 양국 사이를 중재해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어느 붉은 머리처럼 ‘이 전쟁을 끝내러 왔다’는 대사를 멋지게 내뱉고 두 나라 사이를 중재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달랐던 것이다.

외교란 진흙탕 속을 맨몸으로 구르는 일과 같다던가. 아마 이때의 일을 요안이 소설로 썼으면 독자들은 가득한 고구마로 목이 막혔으리라.

“그래도 이때 일로 17세기 내내 국제관계가 안정될 수 있어서 고생한 보람은 있었지만……. 그런 일은 정말 다시 겪고 싶지 않다. 정말로.”

나도 모르게 진저리가 쳐졌다. 내가 한 고생을 후손 놈들은 알까 몰라.

종전 이후 남명은 주전파의 거두였던 오삼계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주화파인 토호들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화북을 탈환하는 것을 포기했다. 뇌물만 먹이면 일사천리로 일이 해결되는 부패한 세력이 남경 조정을 장악해서 조선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청은 청대로 북방을 위협하는 러시아에 맞서느라, 그 이후에는 북서쪽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준가르를 상대하느라 더 이상 남명을 공격할 여력이 없었다. 국경을 그을 때 손해까지 봐 가며 조선군을 빌려야 했으니 오죽했을까.

“하지만 그래도…… 중국은 쪼개야 제 맛이지. 그게 지금까지 고착화되리라고는 나도 예상을 못 했지만 말이야.”

위키에서 관련 링크를 몇 번이나 넘어 다닌 걸까. 지금 화면에는 반으로 갈라진 대륙의 지도가 떠 있었다.

이때 고생한 덕분에 중국 대륙은 다시는 하나로 합쳐지지 못했다. 훗날 북방은 러시아에서 흘러들어온 공산 세력이 혁명을 일으키면서 적화되었고, 남쪽은 민란이 일어나 왕정을 폐하고 공화국을 세운 것이다.

이념은 같은 민족도 갈라지게 만든다는 것은 원 역사에서도 이미 잘 알 수 있는 교훈이었다.

대륙의 남북은 언어부터 다르니 이질감이 더 심했을 테지만 말이다.

“중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중화민국이라……. 원 역사의 마오쩌뚱이 보면 머리를 박고 울부짖겠네, 하하.”

조선이 만주를 삼킨 것도 이런 변화와 관련이 깊었다. 강희제와 우희 사이에서 나온 후손이 청나라 황위를 이었고, 그렇게 강희제의 손자까지 황위가 계승되었을 때였다.

“백 년이 넘게 조선이 무역으로 이득을 보고 있었으니, 청나라 안에서 고깝게 여기는 세력이 생길 수밖에 없었겠지. 가뜩이나 황제의 몸에는 조선인의 피까지 흐르고 있으니…….”

길산이 살아있을 때도 비슷한 이유로 만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던 터였다. 그렇게 또 한 차례 거세게 일어난 방계 황족의 반란은, 이번에는 자금성을 피로 물들이는데 성공했다.

“……황제가 살해당하고 자금성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태자는 몸을 피해 조선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했다……. 새 황제는 태자를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조선 측에서는 단호히 거부, 결국 양국 사이에서 전쟁까지 발발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근대에 접어들기 시작한 조선의 군사력은 청나라 반란군의 예상 이상이었다. 머릿수는 청 팔기가 압도적으로 앞섰지만, 조선군 보병은 상당수가 후미장전식 소총으로 무장한 데다 포병의 경우는 최신형 조란환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산탄을 그대로, 혹은 천에 싸서 장전했던 이전과는 달리 금속 캔으로 포장해 포탄의 형태로 가공한 신무기는 기병을 상대로 가공할 만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원 역사에서는 캐니스터 탄이라 부른 물건이다.

“진천뢰 같은 원시적 작렬탄에도 팔기 기병들이 찢겨져 나갔는데, 저걸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지. 강희제가 플린트락 소총을 팔기에 도입하긴 했지만, 거의 일방적 학살이었겠는데.”

그렇게 대패를 당한 청은 조선에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주고, 황위를 인정받는 대가로 조선을 번국으로 거느리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조선의 만주 영토, 연해도를 위협할 수 있는 영고탑 일대에서 철수하고 그 땅을 조선에 넘겨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자주독립을 쟁취한 조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양 세력과 연합해 본격적으로 대륙을 뜯어먹기 시작한다. 이때 조선의 파트너가 된 것은 유럽에 위치한 오랜 동맹국이었다.

“그때 빌렘 놈한테 인삼을 먹인 게 이렇게 돌아오다니……. 자식이란 게 이렇게 쉽게 낳을 수 있는 거였나.”

빌어먹을 빌렘이 왜 이리도 부러운 것일까. 나는 위키를 읽으며 빌렘의 가족관계가 적힌 부분을 전부 확인하려 스크롤을 몇 번이고 내려야 했다. 자식의 수가 야구팀을 훌쩍 넘었으니, 공작부인 메리가 꽤나 고생했을 게 분명했다.

이때까지 조선과 네덜란드의 우호는 굳건했다. 봉림대군의 후손들은 현지에서 빌렘이 내려준 작위를 대대로 계승했으며, 조선 왕실에서 태어난 대군들은 유럽으로 건너가 상주외교관을 맡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는 후손이 없어 단절된 원 역사와 달리, 빌렘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이어갔다. 그렇게 17세기 후반 하나가 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꽤 오랜 기간 동안 한 몸을 유지한 듯했다.

나폴레옹 전쟁, 프로이센의 침공을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아 이겨냈기 때문일까. 네덜란드가 독립한 것은 세계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주의가 유행하던 시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마저도 독립한 네덜란드 공화국은 아직도 영연방의 일원으로써 국가원수로 잉글랜드 왕가를 섬기는 형태였다.

“하긴, 벨기에, 룩셈부르크에 알자스─로렌까지 꿀꺽했으니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극한의 이득인가. 그래도 왕가가 바뀌어도 혐성은 그대로였던 모양이네. 대륙에 아편을 푸는 역사는 달라지질 않다니. 거, 참.”

늘 그랬듯 영국이 ‘영국’한 역사를 보며,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그들에게 숟가락을 얹고 대륙을 함께 뜯어먹은 이 세상의 조선에게는 제국주의를 비난할 자격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아편전쟁에 끼어 한 몫을 단단히 챙긴 조선은 요동반도 끝의 뤼순을 조차받고 청과 불평등조약을 맺는 등, 본격적인 열강의 길을 걷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제국을 선포한 것은 물론이다.

“만주를 완전히 삼킨 것은 조금 뒷이야기군.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 아편전쟁으로 영토는 뜯지 않았는데, 공산 혁명으로 화북이 적화되면서 완충지로 만주에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다니.”

지금 화면에는 산해관 이남의 화북을 붉게 표시한 지도가 떠 있었다. 청나라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난 것이 러시아와 거의 동일한 시기인 것이 신기했다. 역사가 바뀌면서 중국에 공산주의 사상이 빠르게 전파되고 새로운 혁명가도 태어났던 것일까.

하지만 이 세상의 조선이 어디선가 본 듯한 행보를 취한 탓에, 나는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분만 같을 뿐, 학살 등의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인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조선에 망명했던 청나라 태자의 후손을 만주국왕으로 세우고 지원하다가,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독립 투표를 거쳤으나 만주국민들이 제국에 남는 것을 택했군. 하긴, 인구의 상당수가 조선인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인가.”

만주의 중심지, 요양과 심양에서 이름을 따온 요심도는 그렇게 탄생했다. 세계대전 도중 소련은 소비에트 중국과 연합해 만주로 남하를 시도했는데, 대한제국군이 그것을 막아낸 일의 영향이 큰 것 같기도 했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두통이 다시 심해지기 시작했다. 어제는 이쯤에서 보호국이 된 일본 파트로 넘어가려다 뇌의 용량에 한계가 오더니,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중간에 네덜란드 파트를 읽은 건가.

“후…….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어제처럼 한강으로 바람을 쐬러 가지도 못하는데…….”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눈을 감았다. 어제 본, 한강에 중형 화물선이 오가는 풍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원 역사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던 장면이었다.

“벽란항 입지에 한계가 있으니 아예 서해와 한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뚫어버릴 줄이야. 그게 대공황 때 시행한 대한제국식 뉴딜 정책이었던가?”

바뀐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반도가 분단되지 않은 탓일까, 서울 시가지는 남쪽으로 발달하는 대신 바다가 가까운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택했던 것이다.

한강변을 따라 북서쪽 방향으로 마천루가 늘어서 있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내가 살던 17세기부터 개발이 시작된 서대문과 마포 일대는 이미 구도심이 되어버렸고, 원 역사의 강남 포지션은 운하와 마주한 고양시 일대가 차지한 듯했다.

“강남에는 오히려 베드타운용 신도시가 들어섰다니……. 원 역사의 사람들이 보면 놀랄 지경이겠군. 게다가 서울은 뭐 이리 넓어진 건지.”

아마 해양 제국으로 발달한 역사의 영향일 것이다. 항구의 입지가 강조되면서 서울은 파주, 고양 방향뿐만 아니라 인천 방향으로도 성장한 모양이었다.

그 결과 지금의 서울은 제국에 걸맞은 거대한 광역도시로 성장했다. 북쪽과 남쪽으로는 그리 넓어지지 않았지만, 서쪽으로는 인천까지, 북서쪽으로는 파주까지 확장해 한국사에 유례가 없는 대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히려 서울이 이렇게 커져버린 탓에 나아진 것도 있었다. 한양도성과 서대문 일대에는 황궁과 제국의회, 그리고 정부가 남아 행정수도의 역할을 하고, 고양 일대의 신도심과 인천항 부근이 경제수도의 역할을 나누어 맡게 되었으니까.

“하, 하하……. 역사도, 현실도 이렇게나 많이 바뀌었는데, 나, 이 세상에 적응할 수 있으려나.”

아까 머리를 싸잡았을 때 무언가를 잘못 클릭한 탓인지, 지금 화면에는 대한제국 문서가 떠 있었다. 내가 아는 것과는 다른, 오얏꽃 문양에 태극이 박혀있는 국장을 보니 자신감이 더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대한제국(大韓帝國), 약칭 대한(大韓) 또는 한국(韓國)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만주, 대만 섬과 인근 군도에 걸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국가원수는 대군주, 행정수반은 의정부라 불리는 제국의회에서 선출된 영의정대신이 맡는다…….”

입에서 허탈한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조선시대는 그래도 아는 곳이었고, 성 영감이 나를 이끌어주기라도 했지만 지금도 과연 그때처럼 할 수 있을까.

거대한 변화 앞에 개인은 너무나 무력했다.

그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움직인 내 손가락은, 어떤 이름 하나를 검색창에 입력하고 말았다.

내가 잘 해냈던 과거를 다시 되짚어보면, 그리고 그것을 보고 후대가 내린 평가를 보면 조금이나마 자신감이 회복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참아왔던 봉인을 뜯기로 결정한 것이다.

따르르르릉.

멋대가리 없게 기본음으로 설정된 전화벨이 길게 울렸다. 어느새 모니터에는 상대의 전화번호와 이름이 가득 떠 있었다.

[선배! 어디세요? 저 이제 막 성대역 도착했는데!]

아차,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

“저, 저기…… 그게…… 이제 나가요!”

[뭐야, 첫 밥약부터 늦으시는 거예요?]

“안 늦어요! 지금부터 뛰어나가면……!”

[괜찮아요. 맛있는 거 사 주시면 봐 드릴게요!]

통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문서는 이따 약속을 다녀와서 마저 읽어야 할 모양이다.

“어, 어라?”

이상했다. 그녀의 쾌활한 목소리를 들어서일까. 아니면 행동해야 할 목표가 생겨서일까. 방금까지 몸에 가득 차 있던 불안감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아……. 그런 건가. 역시 사람에게는 짧든 길든 목표가 있어야 한다더니…….”

언제 이 세상에 완전히 적응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는 이제 알 것 같았다.

일단, 오늘은 그녀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 그리고 다른 목표는…… 음……. 좋아. 조선에서 신하의 정점인 영의정에 올라 봤듯이, 저번 생에서 부상 탓에 포기했던 야구, 이번 생에는 정점에 올라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오케이. 별 것도 아닌 걸로 고민했잖아?”

어느새 머리는 맑아져 있었다. 빠른 동작으로 적당한 옷을 몸에 걸친 후, 나는 그대로 방 밖으로 힘찬 발걸음을 옮겼다.

스마트폰을 모니터에 꽂아둔 채 놓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하철 역 출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를 마주하고 난 후였다. 많이 기다렸냐고 물은 내 질문에 그녀는 기다리는 것도 데이트의 일부라고 답했고,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그날 밥 약속을 시작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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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2─17 00:00:00

안한수

분류 : 조선/인물∥1620년 출생∥1687년 사망∥영의정∥조선의 유학자∥청나라의 작위소지자∥서인∥죽산 안씨

조선 영의정

광해군~영종

「펼치기·접기」

성명 : 안한수(安翰秀)

자(字) : 전해지지 않음

호(號) : 성근(性根), 호어사(虎御使), 교하노인(交河老人)

본관 : 죽산 안씨

출생 : 1620년 조선 전라도 진안군

사망 : 1687년 조선 경기도 교하현 오두산

시호 : 문충(文忠)

1. 개요

백성을 살피는 것이 사대부의 첫째가는 임무다.

─감자와 고구마 도입 건으로 송시열과 논쟁을 벌였을 때의 발언

그가 조정에서 세운 공은 소하에 비길 만하고, 전장에서 세운 공은 한신에 비길 만하다.

─안한수의 졸기에 적힌 사관의 논평

조선 후기의 명재상, 유학자. 속칭 ‘성조대왕의 제갈량.’

인조 말부터 광종 초반까지 활동한 고위 관리로서 병자호란의 전화(戰火)에 휩쓸린 조선을 다시 일으키고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했다. 신하임에도 불구하고 성조대왕과 함께 조선의 중시조라고 불리는 인물로, 때문에 수많은 연구가 진행된 인물이기도 하다.

굵직한 업적만 헤아려도 한손에 꼽기 어렵다. 홍문관 교리로 임명된 직후 새로운 작물을 도입하고 김육을 도와 대동법을 추진한 것을 시작으로, 군대 개혁 및 병기 개발, 조선의 개항, 무역 및 상업 육성, 화폐 보급, 함대 양성 및 사쓰마 정벌, 조선인 최초의 유럽 방문, 토지개혁 및 수리시설 보급, 외교관으로 활약, 대기근 극복 등 이후 조선이 발전할 수 있었던 모든 기반은 이 사람 때 마련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도 전국 곳곳에서 전해지는 어사 설화의 대부분은 이 사람으로부터 기원했다. 그를 제외하면 가장 친한 벗이었던 이 사람이나, 후대의 인물인 이 사람 정도.

강희제의 추존황후이자 연녕제의 어머니인 효공인황후 덕비 안 씨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2. 생애 「접힘」

3. 평가

그는 세 임금에 걸쳐 일하며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임금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는데 고금을 통틀어 안한수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그가 세상을 뜬 일을 생각하면 내 팔 하나가 없어진 듯하다.

─승정원일기에 실린 광종의 발언

안한수는 황희나 류성룡, 이원익, 그리고 그의 장인 김육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명재상으로 손꼽힌다. 그중에서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그를 가장 처음으로 꼽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업적이야 말할 것도 없고, 숱한 기록과 그의 일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것을 생각하면 백성들 사이에서도 그만큼 사랑받은 재상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한당의 영수 자리에서 자신이 옳다 생각하는 정책에는 강한 추진력을 보였음에도, 반대파와 등지지 않도록 능수능란한 처세술을 부린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평생 그의 정적으로 활동했던 산당의 영수 송시열도 사적으로는 안한수와 깊은 친분을 유지했으며, 그가 사망했을 때는 비문까지 지어 올리며 정적이자 친구의 죽음을 애도했다.

문(文)은 첫째 가는 사대부에게 붙이는 자, 충(忠)은 으뜸가는 무장에게 붙이는 자, 둘을 합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당신뿐이라오.

─송시열이 지은 안한수의 비문 中

또한 안한수는 이렇게 유능한 관료의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무장으로서 출중한 업적까지 남긴, 그야말로 문무겸비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인재기도 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베일에 싸여 있는 그의 청나라 인질 생활 도중, 청태종 홍타이지의 책사로 활동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생애 중반까지는 고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 일선에 빠짐없이 참여해 백전백승의 전과를 올리기까지 했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육전과 해전을 가리지 않고 임했다는 점인데, 해전의 경우는 미힐 더 라위터르나 이완 같은 명장들의 힘을 빌린 편이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투창술과 승마술 등 개인의 무예 또한 뛰어났다고 한다.

이러니 당대의 임금들이 안한수를 지극히 신뢰한 것은 당연했고, 정적들에게도 신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성조와 함께 청에서 구출해 데려온 백성들이 정착한 교하, 암행어사로 나갔던 남원과 황주, 강원도 일대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경신대기근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숱한 고을들에도 작은 규모의 비석들이 세워졌는데,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가 많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온 백성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은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가족

아내 두 명을 두었는데, 정실인 청풍 김씨와의 로맨스는 아직까지도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이야기기도 하다. 재밌는 점은 그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이 후실이자 제자인 박연의 딸, 원산 박씨라는 점인데, 이 흥미로운 삼각관계는 소설과 연극, 드라마, 영화로 숱하게 재창작되기도 했다.

최근 성근대 이창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심양 일대에서 안한수와 홍타이지의 둘째 딸, 고륜온장공주 아이신기오로 마카타를 대상으로 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강희제의 회고록에도 두 사람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 여겨지는데, 자세한 내용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안한수는 새파랗게 어린 시절 감히 황제의 딸을 거부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인데, 이 스토리가 매력적이었는지 최근 유명 영화사가 <황녀와 선비>라는 임시 제목으로 영화 제작에 들어간 상태다.

다만 자식은 드물어, 강희제에게 시집간 딸을 제외하고는 후사가 없었다. 양자로 거둔 안길산이 그의 뒤를 이었는데, 보통 친척 중 한 사람을 입양하던 당시 풍속을 생각하면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물론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양자 안길산은 도르곤의 딸인 아이신기오로 씨와 혼인한 후 17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성장한다.

5. 저서 「접힘」

6. 그를 다룬 창작물

안한수의 행적은 그가 살아있던 당시부터 꾸준히 창작물로 만들어졌다. 먼저 여류작가이자 부인인 박요안이 지은 <안선비전>을 시작으로, 인쇄 기술, 제지 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17세기 중반부터 발달한 고전소설 등에서 숱하게 다뤄졌다.

그의 행적이 다뤄진 것은 고전소설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가 암행어사로 다녀온 지방에는 유독 어사신을 모시는 무당들이 많은데, 이들에게서 호랑이 탈을 뒤집어쓴 어사 설화, 호랑이가 재주를 넘어 사람으로 변신한 어사 설화, 산군 호랑이가 멧돼지 어사를 보내 탐관오리를 꾸짖는 설화까지 다양한 변형 설화들이 채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가지각색의 이야기가 전해진 덕분에, 윗 문단에서 언급했듯 안한수의 이야기는 현대에서도 동화, 소설, 영화, 만화 등 여러 장르에 걸쳐 꾸준히 재창작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안한수/창작물 문서 참고.

7. 성근학파와 성근학당

그가 가르친 제자들이 김육의 도움을 받아 연 학당인 성근학당은 성균관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거듭난다. 이곳에서 공부한 유생들이 모여 유럽의 신학문을 공부하는 것을 하나의 덕목으로 여기는 성근학파를 형성하는데, 그중에서 조정으로 진출한 이들이 조선 근대화의 주춧돌이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자세한 것은 성근학파 또는 성근학당의 후신인 성근대학교 문서 참고.

8. 학계에서의 논란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나, 재야사학계나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서 안한수의 행적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특히 그의 행적이 불분명한 생애 초기와 청나라 인질 시절이 논란이 되곤 하는데, 최근에는 성조대왕이 선왕에게 왕위를 물려받을 때 안한수가 깊이 개입했다는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자세한 것은 안한수/논란 문서로.

9. 관련 문서

대동법

조선통보

방전법

경신대기근

호포대(총통위)

벽란선

충무포

성조

숭덕제

강희제

박요안 ─ 위 문서에 언급된 원산 박씨가 이 사람이다. 네덜란드에서도 유명한 작가로,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성이성 ─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모티프가 된 사람. 안한수의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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