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주공략
난 백제를 탈주하는 것 외의 궁극적인 목표가 없다.
판을 일단 벌였으니, 이 나라 백제가 무슨 짓을 해서 망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지. 이대로 나주에서 전투하는 척하면서 끝장나면 된다.
“그렇다면 짐이 직접 대야성에 갈 것인데, 신검이 너는 어찌하겠느냐?”
“소자는 금강이와 함께 나주로 가겠습니다.”
대뜸 신검이 형제애를 과시했다.
아니, 이 자식은 머리가 없나.
나주 공방전과 대야성 전투.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나? 대야성은 점령하는 즉시 서라벌까지의 길이 탄탄대로다.
그런데 나주는?
백제 전체를 볼 때, 나주 쪽은 사실 시골이다.
아, 물론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쪽 호족들은 백제 이전 마한 시절부터 강력한 세력을 일궈온 자들이다.
그렇지만 고작 호족이다.
고려군이 직접 대규모 군대를 주둔하지 않는 이상, 호족들은 어떻게 처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마침 나도 딱 잠적하기 좋은 때다.
-금강 왕자가 젊은 혈기에 나주를 점령하려다 호족들에 의해 참살당했다.
잠적만 타도 그런 소문이 완산주까지 퍼질 것이 분명하다.
“형님, 형님께서는 대야성으로 가셔야 합니다. 아버님이 친정을 하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주야 솔직히 그 주변 호족들만 잘 구슬리면 되는 문제라, 공을 세워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형님께서는 아버님 휘하에서 대야성에서 공을 세우셔야 하옵니다.”
“음. 네 생각이 그러하다면 알겠다. 폐하, 소자는 폐하의 선봉에 서서 대야성을 무너트리겠습니다.”
신검은 대야성으로 가고 나는 나주로 간다.
이것이 내 정치적 입지나 탈주를 위한 여러 경우의 수로 알맞춤이다.
견훤 밑에서 대야성이라는 살얼음판으로 가면 자연스럽게 탈주가 어려워지지만, 나주는 적당하다.
“폐하, 소자 금강은 나주로 가 간악한 호족들을 두들겨 백제의 품으로 돌리겠사옵니다.”
“쉽겠느냐?”
아니, 어렵지.
“자만이라 여겨질지 모릅니다만, 나주는 호족 떨거지들만 있지 않습니까. 대야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야성이 어떤 성입니까. 전 삼국시대 때부터 삼국이 격렬하게 부딪쳤던 지역이었으며, 오늘날에 이르러 신라의 땅이나 백제가 삼한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관문이 아니겠사옵니까.”
“음, 금강 왕자께서 참으로 좋은 묘안을 내셨사오나, 그리하면 나주에 보낼 군대가 없습니다.”
능환. 당신이 그럴 줄 알았지.
이 인간은 신검이 편이다.
“그러면 능환은 불가능하다 말하는 것인가?”
“예, 폐하. 나주와의 국경 지역 군대는 수비군이기 때문에 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보낼 군대가 없다는 뜻이로군.”
“정 하시고 싶으시다면, 나주 근접한 지역의 호족군을 이끄셔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고맙다. 아니, 오히려 엎드려서 절하고 싶을 정도다.
이쪽의 군세가 열세일수록 보는 눈이 적으니 내가 탈주하기 쉬워진다.
게다가 능환도 내가 그러기를 바라는 눈치다. 호족군을 데리고 나주로 가 털리든, 시간을 축내든, 이긴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금강아. 할 수 있겠느냐?”
“예, 폐하. 백제의 강역을 반드시 되찾겠나이다.”
“그럼 파진찬과 장군 상애가 금강이의 옆을 지켜야 할 것이다.”
“예, 폐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렇게 나는 파진찬 최승우, 장군 상애와 함께 나주로 향했다.
* * *
현재 나주엔 수많은 호족들이 존재했다.
당연히 고려의 수군도 조금이나마 있고. 원 역사에서 후백제는 929년이나 되어서 겨우 탈환하게 된다.
나주가 백제에서 이탈한 것은 단순히 왕건의 군사적 점령만이 아니라 견훤이 세금을 계속 올린 탓도 있으며, 견훤이 중심지를 완산주로 옮기면서 나주 호족들의 박탈감이 심해진 것이 주된 이유다.
“왕자님, 참으로 신이 나는 것 같습니다.”
“하하, 간만에 나들이가 아니겠습니까?”
“금강 왕자님. 결코 적들이 호족 나부랭이라 하여 가벼이 여기시면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삼국의 군력을 담당하는 태반이 호족들의 사병들임을 모르십니까?”
상애가 나를 무시하듯 입을 이죽거렸다.
무시할 테면 하라. 나에게는 방법이 있다.
“왜 모르겠습니까?”
“허면 방법이 있습니까?”
“아군에도 호족들의 병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 수백이면 충분합니다.”
수백 정도면 내 잠적을 위한 연출엔 충분하다.
“일단 항복하라고 사람을 보내보지.”
“듣지 않을 것입니다.”
“듣지 않는다면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래 이런 건 일단 항복부터 제의하고 그다음에 조지든 말든 하는 거다.
* * *
일단 나주의 호족들과 담판을 짓기 위해 모두를 불러 모았다.
의외로 놈들은 고려군을 믿는 건지 내 앞에서도 위풍당당했다.
“지금 우리보고 이것을 받아들이라고?”
“끽해야 병사 수백 데리고 온 주제에 우리가 겁이라도 먹을 줄 아셨나?”
호오, 그렇게 나온다는 거지?
“마한의 후손들 주제에 백제를 배신하고 고려에 들러붙다니. 창피하지들 않은가?”
내 말에 호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헛기침을 했다.
“창피라니. 먼저 우리를 건드린 것은 견훤이오!”
“그깟 세금 좀 올리고 완산주로 중심지를 옮겼다고 그러는 것인가?”
“어디 그것만인가? 우리를 너무 천대했어!”
이래서 옛날부터 기득권층은 모조리 두들겨 패야 한다.
“그래서, 왕건이는 잘 대해주던가?”
“!”
“지금이야 왕건이 제법 나주를 챙겨줄 테지만, 그 이유가 무엇일 것 같나? 나 주를 이용해서 우리 백제의 뒤를 칠 수 있기 때문이지. 이후 백제가 무너지고 나면? 친고려파라고는 해도 댁들은 결국 백제의 호족들이었어. 고려가 잘 대해줄까? 아니지. 아마 철저하게 잡을 거야. 내 아버님이야 본래 전쟁 탓에 세금을 올리고 완산주로 도읍을 정했다고는 해도, 같은 백제의 핏줄이니 너희들을 챙겨주겠지만 고려는 아니라고.”
내 말에 전 백제의 호족들은 꿀 먹은 벙어리들처럼 눈만 꿈벅거렸다.
머리라는 것이 없나? 돌아가지 않나?
상식적으로 개경에 수도를 두고 있는 고려가 나주의 강력한 호족들을 그냥 둘리가 없잖아?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어차피 아직까진 얼마나 많은 자들이 우리에게 항복할지 알지 못한다.
호족들에게 어느 정도 떡밥을 줬으니, 다음은 민심을 살피는 것이다.
사람들을 몰래 보내 호족들의 병사 중 제법 친목하기 좋은 날라리들을 불러 모아 술자리를 함께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니까요? 왕자님께서 명만 내리신다면 좋은 계집들로 물색하여 뫼시겠습니다.”
“큭큭, 좋아.”
어차피 이런 데에서 할 만한 거라곤 친목질밖에 없다.
휴대폰도 PC도 없으니, 잠적할 루트를 알아보려면 역시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이 제일이기도 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왕자님, 이곳에서 얼마나 머물 요량이십니까? 이미 폐하와 신검 왕자께서는 대야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합니다.”
파진찬이 자주 나를 감시한다는 거다.
그렇기야 하겠지. 이 새끼가 하라는 나주공략은 안 하고 여기서 놀고나 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이미 두 수 앞을 보고 있다.
대야성 쪽은 명분상 명백히 공을 세우기 좋은 지역이다. 만약 내가 나주에서 별 볼 일 없는 군사로 고려군을 먼저 정리하고 왕과 장자보다 주목받는다면, 나는 또다시 신검에게 찍힐 수 있다.
어차피 이 나주에서 잠적할 생각이지만, 세상일이란 모르는 거다. 만일 실패하면 일부러 나주점령을 늦춰서 내 주가를 떨어트려야 한다.
파진찬은 아마 내가 하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할 것이다.
선을 넘지 않는 수준에서 못난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하면 설령 탈주가 불가능해도 내 주가를 떨어트릴 수 있다.
“파진찬.”
“말씀하시옵소서.”
“지금 나주는 친고려파 호족들이 많소이다. 그건 알고 계시겠지요.”
어디를 봐도 친고려파다.
지금 우리가 들어와 있는 나주 땅은 당장에 전투가 없으나, 우리가 칼을 든다면 친고려파 나주들이 들고 일어날 거다.
이곳에 있는 고려군도 지금 즈음이면 사정을 알 테지. 그러니 저렇게 안절부 절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라고?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나를 따라온 파진찬 최승우나 상애가 어디서 급사해도 내 알 바는 아니지.
“그렇습니다. 모두가 고려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고려에 어떻게 하기 전에 신속히 공격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힘으로 억눌러봤자, 불만은 잠재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민심을 얻어야지요.”
힘으로 억누르면 당장에 고개를 숙이겠지만, 결코 충성하지는 않는다.
“설마.”
“예, 이 몸은 지금 나주의 민심을 조금이라도 얻어 아군을 늘릴 생각입니다.”
입 발린 말은 잘도 하였으나 결국에는 나 좋자고 하는 일이다.
그런데 파진찬이라는 작자가 이후로 이상하리만큼 인자한 표정으로 내가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는 게 아닌가.
덕분에 이 세계에서라도 오락거리라고는 근처 호족 사병들과 노는 것뿐인데 그조차도 못 하게 생겼다.
저 인간은 아버지인 견훤의 측근이다. 여기 일을 그대로 일러다 바칠 것이 뻔하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놀고먹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딱 중간을 지킬 생각이었다. 주가를 떨어트리긴 하되, 그래도 어느 정도 능력이 있는, 백제의 왕자다운 왕자. 딱 이 정도 입지만 지켜야지.
‘금강’의 체면을 어느 정도 세워주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