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5화 (5/154)

5. 마한 패왕 금강

* * *

파진찬의 감시가 사라진 날. 나는 병사들을 불러 일본으로 가는 루트도 알아봤다.

“혹시 자네들 일본으로 가는 배를 알고 있나?”

“일본으로 가시려면 신라 쪽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 근방에서 일본으로 갈 배를 구하려면 고려수군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요”

그럼 불가능하지.

심지어 고려는 지금 신라를 돕고 있으니, 신라로 넘어가서 일본으로 가는 것 역시 지금으로써는 좋은 선택이 될 수 없다.

“흐음. 그게 답인가? 신라라. 신라.”

확실히 고려수군에게 걸리면 오히려 발목을 잡히게 된다.

“가장 극적인 연출이 좋다.”

내가 비록 잠적탈 예정이라고 하여도 장렬하게 죽은 척 연기는 해줄 생각이다. 그러니까 이왕이면 전장에 서줄까.

화살이라도 맞는 척하면 나름 대단할 것이다. 전투 중에는 행방불명도 곧 잘일어나니, 내가 사라진다면 왕자니 찾기야 해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대충 팔아먹을 재물들도 준비해놨고, 호족 병사로 위장할 복장도 사전에 준비해뒀다.

“자, 그럼 준비할까.”

전투가 시작되면 곧바로 나는 몰래 호족사병으로 위장하고 튀는 거다. 그리고 그대로 회유한 호족사병 놈들에게 돈을 쥐어줘서 몰래 신라쪽으로 빠진다면?

숨어들기에 적당하다.

“왕자님. 어렵사리 호족들의 병사들 중 일부를 포섭하였사오나, 아직 우리 군이 나주성을 점령할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파진찬. 평생을 아버님을 보필하면서 전투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이상하군요. 전쟁은 머릿수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말에 파진찬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라. 뭐 그런 의미겠지?

“왕자님. 이것이 단순한 회전이라면 아군의 병력이 질적으로 우수하니 승산을 점칠 수 있습니다. 하오나 성을 공격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를 것입니다.”

“음.”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대야성이 떨어졌다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파진찬의 말도, 상애의 말이 일리가 있다.

대야성이 슬슬 떨어졌다면 이쪽도 지체할 수는 없다.

신검이 나주일에 관여하기 전에 나주를 집어삼키는 수밖에 없다.

파진찬은 그러고 싶을 거다. 어쨌든 견훤이 자신을 내게 붙여줬다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니 파진찬 역시 나주를 어떻게든 먹고 싶을 터.

“상애 장군의 말이 맞습니다. 나가십시다.”

"정녕 성을 공격할 생각이십니까?"

"나만 믿으십시오."

고려의 승리를 위해 노력할 테니까.

“한바탕 혈전이 벌어질 것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를 믿으시고, 상애장군은 나를 보좌하시오.”

“예. 왕자님.”

이제부터는 배우뺨치는 연기가 필요할 때다.

* * *

나주성(금성)

이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왜 저놈들이 성을 안지키고 밖에 나와있지? 우리가 우습게 보이나?

“다행스럽게도 나주성에서 나와 있지 않습니까? 왕자님 소장이 가 적들을 처부수겠습니다.”

“고려군도 있고 숫적으로 열세하니 이길 수 있다 자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것입니다. 하늘이 도왔으니, 이제 회전에서 승리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

파진찬 최승우는 회전은 가볍게 끝나는 줄 아는 것 같다.

“파진찬께서는 벌써 승리를 점치셨습니까?”

“군사적 능력에 탁월한 금강왕자님이십니다. 더군다나 상에장군도 있으니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 믿음이 정말인지 아닌지 궁금하다.

“고려의 장수란 장수는 모두 신라와 우리 백제와의 전선에 나온 줄로 압니다.

소장이 나가 저것들을 격멸하겠습니다.”

“허허, 상애장군. 그 일은 내게 맡기시오.”

네놈이 가면 나는 잠적탈 수 없다.

그래서 말을 끌고 직접 선봉에 서려 했다.

타고 있는 말이 미치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히히힝!”

“와.왕자님?”

“이.이놈의 미친 말이!”

말이 갑자기 날뛰기 시작했다.

“말발굽 상태가?”

“왕자님!”

대체 어떤 미친놈이 말발굽을 허술하게 관리했어?

아니, 지금 말발굽이 문제가 아니다. 이놈의 말이 멋대로 뛰기 시작한다.

“어어어어어억!”

“와.왕자님! 뭣들 하느냐! 왕자님을 보필하라!”

“왕자님!”

“금강왕자님!”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 * *

고려파 호족진영과 고려수군들은 입이 떡 벌어졌다.

금강이라는 백제의 왕자가 간덩이가 부었는지 선봉으로 병사 수십만 끌고 오더니, 매섭게 돌진해오고 있었다.

“저.저게 뭐란 말이냐. 저 미친놈들은 수도 적은 마당에 우리와 전면전을 치르고자 하지 않는가? 그리고 뭐야. 저 선두에 있는 놈은?”

고려수군의 지휘관은 위압감넘치게 말을 타고 내달리는 금강의 모습에 위축되었다.

백제에 저런 장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강으로만 알았는데, 아무리 봐도 왕자란 놈이 저러지는 않을 것이다.

“배.백제의 금강왕자입니다.”

“뭐라. 백제의 금강! 제놈이 초패왕 항우라도 되는 줄 아는 것인가? 에라 모르겠다. 화살을 쏴라! 쏴!”

고려군과 고려파 호족병사들은 화살을 비처럼 쏟아부었으나, 금강은 오히려 마치 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으로 전부 피하면서 덤벼들었다.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 역시 금강과 같이 내달려오니 하나같이 오금이 저렸다.

“뭐.뭐 저런 야차같은 놈이! 오. 오오 안 된다! 도망쳐!”

콰지지직!

920년 나주성 전투. 사가들은 훗날 이렇게 전한다.

마한땅에서 패왕 항우가 재림하였다. 라고.

* * *

말이 최고로 달릴 수 있는 속력으로 날아가는 금강석이 인간들에게 부딪치면 어떻게 될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빌어처먹을 신의 노름질에 버프받은 금강이가 인간들에게 박는다면 어떻게 될까?

답은 뻔하다.

마치 나는 볼링공이 된 것처럼 우렁차게 적진을 들쑤셨다.

콰드드드득!

“끄아아악!”

“사람살려!”

호족들의 병사들이 볼링핀처럼 무너져내렸다.

당연히 달리는 말과 비상식적인 강도를 지닌 내 몸에 부딪친 호족놈들의 병사들은 아주 뼈가 아작나는 듯 신체가 변형되었으며, 겁을 집어먹고 혼란스러워하는 호족 병사들 덕에 전황은 아주 묘하게 기울고 있었다.

내 기분은 지금 엄청 쪽팔리다.

지금 이게 무슨 꼴인가. 아주 자존심 제대로 구겼다. 말위에서 미친년 널뛰듯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게다가 뒤에서는 나를 구하러 오는 백제파 사병들과 백제군들. 아주 제대로 쪽이 팔렸······.

“금강왕자님이 단신으로 적진을 휘저으셨다! 가서 왕자님을 보위하고 적들을 죽이자!”

“““와아아아아아!”””

뭐지? 이 바보들은?

그보다 고려놈들은 어떻게 되었나? 아무리 그래도 세를 추스르고 후백제군은 상대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뭔가 죄다 피떡이 되어있었다. 혼란에 빠진 고려파 호족의 사병들은 우리 병사들에 의해 완전 토벌 당했다.

"사.사람살려!"

"우리는 호족 어르신들을 따랐을 뿐입니다!"

항복하는 병사들을 살아남고, 타이밍이 나빠 항복을 외치지 못한 자들은 후백제군의 창칼에 도륙당했다.

“진짜 뭐지?”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아무래도 저 바보들은 성대하게 오해한 것이 아닐까?

나는 그냥 이 멍청한 말에 낚여서 말이 멋대로 움직여 여기저기 들쑤신 것이 전부다.

한동안 시일을 끌 것 같던 전쟁은 후백제의 승리로 끝났다.

* * *

말에서 떨어져 검을 든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상애가 이끄는 아군의 도움으로 겨우 본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승입니다. 내 많은 전장을 다녀봤으나, 이런 전투는 처음 봤습니다. 파진 찬 어른.”

“그야말로 무신이구려.”

이것들이 뭘 잘 못 먹었나? 대뜸 칭찬해도 나오는 건 없는데.

“대체 언제 그런 무예를 익힌 것입니까?”

“소장도 궁금합니다. 이런 무예실력을 지녔으면서 어찌 검을 내려놓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어쨌든 나주성의 병력이 모두 산화되었으니, 이제 슬슬 입성하시어 민심을 다독이셔야 할 것입니다.”

철저하게 착각의 늪이 깊어지고 있다.

“그.그리 해야지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 나주는 백제의 손에 떨어졌으니 잠적하기는 힘든 거 같다.

“다들 보아하니 여전히 아국에 불만이 많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럴 것이네. 금강 왕자께서 일부를 포섭하셨다고는 하나 대다수는 무력으로 밟지 않으셨는가?”

상애와 파진찬의 대화로 나는 가슴이 쿡쿡 찔렸다.

설마 그리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이 몸이 단단한 탓에 호족들의 군사는 아주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커흐흠.”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주 점령이 시일을 끌게 되면 결국 고려가 움직일 것입니다. 고려에 넘어간 나주로 인해 아군의 수군이 약해져 있으니, 저들을 해상에서 막기도 힘들지요. 적당한 시기에 최상책으로 나주를 무너트렸습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지금 점령하지 않았으면 나주는 더 기고만장해졌을 터. 일단 적당한 시기에 먹기는 했다.

물론 백제의 입장에서 볼 때다.

고려입장에서는 지금 최악일 터. 심지어 후백제는 고려보다 군사가 갑절이나 많다고 했으니 위기감을 느낄 것이다.

“더군다나 대야성도 함락되었으니, 나주를 다시 점령하기 껄끄러울 것입니다.”

확실히 견훤이 거물은 거물이야.

나주도 원래 역사보다 한참 이른 시기에 탈환하였으니, 견훤이 신라의 서라벌을 더 빨리 짓밟을 수도 있겠어.

가만 있자, 이거 완전히 나 때문에 말아먹은 거 아닌가?

내가 횡설수설 그럴 듯한 전략을 내놓았으나, 나주를 정말로 점령해버렸으니, 고려의 삼국통일이 더 멀어질 수도 있고, 작은 반도에서 다시 길고 긴 삼국시대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예전처럼 여요전쟁은 고려의 승리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분열된 삼한의 고려 혼자서 요를 상대할 수 있을 리 없겠지.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방도가 있으십니까?”

“나주일대는 백제 최고의 곡창지대가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조금은 우대를 해도 되겠지요.”

당장에 불만을 잠재우려면 어느 정도 특혜는 줘야 한다.

“음,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해서 어찌 우대를 할 것입니까?”

“몇 년간, 세금 감면이 어떻겠습니까?”

“세금을 감면하다니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번에 우리가 움직이지 않았으면 나주는 언제 탈환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백제는 늘 후방이 위협적이었겠지요.”

솔직히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한다.

멍청한 호족들과 본래 주둔 중인 고려군은 본국에 지원요청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우리를 우습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야 그렇겠지. 왕자란 놈이 나주 정벌하러 왔으면서 군사 수백만 데리고 왔으며, 심지어 한동안 처박혀서 늦장부리고 있었으니.

“음. 확실히.”

“몇 년 동안 나주가 없는 셈치고 저들의 민심을 모으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대신에 전시에 군량미를 내놓는다면, 완산주로 진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 정도라면 호족들도 반길테지.

“음. 나쁜 방도는 아닐 것입니다.”

“소장은 영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다 그런 것이니 상애장군은 괘념치 마시오."

* * *

보기좋게 금강이란 볼링공에 패배한 호족들을 불러모았다.

“패자들에게 무슨 변명이 있겠소이까? 얼른 우리를 죽이시오.”

말은 잘하지만, 죽일 생각이 없다.

“음. 같은 마한의 핏줄끼리 죽일 수야 있겠소?”

나는 이래 보여도 마한의 자비로운 남자야.

“무슨 말씀이시오?”

“내 댁들을 살려주도록 하지.”

“우리를 살려준다? 대체 그 무슨.”

“세금도 3년간 면해주겠네.”

이 정도면 정말 잘 해주는 거다.

“그 대신 백제에 충성하라는 것이오?”

“고려로 가지만 말게. 나주는 곡창지대. 고려로 넘어가면 곤란하니. 대신에 고려와의 전쟁에 군량을 내어준다면 완산주로 진출할 수 있게 내 힘을 써보지.”

호족들은 서로 수군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나쁜 제안은 아니다. 애초에 서로의 이익을 위해 그들은 고려와 손을 잡았던 거다. 붙어있는 것은 백제고, 백제가 적당한 조건을 내놓는다면 언제든 받아들일 인간들이었다.

더군다나 힘의 차이도 분명히 해뒀으니, 굳이 나서서 왕건에게 신의를 보일인간들도 아니고.

“왕자님. 나주의 호족 오다련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그 자가 이곳에 있습니까?”

“예.”

“살려두기에는 뭐하지 않겠습니까? 왕자님. 참하셔야 합니다.”

분명 오다련이라면 왕건의 부인인 오씨의 아버지인 것으로 안다.

어떻게 하지? 그놈을 인질로 삼아도 좋은데. 명색이 고려왕의 장인이 아닌가.

“그래도 왕건의 장인이 아닙니까. 파진찬. 내게 전권이 있으나, 오다련은 왕건의 장인이오. 나 혼자 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거물을 얻을 줄이야. 깡패같은 견훤이 오다련으로 뭔 짓을 할 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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