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백진동맹2
* * *
성내에서 사람을 풀어 발해의 사정을 알아봤다.
“알아보았나?”
“거란놈들의 이간질로 말갈인들 일부가 발해에서 이탈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부일 뿐인가?”
“예. 지금은 일단 흑수말갈들이 그런데. 발해 병부에서 다른 말갈부를 동원해서 토벌 중에 있습니다.”
뭐 이미 발해수군들로부터 살짝 들은 이야기지만. 앞으로 몇 년 안에 발해는 거란을 상대로 확실한 승리가 아니라 ‘버틸 수’ 있게 되어야 한다.
버틸 수 있는 정도여야 우리가 발해의 도움을 더 확실히 받을 정도로 은혜를 입힐 수 있고, 운이 좋으면 발해의 내부에도 간섭할 수 있게 된다.
“왕자님 뭔가 계책이라도 가지고 있으십니까?”
내가 입꼬리를 그윽하게 말아올리자, 최승우의 질문이 날아왔다.
계책이라. 계책. 당연히 가지고 있지.
“일단 발해는 이대로 내버려 둡시다. 거란만 무찌르면 되는 일. 발해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우리가 참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또 우리는 지금 이곳에 발이 묶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간이 많지도 않다. 대충 할 일만하고 돌아가는 편이 이득이다.
그놈도 나름 군주인데, 내부의 결속은 알아서 하겠지. 애초에 내분은 발해 멸망의 가설 중 하나일 뿐이지 결정타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시간도 되었겠다. 나와 최승우는 대인선을 알현하여 동맹에 대해 논의했다.
“밤은 잘 보내셨는가.”
“가독부께서 이 외신들을 후하게 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백제국의 조정좌평은 아첨 참 잘할 거 같다는 말이지.”
아첨은 모르겠지만, 이 인간이 사람 기분 좋게는 한다.
“그래. 소개할 사람이 있었지. 내 아들 태자 대광현이네. 태자야,”
대인선이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내게 소개했다.
“예, 폐하. 만나서 반갑소. 발해의 태자 대광현이라 하오.”
“백제국 넷째왕자 부여금강이라 합니다. 대국의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자세히 보니 역시 생긴 대로 노는 것 같다.
얼굴이 딱 나라가 망하면 유민들 끌고 망명을 할 얼굴이다.
위약하고 나약한 얼굴.
아마 발해의 왕권다툼에는 저 인간도 뭔가 엮여있지 않을까.
아무려면 어떠냐. 어차피 역사에서도 유민들 이끌고 고려에 귀부해왔다. 딱이 정도로만 각인 되는 인간이다.
“요동탈환도 거란부터 잡아야 가능한 것이 지금 우리의 사정이네. 당장 평양성문제는 집어넣도록 하지.”
역시 예상대로다.
다만, 지금 걸리는 것이 있다면 병력 상황이다.
“그럼 백진동맹은 공수, 군사동맹을 기초로 맺는 것이 맞습니까?”
“그리되겠지.”
“지금 진의 군사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허, 동맹을 맺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아국의 군사상황을. 거란놈들에게 갖다바치려는 것이 아닌가?”
발해의 늙은 재상이 대뜸 시비조로 뇌까렸다.
원 역사로 보면 아마 저 인간이 발해의 마지막 군대를 이끌고 상경에서 거란군과 싸웠던 인물이겠지.
저 자가 '노상'일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발해와 내통했다는 말도 나오는 인물.
“형제국 백제를 의심하다니. 노상은 입을 조심하라.”
“하오나 폐하.”
“부여금강. 내 자네의 사람됨됨이를 보았으나. 내 신하들은 아닌 듯하네. 백제부터 말해줄 수 있는가?”
대인선. 이 사람은 망국의 군주라고 보기에는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안다.
“아국 백제가 신라와 고려의 국경에 있는 병력을 제외하고 진을 지원한다면 최대 3만까지 가능할 것입니다.”
“양면전선을 감당하면서 3만이라. 상당한 대군이 아닌가.”
사실 그 3만은 과장이다.
아무리 많이 내봐야 2만이 아닐까. 아니, 당초 고려와의 전선에서도 3만이란 군대는 낸 적도 없다.
한방싸움에서 10만을 냈으나, 그건 그때 신검이 고려 상대하겠다고 우격다짐으로 총동원한 군사력이고.
“그럼 짐도 답을 줘야겠군. 병부에서는 지금 군대를 얼마나 낼 수 있나?”
“현재 부여부의 대문진 대장군 휘하의 병력이 8만이 있으며, 서경압록부와 중경 현덕부에 2만의 군대가 있습니다. 속말, 백산을 비롯한 말갈부의 군사도 1만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역시 요동을 잃어서 그런가. 고구려에 비하면 지금의 발해는 병력이 상당히 적다.
아마 약간 과장이 섞여 있겠지. 실질적으로는 저것보다 적게 보는 것이 맞다.
고려를 견제할 병력으로는 수천명으로 중분할 테고. 우리에게 그래도 나름 형제국으로서의 위신도 지키고 싶을 테니까.
그래도 병력수만 따지고 볼 때, 적은 수는 아니다. 저게 설마 과장이라고 해도 그 군사력만으로도 삼한을 도모할 수 있을 정도다. 전신인 고구려에 비해 병력이 적을 뿐이지. 약한 것은 아니라는 말.
차라리 거란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선빵을 날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그런 국운을 건 도박은 좋지 못해.
“과연 진은 대국입니다. 고려도 그만한 병력은 없을 것인데.”
최승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 고려를 상대하기도 벅찬 백제인데, 과연 진의 동맹국으로서 백제가 제대로 할 수 있는지. 발해가 거란에 패망할 것인지. 아마 속으로 점을 치고 있을 것이다.
“거란이 침공을 하면 서신을 보내주셔야 합니다.”
“그리하지.”
원 역사로 치자면, 그 사신을 보내는 동안 발해는 무너질 거다.
거란이 작정하고 침공해오는데, 안 그래도 거란의 눈치를 보면서 보내는 사신들이 과연 제시간에 백제에 도착할까?
백제가 지원병력을 짜는 시간도 생각하면 발해는 버티지 못한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 언제든 깽판칠 준비는 갖춰야 한다.
그러자면 일본도 이용해 먹어야겠지.
“그럼 이제 백제로 돌아가는 것인가?”
“아닙니다. 이 외신들은 일본으로 가야 합니다.”
“아, 일본도 백제의 동맹국이었지.”
대인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발해는 일본과도 연대하여 거란과 맞서려고 했다. 어쩌면 대인선은 지금 나를 통해 실현해보려고 할 생각인지도 모른다.
“예. 다시 국교를 맺고자 사신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제에서 발해로 온 길로는 가지 마시게. 저번에는 운이 좋았으나, 운이 나쁘면 거란군을 만날 수도 있으니. 저 동족의 바다를 통해 가시게나.
배와 항해사는 우리가 준비를 해두지.”
발해는 해동성국답게 바다에서도 뛰어났다.
다만, 곧바로 동해를 통과해서 일본으로 가는 것은 꽤 험난하다.
기록에 따르면 처음 일본으로 갈 때는 중간에 표류했다가 몇 사람만 생존해서 겨우겨우 일본에 국서를 전달했다고 한다.
위험할 거 같은데. 그래도 거란군이 대놓고 있을 압록강 인근보다야 실력좋은 항해사붙은 발해의 배를 타는 것이 낫겠지.
“가독부의 천은이 하늘을 덮었습니다.”
“대신. 일본에 우리 발해의 뜻도 전해야 할 것이네.”
“예. 폐하.”
생각대로 대인선은 우리에게 일본에 보낼 사신과 함께 발해의 국서도 딸려 주었다.
그런데 그 사신이란 자는 의외로 거물이었다.
“이 몸은 대봉예라 하외다. 백제의 금강왕자를 뵙소이다.”
푸짐한 몸집에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 대인선과 달리 문관에 어울리는 인물이다.
“대씨라면 발해의 왕족이시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같은 왕족끼리 뭘 그리 격식까지 갖추시오? 우리 발해의 항해사들은 천하가다 알아주는 자들이오. 자 내일 출발하도록 하고, 술이나 드시구려.”
대봉예. 897년 당나라에 하정사로 파견되었던 인물이다.
발해의 사신을 신라의 사신보다 높은 자리에 올려달라고 하다가 퇴짜맞은 걸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원 역사에서도 알 수 없으니,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아마 발해멸망까지 남아서 발해가 멸망할 때 함께 요에 항복했다거나 죽지 않았을까.
“잠시만, 대봉예라 하셨소?”
최승우가 문득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대는 누구신가?”
“이 외신은 백제국 조정좌평 최승우 합니다. 혹시 당나라에 하정사로 파견되셨던 분이 아니십니까?”
최승우랑 아는 사이였나?
아 시간대로 치면 아는 사이기는 하겠다.
당에 하정사로 갈 무렵에 최승우가 당에 있다면 맞아 떨어지겠지.
“최승우라면 빈공과에 응시해 급제했다던 그 신라인이로군. 그런데 지금은 백제의 좌평이오?”
“신라의 국운이 쇠하였으니, 삼한 천하를 이끌어갈 새주인을 따라야 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아국을 두고 그런 말씀을 잘도 하시오?"
"하하하, 백제와 대진은 형제이니 한몸이거늘.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다."
“음. 그렇지. 그렇지. 자 술들 듭시다.”
“예.”
대봉예는 발해에 대한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넘친다. 발해의 영광스러운 역사와 발해 무왕 때 당나라를 선공한 것까지.
그렇게 밤은 지났다.
* * *
남경 앞 항구에 정박해 있는 거대한 선박에 승선하면서 은근슬쩍 최승우에게만 말했다.
“서둘러야 합니다. 조정좌평.”
뒤따르는 최승우에게 분명히 말해뒀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일본과 국교를 맺고 바로 백제로 가 군사를 조련해야겠습니다.”
백제 내에서도 지금 후계자 다툼에 내가 엮일 수도 있으니, 군사를 키우는데는 신중해야 한다.
하다못해 신검이 나를 옆에 끼우고 주도하게 한다면 또 모르겠다.
“발해가 군사적 열세라 그러십니까?”
“발해의 사정이 많이 딱한 듯 보입니다. 거란은 야율 아보기의 통합을 시작으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당장 지금 국운이 기운 발해의 병력이 저 정도인데, 요동이 건재할 때 거란이 어떤 힘으로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저들은 강합니다.”
한 번 기세를 탄 유목민족의 군대는 강성하다.
발해가 약하지는 않다. 고구려의 후손이기도 하고 훗날 금과 청을 세우는 대륙의 정복자 여진족의 전신인 말갈족을 지배한 나라다.
다만 말갈족은 이 무렵. 발해 밑에서 분열되어있다는 점이 문제다.
그들이 단합만 된다면 거란을 무찌르는데 어려움이 없을 텐데.
“거란의 군사가 발해보다 많다고 여기십니까?”
“그렇습니다. 거란에 맞서는데 일본까지 동원해야겠습니다.”
발해, 백제, 일본 삼국이 이렇게 대거란전선을 만든다면, 거란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소한 거란은 한동안 발해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터. 조금이나마 시간을 더 끌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럼 나도 슬슬 결정해야 한다.
딱, 발해까지만 가자. 발해의 멸망만 막자.
* * *
상경용천부
발해의 가독부 대인선은 발을 동동 굴리고 있었다.
흑수말갈까지 지금 이탈하고 있는 이때, 일단 백제와 동맹은 급한 대로 추진했다. 과연 이것이 옳은 선택인가.
“폐하. 과연 백제가 약조를 지키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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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겠지. 그러나 지원요청을 하면 구색은 갖출 것이다.”
후백제가 양면전선을 감당한다해도 신라에서 분열되어 재건된 백제다. 군사적으로 고려나 신라를 상대로 완벽히 압도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작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우리는 바닷길을 잃었네. 수군들은 강에서 훈련하는 것이 전부지. 뭐 바닷길이 있어도 중원의 지원을 받기란 어렵겠지만, 백제가 수군을 보내 요동을 타 격하면 괜찮지 않겠는가.”
거란은 이제 막 요동을 얻었다. 수군다운 수군은 아직 갖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백제의 군대가 수만이라고 해도 요동을 기습하여 거란에게 타격을 주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거란이 암만 대군을 가지고 있어도 백제와 우리가 양쪽에서 치면 거란으로서도 부담이 될 것입니다.”
“거란의 세작들도 이 일을 알게 되겠지.”
발해가 쇠퇴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로는 발해 내부에 깊숙이 침투해있는 거란의 세작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고구려계와 말갈계 백성을 이간질하고 있어,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마찰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인선은 일찍이 그 문제를 알고 있었으나, 지속되는 왕권약화와 권력투쟁에서 왕권을 공고히 하느라 그들을 미처 처리하지 못했다.
이럴 때 백제와 동맹을 맺어 역으로 그들을 써먹게 되었으니 오죽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