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일본
* * *
일본까지의 길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남경에서 내어준 배가 우리가 타고 왔던 배보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사신단 규모도 큰 탓에 준비가 오래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에서 꽤 고생했다.
주로 멀미기는 한데, 바닷길이 꽤 험난했다.
발해의 항해사들이 제법 능력자들이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우리는 물고기밥이 되었을 것이다.
애초에 동해를 그대로 횡단하는 것이다. 힘들지 않으면 거짓이겠지.
당장 조선통신사만해도 대한해협 통과하는게 그리도 죽을 맛이였다고 한다.
“신라를 얼른 처먹던 해야지 진짜.”
신라를 취하면 발해에서 일본까지 오가는 것도 쉬울 텐데.
“왕자님. 괜찮으시오?”
“뒤지겠습니다. ”
"커흠. 그래도 금방일 것이오."
아까부터 금방 갈 거란다. 애초에 이거 죽을 길 아닌가.
그때 문득 눈에 든 것이 있다.
배의 깃발에 발해도 진국도 아닌 고려라고 적혀있다.
"근데 일본에 갈 때는 '고려'의 이름으로 사신을 보내는 겁니까?"
"본래 발해야 당나라 탓에 대내외적으로 알려진 이름이 아니오? 왜 따위에게 조차 그런 굴욕을 감안할 수 는 없소. 자랑스러운 천손의 나라로서 고려의 이름으로 사신을 보내는 것이지."
요동을 잃은 상황에서도 굳건히 천손의 자부심을 가진 나라. 발해. 여전히 그들은 고구려의 계승의지를 표장하고 있었다.
"우웩!"
그런데 이거 진짜로 침몰해서 죽는 거 아냐? 하필이면 여기서 죽는 건가. 이건 진짜 엄살이 아니다.
사신단을 호위하는 발해와 백제군들도 저마다 토하고 난리도 아니다.
“이제 다 왔으니, 죽는 소리들 그만들 하시오.”
유일하게 바닷길을 다루는 말갈인들만이 멀쩡했다.
훗날 고려시대 때, 여진출신 해적들이 보였다더니, 그 말이 진실인 것 같다.
그러니 저놈들이 저리 멀쩡하지.
“젠장 여기는 어디야.”
“후, 이제 해안선을 따라갑시다. 그래도 이 정도 규모라면 왜구도 별짓은 못하겠지.”
대봉예는 일본길이 익숙해 보였다. 본래 당에 하정사로도 파견된 몸이었으니, 이런 일에는 눈이 밝을 것이다.
어쩌면 일본에도 다녀왔을 수도 있겠지.
“왕자님께서는 일본길이 익숙하십니까?”
“일전에 밀사로 헤이안쿄에 파견된 적이 있소이다.”
내 물음에 대봉예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거란과의 싸움에서 일본과 연합을 꾀하신 겁니까?”
“그렇소이다.”
하지만 잘 될 리가 없겠지. 일단 일본은 바다 건너에 있으니 거란이 비록 발해를 점령한다하더라도 일본에 대한 위협은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다. 일본을 칠 바에야 먼저 고려를 잡는 것이 낫겠지.
일본 입장에서도 굳이 적을 늘려 이득이 없다는 소리다. 끽해야 발해를 지원하면서 자기네 인력자원만 소비할 뿐. 더군다나 발해는 과거에 일본의 신라정벌계획에서 발을 뺀 적이 있다.
일본은 굳이 발해를 도울 필요성이 없다.
“잘 안 되셨겠지요.”
“그렇소. 이번에 다시 가는 것도 귀국이 백제니 일본과의 협상에서 도와줬으면 하고 가독부께서 보내신 것이오.”
“음. 한 번 노력해보겠습니다.”
일본을 구워삶을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알게 모르게 고구려 유민이 일본을 도운 사례가 있다.
그것이 바로 약광의 고구려 유민들. 기록에 따르면 약광의 고구려유민들이 일본에 많은 것을 전수해준 것으로 안다. 철기술이라던지. 뭐 간토 개척이라던지.
그걸 잘 써먹을 수도 있다.
“잘만 성사되면 백제와 진의 동맹이 더욱 돈독해질 것이오.”
“맞습니다. 형제국이 아닙니까?”
나도 일본의 도움이 절실하다.
“조정좌평.”
“예. 왕자님”
“조정좌평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일본의 도움이 지금은 절실하다.
그렇다면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이용해먹어야지.
* * *
금강과 대봉예의 사신단이 일본으로 향할 무렵. 완산주에도 금강의 소식이 전해졌다.
“음. 어허허. 아주 만족스러워.”
“금강 왕자에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 글쎄. 우리 금강이가 발해와 동맹을 맺었다는 구려. 거란탓에 대군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말갈군을 동원해서 고려의 변방을 견제해준다고 하니, 잘된 일이 아니겠소이까?”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꽤 외교가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자기 자식의 활약에 기뻐하던 견훤과 달리 상원부인은 눈살을 떨었다.
소식이 없다했더니 살아있었나.
“아니, 발해라니요. 왜 일본이 아니라 발해로 간다는 말씀입니까?”
“고려의 바다를 지나쳐가야 하는데, 지금 기세가 한풀 꺾인 지금이 기회 아니겠소? 이번에 조정좌평이 된 최승우가 그리 조언을 했다는 구려.”
‘최승우 빌어먹을 인간. 끝까지 나를 방해하는구나!’
“지금 금강이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아, 발해에 유능한 항해사가 많다고, 저쪽 동쪽 바닷길을 타고 일본으로 간다는구려. 발해의 왕족과 함께 한다고 하니 친분을 쌓은 것 같소이다.”
발해 대씨와 함께 배를 타고 일본을 간다고 하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 아닐까.
금강에 대한칭찬이 견훤의 입에서 아낌없이 쏟아지자, 양검과 용검 형제는 인상을 썼다.
“그래봤자 망해가는 나라가 아닙니까?”
“양검아.”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다 우리 백제가 망한 나라에 군대를 내는 어리석은 짓을 할 것 같습니다.”
발해가 요동을 잃고 나라가 반토막이 났다는 소식은 백제도 알고 있었다.
형제를 떠나 제대로 국가의 이익을 보자면 거란과 손을 잡는 것이 이득일 것이다.
그러나 거란은 민족 자체가 다른 집단이다. 언제든 배신을 할 수도 있다. 견훤은 금강을 믿었다.
만일 발해가 이겨내기만 한다면, 든든한 우군을 가질 수 있다.
“그건 양검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금강이에게 차라리 거란의 야율아보기를 만나 국교를 맺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발해 역시 땅덩어리만 크지 결국 신라와 같은 운명일 것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그렇다.
“신검아 네 말이 일리가 있다만. 그래도 형제가 좋지 않겠느냐. 우리가 거란과 교류를 한다면 후일 고려를 무찌른 들. 거란이 우리의 삼국통일을 인정하겠는가? 거란이 발해를 무찌르면 그 강성한 힘으로 삼한을 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발해는 다르다. 가독부 대인선은 자기 나라를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우리를 노릴 수 있겠느냐?”
“소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네 걱정도 당연한 것이다. 어쨌든 발해가 말갈군을 조금이라도 움직여준다고 하니, 고려는 이제 위 아래로 갇힌 처지가 되었다. 앞으로는 신라를 마음놓고 헤치울 수 있게 되었어. 지금 대야성에 누가 있지?”
“좌장군 애술입니다.”
애술. 대야성을 비롯한 여러 신라의 전선에서 제법 활약한 장수다.
그렇다면 신라공략에 믿을 만하리라.
“상황에 따라 신라를 아주 두들겨 팰 것이니, 애술장군에게 이르게. 언제든 신라로 진격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라고 말이야.”
“예. 폐하.”
발해가 금강의 뜻대로 움직여만 준다면, 신라를 곧바로 정벌하거나 복속시키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고려가 주춤하고 있는 최소한 판은 마련해야 한다.
* * *
헤이안쿄
“이곳이 헤이안쿄인가?”
“그렇소이다. 왜구의 나라라고 무시할 곳이 아니오.”
“이게 다 삼한 덕이 아니겠습니까. 백제와 고구려가 문물을 전파하였으니. 왜 놈들이 이렇게 발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소이다. 헌데 이 왜놈들은 은혜를 잊고 아국이 위급할 때는 돕지 않으니 이거야 원. 어이가 없지 않소이까?”
뭐 고구려와 백제의 패망 이후에는 일본의 롤모델은 당나라였지만, 확실히 고구려 유민들의 기술은 일본에 도움이 되었다.
이것들이 지들 자국의 중화뽕에 취해서 한반도를 무시하기 전에 백제의 국호 아래에 왜놈들을 복속시켜야 한다.
헤이안쿄 황궁까지 가는 길에 일본인들이 제법 몰려들었다.
발해와 백제의 사신이 동시에 오는 것은 제법 꽤 그럴 듯한 대규모 사신단이니까. 그럴 만하다.
“백제의 사신 부여금강이 일본국 폐하를 뵙습니다.”
“발해의 사신 대봉예. 일본국의 폐하를 뵙습니다.”
나와 대봉예는 일왕에 대한 예를 올렸다.
“부여금강? 부여씨가 마한땅에 남아있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제 부친이신 대왕께서는 의자왕의 한을 갚고자 대업을 이뤄 마한땅에 백제를 재건하셨으며, 신라를 무찌를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하여 예부터 오랜 혈맹인 일본에 다시 동맹을 맺자 이렇게 이 외신을 보내셨습니다.”
“음, 듣자하니, 고려도 재건되었다고 들었는데?”
그건 어디서 또 어떻게 들은 모양이다.
“예. 그러나 그 고려는 신라 호족놈이 세운 고려이며, 그 분수에 맞게 국운이 기운 신라를 돕고 있습니다. 부왕께서는 마땅히 고려도 징치하시고자 천하에 천명하였습니다.”
“우리와 국교를 맺고 동맹이라. 군사적 원조를 바라는 것인가?”
“백제와 일본의 사이입니다. 어찌 거짓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려와의 전쟁에서 필요할 때, 군사를 지원해주시면 저희 부왕께서는 신라 남부 해안에서 금관경까지의 땅을 일본에 약속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민족의 매국노 같은 제안인데, 어차피 사람이란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법이다.
“당장 필요한 것인가?”
“아직은 아닙니다. 훗날을 염려할 뿐입니다.”
“일리가 있군. 허면 그쪽 발해의 사신은 전과 같은 문제로 찾아오셨는가?”
“발해와 일본이 그간 맺은 우의를 생각해주시옵소서.”
대봉예는 고개를 숙였다.
“난처하군. 백제도 그렇고 발해도 그렇고 우리를 바라고 있으니. 발해는 지금 나라가 반토막이 났다고 들었는데?”
“잠시 밀리고 있을 뿐. 백제와 일본이 돕는다면 거란을 물리치는 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그럼 발해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나?”
대봉예는 미간을 좁히며 침을 삼켰다.
뭐 뻔뻔하게 지원군을 받고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을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땅이든 뭐든 줘야 하는데, 위치상 일본이 받아 관리할 만한 땅은 말갈부가 있는 연해주쪽이 아닐까.
안 그래도 말갈들이 전부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일본에 땅을 떼준다면 그건 불씨를 키우는 격이 되겠지.
“일본과의 교역에서 쓰이는 사치품들의 양을 늘리고, 국혼을 제안하여 혼인동맹을 맺는 것이.”
결국 저게 최선일 것이다.
어쩌다 해동성국 발해가 저지경이 되었나.
“으음.”
이거 더 가다가는 발해가 일본에게 조공을 바치는 지경에 이르는 거 아니야?
“백제와의 동맹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온 것이니, 심사를 숙고할 문제는 아니나 발해의 문제는 다르지. 일단 사신들은 물러가 있게나.”
물러가 있으라고는 하나 결국 일왕은 동맹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백제야 과거의 연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하나 발해와는 백제만큼의 친분은 없다.
무엇보다 발해나 일본이나 둘 다 서로 상국이라 여기고 있다.
일본은 고구려가 칭신했다는 것을 근거로 발해는 왜 칭신을 하지 않냐고 따졌으며, 발해는 문왕대에 스스로 천손이라 하고 일본에 숙부와 조카 관계라고 하여 천황이 격노했다.
물론 고구려가 칭신했다는 것은 신라땅에 있던 안승의 소고구려였으니 고구려가 칭신했다는 것은 개소리다.
서로를 대등하게 보지 않고 낮춰보고 있었으니 아마 신라를 견제하고 우방국을 두려는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다면 사이가 좋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왕을 알현하고 나오면서 대봉예는 슬쩍 내게 말을 걸었다.
“신라의 땅을 내어준다니. 저 왜놈들에게 기껏 점령한 신라 땅의 일부를 뚝떼어 삼한땅에게 저들의 영지를 두겠다는 말씀이시오?”
미쳤나.
“설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렇게만 말해도 일단 동맹을 하기는 쉬워질 것이 아닙니까.”
한마디로 쉽게 동맹을 맺어 이름값을 얻기 위한 술책이다. 군사적 지원을 받지 않으면 그만인 일이다.
발해, 백제, 일본. 삼국동맹이면 고려가 감히 어쩌겠나? 오히려 괜한 도발을 하지 못할 테고, 속말부의 말갈부만 움직여도 고려는 쉽게 대군을 보낼 수 없다.
“이제 보니 금강왕자께서도 꽤 지략가시오. 이 몸은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소이다. 일본은 거란의 위협에서도 안전한 섬나라니.”
“제가 도움을 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희들은 아마 나한테 고마워할 거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본에는 무사시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그곳에 고구려 유민들이 살고 있죠.”
“음? 그렇소이까?”
내 말에 대봉예는 눈을 반짝였다.
눈치는 빠른 자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것이 내가 내어주는 미끼를 어떻게 써먹을지 생각중일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