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상원부인
* * *
대봉예도 돌아갔고, 외부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다.
앞으로 발해멸망까지 조금 각보고 역사를 뜯어고치면 그만이다.
벌써 그 여신의 혈압이 오르는 소리가 내 가슴을 웅장하게 만든다.
훗날 발해와 싸우지 않게 된다면 후백제의 영토는 통일신라 정도가 될 테고, 여신은 죽을 맛일 터.
“무심한 것. 돌아왔으면 이 어미를 찾지 않고.”
어머니는 유독 아들사랑이 지극정성이다.
그럴 만도 하다. 견훤의 총애를 받고 있으나, 견훤의 후원은 완전히 왕비인 상원부인이 꽉 쥐고 있다.
아들밖에 믿고 의지할 곳이 없으니 더 남다른 것이다.
워낙 외모도 좋은 여인이라 그런지 지금까지도 그 단아한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금강은 그 외모를 물려받았다.
반면에 신검은 아비인 견훤의 외모를 쏙 빼닮았고, 양검과 용검은 그 밉상인 상원부인의 외모를 닮았다.
“송구합니다. 어머니. 워낙 나랏일이 바쁘니 어쩌겠습니까.”
“네가 발해,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들었다. 정말이지 이 어미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외교관으로써 이 정도면 뛰어난 업적이라 할 만하지.
“혹시 소자가 자리를 비울 때, 왕후께서 찾아오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을 어찌 알고 있느냐?”
그 여자라면 필시 찾아와서 어머니와 나를 비웃었을 것이다.
특히나 뭔가 지금 감이 안좋을 때라면 더 그렇지.
“왕후가 뭐라 하였습니까?”
“늘 그렇듯, 나에게 농을 쳤다. 네가 무사히 돌아오면 참 좋겠다고 말이야.”
역시 조정좌평의 말이 옳았다.
그 인간은 왕비가 움직일 것을 알고 있었던 거다.
발해로 가잔 이유 중 하나도 그것 때문이었겠지.
“무슨 일 있느냐?”
“양검과 용검이 왕후와 짜고 소자를 죽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설마! 왕후가 그럴 리가 있느냐? 증거는 있느냐?”
어머니도 잘 알면서 왜 그러십니까.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습니다.”
“그러다 괜히 우리가 당할 수 있다. 확실한 물증이 없다면.”
어머니가 복잡한 심정으로 말하면서 두 눈을 굴렸다.
어지간히도 상원부인에게 까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증거는 있다.
“우리 백제는 나주를 한 번 잃고, 교역료를 잃었습니다. 하여 중국이나 외국과의 교역이 끊기지 않았습니까.”
“그건 이 어미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나주를 탈환하고 처음 소자가 사신으로 발해와 일본을 갔습니다. 나주에 회복한 항구로 말입니다.”
백제가 가진 항구는 나주 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른 곳도 배가 움직일 곳은 있지. 하지만 타국과의 교역을 위한 항구는 지금 나주 뿐이다.
고려에게서 탈환한 후에야 황구도 확보한 거고 말이지.
“그런데?”
“헌데 어찌 알고 왜구가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바로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이다.
나주의 호족들 중 나를 패왕으로 떠받드는 일부가 찾아와 말했다.
무장한 왜구들이 탄 것 같은 왜선이 나타났었다고 말이다.
기이한 일이 아닌가. 고려가 나주를 얻었다고는 해도 그때까지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왜구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내가 나주에서 출발하는 것은 백제 조정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심지어 약탈을 한 것도 아니다. 잠시 왔다가 한동안 멀리서 정박하더니 곧 사라졌다고 한다.
“설령 그렇다고 한들. 물증이 없으면 왕후를 쳐내기는 힘들다.”
하여간 겁이 이렇게 많아서야.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 일을 공론화한다면 최악 왕궁에 피바람이 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걸 알면서 왜?”
“그래도 사적으로는 겁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 나한테 생각이 있다.
“무슨 말을 하는 게냐? 물증이 없다고 하였다.”
“만들면 그만인 일입니다.”
이 세상의 법은 현대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지는 시기다.
하물며 전국시대다. 심지어 왕실에서 일어나는 권력다툼이고.
“뭐?”
“어차피 왜구의 소행이 아닙니까? 붙잡아서 이리저리 캐보면 나오는 게 있겠지요. 없으면 그때 짜고 치면 될 뿐입니다.”
“자신은 있는게냐?”
자신? 있고야 말고.
“소자는 그렇다쳐도 소자의 어머니 되시는 분이 저런 투기에 미친 여자에게 비웃음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투.투기라니. 누가 들을라.”
“투기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심려 놓으십시오. 소자 반드시 어머니를 지켜드릴 것입니다.”
때마침 신검과 그 형제들은 애술이 있는 대야성에 있다고 한다.
아마 본격적으로 신라공략에 투입될 예정인 듯싶다.
그래서 딱히 말다툼은 없었는데, 오히려 나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동안은 완산주에 머물렀다. 나주로 사람을 보내 계속 왜구에 대해 알아봤다.
“이미 왜구의 꼬리를 잡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음.”
어쨌든 확실한 것은 심증이 있다는 것이다.
없어도 있게 만들어야지.
그런 고로.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살려주십시오!!”
왜구들을 잡아보았다.
고려수군에게 패배했다고는 하나 고려와 함께 삼한의 패권을 다투는 후백제다. 남은 수군들이 왜구들 따위에 질 리가 없다.
의외로 쉽게 대마도 근처에서 잡은 왜구들을 나주까지 끌고 와 고문을 해봤다.
“정말 너희들이 아니냐?”
“예. 예. 그러합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이 불쌍한 왜구들을 두루두루 살펴봤다.
니들 거짓을 고하지 않는 건 잘 안다. 그런데 어쩌냐. 나한테 걸린 너희들이 재수없는 거지.
쉽게 말해서 단순한 희생양이다.
양검이와 용검이. 그 놈들이 의외로 수완이 좋더라고. 찾아보려고 하니까 힘들었다. 나주 호족들도 왜선이라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하는 듯 했고.
진짜면 진짜여도 좋고.
“받아적게. 왜구들이 양검과 용검의 사주로 나와 조정좌평 최승우를 죽이려 했다고.”
“예. 왕자님.”
언젠가 나를 패왕이라 찬양하던 호족병사 믿을 만한 놈을 시켜 증거물을 위조하기로 했다.
“너희들은 해적질을 한 이상, 범인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허나, 너희들이 내 말만 잘 듣는다면 살길을 열어주겠다.”
“네. 네!”
목숨줄은 붙여주지.
* * *
거짓증거도 확보했겠다. 상원부인이 어떤 개짓거리를 하기 전에 곧바로 왕후 전을 찾아갔다.
“왕후께서 계시느냐?”
“어.어찌하여 금강왕자님께서? 지금 왕후께서는 침전으로.”
상원부인의 시중을 드는 중년의 궁녀가 내 앞을 막아섰다.
불이 뻔히 켜져 있는데 감히 왕자의 앞에서 거짓이나 내뱉다니. 어지간히도나 금강이 상원부인쪽 인간들에게 무시당하는 모양이다.
“이 금강왕자가 왕자전으로 돌아가게 되면 왕비께서는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
조금 협박도 날려보았다.
“뭐.무슨 무례를! 아무리 왕자님이라해도 어찌 왕후께 그런 무례한 언사를!”
“감히 시종 따위가? 자, 그럼 왜구를 이용해 나와 조정좌평을 참살하려 한 일을 어디 대전에서 논의해볼까요?”
나는 이 중년의 아줌마가 아닌 상원부인의 귀에 들릴 만큼 크게 외쳤다.
“들어오거라!”
그렇게 나와야지.
간만에 만난 상원부인의 면상은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대단했다.
찔리는 것은 있는지 얼굴이 일그러지다 못해 금방이라도 뭉개질 것 같다.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있는지 나를 정면에서 째려본다.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큰어머니.”
“큰어머니라. 네 눈에도 내가 어미긴 어미인가보구나?”
아주 비아냥에는 선수다.
어머니이긴 무슨 어머니. 금강의 어머니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는 미모와 덜떨어진 자식들만 있는 주제에.
그래도 지금은 조금 비위를 맞출 생각이다.
“큰어머니께서 왕비고 제 친어미는 첩이니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 네가 조금 전 지껄였던 말을 다시 해보거라. 뭐?”
“왜 이러십니까. 어차피 잘 알고 계시면서. 큰어머니께서 양검, 용검형님을 시켜 왜구들을 사주하지 않았습니까?”
나름 도박이다. 여기서 이 여자가 대놓고 뻔뻔하게 굴면
“증좌는 있느냐?”
“이미 왜구로부터 얻어낸 증언들입니다. 이래도 발뺌하실 참이십니까?”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모습을 보니 웃기다.
그저 추측만으로 내뱉은 말인데, 참 알기가 쉽다.
저래놓고 사람을 죽여보겠다고 수작을 부려?
이대로 밀어붙여도 되겠지만, 나도 진범도 아닌 범인을 잡아두고 이번 일을 벌였으니, 잘 못 걸리면 큰 일이다.
화르륵!
“이런 건 불태우면 그만.”
“누가 그거 하나라고 합니까?”
멍청하기는 내가 보험도 안 들었을 것 같나.
나는 품속에서 사본들을 꺼냈다.
죽간과 두루마리를 비롯해 옮겨 적은 것들을 대놓고 보여줬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 서로 까놓고 말합시다. 큰어머니. 저 마음에 안 듭니까?”
“뭐?”
“제가 신검형님 자리 위협할까봐 그런 거 아닙니까.”
내 말에 상원부인은 기가 찼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더는 내 앞에서 내색을 하지 않기로 한 건지 눈에 경멸을 담고 제 자식을 위협하는 원수를 보듯 노려본다.
“그래. 신검이를 네가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천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 하였다. 너를 믿지 않는다.”
“어차피 신검형님은 전장에 계실 테고 저는 완산주에 있거나 다른 나라와 외교로 빠질 텐데, 그리도 못 믿으십니까?”
머리가 얼마나 권력에 물들었으면 이럴까.
이래서 안 된다. 이러니 후백제가 자식농사 잘 못 지어서 망한 거다.
처음부터 신검 한 명이었다면, 그도 아니면 금강 한 명이었다면
“대왕의 어심이 너에게 가 있다! 네가 싫다고 해도.”
“어심이 제게 있으니 이걸 어떻게 써먹어야 아버님이 좋아하실까요? 나를 암살하려 했다는 건 단순히 왕후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검형님까지 여파가 퍼질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애미와 형제들이 나를 죽이려 했는데, 계승서열에 가장 가까운 신검 역시 휘말릴 터.
신검에 주식을 몰아붙인 상원부인은 지뢰를 밟은 거나 다름이 없겠지.
얼굴 창백하게 질린 거 봐라.
“큭.”
“그런데도 제가 왜 이러겠습니까? 저는 정말로 왕위에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자유로운 것이 좋지. 권력과 왕위를 탐하지 않습니다.”
걸리면 왕이 되기 위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뭐하러 그 짓거리를 하나.
다시 말하지만, 나는 역사에 대한 조금의 지식만 있을 뿐. 정치인도 뭣도 아니었다. 정치도 할 줄 모르고 권력도 다룰 줄 모른다.
적어도 권력과 정치면에서 나는 스스로 어린 애라고 자부한다.
어린 애한테 과분한 권력을 쥐어주면 나라는 도탄에 빠진다.
내 말에 왕비는 여전히 나를 경계하면서도 조금은 긴장이 풀린 듯 보였다.
“어째서냐? 대백제의 왕자라면 응당 왕위를 노리고 싶지 않느냐? 그러기 위해 네가 백제의 관직도 그 옛것으로 돌리고, 왕실의 성씨도 부여씨로 바꾸지 않았느냐?”
“솔직히 부왕께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것을 그대로 수락하실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백제가 백제다워지려면 어찌해야 하냐 그래서 말했던 것 뿐입니다.”
견훤이 정말로 채택할 줄 누가 알았겠어.
나는 정말 몰랐다.
“패왕이라는 소문은?”
“말이 발굽이 망가져 미쳐 날뛰던 탓에 저도 모르게 나주의 고려수군과 호족군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걸 보고 패왕같다는 소문이 흐른 겁니다. 그리도 걱정되시면 제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건 진짜 나도 억울했지.
“무슨 소리냐?”
“수군을 키우려면 나주에서 키워야 합니다. 하여 심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신검형님은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룰 것이고, 저는 나주에서 수군을 키워 발해를 돕는 역할만 맡을 것이니 이거야말로 형제간의 우애도 지키고 왕비께서 걱정하실 일도 없을 줄로 압니다.”
이 즈음 되자, 상원부인의 날카롭던 눈매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여기서 쐐기를 박아줄 차례다.
“왕비께서도 아시겠지만 거란이 발해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삼한일통을 하여 거란에 대비해야 하는데, 제가 만일 왕위에 올라보십시오.
백제는 큰 혼란에 빠질 것이고 고려에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믿어주십시오. 저는 신검형님을 보좌하는 재상이 되고 싶은 것이지. 결단코 나라가 흔들릴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내 대답이 흡족했는지 상원부인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좋다. 내 신검이가 태자가 되고 장차 이 나라의 황제가 될 당분간은 지켜보도록 하마.”
이것으로 나주에 있을 때 귀찮게 방해할 인물을 처리했다.
양검과 용검이 또 거슬리기는 하는데. 내가 바로 나주에 가 있으면 어쩌지 못하겠지.
“왕후께서 바다와 같은 자비심을 보이셨으니, 저는 조용히 나주로 가 있겠습니다.”
“그 물증들은.”
“왕후께서 제 진심을 알아주셨다고 하나, 제 생각도 해주셔야 합니다. 신검형님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는 이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흥. 좋다. 이만 가보거라.”
그 물증들을 나중에 신검이를 엿먹일 수 있다는 것을 아나 모르겠다.
생각보다 왕후가 단순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