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여제전쟁5
* * *
유금필이 미친 듯이 웃었다.
“크.크하하핫.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고작 그런 걸 제안이라고.”
“거절이로군.”
“제 아무리 하늘의 점지를 받았다고 하나 내 주군은 오로지 고려의 대왕뿐이오.”
이런 꽉 막힌 인간 같으니, 전란의 시대에 주인이 바뀌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물며 신이 점지한 인간이다. 그런 자를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신라 호족에 궁예 뒤통수를 친 인물을 주군이라고 받들다니.
아 물론 궁예는 죽을 짓을 하기는 했다. 다만, 그래도 이미지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자기가 모시던 주인을 배신한 왕건보다야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나를 따르는 것이 좋지 않은가.
“흠. 그런가.”
“차라리 내 목을 베시오.”
죽는다는 소리가 쉽게도 나오는군.
“뭐 그 충심 나쁘지 않네. 자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러나 한 가지 알아두게. 자네의 목숨이고 뭐고 떠나서. 자네가 왕건의 밑에서 나를 방해한다면, 그만큼 삼한통일은 늦춰지고 북방을 되찾을 날은 요원해질 것이네.”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오?”
유금필을 죽이면 그것도 나름 업적이겠다만. 죽이는 것보다는 살려두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할 것이다.
“자네의 목은 중히 쓰일 테니까. 지금 당장은 내가 검자루만 쥐고 있을 뿐이 네. 만일 훗날 고려로 가서도 명심해야 할 거야. 자네가 만일 왕건을 따라 끝까지 백제와 싸우려고 한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없어질 테니.”
그 말을 끝으로 감옥을 나왔더니, 상좌평 최승우가 두루마리를 들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님. 대야성에서 급보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양검, 용검 왕자님이 고려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또, 신검 왕자님의 군대마저 위급한 상황입니다.”
이런 씨발.
“대야성의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가?”
“고려와의 전투가 진척이 없자, 양검과 용검왕자님께서.”
그 다음 내 귀로 들어온 말들은 충격적인 것들이었다.
양검과 용검. 그 미친놈들이 기어이 일을 벌였다.
돌대가리들이 박술희의 함정에 걸려 잡혀갔다고 한다.
“한심한 작자들 같으니. 제 형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그 두 놈은 항상 신검과 함께 다닌다. 당연히 그놈들의 돌발행동은 맞인 신검이가 그 책임을 고스란히 져야한다.
신검은 이번 일로 또 견훤이 실망할 테지.
현재 고려, 신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오로지 나주와 서라벌털기 작전 뿐이다.
그 불똥은 또 고스란히 나한테 튀길 것이 아닌가?
“미치겠군.”
귀찮은 일은 사양이다.
그런데 뒤가 찝찝하다. 나한테 튈 불똥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결국 양검과 용검을 내가 구해야 한다는 건데.
고려왕 왕건은 제 사람을 아끼는 인물이라 한다.
아마 유금필을 절대로 버리지 못하는 인물이겠지. 그렇다면 유금필 가지고 양검 용검을 거래해볼까.
아니, 그건 또 아니다.
그러기에는 양검과 용검이 너무 가치가 떨어져. 양검과 용검 100마리보다 유금필 한 마리가 더 가치가 있다.
“급보입니다!”
“두 왕자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얼마 전에 도착했다. 그런데 또 무슨 큰 일이기에 이렇게 호들갑이란 말이냐?”
신검이 잡혔다는 소식이라면 멘탈이 깨질 것 같다.
“신검왕자께서 양검, 용검 왕자님을 구하기 위해 군을 이끌었다가 고려왕 왕건의 군대에 포위되었습니다!”
“왕자님. 아무래도 대야성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완산주에서 지원을 보내기에는 적당한 자가 없고, 그렇다면 결국 지원을 가는 것은 내가 될 것이다.
신검을 비롯한 대야성의 군대가 위험한데, 왕자인 내가 가만히 있으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 아닌가?
“지금 나주에서 소집가능한 호족군을 모두 모아보세요. 지원을 가야겠습니다.”
“예. 왕자님.”
“누군가는 남아서 나주를 지켜야 하니, 상귀장군이 지키고 계시오. 상좌평도 남아서 나주의 일을 돌봐주십시오.”
신검이 왕건의 손에 들어가면 꼼짝없이 유금필을 내놔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신검을 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예. 왕자님.””
“유금필은 어찌할 것입니까? 차라리 양검, 용검. 두 왕자분과 유금필 장군을 포로교환을 하시고, 고려군의 포위를 풀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허나 나는 다르다.
절대 유금필을 쉽게 내어줄 수는 없다.
“일단 완산주로 압송해두세요.”
“왕자님?”
“걱정마세요. 두 형님을 구할 방도는 있습니다. 상애장군은 뒤에서 군을 이끌어주십시오. 나는 부여부대를 이끌어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슬슬 전투에도 익숙해졌다.
이번 전쟁에서 신검을 구해서 확실히 신검의 신임을 얻자. 양검과 용검을 구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 * *
대야성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멀찌감치 고려와 후백제의 깃발이 뒤섞이는 것이 보였다.
포위했다더니 이제 공격하는 모양이다.
다른 군대일 리는 없을 테고, 밀리는 쪽이 백제 깃발인 것을 보면 필시 신검의 군대일 것이다.
“상황은 어떤가?”
“예. 현재 신검왕자님의 군대가 왕건의 군대에 포위되어있으며 우리 본대도 고려군이 막고 있어 신검왕자님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곧 왕건의 군대가 신검왕자님의 군대를 공격할 것 같습니다.”
정찰병을 보내 알아보니, 아무래도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한 듯싶다.
그렇다면 결국 무쌍찍으면서 신검을 구해야겠군.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말인가. 부여부대는 나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있는가?”
“우리들의 목숨은 왕자님의 것입니다. 언제든 명령만 내려주시지요.”
“지금부터 우리 부여부대로만 신검왕자를 구할 거라네.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임하도록. 상애장군은 대야성으로 가시오.”
“““예!”””
이제부터는 정말 항우나 척준경이라도 빙의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신검이, 백제가 살 수 있다.
“백제군을 도륙하라! 부여신검을 생포하라!”
“왕자님을 지켜라!”
신검이 이끄는 부대가 왕건의 군대에 완벽하게 포위되었다.
딱 봐도 왕건이란 티가 날 정도로 금빛의 갑주를 걸친 모습은 가만히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넘치는 영웅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보던 왕건의 그림과 달리 상당히 무섭게 생겼다.
상황을 보니 왕건이 작심하고 공격하는 거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병사들은 구할 수 없고 신검을 구하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고려군 본대는 내 아비인 견훤을 상대하러 나가 있는 것 같고 아마 왕건은 신검을 꼬여내기 위해서 직접 군을 이끌고 나온 것 같다.
“부대를 좌,우,중군으로 나눈다. 좌우 부대는 고려군을 혼란에 빠트리고 나는 중군을 이끌어 직접 신검 형님을 구할 것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작전이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왕건의 부대는 우리를 단번에 제압할 정도로 많지도 않았다. 좌우군은 고려군의 후방에서 화살을 날려 적들에게 혼란을 주었다.
“백제의 지원군이다!”
“아군이다!!”
고려군은 백제의 지원군에 혼란에 빠지고, 신검과 함께 고려군에 저항하던 백제군들은 지원군 소식에 희망을 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왕건이 어느새 신검의 바로 지척까지 가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어그로 좀 끌어야 하나?
“저 자는?”
“네이놈들! 내가 대백제국 넷째왕자 부여금강이다!”
“뭐라. 저놈이?”
나는 활을 들어 왕건을 겨냥했다.
여기서 사거리가 닿으려나? 아니, 맞출 수 있나?
제법 활은 쏜다고 했지만 왕건을 지키는 병사들이 많다.
대충 관심만 끌면 되니 저 중 아무나 맞거나 빗나가도 상관없다.
고려의 왕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쉬이익-푸슉!
왕건을 향해 대충 날린 화살이 무언가에 맞았다.
“컥!?”
“폐.폐하! 폐하를 보위하라!”
순식간에 고려군들이 일제히 왕건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왕건이 화살이라도 맞았나?
설마. 왕건을 맞출 생각도 없었다. 지금 왕건이 죽으면 고려는 무너진다.
어? 의외로 꿀 아닌가?
아니다. 양검과 용검이 죽겠지. 물론 왕건의 목숨과 양검, 용검의 목숨 중 어느 쪽이 더 가치가 있는지 따지고 보면 왕건이 더 높기 때문에, 양검과 용검이 죽는다해도 견훤은 나를 용서하지 않을까.
어쨌든 어그로는 끌어냈다.
나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 고려군을 돌파하여 신검에게 달려갔다.
“형님!”
“너는 금강이가 아니냐! 이곳에는 어찌 왔느냐?”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닙니다. 어서 제 말에 오르십시오! 어서요!”
“알겠다!”
신검이 내 등 뒤에 앉혔다.
고려군이 길을 열어버린 탓에 나는 잽싸게 신검을 데리고 전장을 이탈했다.
“여긴 어떻게 온 것이냐?”
“대야성의 소식을 듣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게 달려오는 길입니다.”
“여긴 적진 한복판이다. 위험하다!”
자기가 할 말인가?
“신검형님 마저 적들에게 생포되면 이 나라 백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크흑. 양검이와 용검이는.”
이 와중에도 형제들을 생각하는 걸 보면 형제애는 대단하다.
정작 그 둘은 금강은 안중에도 없지만. 뭐 이번 일로 신검과 상원부인으로부터 점수는 확실히 따둬야겠다.
“그 형님들은 지금 고려 본진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일단은 형님부터 이곳을 탈출하셔야 합니다.”
“저기, 신검과 금강이다! 화살을 쏴라!”
고려의 궁병들이 활을 들었다. 나는 괜찮지만 신검이 죽을 수도 있다.
이대로 신검이 죽고, 양검과 용검이 사라지면, 나는 눈치볼 것이 없어 좋지만, 내가 다음 백제왕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왕자들의 죽음은 견훤이라도 충격이 클 터.
젠장, 남자와 껴안는 취미는 없지만 어쩔 수 없지. 나머지 부여부대는 알아서 잘 도망갈 테니 우선 신검이를 살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형님 제 앞으로 오십쇼!”
“알았다!”
고려군은 오로지 나와 신검을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운이 좋게도 말이 화살을 맞아 쓰러지는 일은 없었으나, 간혈적으로 내 등에 박히는 화살들이 느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갑옷이긴 하다.
갑옷에 박혀서 내 등짝을 건드릴 뿐. 화살은 내게 부상을 입히지 못했다.
중군의 부여군들이 꽤 큰 피해를 입었으나, 좌우군은 대체로 무사했다. 부여군 100여명 중, 생존자는 68명. 유금필과의 전투에서도 없던 피해를 여기서 크게 입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100명의 결사대로 꽤 선방한 것이 아닐까.
“형님. 이제 다 왔습니다.”
“금강아. 너. 그게 다 무엇이냐. 왜 화살이. 아!”
어느새 등짝에 화살 여러개가 훌륭하게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우는 괜찮습니다. 하하. 고려군의 화살이 갑주를 뚫지 못하였으니 안심하십시오.”
“그것이 문제냐. 내 그릇된 판단으로 금성에 있는 너까지 위헙에 빠트렸구나.
이 못난 형을 용서해다오.”
암요. 당연히 용서해 드려야죠.
어쨌든 백제국 대왕이 되실 분인데 말이야.
“제 일보다는 우선할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무엇이냐?”
“부왕께서 진노하실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군 자체는 큰 피해가 없어 하늘이 도왔습니다.”
내 말에 신검의 얼굴이 폭삭 늙어버렸다.
그렇지. 견훤은 신검에게 있어서 점수를 따야 할 존재이자, 대재앙이다.
한 번 뿔이 나면 신검 한정 쉽게 꺼지지 않는 마왕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바꿔 생각해보면 장자기 때문에 그런 거다.
어쨌든 백제국 대왕의 지위를 이어야 할 후보니까.
“크흡. 아버님께서 벌을 내리신다면 받아야지. 어쩌겠느냐. 이번에는 내가 어리석었다. 아우들을 그리 보내는 것이 아니었어.”
여기서는 나도 몇 마디 속삭여줄까.
지금 무능한 동생들이 고려에 잡혀갔을 때 적당히 호감도를 올려둬야 한다.
“훗날 형님의 손에 이 나라가 달렸음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때로는 형제라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내 이번 일로 뼈저리게 느꼈다. 자 대야성으로 가자꾸나.”
“예. 형님.”
이번 일로 정신차리고 동생들과 거리를 뒀으면 좋을 텐데. 문제는 그 두 놈을 어떻게 구하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