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23화 (23/154)

23. 휴전협상

* * *

왕건은 그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독종도 그런 독종이 없을 것이네. 내 그 자리에 자네들을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이 한스러워. 금강왕자 그 자는 적이지만 참으로 존경할 수밖에 없었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적을 두둔하다니. 대체 그 금강이란 자가 얼마나 대단하면 고려의 대왕인 그가 이렇게까지 칭찬을 할까.

“저 자신을 희생하면서 소수의 병사들만으로 제 형을 구하러 왔네. 배가 다른 형인데 말이야. 그때 내게 화살도 날린 것이지. 그 자는 자기 죽을 길로 알아서 달려들었던 것이었어. 제 형이랑 도망칠 때도 혹시라도 신검이 화살을 맞을까 자기 앞에 앉히더군.”

솔직히 말해 왕건은 감동했다.

뒤늦게 부상당한 몸으로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금강을 추격하는 것을 멈추게 할 정도로. 아니, 그의 무예실력과 뒤따르는 소수의 병사들을 보면 추격해도 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참으로 형제의 우애가 대단합니다.”

금방이라도 백제군을 향해 쳐들어갈 것 같았던 장수들도 왕건의 말에 감탄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왕건은 완벽한 군주였다.

공식 호칭이 대왕일 뿐. 천자와 다름없던 완벽한 군주가 적국의 왕자를 극찬했다. 그렇다면 그 왕자는 설령 왕건에게 부상을 입혔어도 칭찬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그런데 적을 크게 칭찬하던 왕건의 두 눈이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양검과 용검을 포기할 수 없겠지.”

“묘책이라도 있으십니까?”

“분명 화살을 등에 맞았을 테니 운이 안 좋으면 죽었을지도 모르지. 살았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 견훤왕이 총애하는 자식이니 우리와 거래할 때 선봉을 세울 터.”

신검은 지금 패하였으니, 견훤이 협상을 할 때 신검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두 왕자를 포로로 잡혔고, 그 원인은 신검에게 있다. 이미 한 번 밀린 전적이 있으니 차라리 유금필을 잡은 금강으로 협상을 하리라.

“협상을 하실 참이십니까.”

“그래. 양검, 용검. 그 무능한 두 왕자보다 유금필의 목숨이 귀하다. 견훤왕도 제 자식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터.”

아무리 무능해도 자식들이다. 견훤왕이 자기 자식들을 버릴 만큼의 소인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래도 명색이 두 왕자의 목숨입니다. 유금필 장군이 대단한 장수인 것도 사실이오나, 일개 장수와 왕자 둘의 목숨을 어찌 저울질할 수 있겠습니까.”

장군 홍유가 제법 그럴듯한 발언을 하였다.

맞다. 유금필은 승리한 장수가 아닌 패장이다.

분명 왕건은 유금필을 아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기회를 놓칠 위인도 아니었다.

이참에 대야성을 거래 조건에 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좋아, 패에 대야성을 더하지. 대야성과 유금필이라면 왕자 둘의 목숨과 그래도 맞지 않겠는가?”

“그것 참 묘안입니다.”

* * *

한참 등짝의 부상을 핑계로 누워있는데. 한 병사가 막사로 찾아왔다.

“왕자님. 고려에서 사자를 보냈습니다. 속히 관아로 들라는 폐하의 명이십니다.”

“그래? 알았다.”

사신이 제법 빨리왔다.

과연 견훤의 생각은 무엇일까.

고려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는 살얼음판처럼 서늘했다.

“고려의 사신은 말하라.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백제의 왕이시여, 설마 자식들을 버리는 어리석은 군왕이 될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처음부터 세게 나오는데?

“뭐라!”

“이 자가 지금 뉘 앞이라고 막말을 지껄이는가?”

“막말이 아닙니다. 이 외신은 고려국 폐하의 명을 받들어 협상을 하러 왔소이다! 아국의 폐하께서는 대야성에서 백제가 군을 물리고, 유금필 장군을 내어 준다면, 양검과 용검왕자를 하해와 같은 은혜로 백제진영으로 보내겠다 하셨습니다.”

은혜로 백제진영에 보낸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두 왕자가 없어도 후백제는 충분히 돌아간다.

“아주 왕건이 기가 살았군.”

좋아 슬슬 끼어들 타이밍이다.

“고려의 사신은 어찌 그렇게 오만방자하시오?”

“그대는.”

“대백제국 넷째왕자 부여금강이오.”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금강이라는 이름도 저놈은 알 거다.

그야 자기들 왕에게 부상을 입힌 놈이 아닌가. 워낙에 군신간의 의리가 가족과도 같은 고려 조정이니 내가 마음에 들 리 없겠지.

더군다나 이름이 태평이라고 한다. 태평은 고려를 건국하는데 일조한 인물 중 한명으로 왕건이 아끼는 인물이다.

“허, 지금 두 왕자의 목숨을 쥐고 있거늘. 비록 내 사신이라 하나 아국 폐하의 명을 받든 몸. 감히 내게 그리···”

“고려의 왕께서는 무탈하시오?”

나는 내 화살에 부상당했을 왕건을 조롱하면서 태평을 쳐다봤다.

“그게 무슨.”

“혹여나 내가 날린 화살에 반송장이라도 되지 않았을까 걱정이라서 말이오.”

“무례하오!”

무례하기는, 고작 양검과 용검만 믿고 허세나 부리는 너희들만 할가.

“무례한 것은 두 왕자의 목숨을 쥐고 있다 하여 오만하게 구는 사신에게 있소!”

내 말에 태평이 그제야 제 잘 못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예의가 없기는 하지.

“크흠! 아무튼 나는 폐하의 말씀을 전하였으니, 물러나겠소이다. 부디 백제의 왕께서는 현명한 판단을 하시길 바랍니다.”

말은 지 멋대로 다 하고 나가고 있지만, 정작 나한테 더 말해봤자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앗을 것이다.

“금강아. 네 어찌 그런 일을 벌였느냐?”

“맞습니다. 두 왕자님의 목숨이 걸려있는데, 어찌 그리 경솔하게 대하셨습니까?”

“병관좌평은 조용히 하게. 네가 아무생각없이 양검과 용검이를 두고 장난질을 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 역시 견훤이다.

“예. 신검형님과 생각한 계책이 있습니다.”

“신검이와 말이냐?”

“예. 예. 폐하. 금강이와 아우들을 구하면서 동시에 국익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럼 우리도 사신을 보내야 할 것인데. 이번에는 금강이가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니, 폐하. 신검왕자님이 왕건과 담판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능환이 저거 저 주둥이 좀 조심하지.

“전장이라면 모를까. 협상장이네. 왕건한테 죽을 뻔한 신검이 가서 협상을 한다면 왕건이 얼마나 우리를 우습게 보겠느냐는 말이야. 신검아, 너는 나중에 설욕을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자중하도록 하라.”

“예. 아버님.”

신검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이 새끼. 너무 뒤로 쉽게 물러난다.

어쩌면 아직 내 협상안이 성공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일까.

확실히 나도 도박이다. 배째라는 식으로 나갔다가 놈들이 두 왕자의 목을 벤다면?

아니, 나한테는 좋은 일이기는 하지.

견훤이 나를 버릴 리 없다. 내 존재감을 확실히 증명했으니 삼국통일 전쟁에서 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을 테니까.

“폐하, 그렇다면 소신을 금강왕자님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능환. 저 인간은 나를 얼마나 방해하려고 저런 말을 하는가. 내가 슬쩍 견훤을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상좌평이 금강이를 잘 보좌하여 왕건과 협상을 하게. 뭐 믿을 놈이 있어야 말이지.”

“예. 폐하.”

* * *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나는 곧바로 최승우와 함께 고려군 진영으로 찾아갔다.

“대백제국 나주도독 부여금강. 고려국 폐하를 알현합니다.”

“대백제국 상좌평 최승우 고려국의 폐하를 뵙습니다.”

“이게 누구야. 백제국의 영웅이 아니신가. 설마하니 금강왕자가 직접 짐에게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왕건은 대인배였다.

나 같으면 내 몸에 화살박은 놈 용서 못한다. 최소한 똑같이 화살이라도 박아주지. 나는 저렇게 사람좋게 웃지 못한다.

그냥 당해줄 나도 아니지만.

“제가 뭐가 두려워 협상자리를 마다하겠습니까? 외신은 그저 우리 폐하의 명을 받들었을 뿐입니다.”

“그래. 답은 가져오셨는가.”

“폐하께서는 제게 모든 것을 일임하셨습니다. 하여 이 협상 역시 제 뜻대로 할 수 있습니다. 제 말이 곧 백제국 대왕의 말씀과도 같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나를 대할 때 함부로 하지 말라 이 말이다.

“무엄하도다! 우리 폐하의 옥체를 상하게 하였으면 당장 무릎꿇고 용서를 구해도 모자랄 판이거늘!”

“그렇다고 치면 고려의 장수들은 어찌 이리도 오만방자하고 무례하다는 말입니까? 왕자님은 협상을 하러 왔지 용서를 빌기 위해 온 것이 아니오!”

상좌평 최승우가 언성을 높였다.

이 사람도 할 때는 하는 구나.

“그만. 그만! 그래. 금강왕자는 말해보라.”

“거래가 너무 맞지 않습니다. 대야성과 유금필을 내놓으라니요. 양검과 용검형님 수백명이 걸린 일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견훤왕의 뜻인가?”

“예. 이미 제가 그렇게 해야 한다 청도 하였습니다.”

내 말에 그의 얼굴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일그러졌다.

내가 신검을 죽기살기로 구했으니, 형제간의 우애가 깊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그런데 이를 어쩌나.

그놈들은 내 형제도 아니고, 이 삼국통일 전쟁은 형제간의 우애를 따질 만큼 형편좋은 시기가 아니다.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줄 알았는데.”

“이 외신은 백제국의 왕자입니다. 형제간의 우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뭐가 잘 못된 일입니까?”

“그래서 양검과 용검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이 말인가?”

이 양반도 큰 인물은 아니네. 그 둘의 목숨가지고 협박이 될까?

“폐하께서는 더 많은 것을 착각하고 계십니다.”

“뭐라?”

“이미 우리 백제가 서라벌을 털어버린 것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서라벌의 백성 얼마가 나주로 끌려왔겠습니까?”

“서라벌의 백성들을 인질로 삼겠다?”

고려를 몰아내기 위해서라도 못 삼을 것도 없지.

“일본에 보내도 좋겠지요. 지금 즈음이면 일본이 우리 동맹이라는 것도 알고 계실 텐데요? 설마 신라를 지키겠다는 고려에서 신라의 백성들을 버려두겠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어찌 저리 치졸할 수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우리 백제라는 것을 상기하시기를 바랍니다.”

놈들은 분한 듯하면서 이를 갈았다.

“뭐 그럼 다시 협상을 해볼까요.”

내가 갑이고 너희들이 을이야 이 개자식들아.

왕건은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눈싸움하자는 건지 기세싸움을 하자는 건지 몰라도 나도 똑같이 노려봤다.

눈싸움은 내 승리였다.

왕건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입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래서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이제야 자기 위치를 아는군.

“일단 애초에 양검과 용검은 고려의 패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 무능한 왕자 둘을 다시 얻기 위해 대야나 유금필을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둘이 사라지면 아군의 전쟁수행능력은 월등히 오를 테니까요. 두 왕자가 무능하다는 사실은 직접 상대해보신 이 자리의 장수들이 더 잘 아시리라 알고 있습니다만.”

“크.흐흠.”

고려의 장수들도 이건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 니들이 양심이 있으면 그 두 놈과 유금필, 대야성을 바꾸자는 개소리는 하지 못한다.

유금필이 어떤 놈이고 대야성이 어떤 성인가?

“까놓고 말해서 국익으로 봤을 때, 백제가 그 두 왕자를 원할 거라고 여기시지 않을 텐데. 안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형제간의 우애나 아국의 폐하가 두왕자를 버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시나 본데, 아국의 폐하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국에서 오다련은 내어드리지요. 대신, 대야성을 우리 땅으로 인정할 것이며, 이 협상 이후, 5년간 전쟁은 치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오다련은 진작 줬어야 할 놈이지만. 고려가 공세를 보일 조짐이 있자 견훤이 막았다. 이번에 그걸 이용해 먹은 것이다.

내 제안에 놀란 것은 고려왕 왕건만이 아니었다.

나도 상원부인 자식들이 군사를 말아먹지만 않았어도 여기서 왕건의 군사들을 몰살시킬 생각도 해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상태로는 무리다. 휴전이 그나마 최상책이지.

“그 말은 휴전을 하자는 건가?”

“예.”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사신들은 물러가 있으라.”

“예. 폐하.”

아마 머리 좀 굴려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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