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27화 (27/154)

27. 유금필을 속이다.

* * *

한참 일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무렵. 아내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무슨 생각을 그리도 하십니까? 국혼인데.”

“아, 미안합니다. 내 긴장을 해서 커흠.”

죄책감이 들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즐기자.

“천황께서는 금강왕자님이 낭군님으로서 손색이 없고, 훗날 매우 큰 위인이 될 거라 하셨습니다. 소녀는 왕자님을 곁에서 보필하고 싶으니, 부디 왕자님의 대업을 돕게 해주시지요.”

대업이랄 것도 없는데.

“허허허, 아주 잘 어울리는 반려가 아닌가. 일본에서 온 귀족들은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가?”

“그렇습니다. 마치 우리 일본과 백제의 관계같아 아국의 천황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견훤과 일본의 귀족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 신검이 이죽이며 다가왔다.

“금강아. 이제 너도 제법 의젓해 보이는구나.”

“형님은 어떠십니까?”

“부인과의 관계말이냐?”

“예.”

내 물음에 신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사실 나는 알고 있다. 이 신검이란 작자는 부인에게 매일 바가지 긁힌다.

장자인 주제에 왜 그리도 못났냐면서 태자는 될 수 있냐는 듯.

내가 아픈 곳을 찔렀는지 신검의 얼굴이 점점 썩어들어갔다.

“나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지. 어차피 이 시대에 연모화여 혼인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다더냐? 다 저들 이익을 위해서지.”

“그렇기는 합니다.”

“그래도 네 부인은 일본국의 공주가 아니더냐. 나보다는 사정이 더 낫지.”

아니, 그래도 이쪽은 상대가 일본공주라서 훗날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는 말이지.

“그런데 형님 무슨 하실 말이라도.”

“혹시 말이다. 유금필을 어찌할 셈이냐?”

슬슬 인재를 탐내는가?

“어떤 연유로 그리 말씀하시는지 이유를 알아도 되겠습니까?”

“만일 회유하면 우리 쪽에 좋은 장수가 되지 않겠는가?”

말은 그럴 듯하지. 나도 몇 번이고 유금필을 회유해보려고 애를 썼어느끼. 하지만 상대는 우이독경, 마이동풍이다. 왕건을 배신할 놈이 아니다.

“고려가 멸망한다면 모를까. 지금 그 자를 설득하기란 어렵습니다. 설령 우리에게 충성맹세를 한다해도 거짓이겠지요.”

당장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내 말도 씹는 놈인데, 과연 신검의 말이라고 듣겠는가? 아니다.

유금필이 없어도 삼국통일은 이룰 수 있다.

“마치 네가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두고 보십쇼. 삼국통일의 위업을 형님께 바치겠습니다.”

어차피 내 업적을 알아주는 것은 신이 될 테니 상관없다.

“너는 정말로 아무런 미련이 없느냐?”

“예. 몇 번을 말하지만 실로 미련이 없습니다.”

“음, 좋다. 그 말을 믿겠다. 양검이도 고려로 가버렸고, 용검이는 처소에 틀어박혀있으니 내 믿을 사람이라고는 너 밖에 없구나.”

본래 형제들끼리 똘똘 뭉치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지금 둘 다 떨어져 나갔으니 신검의 속내가 어떨지 뻔하다.

“이 아우를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 북쪽에 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발해 말이냐?”

“예. 필시 거란이 발해를 침공할 테니, 그때 발해를 도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청해주십시오.”

그때가 되면 또 능환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설 것이 눈에 선하다.

발해를 돕는 것은 일단 현재 후백제의 입장에서 제법 도박이라고 할 만 하니까.

“이길 수 있느냐?”

“예. 형님과 제가 발해로 함께 가는 겁니다.”

“음. 고려는 어찌 할 것이냐?”

“인질이 둘이나 있습니다. 저들도 함부로 못할 것입니다.”

오다련은 보냈으나 왕신과 유금필이 남아있다. 한부로 휴전을 깰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도 양검이가.”

그 새끼는 가치가 없고.

“형님 양검형님은 형식적으로 가있는 것 뿐입니다. 인질로서의 가치? 왕신이 더 높지요.”

“그렇게 말하니 또 내가 할 말이 없구나.”

이미 신검과, 양검, 용검형제는 상당히 사이가 벌어졌다.

양검은 고려로 갔다치더라도, 용검은 지금 신검에게 나름 배신감을 느끼고 있으리라.

배다른 동생을 더 가까이 두니 그럴 만하겠지.

결국 신검이 의지할 곳이라고는 나 밖에 없다.

신검과 대화를 마치고 보니, 아내는 일본에서 건너온 귀족들과 마지막 추억팔이를 하는 듯 보였다.

하기야 곧 이곳에서 살 텐데 당연하겠지.

그리고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아내가 옆에 있으면 모를까. 일단 혼인을 치르고 나니, 마치 지금까지 쌓인 것이 터진 것처럼 백제의 관료들이 하나하나 나를 축하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종보스 상원부인이 등장했다.

“국혼을 치른 것을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큰 어머니.”

“네가 신검이를 구한 이야기도 들었다. 그 점은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내 용검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네가 고려에 양검과 용검이 둘을 버리려고 했다던데?”

씨발. 욕이 안 나올 수가 없구나.

용검이 그놈은 마마보이인가?

그걸 그대로 가서 일러바쳤네.

“대야성과 유금필을 내줄 수는 없으니, 차라리 두 형님의 가치를 낮추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그리하면 왕건도 인질의 가치가 없다고 풀어줄 테니까요.”

“정말 그런 생각뿐이냐?”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큰 어머니. 신검형님이 이번에 대왕의 진노를 산 것은 두 형님 탓입니다. 아닌 말로 그 두 형님이 신검형님을 얼마나 방해했습니까? 늘 공명심이 앞서서 신검형님의 앞길을 망치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렇더라. 두 형제가 자꾸 신검을 방해하니, 신검이 제 능력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다.

“정말 믿어도 되느냐?”

“큰어머니. 제가 정말 뭔가를 노렸다면 신검형님이 당하고 나서 지원갔을 것입니다.”

“좋다. 내 너를 믿어보마.”

의심병도 이 정도면 병이지. 암.

상원부인이 가고 내 어머니가 등장했다.

정말 바쁜 날이다.

“왕후가 뭐라하더냐?”

“아직도 소자를 의심하는 듯 했습니다.”

“큰일이로구나.”

지금은 좀 사정이 나아졌다.

일본 공주와의 혼인으로 나는 신검파벌들을 자극하였으나, 이전에 신검을 구한 전적이 있으니 조금은 나아졌다.

한마디로 여전히 나는 살얼음판이다.

빨리 저것들도 정리를 해야 하는데.

솔직히 말하지. 능환 중심의 파벌은 가치가 없다. 훗날 후백제 조정에 큰 파란을 몰고 올 것이다.

“지켜보는 눈들이 많다. 앞으로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양검도 처리했고, 신검으로부터 점수를 땄으니 이번 것은 해결.

이제 거란만 어떻게 하면 곧바로 삼국통일 사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그러기 전에 몰래 나주 쪽에서 힘을 길러둘까.

“또 수상한 생각하지 말고. 이 어미 말 잘 듣거라.”

“네. 어머니.”

“이제는 너도 부인이 있는 몸이다. 그것도 공주야. 앞으로 아이도 가져야 하고. 조금 더 네 몸을 아끼도록 해라.”

“아무렴요.”

나는 걱정말라고 확답을 내렸으나, 전혀 믿지 못하는 눈치다.

애초에 죽지도 않는 몸인데. 상관없지.

근데 내 자식도 금강일까?

처소로 가니 아내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서방님. 소녀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아무래도 이 여자도 보통내기가 아니다.

* * *

앞으로 훗날을 위해 현재 후백제에 있는 인재들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영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역시 인재는 고려 쪽이 위라는 건가.”

과연 삼국통일을 하는 나라라는 것이겠지.

후백제도 통일하면 인재가 나올 수 있겠는데, 나는 그런 쪽으로는 잼병이다.

일일이 모르는 사람들 중에 인재를 뽑는 미친 짓은 할 수 없다.

고려 쪽 인물들 여럿을 끄집어 후백제에 박아야 한다.

아니면 역시 내가 잘 못 생각했는가?

먼저 삼국통일을 우선시하고 발해는 그 다음?

아니다. 삼국통일에 대한 확신이 없는 마당에[ 괜히 어렵게 갈 수는 없다.

“왕자님. 나주의 도독이 서신을 보냈습니다.”

나주로 보낸 상귀 장군이 서신을 보내왔다.

놀랍게도 그 외국인들이 고구마와 감자재배에 성공했단다.

문제는 그들이 아예 백제에 눌러앉았다.

그 사정을 알아보니 지들 나라에서도 그다지 좋은 처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우리에게 도움만 되었으면 된 것이 아닌가.

솔직히 말해 그 재배에는 나도 나름 가지고 있는 지식을 보탠 거지만, 그들이 있으면 다른 나라와의 교역도 한결 수월할 듯 싶다.

“감자가 많이 늘면 군량으로도 써먹을 수 있겠군.”

예전에 어디선가 본 것 같다.

감자를 군량으로도 썼었다고.

생각보다 발해의 움직임이 빠른 것 같으니, 어쩌면 거란의 침입이 더 빠를 수도 있다.

군량을 다타라와 일본 본국에서도 얻어와 거란과의 장기전 및 전쟁으로 피폐해질 발해의 백성들을 구제할 생각이기는 한데.

“지금 발해에 유능한 장수는 대문진 뿐. 대인선은 친정을 하던 인물인지 알수는 없지만, 적어도 거란과 맞서 싸울 의지는 있다.”

문제는 백제의 장수들이 거란놈들을 대적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유금필을 써먹어 보는 것은 어떨까?

유금필이란 놈은 북번의 추장들까지 굴복시킨 인물이다. 유목민족들에 대해서는 나름 잘 싸워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감옥에서 신세한탄을 하는 유금필을 말했다.

“유금필.”

“부르셨습니까?”

“거란이 발해를 칠 것이네.”

지금부터 사전작업을 전부해 둘 생각이다.

“음. 결국 그리 되었습니까.”

“남말할 일이 아니지. 지금은 발해가 잘 버텨주고 있지만, 거란이 발해를 집어삼킨 후에 다음은 어디가 될 것 같은가?”

지금 고려는 원 역사만큼 강하지 않다.

말갈군이 자꾸 약탈을 하고 있으며, 지난 대야성 전투로 인해 호족들이 많이 실망을 했다.

당장 백제로 갈아탄 것도 아니지만, 중립을 표방하는 호족들이 늘어났다.

신라는 말할 가치도 없다.

그런 고려가 거란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점을 이용하면 고려로부터 유금필이란 지원군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슨 말씀이 하고 싶은 겁니까?”

“고려가 거란을 상대할 때 도움을 주기를 바라네.”

“발해가 망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입니까.”

당연한 소리를.

“그렇지. 거란이 우리를 방해하면 서로 좋지 못할 것이야. 안 그런가?”

“아국의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 외신은 따를 것입니다.”

“내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보지.”

사실 군사적 지원도 원하지만,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유금필이다. 고려의 힘을 빌렸다가는 후일 괜히 찝찝할 뿐.

그래서 사신은 보낼 생각이 없다.

나는 완산주에서 가필을 잘하는 사람 몇 명을 모았다.

왜? 고려국왕의 필체와 똑같은 것을 만들어 유금필을 속여야 하니까.

“이 필체를 그대로 쓸 수 있겠느냐?”

“말미를 주시면 똑같이 해보겠습니다.”

“좋다.”

왕자란 위치가 이래서 좋다.

* * *

나는 유금필에게 왕건의 국사를 전달했다.

-발해가 그리도 국운이 위급하다면, 내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함께 형제의 나라를 구원할 것이오. 그러나 말갈이 계속하여 북방을 어지럽히고 왜구는 신라를 괴롭히고 있으니 이것을 막는 것만으로 우리 고려는 사정이 좋지 못하오. 현재 백제에 있는 장군 유금필이 천군만마보다 듬직한 장수로서, 유금필에게 왕명을 내려 백제를 돕게 할 터이니, 부디 발해를 도와 거란 도적들을 처리해주시오.

누가 봐도 유금필이란 포로를 이용해서 제 나라 군력은 지키고 백제의 군사만 깎아먹겠다는 수작이 보이는 국서.

이 정도라면 유금필도 납득할 만한 국서가 아닌가.

“이것이 정녕 우리 폐하의 뜻이란 말씀입니까?”

“그렇네. 아주 치졸하기 짝이 없더군.”

“예?”

“그렇지 않은가? 우리를 가지고 이이제이 하려는 속셈이 아닌가. 그깟 말갈을 격퇴하고 신라를 보호하는 일이 뭐가 어렵다고. 쯧쯧쯧. 뭐 그렇다고 해도 유금필. 자네가 이번 전쟁에서 힘써주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폐하의 뜻이 이러하다면 돕겠소.”

유금필은 자기 주인이 머리를 썼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흐뭇하게 웃었다.

나는 그 뒤에서 무척 비열하게, 악당의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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