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35화 (35/154)

35. 불속성 효자

* * *

결국 신검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이 결정되었다.

“5만이면 뒤를 칠 만 하겠군요.”

“신검왕자님은 따로 부르지 않는 것입니까?”

그놈을 부를 수는 없다.

“여기서 신검형님을 부르게 되면 신검형님은 요동공략에 실패한 것이 됩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습니다. 내가 지원요청을 해 2만의 군대를 보낸다면 동생의 어려움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요동 공략을 늦추는 대신 2만을 보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내가 그 새끼한테 뭘 기대하겠어. 그냥 거기 내버려뒀다가 전쟁 끝나고 야율아보기 작살나면 그때 지들 주인 잃어서 혼란해 할 요동의 거란놈들로부터 요동을 주우면 그만일 것이다.

더군다나 요동에 지금 군대를 조금이라도 둬야 발해가 딴 말을 못한다.

지원군을 기다리는 사이 장령부와 막힐부의 상황을 알아보았다.

역시 거란군이 군대를 두고 상경으로 진격했다.

“최악의 수를 생각해야겠지.”

상경이 함락당할 경우, 결국 압록부에 숨어있는 대광현이 왕위를 잇게 될 것이다.

사실 나로서는 대인선보다는 대광현을 상대하기 더 편하다.

“대체 언제 가는 것이오?”

“신검형님이 군대를 보낼 때까지는 무립니다. 듣지 못하셨습니까? 야율아보기의 본대라면 상경의 군대와 협공이 가능하겠지만, 장령부와 막힐부에 있는 거 란군도 야율아보기에 합류했다 합니다.”

“이런!”

대문진이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가독부께서 서경에 분조를 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상경이 거란군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소이다!”

그건 내 알 바 아닌데. 분조가 있다면 상관없지 않나.

“그럼 승산이 확실치 않는 전투를 치르자는 것이오? 가독부께서는 그거까지 각오하셨을 겁니다.”

“크윽.”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대문진이 이러는 이유도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결국 상경으로 진격하는 야율아보기를 막지 못했다.

아마 자기 탓에 야율아보기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상경까지 진격하게 생겼으니 죄책감이 심하겠지.

“문제는 신검왕자님께서 요동공략에 실패한 것이 아닙니까?”

관흔도 질린다는 표정이다.

“지금은 그 성들을 묶어두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인간이 개짓거리하는 게 한 두 번도 아니고.”

그 동생에 그 형이라는 거다.

이미 상귀를 통해 성들의 병력이 빠진 것을 알아냈는데, 그걸 먹지 못했다?

막상 생각해보니 화가 치민다. 뭐가 되었든 그놈은 요동을 먹었어야 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요동을 점령하는 것이 실패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곤란하다.

슬슬 화가 난다.

아니, 나도 내 손바닥 위에서 천하가 돌아갈 거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조금 화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금까지 잘해오다 갑자기 막히니까.

“저. 왕자님. 그. 저.”

“화가 치미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비어있는 걸 못 먹어요. 차라리 상귀장군한테 맡길 걸 그랬습니다.”

서라벌을 털고 요동의 거란군 군량창고를 여럿 불태웠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상귀는 신검보다 뛰어난 능력자라 할 수 있다.

“그쪽 사정을 저희들이 잘 모릅니다. 신검왕자님께도 나름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태자의 자리를 노린다는 사람이 그런 것도 못하면 어쩌겠나. 심지어 신검형님 밑에 있는 일본군들은 본래 내 수하들이야.”

한마디로 내 병사를 요동에 갈아넣고 있었다는 의미다.

요동에서 온 원군을 이끈 장수는 상애였다.

“상애장군이 오셨군.”

“예. 왕자님.”

“그럼 지금 5만이 넘는 병력이 만들어졌군요.”

5만. 가슴이 웅장해지는 숫자다.

이 5만을 내가 이끌고 야율아보기에게 갈 것이다.

그것이 꼬라박기가 될지. 그도 아니면 성공적으로 적들을 격퇴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애초에 주화나 화약은 부여부에 있는 거란군들을 잡기 용이했으나, 솔직히 말해 거란 본대를 상대로 얼마나 선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이곳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지원군이 필요하다면 역시 전황이 좋지 않습니까?”

“일단 부여부의 군대는 물리쳤으나, 좋지는 못합니다.”

하다 못해 5경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군대라도 내놓는다면 할 만한데.

“소장도 왕자님을 돕겠습니다.”

“그럼 이대로 상경으로 진격하는 겁니까?”

원 역사를 뒤져보면 상경에서 거란과 맞선 발해 최후의 병력은 3만.

노상이 이번에는 없으니 3만으로 아에 성을 지킨다면 지키지 못할 것도 없지만, 과연 어떨까.

이미 상경 앞 요새는 모조리 함락당했다.

발해에 속한 말갈군들도 거란군에게 패배했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전쟁에서 가장 의문이 드는 것이 있는데.”

뭔데 그게.

“뜸들이지 말고 말해보세요.”

“서경의 군대는 어디로 갔습니까?”

감질나서 짜증을 내자 상애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

그러고 보니 서경의 군대는 어디 있지?

“분조라 하였습니다. 상경은 위험하지만, 지금 서경은 멀쩡한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서경의 군대는 대체 왜 움직이지 않는 겁니까?”

“대광현. 이 천하의 등신새끼.”

서경과 중경의 군대만 수만이다.

그걸 움직이지 않고 있다. 대체 뭐하는 미친놈이지? 지 아비가 위험한데 군대를 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천하의 불속성 효자새끼가 아닌가.

그게 웃을 이야기라고 웃는 상애도 웃기다. 뭐 아무튼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당장 대광현 그놈에게 사람을 보내야겠다.

“혹시 대광현. 그 자가 왕위를 노리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대광현이?”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긴 한데. 과연? 발해가 망하고 유민들 데리고 고려로 귀화한 놈이 바로 대광현이 아니었나.

내가 발해의 역사는 잘 모른다.

아니, 솔직히 한국인 중에 발해 역사를 아는 놈이 얼마나 있을까. 애초에 기록자체가 부실한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대광현은 발해 멸망 이후에 곧바로 망명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거란에 항거했다는 뜻인데. 그런 놈이 지금은 가만히 있는다?

“대체 그놈이 지금 시국이 어느 시국인데 왕위를 노린다는 말인가?”

이미 백제와 일본 연합군이 와서 부여부의 거란군을 격파했다. 막힐부와 장령부에 있는 거란군 대부분도 거란군 본대에 합류했다.

지금 발해 전체가 전장이 된 상황. 지금 대광현이 남은 군대라도 끌고 와주면 야율아보기를 보다 쉽게 잡을 수도 있다.

“노릴 만도 하지요. 상경의 위치를 보세요. 야율아보기의 거란군 본대가 상경으로 향했습니다. 막힐부와 장령부의 남은 거란군을 서경과 중경에서 군대를 보내 격파하면 거란군은 그대로 상경에 갇힌 형국이 됩니다.”

확실히 발해의 지도를 보니 그렇다.

대광현 그놈은 명색이 왕자다. 상경이 위급하면 직접 군대를 조직할 만한 지휘권은 가지고 있을 터.

“그렇게 되면 사방에서 패잔병이나 말갈군 및 우리가 들고 일어나 공격할 테니. 야율아보기를 잡을 수 있다?”

“전쟁도 승리하고 왕위도 잇고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는 것입니다.”

전혀 그런 놈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역시 사람 속은 모르는 건가. 하기야 권력에 아비고 자식이고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냥 고려에 망명한 놈이라고만 여겨서 나약하다고 멋대로 단정짓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놈 같으니.

요즘 너무 잘나간다고 한껏 오만해져 있었다.

“젠장. 발해의 왕권다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로군.”

“참으로 기이합니다. 나라가 어려운 와중에 내분이라니.”

“본래 나라가 망하는 것은 내분이 아니겠습니까. 신라야 망할 만큼 망했으니 지금의 꼴이 되었다고는 하나. 조선이 한과의 전쟁에서 내분이 일어나 망했으며, 고구려가 연씨가문의 내분 탓에 망했고, 옛백제는 의자대왕과 귀족들의 반목으로 망했죠. 외적의 침입은 그 기회를 적국이 놓치지 않은 것 뿐.”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번 대광현에게 원병을 요청해야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우리가 전쟁을 끝내면 꽤 큰 피해를 볼 것이다. 반대로 대광현은 기세등등해질 테고.

“야율아보기가 그 사이 상경을 점령하기라도 한다면.”

“거란군의 진격이 생각보다 느립니다. 상경 앞의 성들이 함락되었어도 사방에서 저항하는 무리들이 있는 것이죠.”

어쨌든 그 역사도 바뀌었다. 생각보다 대인선이 어떻게든 나라를 재흥해보려고 노력한 증거겠지. 그러니 발해인으로서 거란에 맞서 싸우려고 의기롭게 들고 일어나는 자들이 있는 것이고.

아무튼. 대광현 그 새끼는 발해판 김자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여튼 꼭 한놈이 초를 친다.

* * *

서경압록부

서경압록부는 전국토가 전장이 된 발해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 중 한 곳이었다.

거란군이 출몰하지 않은 이곳은 사실상 거의 독립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압록부의 관아에서는 대광현, 대봉예, 신덕, 오흥 등이 백제군에서 사신이 온 일과 상경으로 지원을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논의를 하고 있었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이겠습니까?”

“태자전하. 어차피 지금의 일을 자초하신 것은 폐하시지. 태자전하가 아니십니다. 상경이 위급하다 하여 군사를 보낸다면, 서경은 누가 지키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서경의 군대를 빼면 훗날을 대비할 때 서경을 누가 지킬까.

대인선이 분조를 천명한 이후 서경은 이미 대광현에 의한 독자적인 정권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군대를 빼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백제군도 와 있는 처지에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은 아들로서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문진도독을 보시지요. 상경을 지원하려 하다 야율아보기에 의해 일격을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본인들은 조심해서 되는 일이 아닌가.

굳이 이대로 상경을 구원하지 말라는 소리인가?

“이미 상경의 해는 저물었습니다. 비록 거란놈들이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상경으로 가 상경을 점령한다하여도 우리 발해가 패할 일은 없습니다. 부여부에 남은 거란족도 백제가 끊었고, 후방도 백제가 끊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보급도 문제인데 청야전술로 인해 저들은 먹을 것이 남지 않았습니다. 변수라면 말갈이지만 그들도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그들이 거란에 빌붙어 발해를 노린다면 위험할 것이다.

확실히 흑수말갈이라면 그럴 만하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 가독부가 다른 말갈부를 동원해 흑수말갈을 자극하였으니까.

“그렇게 되면 거란군은 황제라는 야율아보기를 비롯하여 상경에서 쫄쫄 굶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각 지역의 거란군을 격퇴하고 동시에 상경을 포위 점령하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제대로 된 판단일지 참으로 알 수 없습니다. 공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미 속으로는 정한 주제에 자꾸 묻는 대광현이 대봉예는 얄밉기만 했다.

“이미 상경이 포위되었다면 돕는 것이 옳겠지만, 폐하께서는 이미 분조를 천명하셨으니, 참 일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대인선이 분조를 천명하였으니, 상경에 가지 않는다 해도 명분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원이라도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백제가 돕는다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것이 또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군 신덕이 묻자, 대봉예는 한숨을 쉬었다.

“사정을 알아보니 백제군의 부여금강이 요동에 군대를 보내 거란군을 끊었으며, 부여부의 거란군도 무찔러 태자 야율도욕을 포로로 잡았다 합니다. 지금 발해에서 승리한 곳은 백제군이 있는 곳 뿐이니, 백제가 이번 전쟁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발해 어디에서도 백제군이 이룬 만큼의 승리를 일궈낸 지역은 없다.

막힐부와 장령부는 버티고 있는 거지 야전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요?”

대광현의 순진한 물음의 대봉예는 눈앞이 까마득했다.

부여금강이라는 자는 야망이 있는 사내다.

그 자에게 이 전쟁은 발해를 뜯어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에휴.'

만일 거란을 상대로 부여금강이 대승이라도 이뤄낸다면, 병력을 고스란히 유지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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