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해보시든가.
* * *
상경까지 진군한 거란군 진영에 도착했다.
이곳이 야율아보기의 본대가 있는 곳이지. 확실히 족히 15만은 넘어 보이는 대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앞에서 나를 노려보는 저 거란족의 추장은 역시 추잡하게 생겼다.
그 옆에는 황후 술율평인가.
이놈들은 아무래도 내가 협상을 하러온 줄 알 거다. 아, 협상은 맞다. 그런데 내가 먼저 협상을 하러 왔다면 갑과 을의 관계가 명확해진다.
놈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 방식대로 할 것이다.
“이거 참, 초원에서 말이나 몰던 자들이라 그런가. 어우 냄새가 이거 참.”
일부러 내가 코를 막는 시늉을 하자, 거란놈들이 노발대발했다.
하기야 나는 말끔하게 관복차림으로 와 있다. 그런데 이놈들은 딱 봐도 여전히 유목민족 특유의 특징이 그대로 나는 머리통에 갑옷을 입고 있다.
당연히 무시할 만하지. 안 그런가?
“그나마 당사자가 직접 와서 봐주고 있는 것이니 지금 내가 검을 들기 전에 그 입을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거란놈들의 주인인 야율아보기가 나를 노려본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래야 내가 네놈들에게 할 말, 못 할 말. 다 할 수 있지.
“은혜도 모르는 족속들이 모욕이란 단어는 알고 있나 보오?”
“뭐라고?”
내가 틀린 말을 했나?
“고구려의 은혜를 잊고 당나라에 들러붙던 과거를 잊고 발해는 거란을 지원했었소. 그런데 이렇게 요하를 넘어 요동을 점령하고 당당하게 발해를 범하는 거란이 아니오? 왜, 내 말이 틀렸소이까?”
“대인선이 먼저 요주를 쳤다!”
이 새끼가 누구를 호구로 아나.
참 어이가 없어서 실실 웃으니 야율아보기의 면상이 더 일그러졌다.
이런 놈이 발해를 정복하려 하다니.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아! 초원의 천하디 천한 족속들이라 자기들이 한 일은 잊고 있나? 요동을 침범하고 발해백성들을 잡아간 과거는 거란이 아니고 중원의 한족들이 그랬나 보오?”
내 말에 기어인 그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어차피 내가 죽을 일은 없지만, 이러다 나를 따라온 상애가 죽을까 걱정이 되기는 한다.
“백제의 사신은 그만 하시오. 동맹인 발해가 위급하여 격분한 것은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국의 황제폐하시오.”
황제? 거란이 참 많이도 컸다.
“황제? 거란족이 통일하고 북방을 좀 장악했다고 하여 천자라도 된 것 같소?
끽해야 무상가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억울하면 중원을 점령하고 오시던가. 그럼 우리 백제가 상국으로 떠받들어주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원 역사에서는 야율아보기나 그 아들이나 저 중 원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한껏 키운 수십만의 정예가 고려땅에서 갈렸으니 요나라는 멸망 때까지 화북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했다.
“저. 저자가! 협상하러 온 것이 아니었나!”
“모욕주러 왔습니다만?”
“뭣들 하냐! 저 자를 당장 치거라!”
더는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닉값은 제대로 해야지. 안 그래?
“왕자님!”
“나 혼자 해결할 수 있소.”
나는 검을 받아내려는 상애를 밀치고, 양쪽에서 거란병사들이 휘두르는 검을 차례대로 붙잡아 깨트렸다.
일부러 한대 맞아주기도 했다. 내 몸이 금강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파킨!
손에 쥐어진 칼조각을 아예 가루로 만들었다.
그 순간, 거란놈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나는 고개를 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천자란 하늘의 아들. 하늘에게 선택받은 지존.”
“대.대체 어떻게.”
“바로 나 같은 사람이 천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오. 자, 그럼 다시 모욕을 당해보시겠소? 아, 야율독욕의 머리를 가져와도 되겠군.”
견훤을 두고 감히 내가 천자를 칭하고 있으니 양심에 좀 찔렸다.
그래도 이것은 저놈을 엿먹이기 위한 수단의 하나일 뿐이다.
“그대가 목숨이 여럿 되는 줄 아는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고?”
이미 심리적으로 위축된 놈에게 내가 질 리 있겠는가.
“뭣하면 여기서 저 황후라 칭하는 여자를 인질로 삼아도 되고, 가한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설마 맨손으로 검을 깨는 내가 화살에 죽을 것 같소?”
거란의 장수들과 야율아보기, 술율평은 할 말을 잃었다.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 검이 깨지는 것을. 그것도 백제의 병사가 가진 검도 아니고 거란의 검이 그리도 쉽게 부서졌다.
허튼 수작도 아니다.
“잘 들으시오. 나는 은혜도 모르는 족속들을 참으로 싫어하오. 하지만 도박은 참으로 좋아하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성경을 버리고 철군이라도 하라?”
“나는 대인선이 거란 도적들 손에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소. 왜? 이미 서경 자체가 분조이고 독립되어있으니 오히려 대인선이 죽으면 서경에 있는 대광현이 황위에 오를 테니까.”
이렇게 까지 밀어붙이면 거란이 암만 대군을 가지고 있어도,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도 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가 거란을 이용하는 것 같으니, 야율아보기 입장에서는 자존심에 크게 상처가 나겠지.
“······.”
야율아보기는 나에게 더는 위협을 가하지 못했다.
슬슬 긴가민가 할 것이다. 내가 정말로 천자인지.
“자, 부디 상경까지 달려가시오. 당장 가서 상경을 함락시켜보시오. 오히려 이렇게 주저하니까 내가 찾아온 것이 아니오? 거란의 도적수장 자식은 상경을 점령할 때까지 내 잘 데리고 있겠소. 아, 그리고 하나 더.”
나는 자리에서 등을 돌리다 말고 마지막으로 야율아보기를 더 몰아붙였다.
“내가 가는 길에 거란놈들이 귀찮게 하면 가한이 아끼는 저 여인을 내가 어떻게 다룰지 모르오. 조금 예의를 갖추지 않고 말하자면. 너희 거란은 오히려 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것. 그것을 명심해야 할 거다.”
그러면서도 슬쩍 술율평을 쳐다봤다.
술율평은 계책이 뛰어난 여자.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아군으로 만들지 못하면 죽이는 것이 이득이기는 하다.
10년 정도 젊었다면 거란에게 치욕을 준다는 이유로 내가 데려갔을지도 모른다.
그야 저런 여장부는 보기 드물거든. 야율아보기가 이렇게까지 나댈 수 있게 거란을 키운 것도 저 여자의 공이 크다할 수 있다.
그러니 어떻게든 처리는 해야 한다.
물론 지금 말한 건 죽인다는 뜻이다.
“이거 괜찮겠습니까? 저놈들이 정말로 상경을 점령해버리면.”
거란군 진영에서 당당히 걸어나온 내게 상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점령하라지. 그래도 서경이 있지 않습니까?”
조금 더 여유롭게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서경 압록부가 있고, 우리가 막힐부와 장령부e 뚫어주면 상경이 점령된다 해도 서경을 중심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대광현을 지지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나약한 자가 가독부가 된다면 우리가 가지고 놀기 수월해집니다. 물론 거란족이 우리 말을 잘 듣고 상경을 함락할 경우의 일이지만. 내게 있어서는 대인선이 남아도, 대광현이 남아도 상관없습니다.”
거란을 무찌른 후에 발해는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대인선이 살아남아 서경과 동시에 공존하는 발해의 정권이 되느냐.
아니면 대인선과 상경이 몰락하고 서경을 중심으로 하는 대광현의 발해가 이 어지느냐.
전자의 경우에는 나라가 양분되는 격이니 그들은 동맹국인 우리 백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후자의 경우에도 정통성이 필요하니 대광현은 우리 백제에 의존해야만 한다.
당장 청야전술로 나라가 풍비박산 났으니 남쪽에서 끌어오는 식량도 필요할 테고.
“음, 그런데 저들이 어찌 생각할까요?”
“솔직히 나는 그들이 상경을 점령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그리하면 포위망을 좁힐 수 있고, 저 멍청한 대광현도 군대를 낼 테니 말이죠.”
결국 서경이 원하는 것은 서경 중심의 발해라는 것이다. 그러니 상경이 몰락하면 자기들 권력에 방해되는 거란족을 치우기 위해서라도 군대를 낼 것이고, 우리 백제에게 협력을 요청할 것이다.
혹시 모르니 이대로 대인선을 만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가.
어차피 여기서 상경까지는 지척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발해가 버티는 거지 옛 전성기를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부자사이를 완전히 갈라놔야지.
* * *
상경은 전시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나와 상애도 몇 번이나 검문을 거치고 나서야 대인선을 알현할 수 있었다.
“오, 이것이 누구인가. 동맹국의 총사가 오셨군!”
그간 보지 못한 사이 초췌해진 그의 몸은 갑주를 입어 그나마 한 나라의 군주로서의 위엄은 갖추고 있었다.
“가독부께서는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강녕할 리가 있겠는가. 저 비열한 거란놈들이 기어이 상경 근처까지 진군했네. 지금 상경에 남은 군대로 저들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야.”
상경에 남은 군대는 3만. 더군다나 상대는 요나라의 야율아보기가 이끄는 거란 최정예부대. 야전은커녕 수성전도 힘들 것이다.
“하여 지금 포로를 이용해서 진군을 최대한 늦춰볼 생각입니다. 그 사이 막힐부와 장령부를 해방시키면 곧바로 거란군을 포위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 대광현은 무엇을 하고 있다던가?”
대인선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안 그래도 이 외신이 서경의 태자께 서신을 보냈는데, 자기들은 분조라 서경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뭐라고?”
대인선의 얼굴이 배신감으로 물들었다.
그래. 분명 그런 이유로 분조를 하라고 했다. 그런데 백제군도 왔고, 서경에서 군대만 낸다면 상경까지 진격해서 상경의 병력, 서경과 백제-일본 연합군의 공격으로 포위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란 놈이 움직이지 않으니 얼마나 화가 날까. 지는 전투도 아니고 이길 수 있는 전투를 말이다.
“우리 백제와 일본 연합군이 6만이 넘습니다. 부여부의 거란군도 무찔렀고, 곳곳에서 패잔병을 규합하야 지금은 더 많은 군대가 되었습니다.”
“아들놈이 돕지 않고 승리할 방법이 있겠는가?”
“사실 조금 전에 거란 진영에 가서 도발을 했습니다. 야율도욕의 목숨을 가지고 어디 상경을 빨리 점령해보라며 압박을 해봤습니다.”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어디로 가나 거란은 절대로 우리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허.”
“아마 놈들은 쉽게 오지 못할 겁니다. 이미 막힐부와 장령부에 군사를 보내 거란군을 격퇴하라 하였으니, 이제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폐하께서는 부디 상경에서 끝까지 버텨주십시오. 어차피 놈들은 보급도 형편없습니다.”
결국 거란은 군사적 우위만 점하고 있을 뿐.
사실상 나라가 움직였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황족들이 똘똘 뭉쳐나왔다.
한마디로 이 전쟁에서 거란을 상대로 포위섬멸전만 치르면 거란을 망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야율아보기는 그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다.
자신들은 발해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결국 야율아보기는 중원만을 노렸어야 했다. 내가 끼어든 이상 요나라의 패배는 확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알겠네.”
“그럼 이만 부여부로 돌아가 막힐부와 장령부를 해방하는 대로 대군을 몰고 올 것입니다.”
“그리하게.”
대인선이 믿을 구석은 결국 나 밖에 없다.
이제 보니 굳이 대광현 쪽의 손을 안 들어줘도 될 거 같은데.
이런 식으로 백제에 점점 의존하게 만들면 요동도 우리가 거저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상경에서는 병력을 얼마나 낼 수 있습니까? 최대한 백성들까지 징집하면 말입니다.”
“4만은 될 것이네.”
“흐음.”
역시 우리가 없었으면 서경의 병력이 변수였을 것이다.
이제는 전후처리도 생각할 때다.
전후에 발해가 우리에게 수만의 군대를 지원해서 백제를 치게 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우리가 북쪽에서 써먹을 병력은 확보해 둬야 한다.
요동땅을 점유해야 한다는 말이지. 슬슬 그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