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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에서 살아남기-43화 (43/154)

43. 너희는 좀 맞자.

* * *

견훤이 태자일로 고심할 무렵. 나는 부인에게 해명할 것이 있었다.

바로 두 번재 부인의 일. 거란의 황녀 말이다.

“해서 거란의 황녀를 부인으로 들이시게 되셨다구요?”

“음, 미안하게 됐습니다.”

“뭐, 그렇게 하시지요. 그게 무슨 문제라고.”

“어?”

이걸 이렇게 간단히?

내가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왕이 여러 부인을 거느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왕실의 번영을 위해서, 또 국제관계를 위해서도 나쁜 일이 아닙니다. 조선왕, 요왕으로 봉해지지 않으셨습니까? 억제력을 위해서라도 요의 황녀를 부인으로 들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보통은 투기나 뭐 그런 걸 하지 않나? 정녕 괜찮으십니까?”

궁중암투 사극도 그렇고 저 상원부인만 해도 어마어마한 질투나 하고 있다.

당장 외모만 봐도 어머니에 비해 한참 밀리니 어쩔 수 없다지만.

“일국의 공주인 소녀가 남편은 박박 긁기라도 하겠습니까? 설마 그러는 것을 바라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그.그럴 리가. 다만 상원부인을 보니 보통 그러지 않나 싶어서.”

“상원부인같은 분이 비정상이겠지요. 당초 이런 혼인은 연모와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아 물론 저는 왕자님을 충분히 연모하고 있습니다. 다만, 요에서 올 황녀도 자신이 팔릴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요. 그런 관계일 뿐인데, 소녀가 투기를 하길 바라십니까?”

상원부인이 들으면 어떤 반응을 할까.

“그런데 소녀라니. 부인은 이제.”

“소녀가 투기를 보여드릴까요?”

“미.미안합니다. 암, 내 부인은 소녀가 맞소. 맞지요. 하하하.”

이러다 나중에 늙어서도 소녀라고 할까 두렵다.

아무리 봐도 어른 앞에서 자신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린 여자를 뜻하는 소녀로 저 자신을 부르는 것 같거든.

“그보다는 요동도 요동이지만, 일본도 문제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본이 왜?

“천황께서 원군을 보내셨다지만, 손실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1만이 넘습니다. 1만이. 물론 상대가 요나라군사니 오히려 잘 싸웠다고 봐야 하지만.”

“음.”

그래. 그건 인정해야 한다. 요나라 군은 강했다. 정예 중의 정예가 아니던가.

그나마 일본군이 그 정도만 죽은 것도 신무기의 도움이 컸다.

그래도 발해군도 엄청 죽었는데. 그 정도면 동맹국으로서 그럭저럭 피해를 본것이 아닐까.

“일본에서 쓸만한 장정들을 전부 낸 것이 그 4만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천황께서는 그만한 보상은 바라고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역시.”

부인도 신라땅을 바라게 되는 건가.

부인이 내 부인이라 해도 결국 일본의 피가 흐르는 일본인이 아닌가. 빨리 통일해서 신라땅을 달라는 압박일까.

“왕자님의 속내를 알고 싶습니다.”

“제 속내요?”

“신라땅을 일본에 넘겨주기 싫으신 거지요?”

“싫어도 약조면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싫다고 하면 일본의 공주인 아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

게다가 나는 약속은 지키는 인물이다.

신라땅을 정말로 줄 수도 있다. 어차피 내가 금강으로 있는 한, 일본을 어떻게든 백제에 병합시킬 테니 그 신라땅이 넘어가도 상관없다.

어차피 다 백제의 땅이 될 텐데 뭐.

“전쟁에 휘말리든 아니든. 결국 이번 전쟁에 지원군을 낸 것은 온전히 천황폐하의 결정입니다.”

“네. 들어 알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그 때문에 불만이 많은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심지어 그들은 고르고 고른 일본의 장정들입니다.”

어우, 부담주네. 그렇게 되면 백제가 일본 백성들 끌어와서 다 죽인 것이나다름이 없지 않은가.

심지어 일본군 총사에 나를 임명했다.

아마, 이건 귀족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려함일까.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하다. 천황은 후지와라와 친하지 않던가. 후지와라 자체가 일본 정치의 기둥이라 할 가문이다.

후지와라는 직접 전쟁에 개입하지도 않았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그렇다면.”

“내전의 가능성도 있겠지요.”

한마디로 그 내전에 개입해서 천황을 지켜 신라땅을 내놓는 걸 없던 일로 해달라 그건가.

확실히 그럴듯하다. 그 정도라면 천황도 아무 말 못하겠지.

그런데 이 공주.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아내가 이렇게 백제일을 돕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제와 일본이 혈맹이라 하나 그렇다고 일본인인 그대가 일본과 백제 중에서 백제를 더 우선시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왕자님과 발해 왕족들에게 휩쓸려 원군 약속이나 하면서 대병을 파병한 천황이 아닙니까. 이참에 고생 좀 해봐야 합니다. 그 김에 왕자님이 일본에 방해가 되는 호족들을 처리해주셔도 좋구요.”

이 여자 무섭네. 보통 인물이 아니야.

“하아, 부인 참 무섭군.”

“서로 좋고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설마 천황에게 신라를 치는 것이 좋다고 알린 것도 이 때문인가.

일부러 천황이 나라의 국력을 깎아먹게 하고 귀족들이 들고 일어나게 하려고?

중앙집권화를 노리는 건가?

귀족들을 쳐내고 완전한 천황중심의 중앙집권화라니. 왕정복고를 만들 셈인가?

확실히 호족들의 힘이 강해지는 지금 도전해볼 만한 일이다.

“원래 이런 분이셨습니까?”

“하하하,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속으로는 음습하신 남편만 하겠습니까?”

“그럼 우린 천년에 다시 없을 인연입니다.”

과연 내 마누라야.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럼 슬슬 본거지를 요동으로 옮기시는 겁니까?”

“그리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참 세상이 재미있게 돌아갑니다. 고려는 호족들의 이탈을 막느라 바쁘고, 발해는 부자간의 권력다툼. 거란도 후계자 문제가 터질 터.”

나는 따로 말한 적이 없는데, 내 아내는 보면 볼수록, 보통 내기가 아니다.

이번 요동전쟁에 나섰던 일본군 중 수하라도 있었나.

어휴. 이거 바가지보다 무서운데. 나만 보면 웃는 모습이 사실 화를 내는 모습이 아닐까.

그래도 그녀는 생각없는 온실 속 화초의 공주가 아니다.

머리가 있다. 누구보다도 이 부여금강의 처가 될 만한 자격이 있다.

“중원도 소용돌이지.”

“그렇다면 왕자님께서 원하시는 훗날을 그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훗날.

백제가 다 커지고 내가 마음껏 쉴 수 있는 그런 훗날.

“후우. 도무지 그대의 속을 모르겠군.”

“원래 여인네에게는 비밀이 많은 법입니다. 그보다도.”

“음?”

대뜸 요염한 몸짓으로 아내가 내게 붙었다.

“새 여인을 들이기 전에 아이는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인. 나 좀 피곤한데.”

진짜. 진짜 피곤하다. 전쟁하느라 피곤이 쌓였고, 요동에서 급하게 돌아오느라 본대도 쥐금 뒤떨어져서 내일이나 함대가 포구에 도착한다. 그런데 대뜸집안에 이런 여우 같은 복병이 있었다니.

이 금강의 몸은 정말 여체에 너무나도 약하다.

“전쟁은 줄기차게 즐기시면서 몇 달간 기다린 소녀를 위해 힘을 못 쓰시겠다구요?”

“아니, 저 그게.”

아내의 강압적인 목소리에 나는 굴복하고야 말았다.

* * *

"조정의 문무백관은 듣거라."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일이 오늘 견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래. 뭐 짐도 슬슬 늦었다 생각하기는 했네. 내 금강이와 신검의 의견을 들어, 태자는 신검이에게 내리도록 할 것이야.”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폐하.”

신검과 나는 서로 마주보고 어린 애처럼 기뻐했다.

신검은 태자가 되어서 곧 왕위를 이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나대로 고통이 덜하겠구나 싶어서였다.

그때 또 끼어드는 존재가 있었다.

“하오나 폐하. 아직 처리해야 할 안건이 있습니다.”

“또 뭐?”

견훤도 슬슬 화가 나는지 주름살이 더욱 짙어지면서 언성을 높였다.

그 목소리에 능환은 살짝 주눅이 들었다가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금강왕자님이 왕에 봉해진다는 것 말입니다. 한 하늘에 해가 둘일 수는 없습니다. 이는 금강왕자님이 요와 발해에 의해 휘둘리며 폐하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백제를 분열시키느게 할 것입니다.”

“어, 음. 그 문제는.”

견훤도 뭔가 생각해뒀겠으나, 지금은 무레하게도 내가 나설 때였다.

내가 계속 견훤의 도움만 받으면 저놈은 나를 우습게 볼 것이다.

“폐하. 소자가 신료들을 설득하겠습니다.”

“그리하거라.”

“병관좌평 말은 바로 하셔야지요. 이 나라는 왕의 나라가 아닙니다. 본디 황제의 나라입니다. 비록 중원의 인정을 받았다고 하나, 명실상부 폐하께서는 마한황제이시고, 나아가 곧 삼한을 통일할 황제가 되실 것입니다. 그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이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당장 저 고려의 왕건도 속으로는 황제를 칭하고 있을 터. 우리 백제가 무엇이 부족해서 황제가 아닌 왕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말빨하면 금강이다. 자 받아봐라. 이 머리에 구렁이만 가득한 노친네야.

“그.그것은.”

꿀먹은 벙어리가 된 꼴을 봐라.

내 말을 그대로 부정한다면 견훤은 황제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는 뜻이 된다.

지금 쯤 그 속은 타고 있겠지.

“심지어 본디 우리의 동맹 일본은 우리를 어버이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어버이가 왕의 나라고 일본은 천황의 나라면 이게 얼마나 웃긴 일입니까? 폐하. 이참에 정식으로 선포하시지요. 중원과 요, 발해는 폐하의 칭제건원을 방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말에 능환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그러게 왜 말로 나를 이기려고 들어?

“이미 우리는 황제국이다. 일본에도 그리 전하였고, 다만 칭제건원은 내 삼한을 통일한 후에 저 엣 백제의 한성을 되찾고 나서. 그때 할 것이야. 병관좌평. 더 할 말이 있는가?”

“어.없습니다.”

“용검이도 없겠지.”

“예.예. 폐하.”

능환과 용검은 이번에도 나를 까낼 수 없었다.

나를 까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들.

이놈들 어떻게 처리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병관좌평과 용검이. 둘 다 그간 몸이 망가져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만. 저지른 죄가 있지 않느냐.”

““예?””

뭘 모르는 척하는 건가.

화약국을 터트린 것이 자기들임을 잊고 있는 건가? 화약을 만들려고 하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모르는 건가.

하기야, 과정은 보지 않고 결과만 봤으니 얼마나 지극정성이 들어가는지 모를 거다.

“감히 모르는 척을 하느냐? 너희들이 화약국을 터트리는 것을 짐이 모를 줄 알았더냐? 화약은 우리 백제에게 신무기였다. 그 화약을 다루는 화약국을 너희가 뭔데 부수었느냐? 설마 너희들 몸이 그 꼴이 된 것으로 끝낼 줄 알았느냐?”

“폐.폐하.”

견훤이 삿대질 하기에 자세히 보니 능환과 용검의 상태는 처참하다.

얼굴이나 몸이 흉하게 일그러졌다는 모양이다.

저런 주제에 끝까지 나를 까내려서 신검에 빌붙으려는 꼴을 보니 망가진 로봇이라도 보는 기분이다.

저런 몸이 되었으니 더 권력에 집착하는 거다. 이제 별볼일 없어진 늙은이와 공 하나 없는 왕자니까 신검을 붙잡으려는 거겠지.

“이번 전쟁에서 그 화약무기가 큰 성과를 냈다고 들었다. 맞느냐? 금강이는 대답을 하거라.”

“네. 폐하. 만일 병관좌평과 용검형님이 터트리지만 않았어도, 더 많은 화약을 가져가 일본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전부 새빨간 거짓. 이미 화약은 충분히 소지하고 있었다. 20만이 넘는 대군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 준비한 성과였다.

“그.그런.”

“한마디로 이번 일본군의 피해는 능환과 용검형님의 공이 큽니다.”

“네가 전략을 잘 못 짠 것을 어찌 우리 탓을 하느냐?”

그래. 그 말은 맞다.

중간에 실수가 있긴 했으니까. 처음부터 내 몸을 밀어붙였으면, 이 전쟁은 진작에 끝이 났을 것이다.

“애초에 신무기를 기반으로 한 전략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전에서 누차신무기에 대해 언급했던 겁니다. 그렇다고 거란놈들이 우리가 신무기를 더 비축할 시간을 줄 리도 만무하고. 안 그렇습니까?”

“윽.”

“그나마도 우리가 계속 물고 늘어진 끝에 이룬 승리입니다. 헌데 지금 누구보고 그런 말을 지껄이십니까?”

나도 참아왔던 분노를 기꺼이 터트렸다.

나는 알고 있다. 견훤이 이제 와 저 둘의 잘 못을 꺼내는 이유를.

신검과 나의 시대를 위해 저 둘을 처리할 셈인 것이다.

원 역사와 달리 제법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만큼 모든 것을 걸 정도로 나를 높게 보고 있다는 증거겠지.

“금강아! 그게 네 형에게 할 소리냐?”

“형이 형다워야 대접을 해드리지. 아닌 말로 형의 목 하나보다 병사 수백의 목이 더 귀중하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꼬우면 한판 뜨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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