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변수
* * *
왕건과의 전투를 위해서 부여성의 사정을 알아보니, 그래도 군량은 넉넉한 편이었다.
그간, 요동성에서 부여부를 지원한 것이 컸으니, 이 정도는 쌓여있는 것이 정상이기는 했다.
다만, 작전을 시행하려면 결국 부여성을 버려야 한다.
현재 발해에서 남은 그나마 멀쩡한 지역 중 하난데. 조금 아쉽게 되었다.
“전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이 성을 곧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좀 기분이 좋지 않군.”
“부여성이라면 옛 부여의 왕성이 아닙니까.”
그렇지. 부여성은 의외로 대단한 장소다.
고구려가 마지막힘을 쥐어짜 당나라와 최후의 전쟁을 치르던 시절. 당나라의 장수 설인귀가 부여성을 함락시켰다.
그 결과 주변에 있는 40여개의 성도 항복했다.
삼국사기에는 부여성이 함락되지 않은 성 중 하나라고는 하는데, 어느 쪽이든 대단한 것이 아닐까.
발해가 멸망할 때는 부여성이 뚫리고 용천부까지 고속도로가 열렸다.
강성하던 시절 부여의 왕성이었지.
그만큼 중요한 사건을 겪은 성이다.
“그 성을 부여의 자손인 우리가 불태워야하다니.”
참으로 아쉽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 뿐이다.
좀 더 여유가 있으면 모르겠는데,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
발해도, 나도 더는 더 버티기 힘드니까. 백제 본국에서는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신검이 신속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
뭔 일이 생겼을 리는 없을 텐데.
“정말 전부 불태울 셈이십니까?”
“나중에 돌아왔을 때, 남아있으면 끌 수도 있겠지.”
그것이 작전이다.
성의 군량고를 불태우면서 소수의 군대만 남기고, 대인선은 요동성으로 탈출하는 그런 전개 말이다.
일부러 부여부에서 끌어모은 대규모 군대는 해산시키고, 소수의 군대가 불타는 성에 남아서 끝까지 고려군을 막는 척 발해를 위한 충성심을 보이고, 그사이 고려군에게 보란 듯이 대인선이 고려군이 공격하는 성문이 아닌 다른 성문으로 나가 효봉의 군대와 함께 요동성 쪽으로 도망치면서 설갈산으로 향한다.
고려에서 보면 대인선이 금강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것으로 보일 터. 당연히 급하게 추격하려 들 것이 뻔하다.
부여성의 군대는 얼마 되지도 않을 테니, 굳이 부여성의 포위에 대군을 두지 않을 테고 나와 만날 수 있다고 여길 테니 왕건이 작정하고 추격할 것이다.
“준비는 되었나?”
“예, 폐하.”
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군량고 근처에 횃불을 들고 있는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들은 군량창고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저 군량이 참으로 아깝군.”
대인선이 혀를 찼다.
“양곡은 또 거두면 그만이지만, 나라를 다시 세우기란 어렵습니다. 고구려가 발해로 바뀌는데 30년이 걸렸듯 말입니다.”
“그렇지. 알겠네.”
고구려꼴이 되기 싫으면 욕심은 적당히 가지라는 뜻이다.
물론 상경이 점령당한 지금 부여성이 사실상, 대인선의 발해가 가진 그나마 큰 대도시가 되었으니. 안타깝기는 하겠지.
“폐하! 적군이 부여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올 것이 왔군.”
슬슬 작전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먼저 부여성을 나가야 한다. 그래야 설갈산에서 명령을 내려 놈들을 격파할 수 있다.
본래는 그게 계획의 일환이었는데.
“백제군이다! 놈들을 추격하라!”
성문을 나오자마자 왜 자신은 추격받아야 하는 건가.
“시발. 뭐야, 저 새끼들! 어?”
이제 보니 저놈들. 고려군이 아니다. 그렇다면 발해군? 아니. 발해군이 나를 왜 쫓아?
가만있자, 그렇다면 대광현에게 붙었다거나 대광현이 보낸 군사들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게획이 이미 들통났다는 뜻인가?
“아닌데. 그건.”
만일에 그랬으면 왕건이 직접 움직였을 것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왕건이 대광현을 진심으로 돕고 싶어서일까? 고려를 위해서다. 얻어먹을 것이 잔뜩 있을 테니까. 그런 마당에 자기 아버지의 자리나 노리는 놈이 일을 제대로 처리할거라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저 봐라. 당장 저리 급하게 나를 추격해오는거.
그냥 생각없이 추격하는 거다. 일단 고위직으로 보이니까.
그럼 지금은 당해주는 쪽이 나을까.
“전하! 어찌 합니까?”
“일단 잡혀준다.”
“예? 저 정도면 우리만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고작 십여명의 군대로 수백을 깨트릴 수 있다고 말하는자신감 하나는 마음에 든다.
“걱정 말아라. 내가 누구냐? 나 금강이다. 돌진하면 돌진했지. 내 보신을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니다. 일부러 적들에게 잡히는 거야. 그래야 나를 잡은 놈들이 누구인지 알 테니까.”
“그렇다면.”
“나 혼자 저들을 다 맡지. 너희들의 반은 설갈산으로 가고 반은 부여성으로 가 이 소식을 전하라.”
“““예. 전하!”””
호위병들을 반으로 가르고 나는 반란군들의 관심을 끌기로 했다.
“내가 바로 발해의 가독부 대인선이다! 네놈들은 누군데 감히 내 앞길을 막아서고 있느냐!”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다가 나는 마지 못해 그들에게 잡혔다.
“가독부! 가독부를 잡았다!”
“네이놈들! 놓지 못할까!”
“목숨을 부지하고 싶거든. 조용히 따라오시오!”
생각보다 이놈들 머리는 좋지 않은 모양이다. 발해 북부의 부여부놈들이라면 내 얼굴을 모르지 않을 텐데.
막힐부와 장령부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곳의 군사들은 내 얼굴을 모를리 없다.
고려군도 왕건으로부터 들었을 테고.
그런데 내가 가독부라는 발언에 옳다구나 데려가는 것을 보면 일단 서경과 남경 쪽 군대이며 대인선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놈들이다.
그러고 보니 상경전투도 왕건이 주도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고려군은 아니고 대광현 쪽 놈들이 확실하겠구나.
“전하! 가독부를 잡았습니다!”
예의라고는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미련한 놈들! 가독부를 성심성의껏 모셔라!”
“어서 오십시오. 아버님. 이것으로 전쟁도 끝이로군요.”
오흥과 대광현의 면상을 이렇게 또 보게 되다니.
자기 아버지를 붙잡았다고 좋아하는 꼴을 보니 퍽이나 우습다.
이걸 죽여 살려? 아니다. 죽일까? 죽여도 된다고 했고, 실제로 대광현이란 존재가 없어야 왕건도 어쩌지 못한다.
“멍청한 놈 같으니. 내가 아직도 니 애비로 보이냐?”
“어?”
“그래 대광현 어디 한 번 내 얼굴을 제대로 봐라.”
이놈들 이제 아주 나한테 죽었다.
대광현 저 새끼의 얼굴을 내가 모르고 있을 리 없지.
대광현은 잠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덩치는 나나 대인선이나 비슷하지만, 확실히 다른 것이 하나 있다.
위압감이지.
이미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나와 대인선은 차이가 있다.
“다.당신은!”
“내가 아직도 니 애비로 보이냐?”
한 번 더 말하자, 대광현은 그제야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파악했다.
“어.어찌. 당신이!”
대광현은 나를 알아본다. 서경의 신료들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내 얼굴을 아는 놈이 있기는 하는 모양인데. 제법 머리를 썼네. 왕건한테 들키지 않고 이렇게 해서라도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건가.”
음, 이제 확실히 알겠다. 이놈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곳에서 자기 애비를 붙잡고 왕건이 아닌 대광현 스스로가 전쟁을 끝낼 생각인 거다.
“부여금강!”
“부여금강이라고? 그럼 벌써 백제지원군이!”
대광현과 그 신하들이 나를 보며 경악했다.
이미 효봉을 통해 지원군을 보낸지 오랜데 뭘 이제 와 저런 말을 할까.
“아버지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저자를 잡아라! 저 자를 인질로 잡아 백제군이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겠다!”
오, 그 판단은 아주 좋습니다.
적어도 내가 그저 평범한 놈이면 먹혀들 만한 이야기다.
내가 평범한 놈이었다면 부여군을 희생시켜서라도 나 혼자 탈출했겠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상황이 나는 반갑기만 하다.
대광현을 붙잡는다면 이 전쟁은 순식간에 우리에게 유리해진다.
“내가 잡혀줄 것 같은가? 오히려 네가 내 손에 잡힐 것을 염려해야지.”
어디 철없는 놈이 감히 나를 어쩐다 만다야?
“여기까지 와서 허세는! 뭣들 해!? 잡아라!”
“예. 전하!”
이거 신덕 때와 비슷한 것 같다.
그때는 협상의 자리였으나, 여기는 처음부터 적대관계로 만났다.
누가 죽고 누가 잡히느냐의 싸움. 그리고 이 승부의 끝은 보나마나 뻔할 것이다.
“니들이 아직 나 금강을 모르나본데.”
괜히 금강이 아니란 말이다. 이 머저리들아.
나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반란군 놈들에게 덤벼들었다.
“무식한 자가 아닌가. 살려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내가 왜 덤비는지는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근처의 병사로부터 창을 빼앗아 막사의 기둥을 모두 무너트렸다.
최근에는 힘도 무식하게 세진 것 같다. 그럼 가진 힘을 열심히 써먹어야지 않겠어?
“덤벼라. 허접들아.”
“저 놈을 죽이면 안 된다!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
대광현이 멍청하구나. 척살하라는 명을 내려도 모자랄 판에, 생포하라는 바보 같은 명령을 내려 애들이 전력으로 싸우지 못할 텐데.
나도 굳이 무기를 들 필요가 없다. 나는 창을 들고 돌격해오는 놈들을 향해 나는 내 몸을 부딪쳤다.
콰앙!
어깨로 들이박자 병사들의 전열이 무너졌다.
마치 도미노와도 같았다. 신덕 때보다 더한 것을 보면 훈련도 제대로 안 된 놈들인거같다.
“끄아아아악!”
“내, 어깨가! 어깨가!”
“저건, 사람이 아니야!”
한 번 박은 걸로 사람도 아니라는 심한 소리나 해대고 있네. 주인이 대광현이라 그런지 병사들의 교육이 덜되 처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광현은 아직 포기가 안 되는 것 같다.
“싸워라!”
“이놈들아! 금강을 잡아라!”
그러니까 못 잡는다니까 그러네.
“광현아. 네가 잡힐 처지인에, 명을 내릴 처지더냐?”
“어느새? 안 되겠다. 화살을 쏴라!”
신덕도 같았었지. 아마? 어지간한 공격이 통하지 않으니까. 나에게 궁수들을 이용해서 화살을 날렸다.
“신덕도 같았지.”
“신덕? 설마. 신덕 장군을 금강 당신이?”
그럼 내가 죽였지. 따지고 보면 혼자 달려들다가 죽은 것에 불과하지만, 대광현에게 나는 원수다.
“더 말해 무엇할까. 내 신덕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렸지. 꼴에 마지막까지 제 주인을 위하던데. 그 주인은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해버렸으니.”
나는 혀를 찼다.
정말로 불쌍한 인간이 아닌가. 그 신하는 어리석었으나, 그래도 제 나름대로 주인을 위하는 인간이었는데.
그래도 이번만큼은 제법 뚝심은 있었다.
반란을 일으킨 주제에 발해인의 힘으로 어떻게든 끝내겠다는 것. 그러나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지.
“대체 그게 무슨.”
“신덕이 그랬지. 자기 주인에게는 제발 죄를 묻지 말아 달라고. 그런데도 너는 멍청하게 이런 짓을 저질렀구나.”
신덕이라는 단어에 그는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놈도 충신인 것은 알고 있는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그놈이 지금 이번 일을 저지르게 만든 원인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뭣들해! 저놈을 잡아라!”
학습능력이라는 것이 없는 걸까.
“그러니까. 소용없데도? 덤벼라. 이 서경의 잡졸들아.”
아예 나무 한그루를 통째로 뽑아들었다. 그러자 대광현의 군사들은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그 멍한 얼굴이 보기 싫어 나무로 후려치자, 일대가 쓸려나갔다.
남은 병사들은 좀 떨어져서 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좀 잔인하게 가기로 했다.
조금은 공포스러운 장면을 보여줘야 치를 떨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