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66화 (66/154)

66. 목표변경

왕건은 죽은 대광현의 수하들이 내뱉은 발언에 제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말이 되는가?

“대광현이 끌고 간 군사는 못해도 수백일 터. 고작 십여명에게 죽었다고?”

“아닙니다. 그것이.”

“소상히 말하라! 이 전쟁의 향방이 달린 일이다!”

“금강이 호위병들은 요동으로 보내고 단신으로 우리 병사들을 농락하였습니다.”

고작 한 명에게 수백이 당했다고?

“고작 한 명에게 수백이 죽거나 다치고 대광현이 죽었다는 말인가?”

“예. 폐하.”

무슨 이런 한심한 일이 다 있다는 말인가.

고작해야 한 명에게 수백이 무참히 당했다고? 제 아무리 오합지졸이라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인해전술로 밀어붙였어도 금강을 붙잡을 수 있을 텐데. 대체 이 무슨 멍청한 소리라는 말인가.

“대체 서경과 남경놈들이 얼마나 한심하면. 고작 한 명에게!”

생각해보면 금강은 예전에 고려군을 상대로도 어마어마한 힘을 자랑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지, 소수의 군대로 밀고 들어와 신검을 구했다.

‘그만한 미친 작자라면 그럴 만하지.’

이렇게 되면 위험하다. 금강 그 하나만으로도 끝이다.

“폐하, 이렇게 되었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무슨 뜻인가?”

“대광현이 죽었으니, 이 전쟁은 이제 우리에게 불리해질 것입니다.”

전쟁의 명분을 잃었다. 반대로 부여금강은 발해 가독부의 요청으로 군대를 끌고 오는 상황이다.

이미 명분에서 졌다. 금강의 군대가 요나라에서 피해를 입고, 전쟁의 피로가 극심하다고 해도 명분에서 진 이상, 이것은 국제적으로 규탄받을 일이다.

규탄할 나라는 백제 밖에 없지만, 고려로서는 굴욕적일 것이다.

“그래서?”

“금강이 군사를 보내기 전에 부여부를 몰아붙여야 합니다. 부여부를 점령하고 금강을 방어해야 합니다.”

기병 3천을 끌고 이번 전쟁에 참여한 왕순식은 금강과의 결전을 치르자 의견을 보탰으나, 왕건은 망설였다.

“이미 군량창고에 불이 붙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인선이 성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큽니다.”

“대인선을 잡고 끝내자는 것이로군.”

전쟁의 명분을 잃었으나, 아직 대인선이라는 존재가 남아있다.

그를 잡고 금강과 협상을 해도 좋을 일이고, 협박을 하여 금강을 물리게 할 수도 있다.

“예. 어차피 부여성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좋아. 한 번 해보지. 서경과 남경의 병사들에게는 대광현이 금강에게 어이없이 죽었음을 알리고 포섭해보라.”

결국 다수의 장수들이 부여성을 속전속결로 점령하자는 의견을 묵살할 수 없었던 왕건이 결단을 내렸다.

그때 장수 박술희가 앞으로 나섰다.

“폐하, 송구하오나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어쨌든 이곳은 발해땅이고 금강은 가독부와 연이 깊습니다. 오히려 저들에게 유리한 전장이라는 의미입니다.”

부여금강은 거란과의 전쟁도 발해땅에서 해낸 인물이다. 발해땅은 이미 그에게 앞마당이나 다름이 없다.

“허면 이대로 돌아가자고?”

“차라리 군대를 나누어 부여성을 공격하고, 한편으로는 서경과 남경을 우리 고려가 가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왕규는 부여금강을 속이기 위한 양동작전을 제안했다.

이왕이면 전부 살리고 싶으나, 지금으로서는 금강을 속이고 불필요한 싸움을 피해야만 한다.

“예. 그게 나은 것 같습니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르는 법. 발해를 전부 삼키기에는 지금 우리 고려로서는 힘듭니다.”

발해가 아무리 말아먹기 직전이라고는 해도 여전히 큰나라다. 반면에 고려는 삼한땅의 절반 밖에 먹지 못한 작은 나라다.

“아쉽군. 아쉬워. 그럼 그리들 하게.”

발해를 집어삼킬 기회를 이대로 버리는 것은 아쉽지만, 이미 땅은 충분히 먹었다. 고려의 북진을 마침내 이룬 것이다.

* * *

설갈산

아무래도 이번에는 내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다.

상황은 나쁘지 않은데, 설갈산으로 고려군을 끌어들이겠다는 계획이 성공할지가 미지수라는 것이다.

대광현이 죽었으니, 결국 전황이 애매해졌다.

아니, 고려가 이제 전쟁명분은 잃었는데, 그놈들이 버티고 있으면 어쩌나?

심지어 대광현이란 놈은 서경과 남경의 군대를 그대로 고려군 본진에 둔 상황이다.

“설갈산에서 굳이 유인전을 펼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히려 장수들에게 준비시킨 나 자신이 무안할 정도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광현을 죽였다.”

내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사실상, 적군의 수괴를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그럼 전쟁이 끝난 것일까. 다들 뭔가 그런 생각이 담긴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어쩔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다들 전쟁의 피로가 누적된 것을 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갈 길을 잃은 고려의 대군과 남아있는 서경과 남경의 군대가 있었다.

“그렇다면 고려군이 물러나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겠지. 3만이나 끌고 와서 허무하게 돌아가겠나? 자네가 왕건이라면 손해만 보고 돌아가겠나? 심지어 백제땅이라면 피해를 입혔으니 명분은 있다.

그런데 이건 아니지. 억울해서라도 돌아가지 못할 것이야.”

내가 왕건이라면 때려죽여도 쉽게 회군하지 않을 거다.

심지어 상대는 나다. 또 등을 보이기는 싫을 것이다.

“전하께서는 그럼.”

“아마 사생결단을 내려할 것이다. 멸망시키지는 못해도 최소한 발해를 털 만큼 털어보겠다 이런 거겠지.”

놈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 한다.

왕건이라면 겅거망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에는 대인선이 문제겠지. 그놈이 잡히면 발해는 끝이다.

아니야. 이참에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가?

이미 말갈군과 일부 백성들은 나를 따르고 있다. 차라리 이 즘에서 각오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전하. 이참에 발해를 드시지요.”

“그럴까.”

장수 한 명의 의견에 나는 내심 수긍했다.

자기가 말해놓고 뭘 그리 놀라나. 지칠 대로 지쳤다.

“예?”

“슬슬 발해를 돕는 것도 지치기는 했어.”

이거 너무 밑빠진 둑에 물 붓기가 아닌가. 솔직히 말해서 지쳤다.

아마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다.

이참에 아예 발해를 먹어버려야 하는데.

“드디어 그러면 결심 하신 것입니까?”

관흔이 눈을 반짝였다.

“어차피 상경도 개박살이 났지. 그렇다면 뭔가 해야 하지 않겠니.”

발해의 중심지인 상경이 고려와 반란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한 나라의 수도가 파괴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가독부가 있는 부여성 역시 위험하다.

요군을 상대로 버텼던 막힐부와 장령부도 수도로 삼기에는 좋지 못하고. 서경과 남경은 완전히 고려의 손아귀에 있다.

“확실히 이렇게 되면 깨진 둑에 물만 붓는 격입니다.”

이번에 어떻게 넘긴다고 하더라도 발해가 멀쩡히 돌아갈까?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노선을 변경하는 것도 좋다.

무작정 돕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왕건처럼 적군으로 나타나 발해를 집어삼키려면 힘들 것이나, 나는 지금껏 내 나름대로 빌드업을 해왔다 이 말이다.

발해백성 전부가 나를 따르지는 않아도, 그간 대씨의 권력다툼에 피해를 입은 백성들도 많다.

그런 발해를 금강이 도우러와 적들의 손에서 발해를 구하였다. 이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파장이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인선은 금강인 내 손이 아닌 왕건의 손에 죽으면 딱이다.

“생각해보니 전혀 나쁘지 않은데.”

대인선도 스스로 미끼가 되어 온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왕건이 더 빠르다면?

지금은 나도 대광현이라는 변수에 걸려서 계획에 문제가 생겼을 뿐이다. 일부러 지원을 가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

설갈산에 머물다가 왕건이 부여성을 치는 것을 보고 급하게 지원갔으나 이미 부여성은 함락되었다고 한다면?

“상좌평은 어찌 생각하시오?”

“음. 이는 군자의 도리가 아닌 줄 알고 있으나, 지금은 사정을 따질 때가 아닐 것입니다.”

맞다. 따질 때가 아니다.

지금을 놓치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지.

“말씀하십시오.”

“일본은 사위라는 명분이라도 있지. 발해에서 전하는 그냥 형식적인 관직만 받은 몸입니다. 이번에 발해를 다시 구한다면 발해를 집어삼킬 방책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 지금이 기회다.

발해를 구하고 나서는 그 어느 때도 명분이 없다. 적어도 이번처럼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한 무리다.

또는 내가 대놓고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 한.

이빨을 드러내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역사에 그런 식으로 발해를 먹는 것으로 남기 싫다.

이 위기를 잘 이용해먹자.

“이참에 끝장을 보자는 것이로군.”

“병사들도 지치고 불만을 가진 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위대한 업적은 세워야 할 것입니다.”

상좌평이 그리 말할 정도라면,

“대인선이 서운해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명분을 더 잡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대광현을 잡았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였습니다. 애초에 유인책 역시 대인선과 대문진, 대화균만 아는 것이지 발해 내부에 그 일을 아는 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상경전투에서 많은 신료가 죽었다. 장수들도 마찬가지

“지금의 태자는?”

“뜻대로 처결하시지요.”

상좌평의 입에서 저런 말 나오기 어려운데.

“그래. 발해를 먹자.”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을 위해서다. 발해를 빨리 먹고 삼한을 평정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일본을 두들겨 패든 해야겠지.

“지금은 그럼 병사들을 쉬게 하라. 식량을 넉넉히 풀도록 하고. 대광현의 머리는 부여성으로 보내도록.”

지금이라면 그럭저럭 시간은 될 것이다.

그리고 대인선에게는 서신 하나를 동봉하면 된다. 대인선이 직접 왕건과 협상하여 대광현이 죽었으니, 고려군은 이만 물러나라 하라고. 그렇게 하면 어느 정도 명분은 된다.

그 서신을 무시하고 고려군이 공격한다면 정말로 고려는 상종 못할 나라로 찍히게 될 것이다.

그때 요나라를 이용해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전하.”

“왜 그러시오?”

“지금이 기회입니다. 막힐부와 장령부에도 사람을 보내시지요. 반군 수괴 대광현을 잡았으니 각 부에서도 군대를 내어 적들을 격파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상좌평이 제법 그럴 듯한 명령을 내리기는 했는데.

“내 명령을 듣겠습니까?”

상황이 이래도 나는 백제인인데, 그들이 들을까?

“부여성에 대인선이 갇혀있습니다. 태자도 갇혀있는 마당에, 그 다음 가는 인물은 전하이십니다.”

현시점에서 부여성이 발해의 조정이나 다름없고, 그 조정이 포위되었다면 그 다음으로는 내가 가장 지위가 높다.

특수관직이라고는 해도 결국 요왕이라는 지위는 왕이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발해놈들도 적인 고려보다는 든든한 동맹국인 후백제의 왕자인 나와 함께하려 할 것이고.

“분명 내가 요왕이니까. 그렇겠지요.”

“요왕의 명이라 하시지요. 그들이 고려군을 공격하는 것만으로도 전하는 충분히 할 일을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다 끝나서 내가 가독부와 태자를 구하지 못하면 동정이 생기겠고.”

그 전에 나는 할 만큼 했다. 오히려 다른 부는 직접 가독부를 지원하지 못하고 유격전을 펼쳤지.

직접 싸운 것은 백제군 뿐이다.

양심이 있으면 나를 동정하고 따르겠지.

“바로 그것입니다.”

“가독부에게는 미안하군.”

“애초에 멸망할 뻔한 것을 살려준 것만으로도 전하께서는 발해에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격입니다.”

“그러려나?”

“네. 오히려 발해의 명줄을 전하께서 더 이어주신 격이 아니겠습니까.”

본래는 926년에 멸망할 나라. 그런데 지금까지 멀쩡하게 살아있다.

나는 충분히 할 일을 다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망하는 것이 요에 망하는 것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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