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새로운 발해
* * *
요동성에 있는 관리들이 과연 발해의 새로운 조정에 도움이 될까?
“요동성은 이제 한족과 거란, 백제인들 중, 지식인이 사실상 독립된 조정을 일구어냈습니다.”
다행이다. 당장 발해조정이 무너졌으니, 요동의 조정으로 대신하면 된다.
완산주에서도 동맹국의 일이니 딱히 문제삼지 못할 것이고.
문제는 수도 천도가 아닌가. 상경으로 돌아가는 일은 어렵게 되었다.
남은 수도들 중에 하나를 황성이 지을 새로운 수도로 삼아야한다.
“상경성은 파괴되었으니 당분간은 중경이 어떤가?”
“중경 현덕부라면, 나쁘지 않습니다. 황후전하를 알현하시지요.”
“일단 이놈들은 감옥에 가두고, 서경이나 남경에 있을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야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고려의 장수들 얼굴을 보는 것도 지긋지긋해서 최승우에게 넘겼다.
그리고 한참 고단해 보이는 황후를 찾아가 심심치 않은 위로의 말을 건네기 위해 황후를 찾아가자, 황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요왕.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왕과 태자가 다 죽어버렸으니, 발해는 이제 끝이 아닌가.”
대인선이 왕자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기록상,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왕위 서열에 들어가는 남자들이 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발해는 그런 왕자들이 남지 않았다.
고려가 작정했었군. 그도 아니라면 대광현이 다 죽여버렸다던가.
사실 발해말 권력다툼을 생각하면 피바람이 불을 필요성이 좀 있기는 했다.
나야 다행이지. 왕자들이 다 죽었으니, 내가 권력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왕위를 비워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누가 있을 거라 생각하나?”
“일단 서경유수가 있지 않습니까.”
대봉예 말이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인사는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 않은가. 심지어 그 사람은 왕위에 관심도 없다는 말이네.”
그럼 답은 간단하지.
“음. 그렇다면 여왕을 올리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여왕이라?”
“당나라는 측천무후가, 저 아래에 있는 천년왕국 신라는 여왕이 세 명이나 나왔습니다. 발해라고 여왕을 세우지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다 전성기를 이끈 것은 아니지. 측천무후는 결국 나중에 이씨에 황위를 돌려줘야 했고, 신라의 세 여왕은 제위기간 동안 외침이 잦았다. 당장 후삼국분열도 진성여왕 때 각이 보인 것이 아니었나.
“그러나, 현재 대씨 여인들 중에 정치를 아는 여인은 없네. 조정도 지금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발해 천지가 불안에 떨고 있어.”
“으음.”
“방법이 없겠는가?”
이거 은근슬쩍 나에게 기대려는 것이 아닌가.
하기야 내가 이대로 요동으로 발을 빼거나 또 발해를 집어삼키겠다고 군대를 움직이면 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지.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를 왕위에 올려봤자 발해는 또 분열할 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나에게 매달려서라도 나라의 명맥을 잇고 싶겠지.
당장에 남은 대씨들은 의지할 곳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나다. 하필이면 구심점이 되어줄 인물도 아무도 없으니 내가 딱 적당한 상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드려야지.
“그럼 소신이 옆에서 돕겠습니다.”
“조정도 지금 제대로 돌아가지 않네.”
돌아가는 것이 이상하지. 대광현 탓에 상경은 박살. 부여성도 맛이 간 상황이고 서경과 남경의 대광현 파벌은 왕건에게 넘어갔다.
우리가 이끌 수밖에 없다.
“요동에 있는 제 관리들을 파견하겠습니다. 그리고 소신이 임시로 조정을 이끌어야겠습니다. 그리하면 되겠습니까?”
이렇게는 해야 황후가 안심할 것이다.
“고맙네. 참으로 고맙네.”
“일단 지금 상황이 상황인 만큼, 상경은 나중에 따로 보수해야 하며 중경으로 천도하여 대씨 여인들 중 한 사람을 올려야겠습니다.”
황후와 다른 대씨들의 찬성으로 발해조정을 이끌게 되었다.
발해의 새로운 수도는 중경 헌덕부. 급하게 임시 궁을 짓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후백제와 일본에도 사신을 보냈다.
“흐음. 황후가 꽤 많은 것을 내주었습니다.”
황후와 나눴던 이야기를 최승우에게 전하자 최승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말입니다. 설마 이 정도로 퍼줄 줄이야. 그런데, 문제는 부마일이 아니겠습니까? 요동성에 있는 아내가 허락한다고 하여 끝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대씨 여자를 아내로 둔다고 해도 이게 마냥 좋은 것이 아니다.
대놓고 내가 대씨 여자와 혼인하겠다고 하면 속내가 보이지 않은가. 그러니 황후 쪽에서 먼저 말하기를 바라야 한다.
“음, 그 일은 심려놓으시지요. 이미 황후도 거기까지 셈을 하였을 것입니다.”
“흠?”
“지금 황후입장에서 무너지는 대씨 황실을 잇고자 하려면 여인들 중 한명을 가독부로 세워야 하고 뒤가 든든한 사위를 맞이해야 합니다. 발해 황실을 번영시키기 위해서라도 이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현재 발해땅에서 가장 큰 세력을 일군 몸은 요왕인 나다. 군사적능력이 뛰어나고 혈통도 좋고, 요동에서 막대한 부를 벌어들인다.
한마디로 내가 가장 좋은 후보라는 뜻이로군.
“그렇다면.”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 분명 황후도 내가 필요하다 여기는 모양인 것 같았다.
* * *
부여성 관아
부여성 관아에서는 황후가 대씨 여인들을 소집하였다.
이유는 다음 가독부의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제 이 발해는 바람앞의 등불이 되었다.”
“어.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럼 소녀들은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까?”
대씨 여인들은 황후의 말에 질색을 하였다.
그녀들도 부여성에서 치욕을 겪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르지 않았다. 발해는 지금 사정이 좋지 못하다. 나라를 이끌어야 할 왕은 죽었고, 태자 역시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말단관리들과 각 말갈의 부를 다스리는 추장과 말갈출신 귀족들 뿐.
고구려계 귀족들은 그 수가 매우 적게 남거나, 상경출신이라 몰락하였다.
그들은 그냥 관리에 앉혔을 뿐이다.
“선대 가독부 시절부터 나라가 안팎으로 불안하기는 하였다. 허나 지금에 이르러 가독부께서 고려놈들에게 시해를 당하셨고, 태자마저 비명에 갔으니, 이제 왕통을 이을 남아는 남지 않게 되었다.”
오로지 여인들만 남았다.
“서경유수는요?”
“서경유수는 원래 적자도 아니기도 하며, 왕위에 관심이 없는 인물이다. 대광현이 반란을 일으키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대체 그 인사는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다.
“그럼 우리는 어찌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믿을 건 요왕 밖에 없다.”
괜히 이러는 것이 아니다. 지금 대씨황실은 작살나기 직전이다. 이렇게 될 바에는 요왕을 확실히 붙들어둬야 한다.
단순히 청을 해서는 안 된다. 확실히 묶을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렇게 대씨 여인들을 모은 것이다.
“하지만 백제인이 아닙니까? 백제인이 발해의 군주가 될 수 있습니까?”
맞다. 황후도 대씨의 피가 끊기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독부와 태자가 죽고 왕자들도 없는 이때, 말갈과 고구려계 모두의 민심을 차지하고 있는 자는 오로지 요왕 부여금강 뿐이다.
심지어 부여의 명맥을 이었으며 발해와 형제라고 까지 하였으니, 명분은 충분하다. 부마의 자격이 있다.
“해서 너희들에게 말할 것이 있다. 너희들 중 한 명은 이 대발해의 가독부가 되어야 한다.”
황후는 대씨 여인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없습니다.”
“그래서 너희를 대신하여 정치를 하고 발해를 이끌어갈 부마를 둘 생각이다.”
“설마.”
“그렇다. 요왕이 될 것이야.”
딱봐도 알 것 같았다.
“어차피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겠군요.”
“우리 사정을 떠나서 요왕이 너희들의 반려감으로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외모도 그 정도면 출중하고, 요군을 비롯하여 고려군도 무찔러 상당한 장수의 자질도 갖추고 있다. 뿐만이냐? 요동은 요왕의 영지요. 중원과 삼한, 왜의 모든 상인들이 드나드는 곳이니 부를 가졌다. 반면에 우리는 저번 전쟁으로 귀족들도 꽤 피해를 보았어.”
대광현. 그 반역을 저지른 놈이 나라의 부를 책임지는 상경의 귀족들을 잡으면서 지금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뭐 그 덕에 왕위를 논하는 자리를 황후가 직접하게 되었지만. 이대로 금강이 발해를 등진다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대씨의 여인들은 황후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납득하기 힘든 것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요와 일본의 황녀와도 혼인을 치렀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명색이 발해 황족인 우리들이 세 번째 부인이 되다니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우리 발해는 그렇게 문란하지 않기도 하구요.”
발해는 사내가 첩을 가지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물론 신분에 따라 다르기야 하겠다마는, 발해의 왕족으로서, 여왕이 될 몸으로써 어찌 세 번째 부인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도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도 그 정도면 훌륭하지 않느냐? 내 금강에게 일러 현덕부로 거처를 옮기라고 하겠다. 그리하면 괜찮지 않겠느냐.”
그렇다고 부인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도 아닌데.
어쩌면 이것은 아예 금강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제가 왕위에 오르겠습니다.”
“대연화. 네가?”
대연화. 대인선의 조카로 현재 대씨 여인들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배포가 있는 여인이었다.
얼마 전에는 금강에게 고려군에게 복수해달라고 매달리기도 했다. 그래서 가독부를 죽인 박술희란 자의 목을 벨 수 있게 해주었다.
“어차피 얼마 가지 못할 왕위겠지만.”
“왜 그리 말하는 것이냐?”
“결국 왕노릇은 금강왕자가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여왕이라는 직함은 대씨가 왕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해도 핏줄은 우리 대씨 핏줄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거라.
그래도 거란이나 고려놈들보다는 낫지 않느냐.”
“예.”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다.
확실히 거란이나 고려보다는 신의도 있고, 지금껏 발해의 위기를 구해준 금강왕자가 나을 것이다.
그렇게 발해 16대 가독부는 여왕으로 결정되었다.
* * *
서경압록부
속주전투에서 대패를 한 왕건은 서경압록부까지 겨우 도망쳐왔다.
서경에 도착할 무렵에 합류한 군사는 고작 2천이 채 되지 않았다.
왕건은 패배감에 한동안 국정을 왕규에게 맡겼다.
“폐하,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무슨 결정을? 내리라는 말인가? 적에게 등을 보이고 추하게 살아남은 일국의 지도자가 무슨 선택을 내려야 장수들이 만족하겠는가?”
부여성에서는 지금도 고려의 장수들이 금강의 손에 고문을 받고 있을 것인데, 가슴을 가라앉힐 수 있겠나.
“폐하.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지금 짐에게 안정을 취하라!?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대광현! 그놈과 동맹을 맺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 놈과 동맹을 나라를 망하게 할 뻔했다.
“폐하. 사신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니, 신속히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왕건은 분기를 가라앉히기로 했다.
그의 말대로다. 너무 감정에 치우치면 안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소신의 생각으로는 장수들을 구하자고 이 땅을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고려는 그들 말고도 쓸 장수는 많습니다.”
지금은 전국시대다.
당연히 죽을 장수들을 빼고도 많은 장수들이 언제든 명령만 내리면 싸우러나갈 것이다.
“다른 의견은?”
“설령 장수가 많다고 한들 그들 모두가 명장은 아닙니다. 고려군대를 이끌 기둥들은 구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복지겸의 왕규와는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명장을 키워내기란 어렵다. 더군다나 지금 후삼국이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고 있는 이때, 그간 잘 키운 장수들을 이렇게 내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틀린 말도 아니라 왕건은 신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