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71화 (71/154)

71. 악랄한 계획

* * *

왕건의 신하들은 장수를 지켜야 한다는 파벌과 서경과 남경을 지켜야 한다는 파벌이 서로 침을 튀기며 싸웠다.

“그럼 이땅을 내어주자는 말입니까? 어렵사리 얻은 땅이고, 금강이 굳이 서경과 남경으로 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도 지금 전쟁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차라리 저들의 제안을 거절하시고 남경과 서경을 취하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정에 남경과 서경의 땅을 내어놓는다면, 어떻게 다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많은 호족들이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땅도 내놓고 물러난다면, 장차 호족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 거라 생각하십니까?”

무슨 말이 저리도 많은지 왕건은 머리가 아팠다.

물론 왕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지금 이대로 서경과 남경을 내어준다면 끝이다.

“그렇다해도 장수들의 목숨을 가지고 이러는 것은.”

“음.”

“어찌 그러십니까. 폐하.”

“금강이 우리가 제안을 거절한다고 하여 장수들을 죽이겠는가?”

왕건이 볼 때, 금강이 당장 장수들을 죽일 것 같지는 않다.

“그럴 듯합니다. 금강이라는 인물은 사람을 아끼는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회유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설령 아니라 해도 인질협박이 통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을 테니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냥 풀어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금강이 유금필을 살려준 적이 있다. 그러다가 나중에 돌려보내지 않았나. 당시에는 중론 때문에 유금필을 그렇게 내버리고 말았으나 금강은 유금필을 멀쩡히 보냈다.

“그렇게 하지. 지금은 금강의 자비를 바랄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짐 역시 호족들이 걸려. 패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되 최소한 서경과 남경을 얻고, 대인 선과 태자를 죽여 발해를 혼란에 빠트렸다는 것을 호족들에게 알려야 하네.”

“예. 폐하.”

그저 금강의 자비를 바랬던 왕건과 고려조정은 보름이 되지 않아 발해에서 고려의 장수들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후회했다.

* * *

“전하. 왕건으로부터 답서가 도착했습니다만.”

드디어 답서가 온 것인가. 서경과 남경을 넘기면 편하겠다만.

“왕건 이 작자가 지금 나를 감히 시험하려 드는구나.”

왕건의 답서는 절대로 협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서경과 남경과 어느 하나도 반화할 수 없다는 것.

이 자식이 감히 지금 나를 우습게 보고 있어?

내가 이놈 속을 모를 것 같은가.

저번에 유금필을 내가 살려보낸 것처럼 장수들을 살려보낼 줄 아는 것이겠지.

“흥. 고려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당연한 선택이지. 우리 폐하께서 사사로운 정으로 대업을 그르칠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냥 우리를 죽여라.”

“그렇다. 그냥 우리를 죽여라! 우리는 절대 너에게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죽여달라면 죽여줘야지.

“그래. 관흔장군.”

“예. 전하.”

“살려주려고 했더니 다 죽여달라네. 그럼 죽여줘야지 어쩌겠나. 싹 목을 잘라 그 시신은 왕건에게 보내 예우를 다해주게.”

“예. 전하.”

내 말에 고려장수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하니 내가 살려줄 거라 여겼나. 제 아무리 장수라고 해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운 모양이다.

아마 자존심이 있으니 살려달라고 빌지는 않겠지. 그러나 최소한 내가 죽일 것이라고는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금필의 전례가 있으니까. 그런데 나를 너무 안일하게 봤어.

“단 한 놈도 남김없이 그 목을 베어 왕건에게 보내게.”

“예. 전하.”

인질의 가치가 없다고 풀어주는 바보가 아니다. 그렇다고 밥만 축낼 포로를 계속 둘생각도 없다.

이놈들의 충성심은 나에게 방해가 될 것이 뻔하다.

“전하. 황후께서 오셨습니다.”

황후가?

* * *

“요왕. 내 더도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내 선왕의 조카인 대연화를 가독부로 세울 것이네.”

대연화? 대인선의 조카 중 그런 여자도 있었나.

“그렇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부마가 되어주기를 바라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상좌평의 말대로다. 중경 현덕부의 일도

“부마라니요. 외신은 사적으로는 백제국 왕자이며 이미 부인이 둘이나 있습니다. 설마 두 부인을 배신하고 가독부에 오를 분과 국혼을 치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전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두 부인이 있는 이상 힘들다.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속으로 웃고 있다. 대놓고 발해왕실이 나를 지지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나.

“그렇네. 딱히 부인들을 버리자는 이야기가 아니지. 우리 발해입장에서는 그러는 것이 좋기야 하네만. 많은 걸 바라지 않아. 그저 대연화를 자네가 지원해주었으면 할 뿐이네.”

“음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원래 이럴 때는 넙죽 받기보다는 삼세번은 거절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도리다.

그렇게 해야 내가 발해에서 더 영향력을 가지게 될 테니까.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네.”

“요동성의 제 신하들도 생각해주셔야 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이니, 지금 당장은 다음 황위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황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반면에 상좌평 최승우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음, 전하. 이제 전하께는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마가 된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전하께서 발해의 군주가 되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습니까?”

맞다. 바보도 아니고, 지금 부마가 되라는 것은 왕이 되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황후는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설마. 제게 발해의 가독부가 되라는 말입니까?”

“고구려의 동명성왕 께서도 부여의 왕자로서 부여를 벗어나 고구려를 세우셨습니다.”

“그거랑은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번 일은 완산주에도 알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미 독립적인 세력이라고 해도 내가 발해의 다음 가독부와 혼인하는 것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폐하께서 이미 전하를 부여왕으로 임명하셨고, 발해는 부여의 습속을 이었습니다. 명분도 있습니다.”

“으음.”

아니, 그거야 나도 알지. 명분은 지금 내게 전부 있다. 요나라의 야율배도 떨어지면 내가 요나라를 먹을 수도 있고.

그쪽도 백제인이 관리로 있지 않던가.

“야율배도 오래가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이 북방은 전하의 손에 모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백제인입니다. 어찌 아버님의 기대를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신이 보고 있다. 그래도 내가 스타트를 끊은 지점이 후백제의 왕자인데. 내 신분을 버리고 발해의 부마가 되어 나중에 발해왕이 된다고 한들.

좋게 보이지는 않을 거다. 발해는 백제에 합병시켜야 한다.

“음. 그렇기는 합니다만.”

“발해를 먹고 고려를 먹은다칩시다. 제가 발해의 가독부가 되는 이상, 백제와는 다시 삼한이 패권을 두고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건 피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최소한 내가 백제인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야 통일하는데 어려움이 없어진다.

그런 뜻이다.

적어도 내가 난 나라에 칼을 겨누는 미친 짓은 하지 말아야지.

“소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뭐 생각은 좋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별문제 없이 완전히 발해를 흡수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다만, 거기까지라는 것이다.

당장 드넓은 만주의 주인이 되고자 발해의 가독부가 되는 것은 현실만 본 것일 뿐. 미래를 조금 더 봐야한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전하. 대연화 공주님이 뵙기를 청합니다.”

이번에는 대연화라고?

“들게 하라.”

상좌평과의 대화가 끝날 무렵, 공주가 찾아왔다.

수려한 외모의 북방계 미인. 그러나 요시코와는 달리 정숙한 분위기의 여인이다.

“제가 방해한 것은 아닙니까?”

“아닙니다. 마침 대화를 끝낸 참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대연화는 지난번에 고려군을 잡아달라 했던 여인이었다.

나름 얼굴은 반반하다. 발해의 공주 중에서는 가장 나았다.

설마하니 황후가 물러난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찾아올 줄은 예상도 못했지만 말이다.

“황후께 들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발해는 패망직전입니다. 그 고려라는 놈들 때문에 말이지요.”

“예.”

“황후께서는 그저 발해의 명맥을 잇고자 하고 싶으시겠지만. 나는 다릅니다.

어차피 이 나라는 이제 요왕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잘 알고 있구만. 아니 눈치가 빠른 건가.

내가 고려군을 무찌르는 것을 보고 이미 답이 나왔다 생각했을 것이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십니까?”

“바라신다면 가독부라고 해도 아내로서 성심껏 요왕을 받들겠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발해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온전히 수습해주십시오.”

온전히 수습이라.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은데.

“흐음. 무슨 말씀이시오.”

“이 몸. 여인네라지만 알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요왕께서는 이 난국을 헤쳐나갈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있지. 이 판도 전부 내가 짠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따지고 보면 나는 늘 터지는 발해의 혼란에서 실리를 취하려고 하고 있는 거지만.

“그게 무슨 말씀.”

“하지만, 솔직히 요왕이라고는 해도 남의 나라 일이니 그냥 넘어가려 한 것이 아닙니까? 청컨대 요왕께서는 저를 도와주시지요. 제가 가독부가 되면 결국 선왕과 태자는 죽었으니 제가 다 수습해야 하지 않습니까.”

“음.”

확실히 여왕으로서는 너무 감당하기 싫을 정도의 나라사정이다.

나 같아도 싫을 것이다.

그런데 가독부가 되겠다고 한 것은 대연화가 아닌가?

“제 부마가 되신다면, 아니, 제 남편이 되고 제가 요왕의 여인이 된다면 발해 천하가 요왕의 손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래. 그거 구미가 당기는 소리다.

보아하니, 이 여자도 진심인 듯 싶다. 형식적으로 대씨의 피를 이어가겠지만, 나라를 이끌어갈 자신은 없으니 전부 맡기겠다는 것.

내가 전부 유도한 건 줄도 모르고 말이지.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나를 비난하지는 못할 거다.

어쨌든 이 나라를 지금껏 살려둔 것은 나니까.

“정녕 그런 걸 원하고 계십니까?”

“이대로 제가 가독부가 되면 나라가 어찌 될지 해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의 정자도 모르는 여인네다. 심지어 조정이 갈려 나간 상황. 이런 상황에서 왕위를 받는다고 뭐 뾰족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스스로 가독부가 되려 하셨다고.”

“황후께서 대씨 여인들을 소집한 것은 결국 형식입니다. 가독부의 자리를 노릴 수 있고, 부마를 둘 만한 여자는 저 혼자입니다.”

확실히 어리거나 엄청 나이 많은 사람들만 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는 대연화밖에 딱히 선택지가 없던 것 같다.

“그럴 바에는 스스로 가독부가 되겠다고 한 것이로군.”

“예.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아시다시피. 내게는 이미 부인이 둘이오. 부마가 될 것이라고는 하나 실제로 내가 남편으로서 할 일은 황실의 번영을 위한 것밖에 없겠지.”

대연화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여인네가 이렇게 청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좋지 못하지. 그래. 어디 해봅시다. 완산주에 서신을 보내고 마한 황제 폐하의 허가부터 받읍시다.”

“백제 본국에서 허락을 하겠습니까?”

신검이 군주라면 모를까. 아직 견훤이 살아있다. 발해왕에 임명받는다는 형식을 갖추면 백제에서도 별다른 말은 없을 것이다.

“그대 말대로 발해는 이제 내 수중에 있습니다. 나는 백제의 왕자지요. 마한 황제께서는 발해를 얻기 위해서라도 허락을 할 것입니다.”

“신첩은 요왕만 믿겠습니다.”

“곧 가독부가 되실 몸입니다. 짐이라 하지 그러십니까?”

어쨌든 형식적으로는 나는 남편이 될 몸이니까.

“그래도 신첩은 이제 요왕의 아내가 될 몸입니다.”

“단순한 아내로서 나를 남편으로 대하는 것보다 가독부로서, 성왕으로서 남편을 대해주셔야합니다.”

그렇게 해야 발해의 남은 귀족들이 의심을 조금이나마 덜겠지.

그리고 이런 시대에는 단순히 남편에게 순종하는 여자보다야 권신에게 순종하는 군주의 모습이 더 끌리는 법이다.

나는 발해를 쥐고 흔들 권신이 되고, 가독부는 나한테 끌려다니다가 백제와 하나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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