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72화 (72/154)

72. 연방제

* * *

완산주

완산주의 궁궐에서는 견훤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간만에 느껴지는 시원스러운 웃음에 상원부인과 신검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크크크. 크하하하하핫!”

“폐하, 등창이 깊습니다. 어찌 그러십니까.”

“발해가 우리 금강이 손에 들어갔다는 구려. 금강이가 큰 일을 해냈어!”

견훤은 금강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그게 어인 말씀이십니까?”

“고려의 박술희란 놈이 글쎄. 대인선과 태자를 죽여서 당장 왕위를 이을 자가 없다더구나. 해서 대씨 여왕을 세우는 대신 부마로 금강이를 생각하는 모양이야.”

금강이 부마라면 결과적으로 발해는 금강의 손에 들어오는 격이다.

최승우의 말이 맞았다. 괜히 태자로 올렸으면, 백제 하나로 만족했어야 했다.

“그런 일이. 금강이는 이미 부인이 둘이나 있지 않습니까? 가독부의 부마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 이것저것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발해가 사정이 열악한 모양이야. 어쩔 수 없는 모양이네.”

가독부가 왕자의 세 번째 부인이 되는 굴욕을 받아야 할 정도로 발해의 사정이 최악이라는 소리.

“하여 허락해달라 보낸 것이로군요.”

“그렇지. 허락할 참이오.”

“으음, 그게 과연 옳겠습니까? 가독부의 부마가 된다면 발해인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명색이 백제인인데.”

발해인이 되어 백제를 공격하면 어쩌는가.

상원부인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금강이 진심으로 신검을 태자의 자리에 올렸다고 해도 그것은 이 백제땅에서 상원부인을 비롯한 반대파벌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럼 이제 저 발해라는 대국에서 부마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앞일을 장담할 수 없던 상원부인은 마음이 불안했다.

당장, 지금 신검의 자리도 불안한데, 금강이 백제가 아닌 발해를 위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훗날 백제와 연방을 맺어 통일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는구려. 오히려 우리 세작으로 가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이다. 그보다 신검아.”

“예. 아버님.”

“일본의 일은 어떻게 되어가느냐? 그놈들이 우리에게 다시 따진 것으로 알고 있다. 연왕문제에 대해서 말이야.”

이미 항의사신을 보냈으나, 일본에서는 그저 침묵 뿐이었다.

현재 귀족과 천황의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 일본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는 태자 신검은 일본과의 외교를 실패했다고 여겨 견훤에게 제대로 보고도 하지 못했다.

“음, 그 때문에 아버님께 허락받을 일이 있습니다.”

“무엇을?”

“일본과의 외교에 금강이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견훤은 눈썹을 찡그렸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라는 말인가. 태자라는 놈이 지금 저 멀리 있는 동생의 도움을 바라는 것인가.

심지어 태자가 된 이후에 한 일도 많지 않았다.

금강이 왕건과 결전을 치르고 있을 때, 한일이라고 북진이 아니라 신라를 압박해서 서라벌 밖으로 기어 나오지도 못하게 만든 것. 그거 하나 뿐이다.

‘이런 한심한 놈.’

금강이가 왕건의 군대를 궤멸시켰다는 소식이 들어왔을 때는 차라리 북진을 했으면 고려를 잡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었는데, 이제는 외교마저도 동생에 의지하려 하나. 대체 태자가 왜 되었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네 동생은 저 북쪽에서 고려군을 상대로 겨우 살아남았는데, 그까짓 일본놈들에게 꿇려서 아우에게 도움을 받아?”

“소.송구합니다.”

“신검아. 내가 너를 왜 혼을 내겠느냐. 너는 장차 내 뒤를 이어 통일된 삼한을 경영해야 할 몸이다. 안 그러냐?”

견훤도 괜히 이러는 것이 아니다.

금강은 저 북방에서 바쁘다. 발해를 백제에 병합시키기 위해 한발을 내딛었는 데, 정작 태자는 그보다 공이 덜하니까. 최소한 외교적으로 일본에 큰 소리는 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예. 폐하.”

“그런데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 어쩐다는 말이냐. 일본에 너의 능력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견훤의 기대에 신검은 그저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 * *

중경 현덕부 황성

“““대발해국 만세! 성왕폐하 만만세!”””

성왕. 발해에서 군주를 부르는 호칭으로 가독부로도 부르지만, 앞에서는 성왕으로도 불린다.

대연화는 중경의 황궁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고구려계 귀족들이 대거 몰락하면서 그 자리는 요동에서 관직을 받고 살던 백제인들이 차지하거나 말갈계 귀족들이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때에 맞춰 중원의 사신들도 도착했다.

“짐은 더는 발해국의 성왕이 아니다. 시조이신 고왕께서는 대고려의 장수셨으며, 발해는 과거 고려의 땅과 풍속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이 나라는 발해가 아니라 대내외로 고려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짐은 고려의 태왕이자 성왕이 오. 천손의 후예다.”

즉위식에 모인 외국의 사신들 앞에서 대연화가 선포했다.

대인선이 생전에 하지 못한 일을. 왕건의 고려에 엿을 먹이고 왕건의 혈압을 올릴 수 있는 한방을 대연화가 일구어낸 것이다.

그래. 바로 이거지.

“하여 짐은 저 남쪽에 신라땅에서 신라계 호족인 왕건이 세운 고려를 인정할 수 없다. 저 중원과 초원, 바다를 넘어 온 사신들은 이것을 명심하고 진정한 고려와 남쪽의 신라의 후신을 구분해야 할 것이며, 하늘 아래 천명하건대. 짐은 저 고려를 칭하는 국가를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발해의 위상이 예전과 같지 않으니, 저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사신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고려에 대한 도발로 이어질 것이고, 적어도 고려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중원은 혼란기기도 하니, 고려에 신경 쓸 나라가 얼마나 될까. 고려나 후백제나 고작해야 중원의 관직을 받는 것이 전부다.

이번 일로 고려의 왕건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발해가 국호를 고려로 바꿨으니. 심지어 조정의 절반은 내가 채워서 사실상 반백제나 다름이 없는 것이 지금의 발해니까. 아마 뒷목은 잡지 않을까.

“지아비인 요왕 부여금강을 대내상에 올려 국정전반을 총괄하게 할 것이다.

조정의 문무백관은 짐의 뜻을 받들라.”

이것도 원래 계획대로다. 대내상은 발해 최고 권력기구인 정당성의 수장이다.

그보다. 이 여자. 연기 하나 제대로 한다.

여왕이면 비록 부마가 있더라도 남들에게 무시당할 수 있으니, 확실히 위엄을 보여야 한다고 했더니, 정말로 여왕이라는 분위기가 풀풀 느껴지는 말투에 묵직했다.

그리고 나도 즉위식 이전부터 정식으로 부마라고 알려졌다.

말갈출신들은 이미 나한테 코가 꿰어 알고 있는 눈치였으며, 고구려계는 처음 들었으나, 지금은 마땅히 나에게 반발할 수도 없고, 그럴 처지도 아닌 터라 받아들인 것 같다.

백제에서도 견훤이 수락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양국의 국혼으로 이어졌다.

듣자하니 일본이 연왕일로 보낸 우리 사신들에게 답서를 주지 않은 탓에 앙갚음으로 일본의 황녀와 혼인시켰음에도 내가 부마가 되는 것에 찬성한 분위기인 것 같다.

게다가 발해의 일방적인 구혼이라는 입장이라 견훤으로서는 나라의 위상을 위해서도 받아들이는 좋았을 것이다.

즉위식을 끝내고, 새 가독부가 즉위함으로서 나라의 혼란을 잠재울 무렵. 나는 대내상으로서 제일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요와의 국교도 재개해야 합니다.”

요와의 문제. 그리고 신하들 앞에서 대연화가 적당히 나와 논의를 하는 것을 보여 단순히 얼굴마담이 아니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태봉이 우리의 원수이듯, 요도 우리의 원수가 아닌가? 그럼에도 대내상은 국교를 맺어야 한다 보는가?”

발해가 고려가 된 시점에서 백제와 발해인들은 왕씨의 고려를 태봉이라 부르게 했다.

지금의 고려가 된 발해와 신생국 고려를 구분짓기 위해서다.

무엇보다도, 감히 왕건이라는 자가 신라의 후신을 고려라고 세웠으니, 진정한 고구려 계승국으로서 왕건의 고려를 깎아내리고자 하는 의도였다.

“성왕폐하. 요는 이전과 많이 다릅니다. 이곳 고려땅에서 주력군을 몽땅 잃었으며, 요가 다시는 요하를 넘지 못하도록 야율배와 확실히 밀약을 맺었습니다.”

넘고 싶어도 넘지 못한다. 대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떡하니 버티고 무슨 수로 넘어온다는 말인가?

“내 대내상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변수는 언제든 있는 법이 아닌가?”

“지금 요의 조정은 한족과 백제출신의 관리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한족 관리들은 요나라 내부를 수습하느라 바쁘니 감히 넘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저들과는 상호 이익을 위해 국교를 맺은 후, 저 태봉에 빼앗긴 영토를 탈환하셔야 합니다.”

“군사의 부분 역시 대내상에게 일임하지.”

현재 발해의 군부도 상당히 개혁했다. 말갈계가 많고, 고구려계는 지난 전쟁에 많이 죽어 새로 길러내야 하는 탓에 백제의 무신들이 자리를 잡았다.

“황공할 따름입니다. 폐하.”

“그러나, 대내상은 백제의 왕자이기도 하다. 그대만한 부마감이 없어 짐은 백제에 청하고 청해 그대를 부마로 삼았으나, 대내상의 위치가 백제의 왕자이며 부여왕이고, 또 발해의 요왕이기도 하니, 기형적이지 않은가. 이 역시 백제와 고려의 앞날을 위해 조율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조율하자는 것은 양국에 양다리를 걸쳤으니, 내 자리를 똑바로 하라는 것이다.

말하면서 대연화는 눈가에 호선을 그렸다.

내가 신하들 앞에서 저리 무겁게 나가라고 한 것이 그리도 불만이었나보다.

그래. 그 정도는 내가 처리해야지.

이 기형적인 구조를 받아들인 것도 그 정도는 해결하기 위해서니까.

“예. 방책은 마련할 것입니다.”

이미 생각해둔 것은 있다.

다만 백제 본국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게 관건일 뿐.

* * *

“음, 결국 이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정당성에서 최승우는 찻잔을 들며 중얼거렸다.

“뭐 예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안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다만. 백제 본국에서도 협조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의 발해는 성왕이 내 아내니 받아들일 것이다.

“음, 소신에게도 일러주십시오.”

“연방을 하는 것입니다. 백제와 고려를 부여연방이라는 울타리로 묶어두는 겁니다.”

"전에도 말씀하신 그것이로군요."

"예."

이름하여 부여연방이다. 이렇게 하면 백제연방, 고려연방. 둘 중 하나로 달고 싸우지 않아도 될 완벽한 이름이기도 하고 두 나라 전부 부여와도 관련이 깊으니까.

“부여연방이라는 이름 아래에 2왕조를 존재하게 만든다는 말씀입니까?”

“백제와 고려는 형제국이다를 이전부터 각인시켰으니 나쁘지 않습니다.”

“참으로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면 전하께서 양국의 신하로 취급된다해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고려는 나를 굳이 빼앗으려 하지 않아도 되고, 백제도 고려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 나쁘지 않다.

이 연방제는 국제적으로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고려는 이번에 발해를 통헤 취하려는 이득은 서경과 남경으로 얻었지만, 수만에 달하는 군사를 잃었으며, 장수들도 많이 잃었다.

“문제는 저 남쪽의 태봉과 신라를 부순 이후에 이 연방체제에 불만을 삼을 인물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인데.”

“그 역시 생각해둔 방도가 있으신지요.”

“각국의 황제가 있는 수도를 따로 두고 연방의 수도를 따로 두는 것이 어떤가 합니다.”

일단 옛 백제의 수도를 찾고 나면 그곳을 백제의 수도. 발해는 현덕부를 그대로 수도로 두고 평양을 연방의 수도로 하는 것이다.

“조정을 아예 하나로 합치자는 뜻이라면 그럴 듯합니다. 이미 발해 조정도 백제나 말갈계, 힘없는 고구려계 귀족들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그래. 그래서 거침이 없다.

“가독부도 이미 나를 따르고 있으니까. 신검 형님만 설득하면 될 것입니다.

상좌평이 잘 설득해주세요.”

“예. 전하. 백제로 가 제가 조정에서 연방을 꺼내보겠습니다.”

백제의 완산주 조정은 여전히 견훤이 이끌고 있다.

신검이 대리청정을 하고 있으나, 그것이 영 못마땅한지 최근에는 지병을 안고 있는 견훤이 조정을 이끌어간다.

아마 상좌평이 완산주로 가면 상대가 신검이 아니니 견훤을 설득하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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