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개경이 제법 잘 버티기는 한다.
어디서 꾸역꾸역 올라와 우리와 맞서기는 하는데, 그때마다 족족 화총수들에게 사격 당해 죽는다.
"결사 항전하라! 막아라!"
"막아라! 발해놈들을 막아라! 고려의 수도를 지켜라!"
저기 장대에서 지휘하는 놈이 보인다.
딱 봐도 익숙한 면상이다. 어디서 봤더라. 태봉 놈들은 전부 쉽게 잡아서 일일이 기억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름이 좀 있어 보이는군."
"복지겸이라는 장수입니다. 그 옆은 왕규입니다."
음, 딱 봐도 느낌이 오는 면상이로구나. 복지겸과 왕규.
"어차피 중과부적임을 모르는 걸까. 우리도 머릿수로 밀어붙여라. 아침이 오기 전에 성벽을 넘을 것이다."
"예. 전하!"
공성전 끝에 성벽의 태봉군이 전멸했다.
어느새 성문도 뚫려 내 군대가 단숨에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요나라 황성에 이어 이제는 태봉의 도읍도 우리가 차지하는군요!"
확실히 요나라 때보다도 저항이 덜한 것이 아쉽다. 그 왕건인데 수도를 이렇게 내버려 두다니. 아쉬울 따름이다.
"뭐 빈집털이에 가깝기는 하지만 말이다. 일단 성을 장악해야 한다. 남은 태봉군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백성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일반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오히려 백성들을 약탈하다가 삼국통일 이후 민심을 수습하기 힘들 것이다.
지금부터 적절히 행동하는 것이 좋겠지.
점령했다고는 하나 나는 같은 민족으로서 백성들까지 두드릴 수 없다.
"약탈도 금지다. 요나라 때와는 달리 태봉은 삼한민족이다. 그러니 괜히 자극해서는 안 될 것이야."
"예! 전하!"
괜히 약탈했다가 백성들이 들고일어나면 그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그냥 개경에 남은 귀족과 왕족만 잡으면 충분할 것이다.
개경에 진입하자마자 우선 시가전을 대비해 철저히 군사들을 풀어 태봉군을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궁궐에 당도했다.
"궁궐을 지켜라!"
궁궐을 지키는 태봉군들도 꽤 있었다.
애초에 공성전을 포기하고 시가전으로 돌린 듯싶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그냥 있는 대로 다 부수는 수밖에. 내가 마냥 선인이라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궁궐은 포격하라. 감히 백제를 침공하여 아국을 멸망시키려 하는 자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쾅! 콰광!
궁궐에 화포를 쏘고 공성 무기까지 동원해서 부쉈다.
나 같으면 이럴 때를 대비해서 왕족들을 어디든 보내놨을 텐데. 대다수의 궁인들이 붙잡히면서 왕후도 잡혔다고 하더라.
음, 갑자기 옥좌에 앉고 싶은데.
적국의 수도를 점령했다면 모름지기 옥좌에 앉아보기는 해야 하지 않을까. 견훤도 신검도 없는데 나는 좀 앉아도 되겠지?
"옥좌는 있나?"
궁궐에서 피 칠갑을 한 채로 당당히 걸어 나오는 관흔에게 물었다.
"허허. 전하, 소장이 누구입니까. 관흔입니다. 전하께서 옥좌를 바라실 줄 알고, 대전은 남겨뒀습니다."
"음, 그럼 들어가야지."
당당히 부여군을 이끌고 대전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건이 앉아 고려, 아니 태봉을 호령하던 그 옥좌다.
그 자리에 앉아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원 역사에서 왕건이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옥좌. 나는 그 옥좌에 앉아 끌려온 왕씨들을 내려다보았다.
"백제의 금강 왕자는 어찌 이리도 무례하다는 말이오!"
그나마 남아있는 옥좌에 앉아서 심드렁하게 왕씨들을 쳐다봤다.
"무례는 무슨. 그러게 건드릴 사람을 건드렸어야지."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재해권을 우리가 가져갔다면 상륙작전 정도는 예상했어야 하는 일이 아닌가.
"크윽. 하다못해 왕족에 대한 배려도 없소이까!"
이름도 모를 왕족들이 배려를 바라고 있다.
"그 군주에 그 신하들이라니. 왕건이 나에게 두드려 맞은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 그런데 멍청하게도 나를 건드렸으니, 그 책임을 너희들이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배들을 잔뜩 세운 것을 보니 아마 쳐들어올 것을 예상은 한 모양이다. 물론 왕건은 내가 본국인 백제를 지원 안 하고 예성강으로 올 것이라고 확신하지는 못한 듯하다. 그러니 군대를 나누지도 않았겠지.
아주 만에 하나의 경우라는 것이 조금 전 우리가 불태운 빈껍데기 함대였을 터.
"아마 허장성세였을 것입니다."
"함대를 두고 맞설 병력이 충분하다 우리에게 알리려고?"
"예."
그것참 멍청한 선택이다.
군사를 최소 수천은 강에 두고 우리가 상륙할 때 철저히 잡았어야지.
이렇게 방비를 못 했으니, 궁궐이 파괴되어 마침내 안에 궁궐을 지키던 병사들도 죽고 왕족들마저 밖으로 끌려 나온 것이 아닌가. 귀족들도 줄줄이 끌려오는 것이 궁궐에서 버틸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야 참 대단들 하구나. 이제 보니 태봉이 멸망한 거 같아."
여기서 왕건만 잡으면 끝인데 말이다.
"우, 우리를 어떻게 할 참이오! 최소 포로의 대우는 해주셔야 할 것이오!"
"허? 그래서 내가 얻는 이점이 뭐지?"
"이점이라니."
슬슬 삼국통일을 해야 한다. 왕씨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죽이지는 않아도 당장 이놈들을 일일이 왕족으로서 대우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내 부인인 고려의 가독부가 왕씨에 피의 복수를 바라더군. 그러니 왕씨들은 전부 중경으로 보낼 것이다."
내 말에 왕씨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식었다.
"왜? 겁이 나나? 너희들의 왕을 원망해라. 주제도 모르고 고려를 칭했으며, 감히 대씨들을 학살한 놈이니까."
정확히는 박술희가 저지른 짓이다만, 어쨌든 그 박술희는 이제 죽었다.
"일반 백성들은 그냥 두겠지만, 태봉의 귀족들은 모조리 인질로 잡을 것이다. 또 궁궐을 불태우고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모조리 가져간다."
이왕 개경까지 왔으니 털 수 있는 것은 다 털어야지.
"예, 전하!"
"일리천에 있는 왕건에게도 서신을 보내라. 지금 당장 군사를 물리지 않는다면 왕씨들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말이야."
왕건의 군대가 상당히 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견훤이 상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견훤이 이끄는 군사도 아마 상당히 피해를 입었겠지. 하지만 오합지졸이나마 신검이 병사를 규합해 일리천으로 오면 왕건과 해볼 만할 것이다.
"어찌 그리 치졸하오?!"
"북방의 고려가 뻔히 있는데. 감히 고려를 칭한 주제에 뭐라 하는 것이지?"
"대진국이 어찌 고려라는 말이오!"
옛 부여와 고구려의 습속을 지니고 땅을 회복하였으며, 고려의 대씨는 고구려의 유민 출신. 이것만 봐도 이미 답이 나오지 않나.
"이미 외국에서는 대진국을 고려로 보고 있소. 오로지 왕건의 태봉만이 그것을 부정하고 있지."
왕건과 그 측근들이 귀족들과 왕족들의 눈과 귀를 어둡게 만든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리가 없겠지.
"이래서야 우이독경이다. 왕족들을 내 앞에서 치워라."
"예, 전하!"
왕족들을 치우고, 귀족과 개경을 지키던 장수들은 저 멀리 포박시켜뒀다.
그때 우리 장수 중 한 명인 효봉이 입을 열었다.
"개경을 오랫동안 점령하기는 힘듭니다."
"이미 태봉의 군대는 본국 쪽으로 다 빠지지 않았나?"
왕건의 대군이 이미 일리천에 가 있는데. 물론 지금 당장 개경을 백제 땅으로 삼을 생각은 없으나, 기반은 마련해야 하지 않나.
"아직 북쪽의 군대가 있습니다. 물론 아군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습니다만, 우리는 지금 식량이 부족합니다."
"아."
다급하게 병력을 실어나르기는 했다.
당연히 식량도 많이 가지고 오지 않았다. 가지고 온 것들도 지금 개경을 함락시킬 때 거의 다 소비했다.
남아있는 군량이 진짜 엄청 적다.
"포로가 된 병사들에게 물어보니, 왕규와 복지겸이 청야전술을 펼친 탓에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백성들을 두드려 빼앗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닙니까."
아쉽다. 어떻게 백성들에게 양해를 구해볼까? 아니다. 공성전 당시 백성들의 피해도 제법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것이 나은가.
저들에게 당장 우리는 단순한 침략자로 보일 것이다.
나도 물불 안 가리고 때려 박기는 했는데 말이다. 후일 삼국통일을 대비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것이 낫다.
"잠깐."
무언가 문득 떠오를 것 같은데.
"무슨 내릴 명이시라도……?"
"당장 개경의 백성들에게 혹시 왕건이 내게 대패한 사실을 모르고 있냐고 수소문해보게."
이것이 바로 언론통제라는 것일까. 어쩌면 정말 왕건과 그 측근들만 알고 있던 사실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알아보니, 실제로 개경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저번 전쟁에서 태봉이 대승을 했다 알고 있었다.
이것이 다 왕규의 머리에서 나온 거란다.
피해는 최소화시키고, 서경과 남경에 주둔시켰다는 이유로 눈가리고 아웅도 한 것이다.
설마 왕건이 그런 머리까지 쓸 줄이야. 정말 졸렬하지 않나.
"하필이면 속주에서 전투가 일어난 탓에 백성들이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것이 큰 문제일 것입니다."
태봉의 백성들은 속주에서 일어난 전투의 결말을 알지 못한다는 것. 그 탓에 여전히 민심은 왕건에게 있다.
"왕건이 본래 폭군을 없애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으니, 백성들에게 있어 영웅이 아닌가. 진정한 천자겠지."
그런 마당에 왕건이 북방에서 대승을 하고 땅을 넓혔다고 선전한다면? 백성들은 믿고 따를 것이다. 참으로 치졸한 수작이 아닌가.
"왕규 이 자가 머리 하나는 정말 잘 굴리는군."
"그러니 여전히 태봉의 위세가 대단한 것이지요."
어떤 멍청한 백성들이 전쟁에서 패배를 한 왕을 따를까.
왕건이 운이 좋았다. 속주 전투에서 주력군이 궤멸하였으나, 하필 대씨의 고려가 혼란스러워서 남경과 서경을 수복 못 하니, 그 틈에 제대로 깃발을 꽂았다. 뭐, 수만을 잃고 땅을 얻었다 치면 그것도 승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왕규를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
"참 잘들 하셨어."
"흥! 누가 너희 같은 백제 놈들에게 고려를 넘겨줄까 보냐!"
"너희는 고려가 아니라 태봉이라니까."
원 역사와 달리 왕건의 고려가 존재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제대로 작업을 쳐놔야 하거든. 자꾸 고려라 하면 곤란하다.
"네놈이 무슨 말을 하든 우리는 고려다!"
그래. 고려라고 하면 고려겠지.
어차피 멸망하면 다 끝날 놈들인데 뭘. 더군다나 군주의 실패를 감추고 백성들을 속이는 시점에서 이놈들은 천명을 잃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백성들을 속이고 태봉이 이겼다고 선전하였냐?"
"우리는 북진하여 땅을 넓혔소이다! 그러니 우리의 승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결국 남경과 서경을 점령했으니까.
다만, 그 방식에서 치졸하게 백성들을 속인 것이 문제 아닐까.
"이미 내란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땅에 남아 전쟁을 벌이는 것뿐만 아니라, 선왕과 태자를 시해하였다. 그 혼란한 틈에 서경과 남경을 빼앗은 거지. 심지어 왕건이 속주에서 대패한 사실은 왜 밝히지 않았지?"
"닥치시오!"
"걱정 마라. 내 오늘 무지한 백성들에게 깨달음을 줄 것이다."
개경을 점령할 수 없다면 백성들에게 깨우침이라도 줘서 왕건을 불신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둘 다 포로 취급을 하는 것이 좋겠지. 그러고 보니 양검 형님이 죽었다고 했지?"
"예."
태봉에 보낸 양검은 이전에 죽었다. 그렇다면 형제의 감정을 떠나서 보복은 해도 되지 않은가. 나는 이제 후백제의 왕자로서 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