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포로로 잡힌 왕규와 복지겸은 어떻게 할까.
"뭐 그럼 죽여둘까. 어쨌든 보복은 해야 하니."
"금강아, 결국 백제는 망할 것이다."
누가 봐도 태봉이 더 위험해 보이지 않나.
이렇게라도 현실을 부정하려 드는 것이 불쌍하다.
"현실부정 한 번 참신하네."
백제가 조금 위험하긴 해도 멸망할 정도는 절대 아니다.
왕건의 기병이 4만이라고 해서 주눅들 이유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저들이 칭기즈칸의 몽골군급도 아니고. 뭐 신검이야 밀리겠지만, 발목을 붙잡아주는 정도도 못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살려두는 것이 인질로서의 가치가 높을 것입니다."
"우리를 죽여라!"
그래. 굳이 죽일 이유가 없다. 우선 개경의 민심을 돌리는 것이 먼저다.
"너희가 뭔가를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너희들을 왜 죽이냐? 너흰 살아서 태봉이 망하는 것을 지켜봐야지."
왕규랑 복지겸이면 뭐, 왕건도 그냥 넘어가지는 못할 테지.
나는 병사들을 시켜 개경의 백성들을 모았다.
우리가 적군이라고 따르지 않기에 억지로라도 끌어모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왕건이 숨기고 있는 것들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의 왕. 왕건은 참으로 치졸하고 졸렬한 자다!"
내 말에 백성들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원체 어리석은 것이 백성들이다. 이렇게 말해도 알아들을 놈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니까 목소리를 높였다.
원래 이런 시대에는 목소리가 큰 놈이 이기는 법이니까.
"왕건은 결코 우리를 상대로 정정당당하게 승리하여 땅을 얻은 것이 아니다! 태봉왕 왕건은 대씨 고려의 내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물리지 않고, 전쟁이 끝난 사실에 안도하셨던 선왕과 태자를 시해하였다! 하여 한동안 왕위계승에 문제가 생긴 틈에, 그자는 비열하게도 대씨 고려의 땅을 멋대로 침범하고 점령하였다!"
"우리 폐하께서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니. 참 팔자도 편한 대답이다.
"나 부여금강은 이 개경을 점령해서 너희들을 약탈할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그런 내가 네놈들을 상대로 거짓을 말할 리 있겠느냐? 그자는 심지어 속주에서 나한테 대패를 하여 수만의 군사를 잃었다!"
호족들의 군사도 많겠지만 북진이고, 왕건의 친정군이다. 그 군사의 질은 아마 개경 최강의 군대가 아닐까.
당연히 여기 백성들의 가족도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분열된 땅덩어리에서 인구가 그렇게 많이 나올 리가 없다.
"말도 안 돼. 내 아들이 죽었을 리 없어!"
"내 남편은 지금 북경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 무슨……!"
왕건의 세뇌가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하나같이 저리도 왕건의 말만 철석같이 믿을 수 있을까.
"네놈들의 형제와 남편과 자식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나? 그들이 너희에게 직접 소식이라도 전했는가? 북쪽에 너희의 가족은 없다! 물론 생존자도 있겠으나, 그들은 극소수일 뿐이다!"
"그 말을 우리보고 믿으라는 말이오?"
믿기 싫은 듯 보이니 나는 포로들을 이용해 먹기로 했다.
죽기 싫은 병사들과 몇몇 관료들이 스스로 백성들에게 진실을 말했다.
"주, 죽이지만 마시오! 말할 테니까! 금강 왕자의 말이 사실이오!"
당연히 백성들은 난리가 났다. 멀쩡히 북쪽에서 살아 당당히 나라를 지킬 줄 알았던 남편, 형제, 자식이 죽었다고 하니까.
그들을 죽인 것은 백제군이라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왕건이며 심지어 거짓을 퍼뜨려 백성들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백성들은 처음에 우리 말을 믿지 않았으나, 관료들까지 동원되니 그제야 왕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믿기 힘들다면 너희들이 직접 가 진실을 알아보면 될 일이다."
이것으로 충분하겠지.
왕규와 복지겸도 실시간으로 감상했다. 백성들에게 저번 전쟁의 진실이 밝혀지자 왕규가 나를 죽일 듯이 째려본다.
백성들을 속이는 자가 어찌 진정한 군주라 할 수 있겠나?
"참으로 불쌍하군. 거짓이나 지껄이니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니. 백성들이 너무 불쌍해."
결코 선인이 아닌 나는 왕규를 마음껏 조롱했다.
"백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였소!"
"애초에 백성들이 동요할 짓을 저지르지 않으면 되는 아닌가? 고작해야 반도의 절반만 다스리는 나라가 주제에 맞지 않게 욕심을 부린 탓이지."
백제도 상대하기 어려운 주제에 기어이 북방의 대국을 노린 바보들.
"나를 능멸하는 게요!"
능멸이라니.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지. 주제도 모르고 내부를 다스릴 생각은 않은 채 북진을 노렸으니. 솔직히 난 지금 왕건에게 너무 크게 실망했다.
따지고 보면 이번 전쟁도 백성들을 속이고 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왕건이 삼국통일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했는데, 너희들 꼴을 보니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삼국 통일한답시고 앞으로도 이런 일을 벌일 거다.
그러니 이번에 내게 패배한다면 그다음은 없을 예정이다. 내가 자비를 내리지 않는 한 태봉이 되살아날 길은 없으니.
왕규의 얼굴은 꼴도 보기 싫으니 이놈도 따로 완산주로 보내기로 했다.
"궁궐도 불태우고, 얻을 것은 다 얻었으니 퇴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군대를 정비하던 관흔이 군량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며 투덜거렸다. 개경에 남은 것을 털기는 했는데 그 양이 많지가 않다.
따지고 보면 조금이라도 군량을 얻을 방법이 있다.
세뇌가 풀리기 전까지는 못 써먹던 방법.
"백성들에게서 군량을 구해보도록 하지. 아마 왕건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도 분명히 있을 테니까."
"예. 전하."
그렇게 되면 왕건은 자기 백성들을 믿지 못할 것이다.
백제를 도왔다며 철퇴를 든다면 백성과 그놈의 사이가 더더욱 벌어질 테고. 그래서 나는 개경의 백성들로부터 최대한 군량을 많이 얻어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고려의 궁궐에서 가지고 온 재물들로 구매했다.
"이러다가 나중에 왕건이 정말 철퇴를 들 수 있겠습니다."
"우리에게 식량을 팔아먹은 놈들을 다 죽이려면 아마 피바람이 불 텐데."
아주 많은 건 아니지만, 이미 백성들 마음에는 불신이 차올랐다. 그 마당에 식량을 판매한 백성들을 죽이면 어떻게 될까.
아마 민심은 더 떨어질 테고, 왕건은 그걸 모를 정도의 바보는 아니다.
"과연, 백성들의 민심이 걸려있으니 함부로 못 한다는 뜻이로군요."
"게다가, 개경의 백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오히려 궁예처럼 미쳐 날뛰면 좋지."
그리하면 태봉은 무너지고 백제에게 기회가 넘어온다.
지금 당장 왕건의 군대를 상대하기 힘드니, 스스로 무너지면 우리에게는 더 좋은 일이다.
이번에 퇴각한다면 결국 군대는 다시 언제 일으킬지 알 수 없고. 나도 여기서 빠질 생각은 없으니, 개경으로 돌아온 왕건이 개경을 복구하려고 애를 쓸 때 북쪽의 기병들이 남진하면 되는 일이다.
"전하, 일단은 식량을 전부 배에 실어야 합니다."
"아, 그렇지."
이거 참 아쉽게 되었군. 그냥 남진을 하면 안 되나? 고작해야 좁아터진 땅덩어리인데, 좀 굶으면 어떤가. 백제에서 먹으면 그만인데.
"이대로 남진하는 것은 어떨까? 왕건이 4만이나 불었으면 고려의 남쪽은 텅텅 비었을 것이 아닌가."
삼한이 인구를 생각하며느 4만이면 정말 최대한 쥐어짠 것이겠지. 아마 제대로 군사를 갖춘 성이 얼마 없을 것이다.
"말씀드렸다시피 변수라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묻겠네. 어차피 비어있는 지역들을 다 접수한다면 왕건이 감히 우리에게 대응할 수 있을까?"
어차피 텅텅 비어 있을 텐데, 그 성들을 점령하면 그만이다.
여전히 군량은 부족하지만, 그것도 백성들에게서 얻으면 그만이고.
이럴 때 상귀가 있으면 나주에서 얻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일리천에 나가 있으니 문제다.
그렇다고 지금 나주에 연락해서 따로 군량을 얻는 것도 힘들고.
"음, 그럴 경우에도 또 문제가 생깁니다."
"말해보게."
이번 전쟁에 문제가 많은 것 같다.
이왕이면 태봉을 온전히 병합하고 싶은데, 왕건이 어떻게든 저항하려 든다.
"왕건의 군대는 기병이 주력입니다. 우리 기병은 전부 북쪽에 묶여있어 포병과 보병으로만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있지요. 만일 왕건이……."
"미쳐서 대뜸 말머리 돌리고 북진하면 위험하다는 건가."
그렇게 되면 좀 위협적이기는 하다.
만약 백제 정벌이 무위로 돌아갈 것 같으면 왕건이 말머리를 돌리기는 할 것이다. 사신을 보내면 놈도 어쩔 수 없겠지.
그럼 약이 바짝 오른 왕건은 당연히 나를 처리하려 할 테고, 기병이 북쪽에 묶인 입장에서 내 군대는 큰 피해를 볼 것이다.
"좋아. 퇴각하지. 다만 요동으로 가지 않는다. 차라리 남쪽으로 내려가서 아군과 합류하는 편이 낫겠지."
요동까지 가는 쪽이 더 오래 걸린다. 개경도 점령당했으니 북방의 기병을 동원하여 치고 내려가는 방법도 있으나, 왕건의 대군이 마음에 걸리고.
"예. 그렇게 하면 왕건은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개경을 점령한 이상, 남은 건 왕건 그놈이다. 그놈의 목만 가진다면 삼국통일은 자연히 이루게 될 것이다.
"왕씨들은 중경으로 보내고, 태봉의 귀족들은 전부 완산주로 보낸다. 그 왕건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두고 봐야겠지. 효봉 장군, 지금 북방의 기병들은 누가 맡고 있나?"
"명길 장군이 맡고 있습니다."
명길이라면 믿을 수 있다. 부여성 전투에서도 제법 힘을 써줬으니까.
"사람을 보내 남경과 서경을 우회해서 내려오라고 해야겠네."
"예. 전하."
나는 완산주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왕건이 회군한다 해도 믿을 수가 없으니까.
배를 나눠서 일부는 왕씨들을 태워 중경으로 보내고 나머지 귀족들은 내가 이끄는 함대로 직접 완산주로 보내기로 했다.
* * *
금강이 개경의 왕궁에 불을 지르고 인질들은 중경과 완산주로 보낼 즈음, 일리천에 있던 왕건 역시 그 소식을 들었다.
"폐하. 부여금강이 기어이 폐하의 도성을 범하였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짐의 황성을 범하였다고? 설마 개경이 점령당했다는 소리인가?"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개경이 점령당했다니. 설마 했는데, 정말로 그놈들이 정말로 예성강으로 들어온 것인가?
"예, 폐하! 귀족들과 왕족들이 모두 백제놈들에게 잡혔습니다."
개경에서 내려온 서신을 읽은 견권의 말에 왕건은 고개를 저었다.
개경을 점령하였으니 귀족과 왕족들을 잡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렇다면 인질 협상을 하겠다는 이야기인데, 상대가 금강이라는 점에서 그냥 넘기기에는 힘들다.
"금강이 뭐라 하던가?"
"참으로 황망한 내용이라 소장의 입으로 담기는……."
"에잇, 답답하구나! 내가 보겠다!"
왕건은 직접 금강이 보낸 서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 내용이란 왕건의 두 손을 분노로 떨게 만들기 충분했다.
"당장 군사를 물리지 않으면 개경 저잣거리에서 모조리 목을 베어 효수하겠다고?"
"어, 어찌 그런 무례한 자가 다 있나!"
왕족들을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하다니.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 이미 뛰어난 장수들을 전부 죽여버린 금강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왕건도 자기 아버지가 죽는 꼴을 보게 될지 몰랐다.
"설마 진짜 목을 베기야 하겠습니까? 아무리 적국이고 전쟁이라지만 그런 무도한 짓을 저지를 인물은 아닐 것입니다."
"그자가 우리 장수들을 전부 죽여 목만 보낸 사실은 기억나지 않는가?"
왕건의 말에 좌중이 침울해졌다.
"확실히 그렇기는 하오나……."
"황후를 비롯한 모두가 죽을 수도 있네! 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군사를 물리는 것도 좋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쉽다. 참으로 아쉽다. 견훤을 다 잡았다. 적들의 군세는 이제 끽해야 2천도 안 남았는데, 이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