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항복의식에 앞서 마의태자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이놈! 어디까지 우리 신라를 욕보일 셈이냐!"
아직도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 여전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오늘부로 신국은 없다! 의자 황제께서 너희들 신라에게 당한 굴욕을 몇 배로 갚을 것이니 그리 알아라!"
"네이노오오옴!"
미친개는 매가 약이라고 했으나, 저건 미친개 이상이다. 이럴 때는 굳이 내가 상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상귀 장군은 무얼 하는가? 저 도적놈은 신라의 태자가 아니다! 입에 재갈을 물리고 무릎을 꿇려라!"
"예! 전하!"
상귀가 신라의 태자를 무릎 꿇렸다.
"태자…… 태자야!"
신라의 경순왕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게 진작 항복하고 입조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예상대로 저항하는 것은 보기 좋았으나, 일본보다 먼저 신라를 터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일본 문제에 더 빨리 개입할 수 있는 이 중대한 시기에 마의태자 따위한테 붙잡힌 것이 아닌가.
나는 궁궐 밖으로 김부의 옥좌를 옮겨 그 자리에 앉았다. 고려의 옥좌도 몰래 빼 왔는데, 신라의 것이라고 빼지 못할 것도 없다.
"신라왕은 대백제국 마한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신라를 정벌하러 친히 왕림하신 금강 왕자님께 무릎을 꿇으시오!"
"크흑."
"신라왕은 대백제국 금강 왕자님께 죄를 고하셔야 할 것이오."
"신, 신라왕 김부는 신하들의 충언을 물리치고 감히 백제에……."
잠깐, 신하들의 충언? 지금 순서가 바뀌었는데?
나는 손을 들어 김부의 항복의식을 멈췄다.
내 행동에 백제군과 신라의 문무백관들이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다.
"잠깐. 이거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왕자님, 그 무슨 말씀이신지요?"
무슨 말씀이냐니. 나와 함께한 백제군조차 이렇게 말하면 내가 무안해지지 않나.
신라가 지금 단순히 우리에게 저항한 것만이 전부는 아니지 않냐 이 말이다.
"왜 그것만 고하시나?"
"예?"
"김춘추가 당적들의 노예가 되어 오랑캐들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침범한 사실부터 하나하나 죄를 밝혀야 할 것이다."
뼈에 사무치고 또 사무쳤던 그 날의 기억. 황산벌에서 김유신에게 당하고, 소정방에게 기벌포가 뚫리면서 백제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도 분명히 사과를 받아야 할 일이다.
"그, 그건……."
"꼴에 조상이라고 편드나? 우리 예맥족에게 수치와 치욕을 준 김춘추를 우리가 용서할 거라고 생각하나?"
백제의 재건 명분이 의자왕의 복수인 만큼, 나는 백제인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이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김춘추의 일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읍으읍읍!"
"조용히 못 하냐!"
재갈이 물린 마의태자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따지려고 하는 것을 병사들이 두들겨 팼다.
김부는 제 자식이 얻어맞는 것은 보기 싫었는지 결국 고개를 떨궜다.
"태종무열왕께서……."
"잠깐."
감히 내 앞에서 김춘추를 태종무열왕이라고 하다니. 백제의 왕자 입장에서 볼 때 김춘추는 죄인일 뿐이다.
"태종무열왕이 아니다. 그건 죄인 김춘추이고, 너는 그 김춘추의 후손이다. 왜 하기 싫은가? 언제든지 말하라. 그럼 당장 서라벌을 포위한 백제의 대군이 밀려 들어올 것이다."
각지에서 백제의 깃발을 든 호족들의 군대가 서라벌을 포위하고 있을 것이다.
내 명 한마디면 서라벌이 불바다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이 천년왕국의 수도가 별 볼 일 없었으니까.
명장이 남은 것도 아니고 죄다 제 이익만 챙기려는 호족들과 그 사병만 머물 뿐.
참으로 안쓰럽지만 나는 백제인이다. 신라의 사정을 봐줄 이유가 없다.
"소신 신라왕 김부는 신라 29대 국왕 김춘추의 죄를 고하나이다."
"음 좋다."
"김춘추는 일찍이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당과 손을 잡아 백제를 무너트렸으며 백제인들에게 큰 굴욕을 안겨주었습니다. 신 김부는 그 죄를 대신 고하여 백제의 금강 왕자께 용서를 받고자 합니다."
신라왕이 백제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광경에 백성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미 일본군에게 고통을 받은 금성의 신라인들은 왕건의 도움만 받는 왕실을 믿지 않았다. 그냥 막상 갈 곳이 없어서 서라벌에 머물 뿐이지, 굳이 왕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자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실제로 구경나온 백성들보다는 집에 들어가 문 걸어 잠근 백성들이 더 많았다.
"그래. 오늘날 너희 신라가 이런 수치를 당하고 멸망하는 것은 고작 그 정도 나라이기 때문이다. 저 중국 오랑캐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삼한을 통일하지 못하는 나약한 국가가 바로 너희 신라다! 그런 주제에 감히 대국 행세를 해? 지금 너희 신라를 보아라. 그리도 치고받던 일본에 비해서도 한참 약한 나라가 아닌가?"
"송구합니다."
김부는 땅에 머리를 박았다.
그래. 비굴하지? 굴욕적이지? 의자왕의 기분을 느껴봐라.
"나라가 이런 꼴이니 패망할 수밖에 없지. 자, 그럼 이제 너 자신의 잘못을 고해 보아라."
"간신들에게 휘둘려 백제의 천하질서를 따르지 않고 왕건과 힘을 합쳐 백제를 물리치려 하였으며, 왕건의 태봉이 망한 이후에도 우리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과인은 이 모든 죄를 금강 왕자에게 밝히는 바요. 부디 서라벌의 백성들을 굽어살펴주시오."
서라벌 백성들을 굽어살펴주기는 할 거다. 나에게 덤비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좋다. 진작 그랬어야지. 나 백제국 부여금강은 신라왕의 황복을 윤허하노라.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가 있다."
사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무슨 문제입니까?"
"김춘추의 무덤을 파헤쳐야겠다. 백제를 멸망시킨 김춘추의 무덤을 파헤쳐 직접 완산주로 가져갈 것이며, 고구려를 멸망시킨 문무왕의 관은 고려로 보낼 것이다!"
이건 파격적인 행보다.
"그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김춘추와 김법민의 죄를 고했으니, 김춘추와 그 자식놈 김법민의 묘는 파헤쳐야지!"
"저, 왕자님. 이렇게 하면 신라인의 민심이 이반될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 실제 역사에서는 그런 이유로 보통 부관참시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정도는 해야 한다.
무엇보다 신검의 부탁도 있었다.
- 아우야. 이왕 신라를 잡을 거라면 김춘추와 그 아들놈의 시신도 파헤쳐야 한다. 역사에 죄를 지은 놈들이지 않냐.
나도 고민하던 것이긴 하다만, 어쨌든 신검이 마한황제로서 명을 내린 것이니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따지려면 신검에게 따져야지.
"으음읍읍!"
"저 도적놈은 의식을 잃을 때까지 두들겨 패라!"
마의태자를 한바탕 더 두들겨 팬 후, 백제군과 백제군을 돕는 호족들은 신라의 왕릉들을 털게 되었다.
특히 김춘추와 김법민의 무덤은 처음부터 발굴해내서 직접 내가 관리했다. 혹시라도 용감무쌍한 신라인이 가져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신라의 왕릉들은 털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놈들이 당나라와 함께 삼국통일을 이룬 족속들이라고 생각하면 백제를 위해서 조금 더 보복성이 필요하지 않냐는 장수들의 의견이 있었으나, 참았다.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야 완산주로 가서 백제인들 앞에 한 번 더 사과를 하고 그다음에는 고려로 가서 잘 못을 빌고."
사실 뭐 항복의식이야 처음부터 완산주 끌고 가서 해도 될 일이었지만, 신라인들에게 신라왕이 확실히 무릎 꿇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니 당연히 완산주로도 가야 하고 고려로도 가야지. 왕건의 고려야 어땠을지 모르지만 신라에 한 맺힌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의 한을 풀어주는 거다.
"어, 어째서?"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안 그래?"
신라의 남은 호족들도 전부 국왕 충성파, 신라를 위한 존재들이라고 보면 간단할 것이다. 이놈들도 데려가야 뒤탈이 없다.
"우리에게 끝까지 저항한 호족들은 모조리 남김없이 털어라!"
이미 점령당한 서라벌의 백성들은 숨죽이고 우리가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울 수는 없지.
"네 이놈! 천지신명께서 네 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호오. 천지신명이라."
그 신이 지금 보고 즐기고 있을 텐데? 오히려 업적을 세웠다며 좋아라 할 거다.
"천지신명이라고 했냐?"
"그렇다!"
"산사람에게 천지신명은 무슨. 정말로 있다면 외세의 도움이나 빈 김춘추부터 처단했겠지? 안 그래?"
여기까지 온 이상, 항복을 무를 수도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신라를 봐줄 생각은 없다.
신라왕 김부는 마의태자와 함께 결국 완산주까지 끌려가 또 곤욕을 치르고, 탐라로 보내졌다.
* * *
"아우야. 그간 수고가 많았다."
간만에 뿌듯한 얼굴의 신검이 나를 치하했다.
"예. 형님 폐하."
"네가 제대로 총리로서 일을 해주고 있구나. 그래. 저것들이 김춘추와 김법민의 시신이렷다?"
김부와 마의태자를 유배 보낸 직후, 나는 신검에게 김춘추와 김법민의 유골이 담긴 나무 상자를 넘겼다.
적국이라 하나 한 나라의 왕을 상대로 무례를 저지른 것이나 다름이 없는 행위를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다.
백제 성왕의 머리를 잘랐으면 이 정도는 각오해야지.
"예, 형님 폐하. 전 백제의 열성조들께 바쳐야 할 것입니다."
"오냐. 그렇게 해야지."
완산주로 옮겨진 김춘추와 김법민의 유골을 불태워졌다.
"드디어 백제인들의 한을 모두 씻었도다. 이제야 비로소 백제가 대동강 이남의 땅을 통일하였으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날이 아닌가."
신검이 눈물을 흘렸다.
쓸데없이 감성적인 놈이다.
신라의 항복을 끝으로 신검은 곧바로 대동강 이남 통일을 선포했다. 그러나 원 역사와는 다르다.
일단 백제조정은 지금 발해를 고려로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진정한 통일을 하려면 백제는 고려도 멸망시켜야 했다. 그러나 연방제로 인해 그것은 불가능해졌으며 원 역사의 삼국통일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왕건은 감히 고려를 사칭한 도적 무리로 전락했다.
하기야 관복들도 가지각색을 입고 다닐 정도로 잡종이다. 우리는 진작에 백제는 백제다워져야 한다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억지로 관복을 고쳐 입게 했었는데, 왕건의 태봉은 국가로서는 상당히 불안한 체제를 유지했다.
결국 백제가 세력을 키운 덕이기도 하다.
그래도 오히려 이편이 나았다.
백제로서는 발해까지 집어삼키기 어려우니까.
아니, 물론 내가 있고, 이미 멸망 중이던 나라였으니 꿀꺽하면 그만이라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백제는 지금 옛 신라를 흡수하고 태봉 땅도 흡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당장 나만 해도 의외로 고구려계가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눈치니까 내가 고려의 왕이 된다고 치면 고구려계가 반발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 가장 적절한 선택을 했다.
뭐 결국 이러다 다시 싸울 수도 있다. 이미 700년은 그래왔다. 라고 묻는다면 나도 할 말은 없다.
그래서 점진적인 통일이라는 거다.
문화, 화폐 통합, 군사의 통합으로 연방군이라는 군대 창설. 군사가 통합된다면 서로 싸울 일은 사라질 테니까.
"금강아, 그런데 역시 나는 저 드넓은 북방을 달려보고 싶구나."
"초원을 이르십니까?"
"그렇다."
아주 통일 좀 했다고 기고만장해졌구나.
그거 다 내가 해줬는데. 즉, 저 말은 나보고 초원까지 어떻게 안 되냐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중원을 바라겠지.
하여간 욕심이 너무 많은 놈이다.
"그 일은 고려에 맡겨야 할 일입니다. 고려는 저 북쪽을, 백제는 남쪽을 노려야 합니다."
원래 백제의 역할은 남쪽이었다.
저 끝없는 바다를 개척하고 지금 전국시대로 진입 직전인 일본을 병합하는 것. 일본을 백제의 품으로 들여 국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연방군으로 저 드넓은 중국을 향해 진군해야 한다.
"남쪽이라?"
"드넓은 해양을 통해서 그 옛날 백제가 그러했듯 수많은 나라와 교역을 하고, 바다를 지배하고 열도를 지배하셔야 합니다."
지금도 교역은 꽤 하는 편이다. 그러니 일본만 먹고 백제에 편입시킨다면 진정한 연방의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