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최승우를 물리고 여전히 고민이 많던 천황은 일본의 중신인 후지와라노를 불렀다.
지금 믿을 구석이라고는 후지와라밖에 없었다.
"후지와라에서는 이 일을 어찌 생각하는가?"
"확실히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백제가 폐하를 지원하기 위해 수만이나 되는 대군을 지원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당장 병력을 끌어낼 입장이 아니어서 결국 고려와 연방이라는 기이한 국가연합체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냉정하게 볼 때 백제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지원하기 싫어서 변명을 뱉는 것이 아니다. 저 삼한 땅에서는 끊임없이 전란이 계속되어왔다. 백제가 마냥 지원군을 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천황은 마음이 급했다.
"뭐? 대체 자네는 어느 나라의 신하인가. 그래, 그래서?"
"폐하, 저들이 수만의 군대를 끌어모으는 사이 정말로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백제와 일본의 거리도 문제입니다. 육지로 붙어있다면 모르겠는데, 대규모 함대를 움직여야 하니 시일이 상당히 걸릴 것입니다."
천황이 우겨 백제가 지원을 끌어 보낸다 해도, 바다를 건너는 사이 일본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헤이안쿄에서 백제군이 올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을 말하게."
"백제와 일본은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이건 그냥 , 일본의 북변에 몽진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좋게좋게 생각하면 된다.
백제와 일본은 하나다. 그래서 일본이란 나라는 본래 왜였다가, 백제가 망하자 백제의 국호 중 하나인 일본으로 국호를 고치기도 했다.
이렇듯 가까운 관계다.
"끄응."
"이후 마한황제가 군대를 준비하여 금강 왕자를 통해 호족들을 두드려 잡는다면 그때 개선하시어 당당히 천황의 권위를 떨치셔야 할 것입니다."
끝난 것이 아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하다. 후지와라는 그렇게 천황을 설득했다.
"정녕 그 방법뿐인가?"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폐하."
"혹시 연왕사건 때문에 백제가 지원군을 안 내놓으려는 술책이 아닌가?"
천황은 다시 한번 의심을 해봤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폐하의 사위인 금강 왕자는 신의를 아는 자입니다."
"허, 이럴 수가. 어쩌다 이 나라 일본이 이렇게 되었다는 말인가."
생각해보니 전부 일본이 백제를 지원한 탓이었다.
그때 괜히 돕겠다고 나서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진심으로 후회가 들었다.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다.
"폐하, 정하셨다면 서두르셔야 합니다."
"그러세. 가야 하겠지."
천황과 후지와라는 백제로 잠시 피난할 것을 결정했다.
"천황이 과연 금강 왕자의 뜻대로 움직이겠습니까?"
"소직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저 일방적인 믿음일 뿐이지만, 금강 왕자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 그것도 상대가 일본이라면 더욱 그렇지.
"그래도 한 나라의 왕입니다. 그리 쉽게 일본을 벗어나겠습니까?"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만큼이나 깊습니다. 어떠십니까. 이참에 저를 따라 백제로 가시는 것이?"
다른 나라라면 모를까. 천황은 백제로 올 것이다. 사위의 나라기도 하고 옛 관계가 그리도 끈끈했기도 하니 명분은 충분하다.
그리고 이참에 최승우는 대봉예도 데려갈 셈이었다.
"흠, 그렇다면야 한 번 가볼까요."
"그러시지요. 아국의 전하께서도 공을 무척 반가워하실 겁니다."
대봉예라면 연방정부에서 앞으로도 크게 활약하며 부여연방을 키울 금강을 도울 것이다.
어차피 그가 고려의 황족인 이상 내전이 터질 열도에 계속 있을 이유도 없다.
한참 대봉예를 설득하는데, 후지와라의 병사들이 최승우를 찾았다.
"상좌평 어르신. 천황폐하께서 부르셨습니다."
"크흠. 곧 가겠네."
드디어 일본을 왕자에게 바칠 결정을 내린 것 같다.
* * *
금강의 명을 받고 연방의 수군을 이끌어 일본의 다타라까지 내려온 상귀는 다타라 가문의 도움을 받아 천황이 올 때까지 정박했다.
"대체 언제 온다는 계야."
아무래도 여기 일본은 불안하다. 천황이라는 자를 데려가려고 왔으나, 가만히 상황을 보니 백제의 수군을 감시하는 일본군들이 보였다.
아마 그들은 천황이 아닌 일본 호족들의 군사들일 것이다. 차라리 시원하게 덤빌 것이지 뒤에서 노려보기나 하는 꼴이 우스웠다.
"장군, 차라리 먼저 공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서라. 괜히 공격했다가 외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금강 왕자께서 말씀하셨다."
병사들조차도 저 일본군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호족군도 머리가 있으면 우리가 지금 천황을 데려가려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더욱 서둘러 천황을 데려가야 한다. 다타라가 백제의 문물을 받아 군사력을 제법 키웠다곤 하나, 호족들이 몰려오면 대판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천황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다. 우선 천황을 나주로 빼내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장군! 다타라로 상좌평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호오. 그렇다면."
"일본의 천황가와 후지와라씨들도 당도하였습니다."
다타라까지 오면서 천황과 후지와라 일가는 호족들의 추격을 피해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은 목숨을 부지했다.
"폐하! 소장은 나주도독 상귀입니다! 아국의 전하께서 폐하를 호위하라 소장을 보내셨습니다!"
"그래, 만나서 반갑네."
"천황폐하를 모셔라! 백제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있었다.
배에 원통형 기구들이 실려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배가 무거워지게 저런 걸 둔 이유가 무엇일까.
"물고기를 잡는 용도가 아니겠습니까?"
어업을 어찌 저런 무거운 도구로 한단 말인가. 그때, 멀리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장군! 해적들입니다!"
"그냥 해적이 아니라 일본 호족 놈들이겠지."
저들은 천황의 탈출 소식을 듣고 잡으러 온 호족 무리다.
아마 쉽게 비켜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젠장. 바다 위도 안전하지 못한 것인가!"
천황이 침음했다. 오히려 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냥 헤이안쿄에서 버티고 있었으면 맞서 싸울 수라도 있었겠지. 그런데 지금은 바다에 둥둥 떠 꼴이 우습지 않은가.
"폐하, 심려놓으시옵소서! 이 상귀, 해적들 따위는 쉽게 격파할 수 있습니다!"
"이 몇 안 되는 선박으로 저 큰 함대를 어찌 이긴다는 말인가?"
천황의 걱정에 상귀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뭘 그런 걸 묻고 그러나. 확실히 해적들이 많기야 하지만, 싸우지 못할 것도 없다.
쾅! 콰아앙!
"이렇게 쓰러트리면 그만입니다, 폐하."
포격으로 인해 다 부서져 침몰한 왜선들을 바라보며 상귀가 호쾌하게 말했다.
"대체 저, 저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원통형 기구가 펑펑 터지는 소리를 내더니 해적들을 순식간에 고기밥으로 만들었다. 천황은 혼이 나가 상귀에게 물었다.
"아국의 신무기입니다, 폐하. 저런 무기들로 무장한 군대가 나주로 모일 것이니 폐하께서는 이제 저희 백제만 믿으시면 될 것입니다."
저것이 백제의 신무기라. 자신들에게도 저런 것이 있었으면 진작에 호족들을 무릎 꿇릴 수 있었을 텐데.
과연 백제가 대단한 나라기는 하다. 재건한 지 수십 년밖에 안 된 나라가 저런 무기까지 개발하다니.
* * *
드디어 목 빠지게 기다리던 보람이 있었다.
상귀의 함대가 백제 남쪽 수군 기지인 나주진으로 들어온 것이다.
상귀는 죽는 한이 있어도 명령을 듣는 놈이다. 일본의 호족들과 싸우다 도망친 것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화포를 달고 있는 함선을 끌고 간 상귀다. 단병접전을 시도하거나 사거리도 짧은 화살을 쏘아대는 호족들의 수군에 당할 리가 없다.
"전하! 일본의 천황을 비롯한 황가, 후지와라노가가 나주에 당도하였습니다!"
"장인이 오셨다고? 당연히 만나야지."
일본을 바치러 오신 분을 내가 홀대할 수 있나? 이참에 잘 보여야지.
나는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나주진까지 나가 천황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이제부터는 이 사위가 폐하를 지켜드릴 것입니다."
"사사로이는 사위와 장인이 아닌가. 괜찮네. 장인이라 부르게."
나한테 도움받으려고 벌써부터 꼬리치는 구만.
"예, 장인어른."
"딸은 어디 있나?"
생각해보니 지금껏 천황은 딸을 찾은 적이 없다.
그만큼 일본의 상황이 좋지 못한 탓이겠지.
"완산주에서 아들과 함께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 손주를 보지 못했군."
"완산주까지 가시겠습니까? 마한황제께서도 장인어른을 반가워하실 것입니다."
신검과 천황은 서로 만난 적이 없다. 사신으로 서로 서신만 나눴을 뿐. 아마 이번이 첫 만남인 만큼 신검의 반응이 기대된다.
군대를 내주지 말고, 적당히 궁에 머물게 하라 했으니까.
"음."
"이제 일본에서 해적들로 위장한 호족들의 군대가 올라와 나주를 노릴지도 모릅니다. 완산주로 가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참에 천황이 백제의 수도로 망명을 한다면 열도의 호족들과 백성들은 난리가 날 거다.
일국의 천황이라는 자가 남의 나라에게 의탁하는 꼴이니까.
"설마 호족들이?"
"당장 해상에서 공격받지 않았습니까. 나주까지도 올 수 있습니다. 지금 일본의 호족들은 앞뒤 분간을 못 하는 바보들입니다."
앞뒤 분간을 못 해도 백제 수군에 맞았으니 나주에 함부로 오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금은 불안한 천황과 후지와라를 적당히 겁주어 완산주로 보내는 것이 낫다.
"음, 정녕 그 방법밖에 없나? 후지와라노 다다히라는 어찌 생각하는가? 내 사위의 뜻대로 하는 것이 좋겠는가?"
"이왕지사 완산주로 가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왕 여기까지 온 후지와라도 살길을 도모하려 할 것이다.
완산주로 천황과 함께 가서 신검으로부터 확실한 군사지원을 받을 생각이 아닐까.
"방법이라?"
"백제로 피난한 순간부터 호족들이 들고 일어날 겁니다. 차라리 완산주에서 백제의 황제와 좋은 관계라는 것을 증명하여 호족들을 견제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후지와라가 나를 도왔다.
후지와라는 백제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한 말이겠지만, 오히려 나를 돕는 꼴이 되었다.
"어쩌다 짐의 신세가 이렇게 되었을꼬."
"전하! 나주진 밖에서 왜선들이 보입니다!"
마치 각본을 짠 듯, 헐레벌떡 뛰어오던 한 병사가 그렇게 보고했다.
말 그대로 미리 각본을 짠 병사였다.
"애술은 장인을 완산주까지 모시게."
"예, 전하!"
"설마 정말 호족 놈들이……?"
"장인어른, 이곳은 제가 맡을 것이니 얼른 가셔야 합니다! 병사들은 무얼 하느냐? 장인과 후지와라 일행을 모셔라!"
애술에게 천황가와 후지와라노 가문의 일원들을 호위하게 하고 북쪽으로 올려보냈다.
이 과정에서 해적들로 위장한 우리 군사와 백제 갑옷을 입은 병사가 싸우는 시늉을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빙성을 더해줬다.
물론 이건 단순한 군사훈련일 뿐이지만 군사들은 천황과 후지와라가 꽁무니를 빼며 완산주로 갈 때까지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애술이 호위하는 천황과 후지와라가 떠나자 최승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뜻대로 하셔도 될 것입니다."
"뜻대로라니. 그렇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겠지?"
"좋은 방안이 있으십니까?"
조금 치졸하지만 일본의 호족들을 달굴 가십거리가 이미 있지 않은가.
천황 자신이 줬으니까.
"있고말고. 이제 일본 열도에 천황이 열도를 버리고 백제의 완산주로 갔다는 소문을 확 퍼트리게. 다타라를 이용하면 되겠지."
천황의 권위를 바닥에 처박아, 일본인들이 천황을 있든 없든 상관없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