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이 태봉의 호족들을 어찌한다?
"가문을 보존하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부디 사정을 봐주십시오!"
미래를 생각하면 당장 죽이는 것이 옳지만, 왕건이 말아먹은 덕에 새로운 선태지도 생겼다.
결국 호족들이 위협이 되는 이유는 사병들 탓이 아니겠는가. 그 병사들을 일찌감치 빼내면 되는 것이다.
호족들은 자기가 맡은 지역에서 왕처럼 행동하던 놈들. 백성들의 신임을 받는 자들도 있으니 모조리 죽이면 민심이 위험하다.
"딸들도 살려주고 가문도 보존시켜주지. 대신 사병들을 전부 연방군에 소속시키게."
"연방군이라면……."
"부여연방의 군대일세. 그리고 내 휘하에서 일본을 정벌하는 데 앞장서게."
한마디로 충성심을 증명하라는 말이다.
"저 왜나라를 정벌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연방군에 편입되고 자네들이 백제에, 나아가 연방에 충성한다는 것을 몸소 입증하게."
박쥐 짓을 하는 것은 더는 곤란하다. 이제 나라가 통합되고 고려와는 연방이 되어가고 있는데.
"그, 그건……."
"왜 그것도 못 하겠는가? 솔직히 말하지. 자네들은 하나하나가 약하니 대세를 따르고자 백제와 태봉 사이를 줄타기하고 가까이 있는 왕건에 붙은 것도 이해하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대들을 마냥 받아들일 수만은 없어. 왕건의 중앙군이면 모를까, 호족들의 군대는 이번 전투에서 큰 피해가 없었지 않은가."
그나마 호족들은 연방군과 태봉군의 싸움 막판에 군대를 내지 않았다.
그건 칭찬해줄 만하다.
"그, 그건……."
"어찌할 텐가? 너희들의 자식들도 보호해주고, 가문도 보존해준다고 했는데. 군사는 내놔야지. 안 그런가?"
호족들에게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다.
공을 세운 다음 딸들로 나에게 협상을 시도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지금은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신라마저 항복했는데 과연?
이제 기댈 곳이 없어졌으니 호족들이 연방을 상대로 전쟁을 걸 수는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호족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텐가, 아니면 마한천자의 연방군이 너희들을 쓸어버려야 속이 시원한가?"
"전하의 명을 따를 것입니다."
"부디 가문을 보존해주십시오."
그래. 이렇게 진작에 굴복했어야지.
자,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왕후다.
사실 고려에서 가독부와 귀족들이 포로들을 첩으로 들인다는 결정만 내리지 않았다면 따로 부를 일도 없었을 텐데.
결국 하나하나 내가 다 처리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 나는 내 앞에 태봉의 왕후를 꿇렸다.
무려 고려에서 남해에 있는 부산진까지 끌고 온 것이다.
가만히 보니 참으로 한이 맺힌 얼굴이다.
"백제의 왕자는 어찌 이리 무례하다는 말이오! 내 비록 패망한 나라의 왕후라 하나, 유배를 보냈으면 보낼 일이지 대진국으로 보냈다가 이제는 다시 서라벌보다 한참 끄트머리에 있는 남쪽이라니!"
다만 그 항의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우리 백제에 저항하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오?"
"내 자식들과 떨어지게 되었는데 뭐가 기쁜 일이란 말이오? 심지어 대진국의 귀족들은 우리 고려의 지아비가 있는 여인들을 첩으로 취했소! 그중에는 아국 폐하의 후궁들도 있었으니 이 어찌 참담한 일이 아니오!?"
"한 번만 더 대진국이라 하면 자식들의 입을 찢어버리겠다."
멸망한 나라의 계집 주제에 감히 어딜?
내 말에 왕후는 그저 나를 노려볼 뿐 저항 하나 제대로 못 한다.
"졸렬하기는."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너희 태봉이 상경을 점령할 때는 얼마나 큰 피해가 났는지 아는가? 너희들이 당한 치욕을 상경의 백성들이 맛보았다. 심지어 선대 가독부도 대뜸 네놈들이 죽였지."
고려의 귀족들을 감싸려는 의도는 없으나, 최소한 원인 제공을 한 것은 태봉이라는 것을 분명히 상기시켰다.
내 목소리가 커진 탓일까. 왕후의 뒤에 서 있던 후궁들이 무릎 꿇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전하! 저희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저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억지로 왕건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저희는 억울합니다!"
그래. 억울할 만하겠지.
왕건에 의해 반강제로 혼인하게 되었으니까.
혼인에 관해서도 원 역사와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희들이 어찌 폐하를 배신한다는 말이냐?! 너희들에게는 폐하의 부인이라는 자각도 없는 것이냐? 어찌 마한 놈에게 그리 아양을 떤다는 말인가?"
왕후라는 여자는 배신감에 사무친 표정으로 후궁들에게 삿대질을 하며 악을 썼다.
"왕후께서는 말을 바로 하셔야지요! 소녀들은 이런 시집은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뭐가 좋다고 늙은이와 혼인하려 하겠습니까!"
"이년들이 정말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나라가 망해서 그런가. 측실들이 왕후를 향해 들고 일어났다.
"나라도 망했는데,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여색이나 밝히는 왕이 어떻게 왕이라 할 수 있습니까?"
"폐하께서는 너희 호족들을 모두 끌어안기 위해서……!"
슬슬 귀가 시끄럽다. 왕후도 그렇고 첩들도 그렇고, 좀 배웠다는 여인네들이 저래서야 나라가 망할 만도 하다.
"그만, 그만, 그만. 시끄럽다."
"전하! 부디 선처해주십시오. 고향에 계신 아버님이 너무도 그립습니다!"
"이년들!"
여자들의 싸움만큼 재밌는 것도 없다만, 하도 오래 이러니 슬슬 질린다.
측실 중에는 아마 왕건이 몰락하니 내빼려는 이도 있을 테고, 정말로 나이 많은 왕건을 원하지 않았던 이들도 있을 터. 어느 쪽이든 불쌍한 처지는 변하지 않는다.
분명 이 여자들 아비가 아까 그 호족들이리라.
"그만들 하시오! 지금 뉘 앞이라고 언성을 높이는 게요!"
상좌평이 나서서 싸움을 말렸다.
그럼 슬슬 판을 끝내야겠다.
"처결을 내리겠다. 왕후, 당신은 총리부에서 일해줘야겠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의 의미다. 나는 왕후도 살려둘 참이다. 그녀는 백제에 마지막까지 저항한 왕건의 아내로서 연방에 복종하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멸망한 태봉의 왕후가 손수 연방의 중심이 될 총리부를 위해 일한다면 다른 태봉의 귀족들도 따르겠지."
"내가 따를 것 같소?"
아직도 자존심을 세울 처지가 된다고 여기는 건가.
"애 모가지 떨어지는 꼴 보고 싶으면 따르지 말든지. 그리고 너희들에게 묻겠다. 이중 특히 왕건을 따른 여인들은 누구인가?"
"우리도 태봉의 궁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한 명은 압니다. 오씨입니다."
"오씨라면 오다련의 딸년이로군. 어디 있지?"
"저희들이 갇혀있던 중경에서 관노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오다련. 분명 내가 처음으로 잡고 태봉을 협박할 때 써먹던 인질이었다. 그 오씨는 노예로 만들었다는 건가.
"너희들을 죽이지는 않겠다. 이미 너희들의 아비와도 대화가 끝났으니까."
"이곳에 아버님이 있습니까?"
호족들 다 불렀으니 아마 이 여자들의 아비도 있겠지.
"나는 너희들을 마한황제에게 후궁으로 보내거나 내 첩으로 삼을 생각도 없다. 다만, 너희들도 총리부에서 일해줘야겠다. 따를 수 있겠느냐? 그리한다면 내 너희들을 아버지와 만나게 해주겠다."
쉽게 말해 인질이라는 것이다.
저들을 황제의 후궁으로 들이거나 내 첩으로 들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자리로 인질을 삼는 게 좋을 것이다.
"저, 만일 총리부에서 지내게 되면 혼인은 하지 못하는 건가요?"
후궁이었던 것을 염두하는 것인가.
아니면 궁녀들은 결혼 못 한다는 것 때문인가?
그런 생각조차를 하지 않았지만, 총리는 황제가 아니다. 하물며 총리부는 황궁도 아니니 궁녀로 들이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상관없다. 총리부에서 일하는 여인들은 단순히 일만 하는 시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녹봉도 줄 것이다."
"그럼 저희는 따르겠습니다."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든다.
"어떻게 후궁이란 것들이!"
"왕후는 조용히 하시지?"
왕후란 자가 아직도 현실 파악을 못 했어.
"그럼 나는 왜 태자와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가끔 유배지 가서 만나게는 해주지."
어딜 공짜로 만나게 해?
"자식을 생각하는 어미의 마음도 무참히 짓밟을 생각이오?"
"일 잘하면 만나러 가게 해준다니까? 안타깝게도 내가 총리라고는 해도 연방을 담당하는 고려의 태왕과 백제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 하니 어쩔 수 없소."
아무리 총리라 해도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거든.
양국의 군주가 동의를 해야 하는데. 대연화도 신검도 태봉의 왕후를 자식과 만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둘 다 한 맺힌 것이 많으니 말이다.
어차피 죽을 운명을 타고났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이런 졸렬한!"
"졸렬하기는, 다 자업자득이지. 쯧. 그러니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총리부에서 허튼 수를 부리다가는 태자를 어찌할지 모르니."
결과적으로는 일이 잘 풀렸다.
왕후란 작자는 태자의 목숨을 인질로 삼자 고분고분해져서는 연방을 위해 태봉의 왕후도 열심히 일한다는 그림을 보여주게 되었다.
호족들도 딸을 만나게 해줬더니 협상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군대를 내겠다고 했다.
심지어 호족들의 여식들은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동안은 이곳 부산진에서 잡일을 하겠다고 스스로 나섰다.
"설마하니 호족들의 군대를 이용하실 줄이야."
최승우가 다시 봤다며 호쾌하게 웃었다.
"아니, 정말 내줄 줄은 몰랐지요. 전쟁에서 꽤 큰 피해를 보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꽤 큰 피해를 본 척, 내줄 수는 없다고 울고불고 매달릴 줄 알았는데. 왕건의 횡포가 심해 반대급부로 나에게 호감을 가진 걸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서는 호족들도 전하께 잘 보여야 하니 말입니다. 사실상, 연방의 주인이나 다름이 없으시니."
"그럼 준비는 합시다. 일본을 슬슬 압박해야겠습니다."
과연 일본을 압박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 것인가.
어쩌면 아주 적은 확률로 일본의 호족들이 단합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한꺼번에 백제에 맞서도 되고 호족들이 알아서 기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정산이 안 되는 거지?"
"갑자기 어인 말씀이십니까?"
"아닙니다."
연방제까지 설립했으면 상을 좀 받아도 되잖아. 아닌가? 최근 들어 정산해주는 신이 너무 농땡이를 피우는 것 같다.
그리고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뇌리에 졸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참, 좀 까먹고 있으면 안 되냐?
[백제, 신라, 태봉. 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당신의 명성이 사해를 떨칩니다!]
[대씨 고려와 연방을 이뤄냈습니다! 한반도 역사에 길이 남을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천생연분-부인들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끈끈한 사랑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호족들의 딸과 혼인 시, 호족들의 충성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유럽의 도로 기술자들이 나주로 표류하였습니다!]
오, 도로 기술자라면 지금 당장 필요한 자들이다.
게다가 부인들과의 관계가 서먹해지지 않는다면, 이것도 나쁘지 않다.
호족들과의 혼인이 불편하기는 한데.
도로를 생각하면 일본은 더 빨리 끝내야 할 필요가 늘었다.
"전하,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그런 거 없습니다. 상귀를 부르지요."
나는 부산진을 손보고 있는 상귀를 불렀다.
이제는 수군에 관해서는 거의 백전불패의 장수가 된 그는 꽤 노련해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하명하시지요."
"우선 상귀는 호족들의 사병과 수군들을 동원해서 대마도를 점령하게. 반드시 속전속결로 끝내야 해."
이 시기 대마도를 점령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대마도의 왜들이 왜구가 된 이유가 척박하고 실기 힘들어서가 아닌가. 이 무렵까지는 왜구가 그다지 기승부리지 않는다고 해도 미래를 위해서라면 대마도는 먹어둬야 한다.
게다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대마도에 은광도 있다.
그나마 대마도의 자체 생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은이었다.
훗날 이 은광은 고갈되어 메이지 시대에 폐광되나, 그때까지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파낼 예정이니 상당히 중요한 곳이다.
"예, 전하!"
호족들이 보낸 사병들이 합류하는 즉시, 상귀를 대마도에 보냈다.
본격적으로 일본에 대한 정벌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