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구주출신의 호족이 낸 의견은 다음과 같다.
"헤이안쿄를 불태운다면 백성들의 반발이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백성들이 말인가?"
"눈치를 보는 호족들도 포함해서 말이지요. 그만큼 헤이안쿄는 일본 백성들에게는 상징적인 곳입니다."
수도를 불태우면 백성들의 민심을 잃는다라.
그렇다면 함부로 공격할 수 없겠군. 나중에 연방이 일본을 지배할 때 백성들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테니까.
"결국 고립을 시켜야 한다는 건가?"
"음, 야전에서 싸우느니만 못하게 되었습니다."
놈들이 우리를 우습게 보고 밖에서 싸우는 것이 베스트이기는 한데 말이다.
"그냥 나 혼자 들어가면 어떨까?"
"전하께서 단독으로 말입니까?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역시 그런가."
아무리 내가 죽지 않는다 해도 병사들 입장에서는 곤란할 것이다.
"차라리 고립시키고 본국의 지원을 받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세월에 이 전쟁을 끝내? 그건 곤란하다.
몇 달 이내에는 끝을 내야 연방의 체제를 완성할 것이 아닌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가만히 생각을 보니, 헤이안쿄를 박살 내도 되지 않을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헤이안쿄를 박살 내도 우리가 한 것이 아니면 되는 게 아닌가?"
우리가 한 것만 아니면 괜찮다. 덮어씌울 놈들이야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심지어 헤이안쿄 백성들이 알아챈다고 해도 일본열도 전국 각지에서 어떻게 받아들일까? 당연히 뿔난 호족들이 지 승질 못 이겨서 불태웠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기는 하오나……."
"어차피 이미 천황에게 반기를 들었던 호족들이네. 그런 놈들이 황궁이라고 불태우지 말란 법이 없지 않나."
일단 불태우고 모든 것을 호족들에게 떠넘기면 되는 것이다.
"그건. 그럴듯합니다."
"우리는 천황을 욕보인 호족들에게 징벌을 내리러 온 것이네. 다시 말해 헤이안쿄가 불타면 우리는 오히려 더 좋은 명분을 쥐게 되는 것이야."
그때는 우리가 정의로운 군대가 될 것이다.
황궁을 불태우고 전쟁을 오래도록 끈 호족 놈들을 징벌하는 천황의 군대. 그 명분이면 되겠지. 심지어 연방은 곧 백제기도 하다.
"일단 헤이안쿄까지 진군하지. 애술의 호족군이 공격할 듯 적의 시선을 끌고 부여군은 오늘 밤 나와 함께 헤이안쿄로 들어갈 것이다. 잠입해서 황궁을 불태운다. 각 장수와 호족들은 군사를 잘 다독여 헤이안쿄 점령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예. 전하.""."
연방군은 밤이 되어 헤이안쿄에 도착했다. 어째 밤이 되자 헤이안쿄가 한층 어두워 보였다.
전에도 한 번 온 적이 있었는데. 천황이 없는 황궁은 영 사람 사는 동네 같지가 않았다.
애술 휘하의 호족군으로 공격대형을 갖춰 앞에서 호족 연합군의 시선을 끌었다. 그 틈에 나는 부여군을 이끌고 헤이안쿄에 잠입했다.
헤이안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호족의 병사가 이럴 때 써먹기 딱 좋았다.
"꽤 조용하구만."
헤이안쿄 자체에 백성이 꽤 적게 남은 것 같다.
아마 피난을 가거나 그랬겠지. 남은 것은 호족 군대가 전부일지도 모른다.
병사들의 경비가 얼마나 허술한지 순식간에 황궁 안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황궁을 지키는 병사도 꽤 적다. 그냥 순찰만 도는 수준이다.
"여기 병력은 왜 이리 적은 겁니까? 서라벌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과거랑은 많이 다르군요."
고구려 유민 출신 부여군이 어이가 없는 듯 그렇게 툭 뱉었다.
"누구냐! 컥!"
황궁을 지키는 경비병들도 순식간에 제압했다. 숫자도 적거니와 고작해야 오합지졸 농민 출신들이 버티면 얼마나 버틸까.
"황궁에 기름을 부어라."
"예. 전하."
헤이안쿄에 대해 잘 아는 구주 호족의 병사가 황궁을 안내해준 덕에 황궁에 기름 붓기는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멍청한 놈들. 이렇게 걸려들다니."
화르르르르륵!
황궁에 붙은 불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이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불을 붙였으니, 빠르게 치고 빠져나가야 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황궁에 불이 붙다니! 어떤 놈이!"
어느새 연합군의 병력들이 몰려들었다.
역시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었다. 황궁에 불을 질렀는데 가만히 있을 놈들은 아니겠지. 그나마 다행한 일은 궁병들이 없다는 거다.
허겁지겁 달려왔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저놈들이다! 놈들을 잡아라!"
"놈들에게 진천뢰를 던져라!"
콰앙!
부여군들이 몰려오는 병사들을 향해 진천뢰를 던졌다.
"뭐냐, 이 소리는! 놈들이 도망간다!"
"놈들을 잡아라!"
"놈들은 오합지졸이다! 굳이 상대하지 말고 도망친다! 헤이안쿄를 탈출하라!"
황궁을 불태우자마자 내 이름의 힘만 믿고 곧바로 헤이안쿄를 빠져나갔다. 추격군이 뒤따라오지만 역시 진천뢰 몇 개에 놈들은 도망치고 말았다.
우습게도 이 과정에서 부여군의 피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 * *
"전하, 괜찮으십니까!"
연방군 본진에 도착하자 애술과 상귀가 맞이했다.
"황궁이 불타자 놈들이 달려오는 꼴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오합지졸이더군. 지금 헤이안쿄 내가 아주 어수선하네. 굳이 투석기나 화포를 사용한 공격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도 될 것 같아."
지금 꼴을 보니 분명 맨몸으로 가도 이길 것 같다.
"지금 말입니까?"
"생각보다도 호족들이 처참해. 오히려 실망스러워."
수십명의 부여군만 이끌고 헤이안쿄에 잠입했다. 그리고 우리가 황궁에 불을 지른 것이 들켰는데. 놈들은 우리를 잡지 못하고 오히려 황궁의 불을 제대로 끄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정말 일본의 호족들은 태봉의 호족들에 비하면 한참 덜떨어진 놈들이었다.
"그럼 지금 당장 공격해야 합니까?"
"아니지. 며칠만 기다리지."
"지금이 적기일 텐데 굳이?"
적기기는 하지. 지금이 딱 놈드을 조질 좋은 기회기는 하다.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고 말이다.
그래도 지금은 안 된다. 나도 끝내버리고 싶은데 구주 호족들 말대로 백성들 반발도 생각해야 하지 않나.
"말하지 않았나. 헤이안쿄가 불타오르면 백성들의 반발이 있을 거라고."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러니 며칠만 지켜보자는 거지. 괜히 지금 공격하면 우리가 불 지른 것으로 보일 테니까."
헤이안쿄에 불기둥이 치솟은 날 연방군이 헤이안쿄를 점령한다? 딱 봐도 연방군이 불 지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예. 전하."
"우선 각지에 사람을 풀어 헤이안쿄를 지키는 호족 연합군이 패할 거 같으니 헤이안쿄에 불을 질렀다 하지."
"예. 전하."
분명 시간은 조금 걸릴 것이다. 고목 나무가 될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은 없고, 며칠만 버텨 우리는 화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만 증명하면 된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 * *
헤이안쿄.
지난밤 있었던 황궁화재 사건은 호족 연합군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밤새 화재를 진압하랴, 적들이 공격대형을 갖추니 방어할 준비를 하랴 바빴으니까. 병사들이 꽤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그건 불타버린 황궁 밖 막사에 모인 호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라는 말인가. 황궁이 전부 불타다니. 심지어 불이 너무 번져서 황궁을 제외한 건물도 전소했소이다."
많은 건물들이 그 화재에 휩쓸렸다.
"대체 황궁을 지키던 병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잠을 잔 것도 아니고 대놓고 들어오는 침입자를 막지 못한다는 말인가. 대체 얼마나 병사들이 형편이 없으면 황궁도 수비할 수 없다는 말인가.
"훈련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놈들이었습니다. 다 죽어버렸습니다."
"범인은 연방군이오?"
"범인이 연방군인 건 중요하지 않소. 지금 우리가 황궁에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진 것이 문제요."
소문을 퍼뜨린 건 분명 연방군일 것이다.
그러니 방화한 것도 연방군일 터. 만일 백성들이 소문을 그대로 믿어버린다면 헤이안쿄의 병력도 크게 동요할 것이다.
지금에 있어서 헤이안쿄의 황궁은 귀족들에게 더는 지켜야 할 가치도 없지만, 병력이 동요한다면 큰일이다.
"그렇다면 한 놈이라도 잡았을 테니 시신을 보여서라도 병사들에게 이번 일은 연방이 저질렀다고 선전해야 하오."
한 호족이 그렇게 의견을 냈으나, 황궁을 담당하던 호족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무도 잡지 못했소."
"무슨 말이오? 단 한 명도 잡지 못했다는 말이오?"
말이 되는 건가. 어떻게 황궁에 몰려간 수천 명이 수십 명도 잡지 못했다는 말인가.
"병사들이 죄다 오합지졸이라는 말인가."
"오합지졸이라니!"
"밤중에 잠입했다고는 하나 연방군은 겨우 수십인데, 심지어 다른 데도 아니고 황궁에 침입한 놈들 단 한 명도 못 잡다니! 그게 그럼 오합지졸이지 뭐요?"
솔직히 믿기도 힘들다. 아예 그냥 황궁을 내어주고 배신했다는 것이 더 믿음이 가지. 대체 병사들이 얼마나 형편이 없으면 이렇게 되나?
"그, 그건……."
그건 정말로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설마하니 적들이 소수의 군대를 보내 황궁을 불태울 거라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진정하고 일단은 헤이안쿄를 방어해야 하오."
"다들 우리를 의심하고 있지 않소. 이런 상황에 방어라니?"
"그러니 더욱 방어해야지. 지금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으니까!"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 그러니까 헤이안쿄를 철통같이 틀어막아 결사 항전을 해야 한다.
"아니, 놈들이 풀어놓은 헛소문은 어떻게 잠재워야 하지 않소?"
"잠재우다니, 이대로 나가면 우리는 그대로 죽을 것이오."
밖에 연방군이 신무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
이 마당에 나가자는 것은 멍청한 생각이었다.
"우리가 병력이 더 많소이다."
"그래서 그 병력 끌고 나가서 인근 백성들을 설득하라는 말이오? 나가다가 연방군에게 두들겨 맞을 것이오. 전멸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이 소식도 연방군을 피해 겨우 얻어온 것이라는 말이오."
호족군들은 기가 찼다.
그렇다면 이미 승기는 저쪽으로 기운 것이다. 순식간에 호족들이 이 나라의 역도가 되어버린 것. 이대로라면 연방군이 대놓고 헤이안쿄를 들쑤셔도 호족군이 스스로 헤이안쿄를 없앴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다.
천황이 바보천치처럼 다른 나라로 가버리기는 했어도, 저들 연방군은 사실상 장인의 요청으로 사위가 반군을 무찌르려고 온 것이니까.
그렇다면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그럼 이제 적들과 맞설 방법을 찾아보시오."
"그냥 여기서 결사 항전하는 것이……."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냥 여기서 최후까지 결사 항전하는 것. 그러다 하늘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이겨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열도의 절반이 날아간다 하더라도 버텨내면 된다.
"그 계획은 이제 더는 써먹지 못하오. 안 그래도 동요하는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것 같소이까?"
안 그래도 승기가 없는 전쟁인데, 병사들까지 동요하는 마당에 결사 항전이라는 듣기로만 좋은 전략을 취하면 군대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럼 이대로 당하자는 것이오?"
"규슈의 멍청한 놈들이 연방에 붙은 탓에 이미 승세는 기울었소이다. 미심쩍을 때 차라리 다타라를 쳐서 연방군의 상륙을 저지했어야 했는데."
차라리 군대가 모이는 대로 다타라로 가 다타라를 무찌르고 보급품이라도 얻어 적들의 상륙을 저지해야 했다. 그랬으면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에서 싸웠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합시다. 그냥 죽어줄 수는 없으니."
지금이라고 못 할 건 없다.
"그게 무슨 말이오?"
"군사 1만을 우회하여 다타라를 칩시다. 밤에 몰래 이동하면 될 것이오. 때마침 금강이 그놈도 군사를 한 곳으로 집중시켰으니 알아채지 못할 것이오."
전 병력이 빠져나간다면 모르겠지만 최소한 1만 정도는 어떻게 빼서 다타라까지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다타라에 피해를 주면 적들이 병력을 나눌 수도 있겠지.
"양동작전을 하자는 말씀이시오?"
"그렇소이다. 이대로 당하는 것은 억울하지 않소?"
다들 알고는 있다. 이 싸움이 이미 패배했다는 것 정도는. 그렇다면 최소한 최후의 저항이라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결국 호족들의 새로운 전략이 수립되었다.
성공만 하면 금강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최후의 전략이, 마침내 수립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