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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에서 살아남기-99화 (99/154)

99화

일본 열도는 한반도보다 크다. 그런 마당에 이 당시 영주들이라 할 수 있는 호족들까지 처단당했으면, 일본은 지금 천황도 없으니 무법지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군대 파병이 절실할 것이다.

"예. 이미 한참 일찍 군사를 요청하였습니다. 평양에서 선별한 3만의 군대가 추가로 올 것입니다."

"평양은 연방의 총리부가 아닙니까?"

"예."

"총리부에 그만한 군대가 있었습니까?"

설마 그사이에 그런 대군이?

"전하께서 태봉의 호족과 왕족들을 처리하고 일본으로 넘어와 일본을 경략하면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총리부를 세울 때부터 이미 고려와 백제의 연합군이 만들어져, 그들을 연방군으로 창설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일을 제법 똑 부러지게 하고 있구나.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면 그래도 미리 준비한 것들이 효과가 좋았던 것 같다.

"지금 연방군의 총병력은 20만입니다. 3만 정도야 괜찮지요."

그러고 보니 일본에도 남북조 시대가 있었지.

남북조의 남조가 요시노 지역에 있었다.

당장은 그렇게 하는 편이 연방 입장에서도 지원하기 쉬울 것이다.

조금이라도 열도를 보다 관리하기 편하려면 도로정비도 해야 한다.

"포로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수천 명입니다."

수천 명이라, 걔네들을 노역시킬 생각이었는데 수가 적지 않을까.

"역시 그럼 중국을 털어먹어야겠지."

사람 수는 중국이 제일 많지 않나. 도로정비를 위해서는 인력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지금 연방은 그만한 인력을 뺄 수 없다.

"도로정비는 중국을 털고 나서야 가능하겠군."

모처럼 도로를 정비할 기술자들이 있어도 사람이 없다.

역시 전쟁에서 피해가 너무 컸어. 왕건이 저항하다 죽게 만든 병사들만 따져도 수만이 넘는다.

그렇다고 일본인들을 데려와 돈 주면서 노가다 시키기도 뭐한데.

"중국이라 하시면…… 혹시 중원과 전쟁을?"

"분열한 중원입니다.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지금 중원에서 우리보다 강한 나라를 찾기는 힘들 것입니다."

어차피 중원정벌은 신검 역시 바라는 것이었다.

고려의 태왕이자 황제인 대연화도 받아들일 것이고.

"그러나 중원은 상대하기 힘들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도 그리해야 합니다."

마침 지금 놈들이 분열했으니, 확실히 분열 상태로 짓밟아둬야 한다.

최소한 통일은 못 하게 막아야지. 통일한 중국은 연방에 위협이 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힘들 것이다. 중원은 땅이 넓고 인구도 많다.

그러나 유목민족들이 저마다 중원을 지배한 적이 있었다. 지금 우리도 저 북방의 대씨 고려가 살아남은 이상 유목제국 특유의 힘은 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요나라의 야율덕광도 우리를 돕는다면 어렵지 않겠지.

"그렇다면 요와 연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최승우는 아마 내 속을 이미 꿰고 있는 듯싶었다.

"요가 지금 우리를 도울 처지가 됩니까?"

세를 조금 회복했다고는 해도 상황을 보면 군사를 따로 뺄 형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야율배가 중원을 노린답니다. 요의 조정에 있는 백제인들이 보낸 소식입니다."

"야율배가 중원을 노린다라."

그간 꽤 참아왔겠지.

중원의 상황을 시시각각 살피며 내치를 돌보느라 어지간히도 힘들었을 것이다.

저 분열된 땅덩어리로 쳐들어가고 싶어 몸이 근질거릴 테니까.

동쪽으로는 오지 못하니 만리장성 이남을 노리겠지.

"겨우 내부를 수습하였으니, 업적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자기 아비가 나라를 망치고, 심지어 야율덕광 자신도 좀 힘들게 올랐으니."

야율배는 어떻게든 옛 영광을 회복하고 싶을 것이다.

"예. 황위 등극을 우리의 도움을 받은 이상 뭐라도 큰 업적을 세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일단 요와의 관계를 강화시키는 것이 좋겠군요. 천도 문제는 어떻게 되어갑니까?"

"서라벌이 수도로 적합하다는 게 조정의 중론이며, 완산주의 백성들도 서라벌로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 의외로군. 백성들까지?

"잘도 받아들였군요."

"복수란 다양한 방법으로 존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신라의 천년 수도였던 곳을 백제의 수도로 삼으면, 신라의 정통성을 우리가 흡수하게 되는 셈이지요."

신라의 천년 수도를 백제인의 손으로 다스린다는 것. 의자왕의 복수를 명분으로 들고 일어난 백제에게는 통쾌한 복수가 아닐까.

아버지의 유지를 잇는 신검도 그 정도는 생각했을 것이다.

"나쁘지는 않군요."

백제는 새로운 수도를, 그리고 나아가 일본 열도를 흡수한다.

고려는 저 드넓은 북방을 평정하고 있다.

그야말로 대국의 위용을 갖추게 된 격이 아니겠는가.

"천황은 언제쯤 불러올 생각이신지요?"

"지금 부를 필요는 아직 없지 않을 텐데?"

애초에 부를 필요가 있는가? 어차피 백성들을 버리고 백제로 토낀 천황이다. 이미 몰락할 명분은 충분하다.

"예. 괜히 불렀다가는 전하께서 일본을 잡는데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하옵고, 이제 이 열도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인재가 필요하실 겁니다."

호족들을 다 족칠 예정이니 인재가 필요는 하다.

안 그래도 일본을 다스리기 힘든 시절이니 현지의 관리라도 뽑을 예정이었는데.

"추천할 인물이라도?"

"일단은 대봉예 공이 어떻겠습니까? 일본에 심어도 결국 연방의 사람이 되는 것이니 연방을 위해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봉예라.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래. 일본에 있었다고 했지. 최승우가 잘 챙기고 있었다. 어쨌든 대봉예는 지금으로서는 필요한 사람이다.

"현재 다타라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진즉에 나를 찾아올 일이지."

"하하. 길이 엇갈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엇갈리기는 개뿔. 아마 나를 만나기 좀 무안했던 거지.

* * *

완산주.

헤이안쿄에서 연방군이 호족 반군을 상대로 대승을 이루었다는 소식은 완산주의 천황에게도 알려졌다.

"사위가 승리하였다면 이제 일본으로 돌아가도 되는 것이 아니오?"

"지금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 천황께서는 진정하시오."

신검은 죽을 맛이었다.

하필이면 천황이 대전을 들어오다 모든 것을 듣고 말았다. 머리가 복잡하게 되었다. 또 얼마나 귀찮게 할까.

"대체 무슨 문제라는 말이오?"

"헤이안쿄가 아예 불타버렸다는 소식이오."

신검조차도 놀랐던 경악할 소식. 본래는 금강이가 불태웠으나, 금강은 호족들에게 그 책임을 전부 떠넘겼다고 한다.

대체 뭐 이런 엄청난 짓을 벌였는지. 하여간 동생이 너무 뛰어나도 탈이었다.

결국 그 뒷수습을 하는 것은 자신이니까.

"뭐라!"

"그래서 진정하라는 것이오. 금강이가 한 일이 아니라 금강에게 맞선 호족들이 벌인 일이오."

금강의 책사인 최승우가 보낸 서신에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것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입은 일본의 피해는 전부 호족들 탓으로 돌리라고 했다.

즉, 남 탓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면 마한 황제께서는 내게 어쩌라는 것이오?"

"이런 말 하기는 뭐한데……."

"무슨 일이 더 있소?"

그래. 무슨 일이 있지. 어쩌면 게거품을 물지도 모를 일이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천황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호족 연합의 주력을 격퇴하였으나, 반란의 무리가 계속 들고일어나는 탓에…… 연방에서 3만을 더 보내게 되었소이다."

연방군 3만이 다시 바다를 건너게 생겼다. 이것을 거듭 강조했다. 안 그래도 그간 많은 전쟁을 치러왔는데 큰맘 먹고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인즉……?"

"지금 일본은 천황께서 돌아가셔도 바로잡기 힘든 지경에 이른 것이오."

속으로는 내심 일본을 백제에 편입시켰다는 생각에 기뻐하던 신검이었으나, 겉으로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천황과 슬픔을 공유하는 척하였다.

여기서 좋아하면 안 된다.

"그럼 짐은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이오?"

"상황을 더 봐야 알 것 같소."

"상황이라니, 일본 열도의 주인은 짐이오!"

그걸 왜 모를까. 그래도 결국 승자는 금강이 될 것은 뻔하다. 이런 연약한 자가 어찌 천황으로서 군림할 수 있을까.

신검은 한숨을 쉬었다.

"그것을 왜 모르겠소. 그런데 호족들이 일본에 더는 천황은 없다며 전국시대를 선포한 모양이오. 그 영향 때문인지 지금 사방에서 난립하는 반군을 제압하기도 힘든 처지고. 솔직히 연방군 3만의 파견은, 우리 연방으로서도 많은 힘을 쓰는 형국이오."

신검이 우리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며 고개를 젓자 천황은 뒷골이 뜨거워졌다.

"그런 정신 나간 작자들이 있나! 흑! 끄으윽!"

"폐하!"

"아버님!"

천황은 뒷머리를 잡으면서 쓰러졌다. 그리고 자신을 부축하는 딸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아이고, 딸아…… 이제 어찌하면 좋다는 말이냐! 내 최승우란 자의 말만 믿고 넘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놈만 아니었어도 일본에서 백제의 지원군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천황과 후지와라는 뒤늦게 최승우를 욕하면서 분노를 삼켰다.

"아닙니다. 그 덕에 지금 아버님과 후지와라가 살아남은 것이 아닙니까? 만일 호족들의 손에 급변이라도 당하셨다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호족들의 손에 천황이 죽었다면 그때는 정말 일본에 호족들의 시대가 도래했을 것이다. 지금 그나마 천황이 이 백제 땅에 있으니 아직은 왕조 국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는 말이냐?"

"그럼 내친왕께서는 목숨을 건진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어쩔 수 없다. 치사하고 더러워도 지금 일본의 천황이 할 선택은 많지가 않다. 이제 와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도 양심이 있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슬픈 일이지만 그럴 수밖에요.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제 남편인 연방의 총리가 민심을 얻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설마 금강이에게 황위를?"

"이미 총리인 남편입니다. 황위를 제 서방에게 줘서 무엇하겠습니까?"

어차피 황제보다 지금 위에 있는 것이 금강이란 사내다. 굳이 천황의 자리를 물려받을 이유가 없다.

"그럼 네게 달란 소리냐?"

"이 딸도 지금은 백제인입니다. 또 아버님의 여식이구요. 저 역시 불가합니다. 그러나, 제 아들은 어떻습니까?"

현재 일본 천황가는 일본을 다스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반란을 진압하고 민심을 챙기고 있는 금강이 유력하지만, 금강은 총리이며 오로지 백제의 피만 잇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식인 부여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두 황실의 핏줄을 타고난 고귀한 존재.

"광이를 말이냐?"

"예. 제 아들이면 그래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때마침 광이는 마한황제의 뒤를 잇는 몸이기도 합니다."

부여광. 부여금강과 요시코 내친왕 사이에서 태어난 백제와 일본 황실의 핏줄. 충분히 명분이 있다.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뿐인가."

"어차피 백제와 일본은 한 몸입니다. 그리고 광이는 마한 황제의 피와 천황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이보다 완벽한 혈통도 없지요."

다른 핏줄이라면 모르겠으나, 일본 황실의 핏줄이 흐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차피 지금의 천황은 일본에서 더는 그 지위를 누릴 수 없다. 그 탓에 일본의 황실이 흔들려 천황가가 몰락할 상황이 온다면, 차라리 손주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일 것이다.

"그야. 그렇기는 하다만……."

"어차피 이대로 귀국하셔도 천황의 자리에 있기는 힘드실 겁니다. 차라리 백제에 계시다가 광이에게 황위를 넘기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되었다는 말인가."

천황은 한탄했다.

지금이라도 일본으로 넘어가 호족들을 설득할까. 그러나 이미 적들이 사위에 의해 처단당했다고 한다.

"그나마도 사위가 있으니 이 정도인 겁니다. 나라가 수습될 때 귀국한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한동안 일본의 천황으로 군림하신 다음, 적절한 때에 부여광에게 천황의 자리를 양위하면 되는 일입니다."

"알겠다."

천황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결국 천황가의 핏줄이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천황은 마한황제 신검의 허락을 구하여 완산주에서 형식적인 일본 조정을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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