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자비를 보이는 것도 한 번이지, 두 번은 안 된다.
"비록 후지와라가 천황 폐하를 빼내기 위해 속였다고는 해도, 그간 바친 가산이 결코 적지가 않습니다."
"으음."
그래. 그동안 많이 바치기는 바쳤지.
도로를 만들 때도 있는 돈 없는 돈 다 내놓았다.
그럼 또 뭐, 굳이 잡아 죽일 이유가 없는 것도 같은데. 그냥 단순히 압박하는 수단 정도로 나쁘지 않을 것이다.
후지와라나 장인은 이제 정치에는 손을 댈 수도 없는 처지니까.
"당장 옛백제의 서적들을 갖다 바친 것도 후지와라였으니 그간의 공을 한 번 생각해주시지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군."
그래 봐주도록 하자.
그런데 문제는 남부의 아이누들이었다.
남부의 아이누들은 뭐가 문제인지 잔뜩 얼굴이 구겨져서는 나를 찾아왔다.
"대체 왜 지원을 하지 않는 것이오?"
"대신 물자를 보내지 않았소?"
"애초에 약속된 군사적 지원은 왜 없는 것이냐고 묻는 것이오!"
왜 약속된 군사적 지원이 없느냐고 따져도. 우리는 이제 굳이 끼어들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북부 아이누도 이번 공격으로 꽤 피해를 입은 모양이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하지 않았소? 애초에 남쪽에서 합류하는 것보다 이쪽에서, 그리고 아래쪽에서 서로 협공하는 것이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것이 아니겠소? 우린 적들의 본진을 한 번 쓸었는데, 설마 그들도 처리 못 한 것이오?"
이건 좀 실망적인데.
"놈들이 죄다 도망쳐버렸으니……."
"설마 그것까지 우리보고 해결해달라? 이건 좀 아니지 않소? 썩 돌아가시오. 자꾸 그러면 우리는 연방의 방식대로 해결할 테니."
남부 아이누족들을 쫓아냈다.
그래도 영 속이 찝찝했다.
생각해 보니 남부 아이누들은 잘못한 것도 없으니까. 오히려 이건 순전히 내 이기심으로 벌어진 일이다.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서 보급은 그만큼 해주고 있으니 서로 쌤쌤 아닌가.
게다가 내 입장에서는 둘이 계속 싸워주는 이득이다. 그렇게 해야 우리 연방이 북해도 장악이 쉬워지니까.
그렇게 슬슬 나태해질 무렵. 상좌평이 볼멘소리를 냈다.
"이곳에 언제까지 머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차피 연방일은 장관들도 잘 해내겠지."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가도록, 행정에 나름 머리가 잘 굴러가는 호족들 출신이 많다. 연방 군부는 관흔이 수장이고 그 밑으로 백제와 고려의 장수들이 즐비하니, 지금은 내가 없어도 충분히 나라가 돌아갈 거다.
"그게 문제가 아니오라 국가의 지도자이십니다."
국가의 지도자라, 나 말고도 많지 않던가.
"나만이 지도자는 아니지요. 오히려 두 나라의 황제도 있지 않습니까?"
연방정부는 결국 중앙에 존재하는 최고권력기구지만, 유사시에는 현덕부와 금성부에 있는 각국의 황제가 나라를 이끌어도 된다.
대연화도 부여신검도 나름 정치는 할 줄 아니까.
더군다나 신검에게는 도로에 관련해 적극 당부했으니까 금성부는 도로 정비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각하."
"말씀하세요, 상좌평."
"신에게는 솔직히 말씀해주시옵소서."
말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저 양반 목소리 깔 때는 항상 무섭다.
"무엇을?"
"솔직히 조금 휴식을 취하러 오신 것이 아니십니까? 이 늙은이의 눈까지 속이려 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이거 참. 역시 상좌평이라는 건가. 바로 들켜버렸다.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할 말은 많다. 솔직히 이 정도 일했으면 이제는 조금 쉬어야 하지 않을까.
도로 정비 사업도 내가 손수 보니 이 정도면 지쳤다.
"허허. 이거 내가 상좌평을 속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흠, 쉬어가실 때도 되기는 하셨지요."
그래. 이 정도는 즐겨도 되지 않은가. 그러니까 내가 쉬고 싶은 것을 막지 말라.
아예 별장까지 지어버릴까? 이곳이라면 별장을 짓고 휴식을 취하기 좋은 동네 같은데.
물론 상좌평이 나를 그대로 둘 리 없지. 아마 그는 내가 앞으로도 계속 나라를 키우기를 바랄 것 같다.
"것 보세요. 이 정도 하면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시지요. 연방은 이 정도면 많이 컸습니다. 중원을 분열시키는 것은 좀 휴식을 취한 후도 나쁘지 않지요."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지. 나한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곤란하다.
솔직히 백제와 고려. 어느 한쪽으로 나눈다고 해도 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요."
"다만, 중원이 그간 통일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기분 좋게 쉴까 했더니 상좌평의 말에 불안해졌다.
석경당이 연방의 도움으로 후진을 세웠는데. 그 아랫놈들은 가만히 있을까?
뭔가 뒷골이 써늘해진다. 지금 이렇게 방심하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다.
연운 16주에는 군사가 얼마나 있던가. 후진은 사실상 우리 제후국이나 마찬가지인데. 뭔 일 터지면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냥 북해도 일을 빨리 마무리 지읍시다."
그게 그냥 편할 것 같아.
"그렇다면 북해도 일은 어떻게 마무리 지으실 생각이십니까?"
"아직은 전투가 계속 일어나는 상황이지요."
"예."
그렇다면 뭐 우리가 어딘가에 끼어들어서 싸울 필요가 있을까.
이 틈을 노려 관청을 세우고 덕으로써 아이누족을 다스리면 된다. 그뿐이 아닌가.
마침 마사오라는 놈도 있겠다. 전혀 나쁠 것은 없어 보인다.
"중재합시다. 전쟁은 이쯤이면 되었다고 말입니다."
"예, 각하."
아이누족들의 전쟁은 멈췄다. 연방이 진에 이어 관아를 설치해 두 세력을 중재했기 때문이다.
아이누족들도 서로 싸우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알아서 고개를 숙였다.
"우리 연방은 두 부족에게 교역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누구 때문에 싸웠는데!"
물론 북부에서는 반발하는 놈도 있고.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애초에 우리 잘못입니까? 먼저 북부에서 내 장인을 납치하였으며, 남부에는 내 북부를 공격한 데에 이어 무기까지 지원해주지 않았습니까?"
"커흐흠."
북부 아이누 측에서 고개를 돌린 채 헛기침을 했다.
"두 부족 다 전투에서의 피해가 크니, 교역소를 세워 두 부족에게 아낌없이 지원해 드리리다. 본래 두 부족의 싸움은 전리품에 의해 발생한 것이니 충분하지 않소?"
"허."
말이 교역소지 결국 관청이다.
그 관청은 두 부족을 중재하겠지만 동시에 서서히 통제할 것이다.
군사는 5천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그 관청의 책임자는 한 명밖에 없다.
"마사오, 잘 해낼 수 있나?"
"가, 각하?"
"일단 관리들을 파견해줄 테니, 그들에게 이 원주민들의 언어만 가르치게. 북부랑 남부의 도움도 받고 말이야."
북부와 남부는 거절하지 않았다.
특히 남부는 이미 우리 지원을 받은 전례가 있으니까.
무기와 음식, 모든 것을 받은 남부에게 털리던 북부도 마찬가지다.
결국 두 부족 전부 연방인들에게 이곳의 언어를 가르치게 했다.
"저, 그럼."
"걱정 말게. 나는 한번 한 약속은 지키니. 고려의 현덕부, 백제의 금성부, 연방정부의 평양. 자, 고르게."
너에게는 원하는 대로 집을 주겠다. 그런 선언이다.
내 집 마련의 기회. 고작 통역 한 번 했다고 마사오는 대박이 터진 것이다.
"저. 그래도 금성이……."
금성부라. 나쁘지 않지. 신라의 천년 수도고 그 위세는 여전하니까. 평양과 현덕부도 나쁘지는 않지만 마사오의 고향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금성에는 여전히 빈 집이 많으니 그 집을 내어주면 될 것이다.
"좋네. 금성부의 고래등 같은 집을 준비해두지. 가족들이 있다고 했나?"
"네. 지금은 부산진에 머무는 것으로 압니다."
"자네가 관리들에게 인수인계하고 금성부에 돌아올 즘에는 비단옷을 입은 처자식들이 거대한 저택에서 나와 자네를 맞이할 것이네."
고된 노동을 마치고 몇 달 만에 돌아왔더니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옷을 걸친 처자식이 기다리고 있다? 돈을 번 보람이 있지 않을까.
"충성을 다 바치겠습니다!"
"아니야. 그리고 몇 달은 걸리겠지만, 그, 이번에 내가 세운 별장은 자네가 이용해도 좋네. 일할 사람도 좀 붙여주지."
"예!"
이런 식으로 발판을 마련해서 서서히 북해도를 우리 땅으로 만들면 된다.
아이누 입장에서도 결국 전혀 나쁠 것이 없다. 이득만 있을 것이다. 전쟁도 끝나고 물자도 지원받는데 뭐가 문제인가?
* * *
임황부.
"금강이 참으로 부럽구나. 내 그때 금강과 함께 남진했어야 했는데. 끄응."
야율배는 최근에 배가 쓰렸다.
연운 16주를 먹고 중원 쪽 영토를 크게 넓혔다. 심지어 후진을 세운 석경당이 스스로 연방의 신하라고 했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때 금강의 제안만 받았어도 어쩌면 중원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함께 먹을 수 있었겠지.
이제 군사력도 제법 커졌다. 지금이라면 밀어붙일 수 있지 않을까. 중원을 넘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자면 결국 연방이 또 걸린다.
연방은 백제와 고려가 연합한 대국이다. 만약 후진으로 남진하고자 한다면 연방과 척지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전쟁상태에 돌입하겠지.
당장 연운 16주와 저 요동에 부활시킨 천리장성은 20만이 넘게 주둔해있는데 말이다. 아마 그리하면 연방과 정면 대결이 될 것인데.
"승산은 있나?"
승산이 있는지의 문제다.
연방은 무기도 좋고 군사의 훈련도 만만치 않다.
저 동쪽의 고려는 옛 기세를 회복하여 그들의 기마군만으로도 능히 요와 맞설 것이다.
거기에 남쪽의 백제군은 강력한 보병과 화포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지금 요가 대군을 일으킨다면 연방과 못해볼 것도 없다. 그러나 후진의 역량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후진이 고기 방패라도 한다면 연방과의 싸움은 힘들어질 것이다.
"굳이 칠 이유도 없겠지."
밑에서 일을 알아서 잘하다 보니 혼잣말이 늘고 생각이 많아졌다.
솔직히 여전히 배가 아프다. 약 오르지 않은가. 그때 전후 사정을 다 설명했으면 군대를 냈을지도 모를 일인데.
"폐하. 후진의 석경당이 사신을 보냈습니다."
"끽해야 잘 부탁한다는 소리가 아니겠나."
이웃 나라니 예의상 보낸 것이다.
"사신으로 온 하동절도사 유지원이 반드시 만나고 싶다 하여……."
"나도 나름 대칸이자 천잔데 참으로 귀찮게 하는군."
그래도 최근에 너무 무기력한 감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정치도 전부 아랫놈들에게 맡기니 이거야말로 정말 허수아비 황제가 아니고 무엇일까.
밑에 있는 백제와 한족 놈들이 제법 일을 열심히 하고 있고, 그 덕에 내부가 꽤 안정되었는데 말이다.
"대요제국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본론을 말하라."
그래서 들어보니 다름이 아니라 결국 이웃끼리 친하게 지내자는 것이다.
굳이 이렇게 대면해야 할까 싶지만, 문제는 그날 밤이었다.
관료들이 궁궐에 남지 않은 새벽의 조용한 시간. 황궁으로 하동절도사 유지원이 몰래 찾은 것이다.
하동절도사 유지원은 대뜸 무례를 무릅쓰고 황제를 직접 찾아갔다.
"대체 이게 무슨 무례란 말인가? 그것도 은밀히. 지금 황제인 나를 암살이라도 할 셈이었나?"
이거 아주 위험할 뻔하지 않았나.
당장 이 자리에서 하동절도사를 죽이고 진에 사신을 보내 엄히 문책하려고 했으나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따로 폐하와 독대를 하고 싶습니다만."
"지금 말인가?"
무례가 끝이 없다.
"요에는 백제인이 많다 들었습니다. 하여 이렇게밖에 뵐 수 없는 점 참으로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어느새 소문이 그렇게 났나.
진나라까지 알려졌다면 사실상 천하가 아는 사실이 아닐까. 그렇다면 요는 백제인의 손에 있다는 등의 헛소리가 돌 테고.
그래, 어디 계속 들어나 보자. 이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