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헬 나이츠 4권 (12화)
Episode 35 겁을 내다 (3)
그때 기사 한 명이 군막 안에 들어섰다.
그는 곧바로 레딘 기사단장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레딘 기사단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실이냐?”
“네, 그렇습니다.”
“알겠다. 주변을 경계를 하고, 병력을 지금 당장 준비시키도록 해.”
“네, 단장님.”
지시를 받은 기사가 나가고 어두운 얼굴이 된 레딘 기사단장이 베이런 후작에게 말했다.
“후작님, 아무래도…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레딘 기사단장의 말에 베이런 후작이 그를 보았다. 매우 어두워 보이는 모습에 뭔가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 자신 있게 소리치는 발데스와 벨키라노의 시체, 그리고 레딘 기사단장의 어두운 표정, 베이런 후작은 점점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레딘 기사단장의 안내로 베이런 후작과 게이런 남작, 나머지 가신들이 움직였다.
“이곳입니다.”
병사들이 둘러싸여 있는 곳이었다. 레딘이 나타나자 병사들이 물러났다. 그 안으로 들어선 베이런 후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 이것은 또 무엇이냐?”
베이런 후작이 본 것은 죽은 발록의 시체였다. 팔과 다리가 뜯겨져 나가고, 가슴이 파헤쳐졌으며 얼굴이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 덩치도 어마어마해 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게이런 남작도 흉측한 괴물의 시체를 보고 넋을 잃었다.
“시체가 너무나 망가져 있어.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생긴 괴물은 생전 처음 봅니다.”
레딘 기사단장이 설명을 했다. 그때 한 명의 가신이 나서며 말했다.
“혹시 오우거는 아닌가?”
“오우거보다는 훨씬 큰 존재입니다.”
레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베이런 후작이 큰소리로 말했다.
“그럼 뭐냐! 발록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의 말에 레딘 기사단장을 비롯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놀란 얼굴이 되었다.
발록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베이런 후작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말 같은 소리를 해라! 마계의 존재인 그것도 투신이라고 불리는 발록이 어째서 이곳에 죽어 있냐 말이다!”
베이런 후작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 치부했다. 하지만 게이런 남작은 생각이 달랐다. 그가 조용히 베이런 후작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흑마법사들은 소환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혹여 흑마법사가 소환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게이런 남작의 말에 베이런 후작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러자 가신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럼 발록을 다른 흑마법사가 없앴단 말인 것인데. 조금 전에 후작님 군막에 있던 흑마법사들은 어제 우리가 데려온 흑마법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발록은…….”
“으으, 이거 큰일이군. 발록도 죽었고, 어제 데리고 온 두 흑마법사들도 죽었고, 그럼 적들의 흑마법사는 아직 남아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허헉! 그렇군. 그럼 어찌한단 말이지?”
가신들이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겁에 질린 표정으로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베이런 후작이 발악을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그만! 다들 입을 다물라!”
가뜩이나 머리가 어지러운데 도움도 되지 않는 말들만 꺼내고 있었다.
게이런 남작도 어두운 얼굴로 베이런 후작에게 말했다.
“후작님, 가신들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 측 흑마법사들이 죽었다는 건, 다른 흑마법사가 이겼다는 뜻입니다. 실력으로 보아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베이런 후작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게이런 남작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대로 계속 진군을 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의 말에 베이런 후작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렇다는 것은 퇴군하자는 말인가?”
“어려운 결정이시겠지만, 그것이 옳다고 느껴집니다.”
“안 된다, 안 돼!”
베이런 후작은 단칼에 거절했다.
하지만 게이런 남작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갔다.
“어젯밤도 그렇지 않습니까. 놈들은 우리 군의 한복판까지 들어와 후작님의 군막에 시체를 두고 갔습니다. 게다가 시체를 놓고 갔으면서도 후작님을 어찌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일종의 경고의 뜻인 듯합니다. 언제든지 목숨을 거둘 수 있다. 그러니 조용히 물러나라. 이런 뜻이 아닐까요?”
게이런 남작의 말을 들은 베이런 후작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젯밤 놈들이 자신의 군막에 시체를 두고 간 것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게이런 남작의 말마따나 자신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판이었다. 그런데 시체만 두고 간 것은 역시 게이런 남작이 말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에페로 자작성을 코앞에 두고…….”
베이런 후작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한 번 크게 싸워 보지도 못하고 퇴각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물며 큰소리 치고 나온 출정이 아닌가. 눈 주위에 주름이 생기며 몹시도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게이런 남작이 입을 열었다.
“후작님께서 무슨 의도로 이렇듯 고민하는지 다 압니다. 그러나 만약 후작님께 변고가 생기면 군의 사기는 엄청나게 떨어질 것입니다. 우선 인근 성으로 돌아간 후 추후를 지켜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게이런 남작의 끊임없는 설득에 베이런 후작은 마지못해 승낙을 했다.
“알겠다. 지금 당장 진영을 정리한 후 퇴각한다.”
“네, 알겠습니다. 후작님.”
게이런 남작은 곧바로 레딘 기사단장에게 다가가 퇴각 명령을 내렸다.
레딘 기사단장은 잠시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인 후 사라졌다.
잠시 후 폐허 성에 진영을 차린 베이런 후작군은 그곳을 떠나 폐허 성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노르딘 성이었다.
노르딘 성은 베이런 후작성과 폐허 성 중간에 위치한 성이었다. 우선은 그곳에서 지내며 작전을 새롭게 세운 후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3
제이크는 폐허 성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아 있었다. 양반 다리를 하고 허벅지에 팔을 기대어 턱을 받친 채였다. 그는 발록을 죽인 후부터 계속해서 저 상태였다.
뒤에는 폴과 필이 그런 제이크의 모습에 눈치를 살폈다.
“도련님 왜 저러시지?”
“몰라, 발록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서 그러나?”
“에이, 설마?”
“설마가 아니야. 발록은 마계의 투신이잖아. 그런데 인간계로 넘어와 죽었잖아. 마계에 있어야 할 녀석이 말이야. 그래서 그런 것일 거야.”
“음, 일리가 있네.”
폴과 필은 말도 되지 않는 논리로 스스로를 위안 삼았다. 그런데 그 모든 말을 제이크가 다 듣고 있다는 것이다. 제이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중얼거리는 폴과 필의 말에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홱 돌리며 째려보았다.
“너희들 조용히 못해!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말할 생각이거든 차라리 먼 곳에 가서 하던가. 아니면 내가 듣지 못하게 살살 말하던가.”
제이크의 호통에 폴과 필은 서로를 안으며 무서워했다. 필이 조용히 말했다.
“저희는 도련님이 걱정이 되어서…….”
“시끄러, 나의 걱정은 너희 둘이야!”
제이크가 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 베이런 후작이 보였고, 뭔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병력이 서둘러 철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후훗, 이제야 움직이는군.”
제이크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그의 말에 폴과 필이 달려왔다. 그들 눈에도 역시 베이런 후작군이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라, 그러네.”
“뭐야, 벌써 끝이야? 아직 다 놀지도 못했는데.”
폴이 실망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베이런 후작군은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들 모두 허둥지둥거렸다.
발록이라 의심되는 괴물의 시체와 동료 병사들의 죽음. 게다가 도움을 주러 온 두 흑마법사의 죽음까지 이 모든 일이 하룻밤에 벌어진 것이었다.
베이런 후작군은 폐허 성의 저주라며 공포감에 빠졌고, 군의 사기는 점점 떨어졌다. 몇몇 탈영병까지 생겨났다.
이대로 있다가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질 것 같았다. 그래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우선 이곳을 벗어나 보기로 말이다.
그리고 얼마 후 베이런 후작의 퇴군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은 한숨을 내쉬며 기뻐했다.
여기 저주 같은 폐허 성에서 한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퇴각 준비를 마친 병사들은 서둘러 폐허성 뒤쪽에 위치한 노르딘 성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폴과 필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한 마디씩 했다.
“뭐야, 도망가는 거야?”
“쩝, 싱겁게 말이지. 좀 더 있지.”
폴과 필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가 허둥지둥거리는 베이런 후작군의 모습에 웃기 시작했다.
“푸하핫! 저것 봐, 완전 겁먹은 모습이잖아!”
폴이 배꼽을 잡으며 말하자 필은 약간 실망스런 얼굴로 말했다.
“쳇! 이게 뭐야, 너무 허무하잖아.”
필의 말에 웃던 폴도 약간 아쉬운 얼굴이 되었다. 폴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제이크를 보며 말했다.
“도련님, 그냥 보내 주는 겁니까?”
“…….”
제이크는 말이 없다. 이번에는 필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 지금이라도 그냥 내려가서 쓸어버리죠.”
“…….”
하지만 역시 제이크는 말이 없다. 그 모습에 답답함을 느낀 폴과 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련님!”
“제가 지금 묻잖아요!”
그 소리에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폴과 필은 제이크의 눈빛에 몸을 움찔했다.
“그것이 말이죠… 도련님이 말씀이 없으셔서.”
“하하, 하하하. 그러니까요.”
폴과 필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제이크가 한숨을 쉬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폴과 필이 눈치를 살피며 제이크 곁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매우 조심스런 움직임이었다. 폴과 필이 다가오자 제이크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콩! 콩!
“아얏!”
“아니, 왜?”
제이크가 폴과 필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씩 때린 것이다. 방비도 못하고 당한 폴과 필은 머리를 감싸며 제이크를 째려봤다. 그러자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이놈들아, 싸움이 그렇게도 좋으면 휴가를 반납하고 마계로 돌아가!”
제이크의 말에 필과 폴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예에?”
“그건 싫어요!”
폴과 필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왜 가기 싫어? 거기 가면 평생 싸울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제이크의 말에 폴과 필은 서로를 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거긴 쉴 틈이 없단 말이에요.”
“맞아요. 너무 힘들어요.”
“그치, 정말 힘들지.”
폴과 필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을 했다. 하긴 군단장인 제이크에 비하면 만부장인 폴과 필은 정말 끊임없이 싸운다.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며 싸움을 해야 하기에 폴과 필이 가기 싫었다. 여기서는 싸움도 하고, 쉬고 싶으면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기에 좋았다.
게다가 마계보다 싸우는 상대도 너무나도 약하고 말이다. 무엇보다 폴과 필은 마계에서 나이츠가 되기에는 지능이 떨어져, 평생 만부장으로 머물러야 하는 판이었다.
그러니 명령이 내려지면 무조건 전장에 나가야 했다. 그래서 제이크가 군단장이 된 기념으로 휴가를 얻어 꼽사리로 따라 나온 것이 아닌가. 그들에게 있어 마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제이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