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헬 나이츠 4권 (19화)
Episode 38 저희 아가씨,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제이크의 물음에 세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바로 공포심이야. 베이런 후작군에게 일차로 공포심을 심어 주었지. 그러니 알아서 놀라고, 알아서 도망을 가더라고.”
제이크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많은 병력에게 공포심을 심어 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베일 기사단장이 넌지시 말했다. 하지만 제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심어 두면 그 후로는 쉬워.”
“어쨌든 얘기해 줘요,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린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제이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짱을 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말해 둘 것이 있어. 내가 왜 그들과 싸우지 않았는지 알아?”
그러자 베일 기사단장이 말했다.
“더 강한 적을 막기 위함이 아닙니까?”
제이크가 피식 웃었다.
“맞아. 만약 후작군을 처리했다면 아마 더 강한 적이 이곳에 왔을 거야. 하지만 그냥 큰 피해 없이 순순히 물러난다면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지. 현 상태만 유지한다면 에페로 자작령은 앞으로 문제가 없을 거야. 하지만 베이런 후작이 다시는 이곳을 넘보지 못하게도 해야겠지. 그래서 나만 다시 후작성에 들어간 거야.”
제이크는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베이런 후작이 미쳐 버린 것까지. 다시는 에페로 자작령을 넘보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서야 돌아온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세 사람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제이크가 하는 말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지.
아니 왜 베이런 후작이 미쳤는지 그 영문을 몰랐다. 사실 제이크는 망각의 가루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그것은 마계의 물건이기에 인간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그러니 제이크가 말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아이린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제이크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건 좀 곤란해.”
“왜요?”
아이린이 집요하게 물었다. 그럴수록 제이크의 얼굴이 더욱 난감해졌다.
“하하, 하하하. 그게 말이야… 말할 수가 없어. 이해해 줘.”
제이크의 부탁에 아이린은 아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베이런 후작이 다시는 우리 영지를 넘보지는 않는 거죠?”
“후후, 그건 보장해.”
“그럼 됐어요. 모든 것이 제이크 님 덕분이에요.”
“네, 맞습니다. 한시름 놓았습니다.”
네빌 집사가 말했다.
제이크는 살짝 민망한 얼굴이 된 채 웃었다. 어쨌든 자신이 내뱉은 말은 지켰으니 말이다.
2
베이런 후작군과의 전쟁은 그렇게 종결이 되었다.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없었다는 것이 에페로 자작령에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영지민들도 베이런 후작군이 돌아갔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의 내쉬었다. 모두들 큰 피해가 없었다는 것이 정말로 행운이라고 믿었다.
어쨌든 전쟁에 두려움이 사라졌고, 상점들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많은 상단들이 다시 에페로 자작령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곳에 벨란 상단이 있었다.
벨란 상단을 이끌고 있는 칼은 오랜만에 에페로 자작령에 온 것이다. 그동안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상단행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베이런 후작이 자신의 성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곧바로 이곳에 온 것이다.
칼이 마차에서 내렸다. 네빌 집사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저희야 항상 똑같죠.”
두 사람은 이례적인 이야기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고는 네빌 집사가 칼을 안내했다.
“아가씨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가시지요.”
“네, 앞장서십시오.”
그렇게 두 사람은 아이린이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아이린이 책상에 파묻혀 서류 작업에 한창이었다.
전쟁도 끝났으니 다시 과중한 업무를 해야 했다. 시장조사며, 필요한 것들은 무엇인지, 게다가 이번의 밀 수확은 어떻게 되었는지, 특산품을 어떤 것을 할지, 관광객들은 또 어떻게 모아야 할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에페로 자작가의 가신들을 모아 놓고 열띤 회의를 하였다. 그리고 어제 늦은 밤이 되어서야 구체적으로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나아가야 할 방향만 잡고, 이제부터 다시 세부 계획을 짜야 했다. 오늘 저녁에 다시 가신들을 불러 놓고 회의를 할 참이었다.
몸은 무척이나 힘이 들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좋았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아이린은 보지도 않고 곧바로 말했다. 문이 열리고 네빌 집사와 칼이 들어섰다.
칼은 벨란 상단의 총 책임관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왔지만 아이린은 여전히 서류에 고개를 파묻고는 열심히 적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네빌 집사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벨란 상단의 칼 총관이 왔습니다.”
“네, 잠시만요. 이것만 마저 하고요.”
여전히 고개는 들지 않고, 손만 들어 답해 주었다. 네빌 집사는 그런 아이린의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칼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여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그렇지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전 괜찮으니까요.”
“네, 그럼 제가 차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는 칼이 의장에 앉았다. 네빌 집사는 곧바로 나가 차를 가지러 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아이린이 고개를 들었다.
“후와, 이제야 끝났네.”
아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아이린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눈 밑에는 약간의 다크써클이 생겨났다. 젊은 아가씨의 몰골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차를 가지고 온 네빌 집사가 그런 아이린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눈짓을 보냈다.
“아가씨!”
“네에?”
아이린은 네빌 집사의 눈짓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왜 그런지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어머나!”
아이린이 황급히 자리에 앉아 머리며 얼굴 상태를 점검했다. 손님을 불러놓고 이런 모습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아이린이 서류를 들고 얼굴을 가린 후 조용히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하하하, 저는 차를 마시고 있겠습니다.”
아이린은 대답을 듣고는 황급히 옆문으로 나갔다. 차를 들고 온 네빌 집사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이해해 주십시오. 요즘 업무가 너무 바빠서…….”
“괜찮습니다. 전 오히려 보기 좋던데요.”
“하하하, 너그럽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시 후 단정한 얼굴로 나타난 아이린이 칼을 보며 말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아가씨!”
칼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린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곧바로 칼이 물품 목록을 꺼내었다.
“이번에 저희가 가지고 온 물품입니다.”
“아, 네.”
아이린은 물품 목록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역시 벨란 상단은 저희들이 원하는 것을 항상 가지고 오시네요.”
“후후, 고객님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그것을 모르면 장사하기 힘들죠. 그보다 이곳으로 오는 중 베이런 후작령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칼이 약간 심각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아이린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당분간은 우리를 신경 쓰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아, 그래요. 그럼 이 틈에 영지전의 결과를 인정받고 작위를 계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아이린과 네빌 집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전혀 생각도 못한 부분이었다. 하긴 그동안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기에 작위 계승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칼의 말을 듣고 보니 시간을 끌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채플 백작과의 영지전을 통해 그곳을 흡수하지 않았다.
이제 그곳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정식으로 왕국에 통보를 하고 에페로 자작령에 속한 영지라는 것을 허가받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 작위는 병석에 누워 있는 큰 오빠인 아론이 물려받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력이 쇠해서 더 이상 어쩌질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물며 둘째 오빠인 아크는 그 소식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결국 남은 사람은 아이린이었다. 그러나 아이린은 여자였다.
현재 왕국의 법에 의하면 여자는 작위를 계승받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이러니 아이린과 네빌 집사는 난감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렇군요. 역시 그 문제가 있었네요. 하지만 큰 오빠는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고, 둘째 오빠는 아직 소식도 모르고 있어요.”
아이린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빌 집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을 보던 칼이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결국은 아이린 님께서 결혼을 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네에? 결혼요?”
칼의 말에 아이린이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네빌 집사도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칼은 여유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지금 현재 두 오라버니께서 작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현재 남은 사람은 아이린 님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아이린 님이 결혼을 해서 작위를 이어 가셔야죠. 안 그렇습니까?”
“그, 그렇군요. 아가씨, 아무래도 그 방법밖에 없군요.”
네빌 집사가 아이린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이린도 현실을 직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하지만 과연 누구와 결혼해야 할까요?”
“지금부터라도 알아봐야죠.”
네빌 집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도 안다. 현재로써는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린 주위로 여러 가신들이 있지만 다들 나이 든 사람뿐이었다. 하물며 아버지뻘 되었다.
딸 같은 아이린을 넘볼 처지가 되지 못했다. 그들에게도 자식들은 있다. 그러나 모두 어려 아이린의 짝이 될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아이린은 갑자기 찾아온 결혼에 당혹감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자신의 결혼에 에페로 자작가의 운명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자신도 여자인데 아무 남자와 할 수도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하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
그때 아이린의 뇌리에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를 같이 해 집무실 문이 열리며 제이크가 들어섰다.
“아직까지 회의해?”
순간 동시에 세 사람의 시선이 제이크에게 향했다. 제이크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며 주춤거렸다.
“왜, 왜 그렇게 날 쳐다봐!”
제이크는 당황하며 말했다.
그러자 네빌 집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제이크에게 다가갔다.
“왜, 무슨 일인데?”
제이크의 머리에서 자꾸만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살기 같은 것이 아닌 뭔가 알지 못하는 그런 신호였다.
네빌 집사는 제이크에게 다가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제이크 님, 저희 아가씨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빌 집사의 말에 제이크의 눈이 커졌다.
“엥?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제이크가 당황하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아이린과 칼에게 향했다. 칼은 환한 미소를 지었고, 아이린은 약간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