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헬 나이츠 4권 (22화)
Episode 39 결혼식 (3)
휘이이잉!
아이린은 그 바람에 눈을 찡그렸다. 그녀의 고운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바람이 얌전해지자 눈을 뜬 아이린이 테라스의 난간에 손을 댔다.
멀리 도시가 보였다. 하늘은 맑았으며 몇 마리의 새가 날아다니며 지저귀고 있었다. 푸른 하늘만큼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였다.
지금 이 순간 아이린도 마찬가지였다.
왠지 모르게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고, 온 세상을 다 가진 그런 느낌이었다.
그 아래에는 연무장이 보였는데 폴과 필이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 그리도 귀여워 보이던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날이었다.
3
아이린과 제이크의 결혼 소식은 베이런 후작가에도 전해졌다. 거의 반 미쳐 있는 베이런 후작은 그 소식을 접하고 더욱 미쳐 버렸다.
분개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미친 년! 내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베이런 후작은 그저 외침에 불과했다.
자신의 집무실에 틀어박혀 바깥 출입은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둘째 아들인 빌슨이었다.
빌슨은 자신의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우당탕탕!
“으아아악! 감히, 감히 날 무시해!”
빌슨은 손에 잡힌 것은 뭐든지 집어 던졌다. 방문 밖에서는 하인과 하녀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빌슨은 아이린과 결혼하기 위해 온갖 이상한 짓을 다했다. 급기야 아버지인 베이런 후작에게까지 결혼시켜 달라고 떼를 썼다.
하지만 이 일은 무의로 돌아갔지만 뜻을 꺾지 않았다. 베이런 후작이 낫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사이 결혼을 발표한 것이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확인하고 결혼한다는 것을 알고는 이렇게 날뛰는 것이다.
“안 돼! 아이린은 내 여자야! 나만의 여자여야만 해!”
빌슨도 거의 미친 듯 울부짖었다.
그의 괴물과도 같은 울부짖음이 방문 밖까지 들려왔다. 하인과 하녀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있을 때 마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들 거기서 뭐하는 게냐?”
“마, 마님!”
하인들과 하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베이런 후작의 부인인 안나는 붉은 입술과 코 옆에 있는 검은 점이 매력이었다.
그녀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바라보았다.
“지금 여기서 무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하녀 중에서도 나이 지긋한 하녀가 나섰다.
“마님, 그것이 현재 둘째 도련님께서…….”
그 하녀의 말에 안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슨이 난리치는 소리가 복도 밖에까지 들려왔다. 그것을 들은 안나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굳은 얼굴로 하녀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물러가 있어.”
“네, 마님.”
하인들과 하녀들이 인사를 하고는 모두 물러갔다. 안나는 방문 앞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이내 그것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빌슨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난장판이 된 방 안 중앙에 앉아 처량하게 울고 있었다.
“으허허헝!”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안나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빌슨을 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빌슨 지금 뭐하는 것이냐!”
그러자 빌슨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며 콧물이 흘러내려 말이 아니었다. 그는 안나에게 기어가 다리를 붙잡았다.
“엄마, 으아아앙!”
그런 아들을 보는 안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곧바로 자리에 앉으며 조용히 말했다.
“왜 그러느냐?”
“아이린이, 아이린이 결혼한대요. 내 여자인데, 나랑 결혼해야 하는데 저는 이제 어떻게 해요.”
빌슨의 울부짖음에 안나는 한심스런 표정이 되었다.
“고작 그런 여자 때문에 우는 것이냐! 장차 이 가문을 이끌 녀석이 말이냐! 울음을 그쳐라, 뚝 그쳐!”
안나가 강하게 말했다. 하지만 빌슨의 울음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전 아이린과 결혼하고 싶어요.”
“시끄럽다! 뚝 그치지 못할까!”
안나의 호통에 빌슨이 놀란 눈이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안나가 그를 살포시 안았다.
“아들, 걱정 말아라. 내가 아이린보다 더 예쁜 여자, 더 좋은 여자를 소개시켜 주겠다. 그러니 그년 때문에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마라. 사내가 되어서 어찌 여자 때문에 눈물을 보이는 것이냐.”
“저, 정말이에요?”
“그래, 네가 후작님의 뒤만 이을 수 있다면 모든 여자들이 너에게 시집오려고 할 것이다. 그때 너는 네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고르면 될 것이야. 아이린 그년보다 훨씬 예쁜 여자로 말이다.”
안나의 말에 빌슨은 언제 울었냐는 듯 환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안나 품에 안기며 말했다.
“엄마, 저 꼭 이곳의 주인이 될 겁니다. 꼭!”
“그래야지. 그래야 착한 내 아들이지. 걱정 말거라. 이 어미가 널 꼭 이곳의 주인으로 만들어 주겠다.”
안나는 빌슨을 꼭 안으며 다짐했다.
한편 게이런 남작도 결혼 소식을 들었다. 그는 얼마 전 왕도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곳에 있는 첫째 아들인 필립 도련님을 만나고 왔다. 그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세히 말했다. 필립은 그에 따라 조만간 가문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확답도 얻었다.
그 같은 사실을 필립 파의 가신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기쁨을 표출했고, 조만간 돌아올 필립 도련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그전에 에페로 자작가의 아이린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외로 초대장까지 보내 주었다. 이에 게이런 남작은 고심을 한 후 지참금을 가지고 사신을 보내기로 했다.
가신들은 얼마 전까지 전쟁을 벌이려고 했던 곳에 이렇듯 사신을 보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말한 게이런 남작의 얘기에 모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이 모든 것은 필립 도련님을 위해서요.”
이 한마디로 가신들을 납득시켰다.
게이런 남작의 지휘 아래 사신단이 꾸려졌다. 그러자 안주인인 안나도 빌슨의 이름을 대신해 지참금과 함께 사신단을 꾸렸다.
그렇게 베이런 후작가에서 각 아들을 대표한 사신단이 에페로 자작령으로 향했다. 어쨌든 이들 덕분에 결혼식 분위기는 매우 뜨거워졌다.
4
에페로 자작령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계속해서 각종 행사가 끊이지 않았다. 상단 행렬도 줄을 이었다.
벨란 상단부터 여러 상단까지 그들은 결혼식에 맞춰 갖가지 귀한 물건들을 들고 찾아와 축복을 해 주었다.
또한 주변 영지의 귀족들도 참석해 그 열기는 가히 뜨거웠다. 이 모든 것이 네빌 집사의 힘이었다. 그는 이번 결혼식을 아주 성대하게 꾸밀 생각이었다.
남부럽지 않게 말이다.
예전 같았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제이크가 온 후로 금전적으로 안정을 되찾고 채플 백작가를 무너뜨리자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위해 많은 귀족들이 앞다퉈 찾아온 것이다. 네빌 집사는 그런 모습을 보며 흐뭇한 얼굴이 되었다.
이래저래 몸은 힘들지만 마음만은 편안했다.
그리고 다음 날 결혼식 아침이 밝아 왔다.
결혼식은 신관을 모시고 저택 앞마당에서 하는 것으로 했다. 모든 문을 개방하여 도시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모두 참여해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 압권은 에페로 자작가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지난밤 자신의 갑옷을 광택이 좔좔 흐르게 닦았다. 얼굴을 비추면 마치 거울처럼 자신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 갑옷을 착용한 기사들이 저택 입구부터 양옆으로 줄을 서서 대기했다.
잠시 후 음악 소리가 들렸고, 저택 안에서 화려한 흰색 드레스 차림의 신부가 걸어 나왔다. 머리에는 흰색 망사를 둘렀고, 걷는 걸음걸이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아이린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등 뒤로 드레스 자락이 길게 늘어졌다. 바닥은 꽃잎으로 가득했고, 하늘에서는 오색 종이들을 날아다녔다.
오늘따라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마치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이라도 하는 듯 말이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식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 단상에 역시 검은 연미복을 입고 있는 제이크가 보였다. 아이린은 머리에 둘린 망사로 사이로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제이크도 많이 떨리는지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가 아이린이 들어서는 것을 보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자신 앞에 도착했을 때 제이크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머리에 두른 망사를 걷어 올렸다. 그러자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보는 듯했다.
“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이린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바로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신관이 먼저 신들에게 축복을 내려달라며 축언을 올리면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그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네빌 집사였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작님, 보시고 계십니까? 우리 아가씨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하늘에서나마 아가씨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게 도와주세요.’
네빌 집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말했다. 그 옆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빌 집사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울고 있는 사람은 바로 폴과 필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안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에 네빌 집사는 그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결혼식이 끝나고 곧이어 연회가 시작되었다.
신랑, 신부는 연회장에 찾아오신 하객들에게 일일이 찾아가 인사를 하였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여러 귀족들은 와인과 음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사이에 폴과 필은 언제 울었냐는 듯 음식을 보고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네빌 집사가 달려가 그들을 데리고 사라질 때까지 귀족들의 눈초리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렇게 연회가 끝이 나고 늦은 밤.
제이크와 아이린이 자신들의 신혼방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눈을 못 맞추고 있었다. 둘 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고, 어색한 분위가 계속해서 흘러갔다.
탁자 위에는 고급 와인이 있었다.
아이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제이크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헛기침만 내고 있었다.
“허험, 조금 덥네.”
몸에서 열이 나는지 손으로 부채질을 하였다. 그러다가 아이린을 보며 말했다.
“조금 덥지?”
제이크의 물음에 아이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바람 좀 쐴까?”
그렇게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그 밤바람을 맞으며 제이크는 몸과 마음이 시원해졌다.
“아, 좋다!”
눈을 감은 채 두 팔을 벌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아이린에게 말했다.
“너도 이리 와. 밤바람이 시원해.”
아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아이린 역시 밤바람을 쐬자 기분이 상쾌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테라스로 나가 각자 말없이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참 맑은 밤하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