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 나이츠-107화 (107/125)

# 107

헬 나이츠 5권 (7화)

그런 둘 사이의 침묵을 먼저 깬 쪽은 제이크였다. 그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차가 식었습니다. 새로 내오라고 하겠습니다.”

제이크가 막 일어나려고 할 때, 아크가 입을 열었다.

“아니, 되었습니다. 그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아크의 말에 제이크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물어보십시오.”

“당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아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제이크는 이미 예상했던 질문인 듯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히 아크를 바라보다가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제이크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는 듯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재 저는 마계의 열두 마왕을 보필하는 군단장이며, 그곳에서 헬 나이츠라 불리고 있습니다.”

“헤, 헬 나이츠!”

아크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저, 정말 헬 나이츠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제이크는 아크가 못 믿는 눈치라 슬쩍 가슴을 열어 보였다. 그곳에는 홍염의 불꽃이 살짝 일렁이고 있는 갑옷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전에 계셨으니 이 갑옷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이, 이럴 수가……. 홍염의 갑옷! 헬 나이츠만이 입을 수 있다는 그 갑옷을……. 그저 풍문으로만, 아니, 전설로만 전해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보게 되다니…….”

아크는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는 듯하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던 아크가 어느덧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그래, 당신이 헬 나이츠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마계에 있어야 할 당신이 어찌 여기로 나오게 된 것인가? 그리고 당신…… 인간은 맞습니까?”

아크는 정신없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 아크를 보며 제이크가 피식 웃었다.

“후후후, 하나씩 천천히 질문하십시오.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마지막 질문의 답은…… 네, 인간 맞습니다.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이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마계로 넘어가기 전 제 신분은 프라인 백작가의 막내아들인 제이크 프라인이었으니까요.”

제이크는 말을 하면서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왔다. 왠지 지금 자신이 취조를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눈치챈 아크가 바로 말을 하였다.

“오해할 수도 있는데, 난 다만 아이린의 오빠로서……. 물론 오랜만에 나타나 오빠 노릇을 한다는 것이 부끄럽지만, 그래도…….”

“알고 있습니다. 전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제이크는 식어버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치 옛이야기로 향수에 젖은 듯했다.

“모든 것은 지금 제가 입고 있는 갑옷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이크는 입고 있는 홍염의 갑옷을 손으로 툭툭, 치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마계로 넘어간 저는 죽지 않기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물론 죽을 고비도 수없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여기 입고 있던 갑옷이 절 구해주었죠. 그렇게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다 보니 어느새 제가 헬 나이츠라는 이름을 얻고 군단장이 되어 있더군요.”

제이크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계에서 겪었던 기억을 새삼 떠올렸다. 그때는 정말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다시 하라고 하면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마계에서 살아온 일과 군단장의 지위까지 오른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휴가를 받고 인간 세계로 나왔다는 말을 하며, 언젠가 돌아가야만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 아직은 때가 아니야.’

제이크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그것만 빼고는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 설명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힘겹게 돌아왔는데…… 젠장, 모든 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아, 욕을 해서 죄송합니다.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 욱하는 바람에…….”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이크가 바로 사과를 하자 아크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어쨌든 그렇게 되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는 아이린이 얘기를 해줬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제 얘기입니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이야기였다. 차도 두 번은 더 나왔던 것 같다. 하지만 아크는 두 시간의 이야기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자신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얘기였다.

“그, 그랬군요. 하긴 그에 비하면 저는…….”

솔직히 제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신의 겪은 일은 힘든 축에 들지도 못했다. 오히려 지난날 힘들어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이크에게서 연민의 정이 느껴졌다.

“집 떠나 고생한 건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지만, 난 당신에 비하면 부끄러울 정도군요.”

아크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하였다. 그런 아크를 보며 제이크가 물었다.

“저도 궁금하던 참입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실 전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이번에는 아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무작정 집을 나서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움직였다. 그러던 중 형이 중독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런데 곧장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기에는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큰소리치며 집을 떠나왔는데 아버지 복수는커녕 무능력하게 세월만 보낸 것이다.

그래서 형만큼은 꼭 살려보겠다고 여기저기 수소문을 한 끝에 신성제국의 대신관이라면 고칠 수 있다는 말에 무작정 신성제국으로 향했다.

“천신만고 끝에 신성제국에 도착했지만 제가 얻은 것은 차가운 멸시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오냐, 니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냐. 내가 니들의 면상을 짓밟아 주겠다’ 그렇게 다짐을 하고 신성제국의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때부터가 개고생의 시작이었더군요.”

아크는 지난날의 고생을 떠올리는지 깊은 침묵에 잠겨들었다.

“어쨌든 열심히 노력한 끝에 신성기사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막상 거기까지 올라가고 보니 너무나도 오랜 세월이 지났더군요.”

그 말을 할 때, 아크의 모습은 매우 씁쓸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돌아온 것만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리 아이린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크는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닙니다. 어쨌든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입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느새 동화가 되어버린 듯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아크는 오직 실력으로 신성기사가 되었지만, 대신관은 알고 있었다. 그의 신앙심이 그리 높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일부러 자신의 고향으로 보내서 그곳에서 임무를 수행하라고 한 것이었다.

물론 아크에게는 교황께서 꿈에 계시를 받았다고 둘러댔다. 어찌 보면 일종의 배려라 볼 수 있지만, 나쁘게 말을 하면 신앙심이 형편없어 고향으로 쫓아낸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대신관은 아크를 쫓아낸 것에 대해 정말 많은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아크의 검술 실력 때문이었다.

아크의 검술 실력은 신성제국에서도 세 손가락에 들 정도로 뛰어났다. 아니, 차기 성기사단장 자리까지 오를 수 있을 실력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의 신앙심 문제였다. 깊은 신앙심이 있어야 홀리 크로스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홀리 크로스는 성기사단장의 필살기인데, 깊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몸에 축적된 기를 순간적으로 방출해서 주위를 정화시키는, 아주 놀라운 기술이었다.

각설하고, 아크는 그것만 빼고는 성기사단장과 겨뤄도 검술로는 거의 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실력 있는 성기사인 아크는 단지 신앙심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이곳까지 쫓겨난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아크는 전혀 모른 채 자기 편한 대로 생각을 해버린 것이다. 이곳에 왔어도 오직 임무만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임무를 맡아 이곳에 왔습니다. 이곳에 악의 종자들이 많이 있다고 해서 말이죠.”

아크는 마지막을 말을 할 때, 힐끔 제이크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제이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아크의 행동과 말하는 태도, 특히 신앙심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크는 명색이 성기사였다.

제이크와 가는 길이 달랐다.

“후우, 그렇군요. 임무를 받고 이곳에 왔군요. 그렇다는 것은…….”

“네, 그렇습니다. 제 일은…….”

아크도 제이크의 속내를 알아채고 곧바로 말을 가로챘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도 지금 그것이 고민입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는데…… 하물며 신전의 대신관도 이곳에 악의 종자가 살고 있다면서…….”

아크는 여전히 말을 하면서 제이크의 눈치를 살폈다. 제이크의 이마가 살짝 일그러졌다.

‘이런 잡종 새끼가…… 감히 날 보고 악의 종자라고?’

제이크는 속으로 욕을 해 대며 언젠가 대신관을 손 좀 봐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바로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폴과 필이 들어왔다.

“도련님!”

“도련님!”

“헉! 네, 네놈들은!”

폴과 필이 들어오자 아크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손까지 들며 폴과 필을 가리켰다.

하지만 폴과 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들어 인사했다.

“어? 일어났네! 반가워.”

“이야, 난 또 니가 죽는 줄 알고……. 아무튼 살아서 다행이네.”

“허헉……. 어, 어떻게…….”

아크는 순간 말문이 막히는지 제이크와 폴, 필을 번갈아 바라보며 설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 아크의 상태를 보고 제이크는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아놔, 저 새끼들은 예고도 없이 쳐들어오냐.’

제이크는 난감한 표정이 된 채로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고민하였다. 그러는 사이, 폴과 필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히죽 웃고 있었다.

2

검은 로브를 쓴 사제들이 영지로 하나둘 들어서고 있었다. 다만, 선두에 있는 한 사람만 후드를 쓰지 않았다. 바짝 마른 얼굴에 살이라고는 한 점 붙어 있지 않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얼굴에 뼈만 앙상한 것이, 마치 해골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영지에 발을 내딛자마자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후흡―!”

그러고는 깊게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길게 숨을 내쉬며 매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흐흐, 좋구나, 좋아!”

그때, 뒤에서 한 명의 검은 사제가 조심스럽게 말을 하였다.

“스승님, 마기가 다른 지역보다 충만합니다. 저희들도 이곳에 오니 힘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 잘 찾아온 것 같구나.”

마기의 냄새가 물씬 풍겨지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공기 중에 잔잔히 떠다니는 마기를 몇 번 더 흡입하더니, 눈을 빛냈다.

“이곳이라 했느냐? 나의 라이벌인 클레노스가 죽었다는 곳이?”

“네, 그렇습니다.”

“크크크, 멍청한 놈. 명색이 나의 라이벌이라는 놈이 엉뚱한 놈에게 뒈져 버리다니.”

이그나탈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긴 뭐, 상관없지. 어차피 그놈도 나의 마기를 채워줄 재료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야. 다만 아쉬운 것은, 놈이 죽어버려 그 막대한 마기를 흡수하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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