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다가오는 증명의 시간 (1)
“몇 시까지 가냐?”
“한 시까지라 이제 슬슬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괜찮을까요?”
“그래, 가 봐.”
이진성 실장에게 허락을 구하고 회사에서 나갈 채비를 했다.
홍승기가 말한 시사회 참석은 회사에서도 쉽게 보내줬다.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고 ‘이번에도 혹시?’ 하는 느낌이었다.
항상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무언가 해왔으니까.
그와 반대로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 초조하긴 했다.
이제 조금씩 내가 영향을 끼쳤던 씨앗들이 하나둘씩 발아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발아한 것은 조심스럽게 대박 드라마의 조짐이 보이는 마녀였다.
첫 방송 직후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무섭게 시청률이 올라가고 있었다.
남의 씨앗은 성공적으로 개화했는데 우리 애들은 성공적으로 개화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고 비공개 시사회를 가기 전 애들의 모습이나 보고 가려고 연습실로 내려갔다.
연습실에 가까이 가니 한창 연습하고 있는 스타즈의 모습이 보였다.
“Love Up&Down 안무 시안이지? 보는 건 또 처음이네.”
“오늘 스케줄 있어요?”
“Y앱이라도 하나?”
내가 연습실에 들어가면서 이야기하자 이나라와 유미소는 안무 연습을 하다 말고 내게 물었다.
“아니, 무슨 내가 일 있을 때만 여기 오냐?”
“삼촌이 연습실 오면 항상 일이 생겼는데요.”
“그러게 말이야. 이번엔 또 뭐예요?”
내가 투덜거리며 말하자 신희진도 투덜거렸고 서지영도 덩달아 훅 들어왔다.
“그냥 지나가다 잠깐 들렀어. 오후에 내가 어디 가야 하거든.”
“또 팔려가요?”
서지영이 말한 말에 뜨끔했다.
내가 팔려가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팔려가는 게… 맞나?
“아니. 화랑 비공개 시사회 가.”
“왜. 나는. 안 데려가요?”
“린아, 너는 이야기 없더라.”
“궁금한데.”
“갔다 와서 잘 알려줄게.”
화랑 영화를 이야기하자 출연을 했던 린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누구는 죽어라 춤추면서 연습하는데 누구는 영화 보러 가네. 좋겠다.”
“야. 나도 일하러 가는 거야.”
“좋겠다~”
“연습 잘하고.”
유미소는 내가 놀러 가는 것처럼 느꼈는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나를 갈궜다.
애들의 갈구는 솜씨가 나날이 늘어가는 게 요즘 피부로 와 닿는다.
“아, 맞다! 오빠! 오빠 예전에 알려준 안무 있잖아요. 이거.”
“어? 어.”
“이거 안무 넣기로 했어요!”
“오, 그래? 괜찮지?”
“안무 쌤이 좋다던데요. 눈에 확 들어온다고.”
고럼, 고럼. 내가 짠 건 아니지만 유행했던 춤이니까.
이나라에게 틈틈이 강력히 어필한 게 먹혔던 것 같다.
혹시라도 다른 안무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다행히 내가 알던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나중에 노래 뜨면 내 덕인 거 알지?”
“암요. 잘 알죠.”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웃으면서 애들에게 말했다.
애들도 노래와 안무에 만족하는지 참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묻힌다면….”
“나, 갈게! 고생해!”
신희진이 스산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식겁했다.
어우,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니까 식겁했네.
애들이 나를 믿어주는 건 좋은데 한편으론 항상 불안했다.
예전과는 결과들이 다 조금씩 달라졌으니 이번에도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쁜 쪽으로 달라지지 않을 거다.
그래야만 했다.
애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 * *
홍승기가 알려준 화랑의 비공개 시사회 날짜는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홍승기는 뭘 보고 나를 여기에 밀어 넣은 건지 모르겠다.
그냥 거절할 걸 그랬나 싶다.
그렇지만 내가 아예 엮여 있지 않은 것도 아니고 린의 모습이 어떻게 나올까 궁금하기도 해서 거절하지 못했다.
“여기가 사운드 크리에이터 믹싱실 맞나요?”
“네, 맞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죠?”
홍승기가 알려준 장소로 들어가 안에 있는 인물에게 장소를 확인받았다.
“아, 그 이충재 감독님한테서 비공개 시사회 초대를 받아서요.”
“아! 일찍 오셨네요.”
“네. 제가 길치라 일찍 출발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찾았네요.”
“안으로 들어가시면 상영실 있어요. 기다리시면 다른 분들도 오실 거예요.”
“네, 근데 지금 보는 시사본이 믹싱까지 끝난 영상본인 거죠?”
“네.”
의아해하는 직원의 호기심을 하나씩 해결해주고 내 호기심도 해결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고생하세요.”
“뭘요.”
직원과 대화를 끝내고 안으로 들어가니 문 위에 스크린 룸이라는 표지가 있어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영화관이 축소된 단출한 스크린 룸이었다.
후반 사운드 작업을 하는 믹싱 스튜디오의 경우 영화관처럼 사운드 체크를 할 필요성이 있기에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믹싱팀은 대개 스크린 룸이 있는 편이다.
앉아서 천천히 스크린 룸을 구경하고 있자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하나둘 입장해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아는 얼굴이라고는 이충재 감독밖에 없는데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때에 마지막으로 이충재 감독이 상영실로 들어와 스크린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초대에 응해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짝짝짝.
“먼저 오늘 비공개 시사회는 여러분들에게 가탄 없는 의견을 듣고자 연 자리이니 끝나고 다양한 의견을 알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되십시오.”
이충재 감독이 말을 끝낸 뒤 앞자리에 앉자 스크린 룸이 어두워지며 영화가 시작되었다.
- 이곳이 넘어가면 우리의 전쟁은 더 힘들어지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 풍월주….
- 우리 신라를 위해서 이 한목숨 다 바치리라.
- 가자! 화랑이여!
시작이 독특했다.
일반적인 서사 구조라면 기승전결인데, 전에 해당하는 내용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아마도 초반 흡입력을 위함인 것 같았다.
영화나 드라마든 초반부 흡입이 제일 중요하다.
초반에 지루하면 후반까지 지루함을 느낄 수가 있다.
이충재 감독은 그 부분을 생각해 이렇게 앞에 영화에 전반적인 분위기와 내용을 암시해 주려고 했던 듯했다.
화랑의 인물들이 나가는 모습과 함께 타이틀 화랑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보고 싶었던 장면이 나왔다.
저잣거리에서 유유히 걸으며 둘러보는 한 인물.
왕세자인 박재영이었다.
그리고 린의 모습도 보였다.
린의 모습에 옆에 있던 누군가의 침 넘기는 소리는 내 기분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확실히 편집의 힘으로 색을 더 이쁘게 입히고 보이는 영상의 모습은 흔히 말하는 때깔이 좋다는 표현이 절로 나왔다.
영상을 잘 뽑은 김진석 촬영 감독의 힘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계속 진행되어 박재영과 린이 만나는 장면이 나왔다.
린의 연기는 편집과 영상미의 힘으로 더욱 돋보였다.
확실히 스크린으로 보니 현장에서 봤을 때보다 더 압도적이었다.
씬 스틸러로 흠잡을 곳이 없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린의 출연 이후 영화는 내가 딴생각하지 못하도록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수십만 대군의 당나라가 쳐들어오는 장면. 이에 대치하는 신라. 그리고 냉병기들의 소리와 함께 영화는 후반부를 향해 돌입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확실히 볼만했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내내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원래 화랑이 이렇게 신파가 짙은 영화였나?
쓸데없는 신파로 오히려 흐름이 깨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호쾌한 액션 그리고 화려한 전쟁과 영상미로 승부 본 영화라고 들었는데 원래 이랬나 싶은 의아함이 생겼다.
- 그대들의 희생… 내 잊지 않겠소!
- 신라 만세!
박재영의 흐느낌과 신하들의 만세 소리와 함께 영화가 끝이 났다.
비공식 편집본이라 크레딧 롤은 따로 넣지 않는 듯했다.
“잘 보셨나요? 잠깐의 휴식 후 스크린 룸에서 다시 모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충재 감독이 영화가 끝이 나고 불이 켜지자 앞에 나와 짧게 한마디 했다.
두 시간이 조금 안 되는 상영시간이었는데 영화를 본 사람들을 배려한 듯했다.
나도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할 겸 화장실을 갔다 왔다.
화장실로 움직이면서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는데 썩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저 사람들이 나랑 느끼는 게 같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가 이대로 흐르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다.
신파를 쳐내는 게 맞다.
괜히 영화의 지루함만 가중될 뿐이다.
한국 영화에 신파가 빠지면 섭섭하다지만 이건 아니었다.
예전엔 어떻게 통한 걸까?
최종본은 신파를 걷어내고 상영했던 걸까?
“다 계신가요?”
이충재 감독이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앞에 서 있었다.
하긴, 어떤 말이 오갈지 모르는 시사회인데 오죽할까.
“그럼 먼저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영화에 대한 감상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이야기해주신 감상은 화랑에게 좋은 피드백이 될 것 같습니다.”
이충재 감독이 긴장되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지금 이 자리는 화랑 영화를 피드백 하는 자리이다 보니 어떤 말이 나올지 몰랐다.
신랄한 말이 나올 수도, 좋은 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 이런 자리는 쓴소리가 잦다.
“안녕하세요.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마루 제작사 대표 한승택입니다. 일단 전쟁과 그 배경을 표현함에 있어서 영상 퀄리티가 상당히 훌륭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확실히 김진석 촬영 감독님이 괜히 충무로의 아티스트라고 불리는 게 허언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이상입니다.”
제작사 한승택 대표는 괜한 말은 하지 않고 장점만 이야기를 해줬다.
면전에 대고 단점을 말하기엔 부담스러운 일이긴 했다.
“다음은 저인가요? 안녕하세요. 하늘 일보 이희성 기자입니다. 먼저 저도 이런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단 말 먼저 하고 싶고요. 영화 잘 봤습니다. 저도 앞에 이야기해주신 한승택 대표님처럼 영상에서 오는 웅장함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신파 부분에서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면이 있는 것 같네요. 이상입니다.”
이희성 기자는 조심스럽게 장단점을 같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다시 볼 수 없는 그 날을 연출한 김철수입니다. 반갑습니다. 영화를 영화관에서 대형스크린으로 봤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렇게 비공개 시사회로 먼저 보게 되네요. 인상 깊었던 건 아무래도 처음 부분에 당나라에서 건너온 여인인데, 누구죠?”
“아, 그 배우는…. 아니, 배우가 아닌가? 어쩌다 캐스팅하게 되었는데 아이돌을 하는 친구입니다. 국적은 중국인가? 대만으로 알고 있고요.”
김철수 감독의 말에 이충재 감독이 답변을 해줬다.
그러나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린이 언급되다니.
확실히 인상에 남지 않는 이상 언급하지 않았을 텐데 이런 언급은 기분 좋은 징조다.
“그렇습니까? 아무튼, 마스크가 확 눈에 띄는 게 인상 깊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가진 여인이라면 모든 걸 감수할 만하죠. 경국지색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도 하니까요. 캐스팅이 잘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영상이 깔끔해 보기 편했습니다. 전쟁 떼씬은 확실히 돈 쓴 티가 팍팍 나더군요. 고생하셨습니다.”
김철수 감독의 말이 끝이 나자 내 차례가 더더욱 가까워졌다.
근데 이 자리 내가 있어도 되는 자리인가 의문이 들었다.
다들 하나 같이 쟁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이어서 말을 시작했다.
“영화 평론가 민병수입니다. 먼저 비공개 시사회에 초대해 주시어 일찍 영화를 보게 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민병수는 나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영화 평론가 중에 가장 독설을 잘하는 사람.
그리고 대중의 입맛을 가장 잘 아는 평론가 중 한 명이다.
또 나랑 기호가 비슷한 인물이어서 종종 평론을 찾아보는 편이었다.
나는 영화가 이대로 가면 예전과 다르게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민병수 평론가가 뼈 있는 말을 해줬으면 싶다.
“이 영화는 단언컨대 쓰레기입니다.”
그래. 쓰레기….
어? 말이 너무 거친데?
내 예상범위에서 벗어난 말이었다.
민병수의 말에 스크린 룸 분위기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숨소리도 들릴 만큼 아주 고요하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