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어 밖으로》
사람들이 가득 찬 광장의 넓은 구역에는 유저들만의 공간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유저들이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하는 안전지대로 들어가려던 하룬은 잠시 발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비욘드를 시작한 이래 항상 무언가를 진지하게 해 온 하룬으로서는 보름이라는 시간이 고민거리였다. 유저들과 한번 파티를 한 이후로 그런 것은 쳐다보기도 싫은 하룬은 고민에 빠졌다.
특별한 계획이 없으니 벨과 좀 놀든지 아니면 다른 할 일이라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아!”
생각이 났다.
이렇게 멋진 게임을 제대로 하게 만들어 준 양아버지를 도와준 아우터들의 존재가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예전에 살던 삶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거금을 벌었으니 어느 정도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가지고 있는 현금과 아이템이면 어느 정도는 보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룬은 먼저 은행에 들렀다. 일정 규모가 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유저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은행이 설치되어 있었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은행 안에 유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룬은 일단 5,000골드를 환입금했다. 엄청난 거금에 같은 유저인 은행원의 입이 떡 벌어지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에게는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1만 골드나 더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환시세는 골드당 30,150원입니다. 수수료를 제외한 돈은 모두 입급이 끝났습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행원은 상인 계열의 유저로, 이런 은행 업무를 하는 것만으로도 상거래 스킬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총 거래 금액에 따라 경험치를 얻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행운을 얻은 은행원의 태도는 더할 수 없이 친절했다.
하룬은 눈앞에 떠오른 거래 창과 가상 계좌에 입금된 1억 5천만 원에 달하는 액수를 보며 뿌듯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이런 돈을 자신이 벌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애써 무심해지려고 해도 한번 떠오른 미소는 지울 수가 없었다. 하룬은 기쁜 마음으로 로그아웃을 했다.
“호호! 요즘은 자주 나오네요.”
그를 맞은 벨은 자주 보아서 기분이 좋은 듯 귀엽게 웃음을 지었다.
“우리 귀여운 벨이 보고 싶어서 그렇지.”
짐짓 벨 핑계를 내며 캡슐에서 나온 하룬은 이제는 완전히 물리적인 육체를 가진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작고 아담한 벨이 품 안에 쏙 들어오자 이전에는 집에서 느끼지 못한 충만감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헤엥, 거짓말!”
“아니야. 정말 네가 보고 싶어서 나온걸.”
하룬은 벨의 얼굴을 당겨 볼을 비볐다.
“아이, 따가워! 오빠, 아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벨도 그런 스킨십이 싫지는 않은지 그의 목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따듯한 그녀의 숨결이 볼에 느껴졌다. 얼핏 꿀 냄새처럼 달콤한 향이 느껴지는 벨의 몸을 힘주어 안는 하룬이었다.
일단 한 번 안자 그녀를 몸에서 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전처럼 아무런 질감도 느껴지지 않던 육체가 아니라 자신처럼 따듯한 피가 도는 그런 몸으로 바뀐 듯, 따듯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투명한 옷을 통해 생생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를 안은 채 오랜만에 소파에 앉은 하룬은 그녀의 볼에 얼굴을 다시 비볐다.
“그래, 별일은 없었어?”
“네, 오빠.”
“아닌데. 뭔가 바뀐 것 같은데?”
“뭐가요?”
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벨의 표정이 정말 귀여웠다.
“이젠 완전히 휴먼으로 진화한 것 같은데…… 아니야?”
무슨 소리인가 하던 벨의 눈이 이해를 한 듯 반달처럼 구부러져 웃었다.
“아직 완전히는 아니에요. 하지만 열심히 연구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진짜 휴먼체로 태어날 수 있을 거예요.”
“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같이 게임도 하고 밖에도 나가 구경도 하고.”
“나도요.”
벨도 하룬처럼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오빠, 진짜 무슨 일이에요?”
“진짜 별거 없어. 너 보고 싶어서 나온 거야.”
“정말?”
벨의 눈이 반달이 되었다. 뺨도 불그스레해지는 것이 진짜로 기쁜 듯했다. 그 모습을 보자 하룬은 왠지 기뻤다. 고아인 자신이 다른 존재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그럼.”
하룬의 대답에 벨은 이번에는 자신이 뺨을 비벼 대고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맞닿은 가슴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져 오고 가는 따듯한 정이 그 순간만은 그 무엇도 부족하지 않은 충만함과 행복감을 둘에게 아로새겨 주고 있었다. 둘은 말없이 서로의 체온과 감정을 음미하며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흐른 후 아직도 발그레한 얼굴로 벨이 그의 귀에 속삭였다.
“오빠, 나 빨리 휴먼체가 되고 싶어요.”
그 순간 벨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몸을 바짝 밀착해 왔다.
‘헉!’
이제까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던 감각이 느껴졌다. 언제 부풀어 오른 것인지 부드럽고 탄력 있는 가슴의 융기가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압박하며 이제껏 느끼지 못한 묘한 감각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가슴에 이어 엉덩이의 감각도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그는 맨살이고 벨 역시 옷은 홀로그램이기 때문에 맨살이나 다름없었다. 맞닿은 살의 감각이 날카로운 비수의 날처럼 그의 감각기관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던 여자와의 첫 접촉에 당황한 하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욘석!”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느낌에 당황한 하룬은 짐짓 호통을 치며 벨의 몸을 떼려 했지만 그녀의 몸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그의 몸에 밀착되고 있었다.
‘휴우.’
눈을 감은 하룬은 생경한 감정에 놀라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알지 못할 욕구에 휩싸여 벨의 작은 몸을 힘주어 안았다. 그 반응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하룬.
“후읍!”
은은하고 달콤한 벨의 체향이 느껴졌다.
‘이 녀석이 언제 여자가 된 거지?’
분명히 외모로 봐서는 아직 한참 성장 중인 소녀로 보이는데 어느새 벨은 아가씨가 다 되어 있었다. 키나 몸집은 아직 소녀지만 몸매는 이미 완연한 아가씨의 그것으로 변해 가고 있었고, 성숙한 여인들 특유의 달콤한 체향까지 풍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도 한참 동안 한껏 서로의 몸을 안은 둘 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눈까지 감고 피부로, 가슴으로 전해지는 서로의 생생한 감촉을 음미하는 둘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끈끈한 그 무엇이 마치 실처럼 한 가닥 두 가닥씩 굵어지고 단단해지고 있었다.
“벨!”
“으응?”
아이처럼 귀엽기만 하던 벨의 대답에 이제는 여인만이 가질 수 있는 교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참 좋다. 그치?”
“응, 오빠. 언제까지라도 이렇게 있으면 좋겠어.”
어느새 말투가 바뀐 벨은 언제까지라도 그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벨에게는 알릴 수 없는 이상한 충동에 당황한 하룬은 화제를 바꾸었다.
“벨, 양아버지를 도와준 아우터들이 사는 곳 알지?”
“응. 사이언스 마을이야.”
“그럼 위치 좀 찾아 줄래?”
“알았어. 이곳이야.”
대답과 동시에 벨은 하룬의 눈앞에 홀로그램 창을 띄우고 한 곳을 가리켰다.
“F3-4구역 바로 밖이네. 암시장과 그렇게 먼 곳은 아니야.”
그곳은 유니온의 서쪽에 있었다. 각 구역 이름의 뒤에 붙은 숫자는 방위를 가리켰다. 예컨대 1은 동쪽, 2는 북쪽, 3은 서쪽, 4는 남쪽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방위를 15도 각도마다 다시 숫자를 부여하는 식으로 주소를 표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F3-4구역은 그가 사는 F4-1구역과는 사실상 인접한 지역이나 다름없었다.
그곳에 버려진 발전소가 있었다. 종말 시대의 말에 만들어진 그 발전소는 원자력 발전소의 일종으로 마지막 전쟁 기간까지 가공을 하던 곳이었다.
종말 시대 말에 발견된 새로운 콘크리트 건축법으로 지어진 건물이라 그 속에 아우터들이 자리를 잡고 살아온 것 같았다. 당시 지어진 건물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을 정도로 견고했다.
그곳까지는 보통 사람이면 걸어서 이틀이 걸릴 거리지만, 현실에서도 펼칠 수 있는 메신저 워킹을 사용하면 하루도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직도 그들이 거기에 있을까?”
하룬이 중얼거렸다. 굳이 벨의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럴 거야, 오빠. 내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 그 발전소는 아직도 발전이 가능한 소형 원자로 두 개를 가지고 있어. 생활 거주 공간뿐 아니라 하르크를 비롯한 변종 생물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견고한 외벽과 방어 시설들이 있어 유니온 밖에서는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곳이거든.”
“그곳 사정을 혹시 알 수 있을까?”
“그건…….”
그것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종말 시대에 인간들이 우주에 띄웠던 인공위성과 접속을 할 수 있어. 그럼 지상의 정보는 나노미터 단위까지 파악할 수 있는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벨은 괜히 자신이 죄를 지은 듯 얼굴도 들지 못하고 기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사정을 모르니 좀 답답해서 한 소리야. 너무 신경 쓰지 마. 지금의 네 능력으로도 난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니까.”
이제 그녀는 사랑스러운 여동생이자 같은 휴먼으로 느껴지는 판이다. 당연히 이전처럼 그녀를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의 진화체 정도로만 인식하지 않는 하룬이다.
“그래도…….”
“괜찮아. 가 보면 다 알게 될 텐데, 뭐.”
“빨리 내가 성장해야 완전한 육체를 가지고 오빠를 도울 텐데. 벨은 빨리 성장하고 싶어.”
지금으로도 충분한데 뭘 자꾸 성장한다는 말인지 확실히 알아들은 것은 아니지만, 기가 죽은 벨의 모습이 안쓰러워 다시 그녀를 안고 말았다.
“그래. 빨리 성장해. 하지만 난 지금의 네 모습도 충분히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그의 말에 실린 따듯한 정을 느낀 듯 벨을 배시시 웃으며 그의 목을 가볍게 안았다.
“고마워, 오빠. 오빠 동생이라서 정말 좋아. 평생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나도.”
하룬은 얼굴에 밀착해 오는 벨에게 얼굴을 비볐다. 부드러우면서 따듯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비비는 것은 정말 그의 가슴을 행복으로 충만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옷을 입었기에 접촉에 따른 자극은 훨씬 줄어 못난 꼴을 보여 주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렇게 따듯한 정을 즐기던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여전히 그에게 안긴 채로 벨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오빠! 나 필요한 것들이 있어.”
“뭔데?”
“쪼금 많아. 나노봇을 비롯해 만들고 싶은 기계와 장치들이 너무 많아. 그런데 재료도 없고, 그런 것을 만들 공간도 없어 곤란해. 오빠가 빨리 돈 많이 벌어서 넓은 집으로 이사갔으면 좋겠어.”
“집이라고?”
“응. 넓은 작업실이 있는 집이 필요해. 물론 재료들도 엄청 필요하고.”
하룬은 잠시 눈매를 좁혔다.
배리어로 제한된 공간밖에 없는 유니온의 토지는 이미 유니온 생성 초기에 지금은 노블이라고 불리는 일단의 사업가들과 과학자들 그리고 군인들이 거의 소유한 상태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때문에 토지나 집의 가격은 엄청난 수준이며 유니온 주민의 대부분은 월세 형태로 집을 이용해 왔다. 그 월세는 매년 약간씩 변동은 있지만 보통은 수입의 3할에서 5할 정도로 책정되어 있어 노블들에게는 안정적인 수입원으로 그리고 일반 주민들에게는 세습되는 가난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나마 몇십 년 전부터 노블들이 마음대로 월세를 올리는 폐단을 막기 위해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유니온 정부가 모든 건물을 대행해서 관리하고 운영하는 덕분에, 지금은 그래도 물가가 많이 안정된 편이었다.
세상 물정을 많이 모르기는 하지만 환입금한 돈이면 제대로 된 집은 어림없어도 하자가 있는 집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지하실이 딸린 C와 D구역 경계에 있는 단층 주택 정도는 구입할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유니온의 중심으로부터 정확히 절반이 되는 위치에 있는 그 경계지역은 간혹 과도한 에너지가 집적되거나 중첩 혹은 간섭현상이 일어나 살기에 부적합해서 거주가 힘든 곳이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그런 에너지 이상 현상이 미치지 않는 지하 3층이나 4층에 생활공간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었다. 가격도 같은 넓이의 D구역 아파트 정도밖에는 되지 않으니 적당할 것이다.
연구실과 작업실로 쓸 공간이니 간섭이 많은 임대는 할 수 없었다.
학교 동창 중 하나가 그곳에 살았기에 아는 정보였다.
‘그래. 벨의 능력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
하룬은 벨에게 그 지역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딱이야. 내가 원하는 그런 곳이야.”
작은 정원이 딸린 건물 전체에 해당하는 지하 3, 4층 주택이라면 실험실이나 작업실 공간으로 넘치고도 남았다.
“좋아. 말이 나온 김에 당장 알아보자. 유니넷을 열어 봐!”
하룬은 전 지구에 깔린 인터넷인 글로벌넷의 하부 네트워크로 코원 유니온을 관장하는 유니넷을 검색했다. 유니온 정부에서 직접 관장하는 주택 임대 정보를 검색하니 생각대로 그 구역의 주택들이 많이 임대로 나와 있었다.
생활에 필수적인 에너지의 사용이 심심치 않게 이상 현상을 일으키는 그곳은 거주에 적당하지 않은 탓이다. 정부의 통제에도 그에 대한 불평이 여기저기에 가득할 정도여서 빈집은 엄청나게 많았다.
물론 매물도 적지 않게 나와 있었다. 그중 하나를 골랐는데 가격은 2억 원이었다. 지상과 지하의 공간을 생각하면 정말 헐값이나 다름없었다.
설계도를 비롯해서 실제 공간들을 찍은 사진을 통해 구조를 확인한 벨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지하 4층의 생활공간을 제외하고도 4층이나 되는 공간을 실험실과 작업실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 이번에 환입금한 1억 5천에 후크란에서 건진 아이템들을 경매로 올리면 구입 대금은 나오겠다.’
“이 집으로 하자. 나온 지 오래되는 물건이니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네가 필요한 재료들이 없으면 이사를 가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일단 사이언스 마을에 다녀와서 이사 문제를 결정하자.”
“헤헤헤! 정말 고마워, 오빠!”
벨이 좋아하는 것을 보자 하룬도 흐뭇했다. 아끼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네가 필요로 하는 재료들은 역시 암시장을 통해 구해야겠지?”
“응. 유니온에서 알면 곤란할 것 같아.”
“바란 형에게 도움을 받아야겠구나. 좋아! 어차피 사이언스 마을에 빈손으로 갈 수도 없으니 겸사겸사 암시장에 갔다올게. 필요한 물건 목록 좀 뽑아 줘.”
“오빠 최고! 고마워, 오빠!”
벨은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되는 것이 그렇게도 좋으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안겨 들었따.
‘이거 은근히 중독되는걸.’
겉으로 보면 소녀 같이 풋풋함이 가득한 벨이지만 막상 안으면 볼륨감도 그렇고 느껴지는 감촉이 너무나 좋아 떼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엉큼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그렇게 있고 싶을 정도였다.
“녀석은. 오빠가 이 정도는 해 주어야지.”
누군가에게 간절히 바라던 것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더구나 선물까지 있지 않은가.
쪼옥! 쪽! 쪽!
벨이 그의 양 볼에 작고 도톰한 입술을 마구 찍어 대고 있었다.
하룬은 바보처럼 헤벌쭉 웃고 말았다. 벨처럼 귀엽고 예쁘며 능력이 있는 여동생을 가진다는 것은 정말이지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저나 돈이 많이 필요하니 아무래도 경매를 해야겠다.”
통장에 있는 돈을 쓸 수도 있지만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길 소지는 남기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많은 진실들을 감추거나 왜곡해서 세뇌시켜 온 유니온 정부를 하룬은 믿을 수가 없었다.
하룬은 자신이 가진 아이템 중 몇 개를 떠올렸다. 그것들은 모두 후크란에서 어부지리로 얻은 아이템들로 비교적 쓸 만한 것들이었다.
하룬은 벨이 열어 놓은 암거래 사이트 ‘다크 주얼리’를 검색해서 자기가 경매에 올릴 아이템들에 대한 대충의 가격을 파악하고는 경매를 올렸다.
『홍옥 마법 지팡이
등급: 매직(상)
귀한 보석으로 꼽히는 홍옥을 가공해서 만든 마나구를 가진 마법 지팡이. 동급 지팡이에 비해 마나 전도율은 32% 빠르며, 증폭률은 124%에 이른다. 4서클까지 사용이 가능하며 옵션으로 1일 1회에 한하여 매직 미사일을 쓸 수 있다.
경매 시작가: 70골드』
『천사의 팔찌
등급: 레어
치료의 신인 ‘메디니아’의 권능이 스며든 팔찌다. 은에 오팔과 수정으로 장식한 이 팔찌는 1일 3회에 한하여 2서클 치료 마법인 ‘케어’를 시동어만으로 펼칠 수 있으며, 1일 1회에 한하여 3서클 마법인 ‘큐어’를 펼칠 수 있다.
경매 시작가: 150골드』
『배틀액스-전사의 투혼
등급: 매직(상)
괴력을 지닌 오크 워리어들이나 전사장들이 사용하는 전투 도끼다. 공격력 150으로 힘 40 이상이라야 사용이 가능하다.
옵션: 힘 +10, 지구력 +3
경매 시작가: 100골드』
하룬은 세 개의 경매에 모두 1시간의 시간제한을 걸었다. 물론 시간을 오래 끌면 더 많이 받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장 현금이 필요한 것이다. 은행에서 찾을 돈은 많아야 1,000만 원 정도에서 그칠 생각이었다.
환시세가 지난번 경매 때보다 많이 떨어졌고 아이템들도 많이 풀렸기에 가격을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자금력을 가진 유저들의 수요도 늘어 현실가로 보면 지난번과 비슷하지 않을까 예상했다.
‘일단 이 정도면 아우터들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 뭐, 부족하면 은행에서 조금 더 찾지.’
정보를 확인한 아이템 중에서 마법사 전용 아이템 몇 개가 더 있지만 그것들은 해란과 직접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 그녀라면 자신보다 더 가격에 빠삭할 것이다. 지난번에 도운 일도 있고 하니 설마 속일 리는 없었다.
‘한번 날 잡아서 정리를 해야 하는데.’
인벤토리도 그렇고 싸가지의 아공간에도 아직 확인도 못한 아이템들이 많지만, 막상 하려고 하면 시간이 없거나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공간이 부족하면 모를까 지금처럼 돈이 필요할 때 곶감 빼먹듯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확인 못 한 아이템들이 많다고 생각하면 없던 여유까지 생겨나니 더욱 그랬다. 더구나 그는 아직 큰돈을 쓸 곳을 별로 알지 못했다. 남들이 즐기는 그런 오락(?)에 아직 눈을 뜨지 못한 하룬이었다.
“벨, 아우터들은 어떤 물건들이 필요할까?”
“글쎄. 배리어 밖에 대한 정보는 기밀 등급이 1등급이라 나도 아직 못 봤어. 아직 보안 등급이 낮아 접속할 수 있는 아우터들에 대한 정보는 무척 제한적이야.”
하룬은 벨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자기가 가진 정보를 떠올렸다.
해란의 말과 약재를 구할 때 상인에게 듣기론 밖의 사정은 무척 열악하다고 했다. 산지나 바다의 경우는 예전 종말 시대보다 오히려 식생이 더 풍부해진 반면, 평지는 거의 모두 사막으로 변해 버렸다는 말을 자신도 직접 들었다.
“흠, 그럼 식량을 구입하는 것이 좋겠네. 그런데 고작 나 한 사람이 들고 갈 수 있을 정도의 식료품이 도움이 될까? 될 수 있으면 많이 구입해서 가져다주면 좋을 텐데. 문제는 운송 수단이네. 마법 배낭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비욘드를 떠올리는 하룬이다.
그곳처럼 마법이 통하는 세상이라면 엄청난 양의 식료품을 마법 배낭 몇 개에 넣어 편리하게 운송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그를 보며 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빠, 나중에는 내가 꼭 만들어 줄게. 하지만 배낭이 없다고 물건을 운송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응? 방법이 있다고?”
“응. 비록 마법 배낭과 같은 것은 없지만 오빠 말대로 아우터들이 비밀 통로를 통해 암시장에 들르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들을 고용하면 되지 않아? 내 생각에는 이너들 중에서도 직업적으로 배리어 밖으로 물건을 옮기는 일꾼들이 있을 거 같은데.”
“하긴, 그 편이 길을 찾는 것이나 그들과 접촉하는 데 편리하겠지. 좋은 생각이야.”
하룬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참, 의료품도 필요할 거야. 그들에게 그런 약품 조제 기술이나 공장이 있을 리 없을 테니까.”
“좋아. 그럼 일단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알아보는 것이 급선무야.”
하룬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래! 해란이 있었어.”
그 능력은 자세하게 모르지만 자칭 정보 거래상이니 그녀를 통하면 될 것 같았다. 창밖을 보니 어둠 속에 희미한 두 개의 달이 배리어를 통해 보였다.
‘설마 해란이 최상급 캡슐을 사용하진 않겠지?’
보통의 경우 유저들은 성인이라 해도 1일 최대 14시간밖에는 비욘드에 접속할 수 없다. 장기 접속에 따른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보통 직장을 가진 유저들의 경우는 하루에 6시간 정도를 게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정도라면 비욘드에서는 하루에 해당했다.
특별히 게임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거나 행운이 좋아 대박 아이템을 지속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유저들이나 게임을 생업으로 삼는 다크 게이머가 아닌 이상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해야만 했따.
상급 캡슐 사용자까지는 그 사용 시간의 제한이 적용되지만 예외는 있었다.
최상급 캡슐의 경우 영양 공급과 배설 등 모든 생리 행위를 고급 시스템이 자동으로 해 주기 때문에 연속 접속이 가능했다. 물론 그런 경우라도 최소 이틀에 한 번은 로그아웃을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근육이 약해져 현실의 육체가 큰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상급 캡슐 사용자들 역시 연속 접속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 정도의 부를 가진 자들은 대부분 노블들인데, 그들은 게임보다는 무소불위의 군력을 부릴 수 있는 현실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이 번호로 연결해 봐.”
바란으로부터 받은 번호로 화상 통화를 시도하자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해란이 얼굴을 드러냈다.
막 캡슐에서 나온 듯 아직 슈트도 벗지 못한 그녀는 하룬이 뻔히 보는 상황에서도 슈트를 벗고 있었다. 마치 보라는 듯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신기한 마음까지 들었다.
“히잉. 뭐야, 저 여자?”
벨이 민망한지 얼굴을 돌렸지만 하룬은 호기심에 찬 눈길로 그녀의 행동을 응시했다.
슈트가 벗겨지자 달랑 속옷만 입은 해란의 몸매가 드러났다. 8등신의 쫙 빠진 몸매는 마법사를 선택한 유저답지 않게 건강하면서도 탄력이 느껴졌다.
“호오, 여동생이 있었네.”
“벨이야.”
해란은 벨을 향해 윙크를 보내며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이내 하룬에게 눈을 돌렸다.
“그래도 내 몸매가 꽤 보기 좋은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은가 봐.”
“왜?”
“네 눈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으니까. 작정하고 벗은 건데 이거 실망했어.”
“그랬나? 실망할 거 없어. 눈은 즐거웠으니까.”
픽!
해란이 웃으며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있는 곳에는 또 하나의 캡슐이 보였는데, 그 안에는 아마도 쌍둥이인 세란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해란이 그 캡슐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큰오빠에게 네가 왔다 갔다는 소리는 들었어. 미리 연락이라도 했으면 좋았잖아.”
“급한 사정이 있어서.”
“내 몸과 얼굴로도 전혀 흔들림을 줄 수 없는 고고한 분이 웬일로 연락을 다 했대?”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빈정거리는 기색이 다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우터들의 생활상을 자세하게 알고 싶어서.”
“아우터? 나인을 만나러 가려고?”
아우터란 소리에 해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니, 밖에 나갔다 올 일이 좀 있어서. 미리 아우터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렇구나. 난 또.”
왠지 다행이라는 느낌이 묻어 나오는 해란의 말에 하룬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좋아. 뭐가 궁금한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아는 대로 바깥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지.”
물을 한 잔 마신 해란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룬의 옆에서 벨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해란이 하는 말을 경청했다.
배리어 밖은 종말 전쟁과 암흑기를 거치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많은 도시가 있던 평지는 거의 예외 없이 핵무기 때문에 불모의 사막지대로 변해버렸다. 유니온들은 그런 폐허 속에서 건설된 것이다.
아직도 대기와 대지에 남은 강력한 방사능 물질에도 생명의 강인함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모래와 먼지바람만이 부는 황량한 땅이지만 그래도 일부 지역은 풀과 같은 식물도 나고 물도 있는 초지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방사능을 극복하고 나타난 식물들은 이전에는 없던 종이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이전에도 존재했던 종들이었다. 삼백초와 같은 식물은 방사능을 이길 정도로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식물들의 경우 사람이나 동물이 먹을 수 없었다. 강력한 독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식물들은 방사능을 포함한 오염 물질들을 꾸준히 흡수해서 세상을 조금씩 정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종말 전쟁 전에 극도로 오염되었다는 환경 수준까지 정화되는 데에도 수천 년은 더 걸려야 할 거라고 했다.
산지는 평지와는 사정이 좀 달랐다.
종말 전쟁으로 수많은 식물들이 죽어 갔지만, 오염 물질의 밀도가 그나마 평지나 도시 지역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덕분에 수많은 식물들이 마치 멸종이 된 것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강력한 진화가 동식물 전반에서 일어났다. 이전이라면 수천수만 년에 걸쳐 일어났을 진화가 몇백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것이다.
진화의 힘은 위대했다. 그 식물들은 외형은 예전과 비슷하지만 예전보다 더욱 강력한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특히 약초들은 더욱 강인한 생명력과 더불어 강력한 약효를 가지게 된 것이다.
많은 아우터들은 오염이 비교적 심하지 않은 깊은 산중에 모여 마을을 이루어 살거나 비밀 벙커로 건설된 대형 지하 시설, 혹은 종말 시대 말에 발명된 강력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 군의 폐허에 있는 지하 공간에서 거주해 왔다.
아우터들은 초기에는 풀이나 나무의 껍질을 닥치는 대로 벗겨 먹으며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그래도 감자의 일종으로 강력한 변이를 통해 오염된 환경에 적응한 수감이라는 구근류와 거대 옥수수를 주식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또한 배리어 인근에 자리를 잡은 아우터들은 변종 생물들과 대를 이어 싸우며 터득한 무술을 익혀 전사가 되어 사냥을 하거나, 혹은 영흥 마을의 나인 일행처럼 암거래 시장에 배리어 밖의 물건을 공급하고 필요한 것들을 사 가는 방식으로 생활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당장 코원 유니온 인근에만 해도 걸어서 사흘 거리에 있는 아우터 마을의 숫자가 20여 곳에 이를 정도라고 했다. 오염된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온 아우터들의 생존력은 강인해서 조금씩 그 인구가 늘어가는 추세였다.
“그럼 그들이 가장 필요한 것은 뭐야?”
“그거야 당연히 식량이지. 유니온의 직영 농장에서 수경재배한 쌀과 밀 같은 곡식류 그리고 각종 채소들은 물론 대량으로 재배한 콩에서 추출한 식물 단백질을 합성해서 만든 인공 육류 모두 그들이 직접 얻을 수 없는 품목이니까.”
해란의 설명을 듣자 대충 상황이 그림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다음으로는?”
“음. 의약품과 의복 그리고 발전기와 같은 구식 기계류들이지. 비록 그들이 우리보다 예전 종말 시대에 대한 지식은 많이 가지고 있지만, 늘 변종 생물들의 위협에 시달리는 환경 때문에 그런 것을 만들어 낼 설비나 동력을 갖출 수 있는 여건이 안 되거든.”
“흠, 그렇군.”
하룬이 양아버지를 도와준 아우터들에게 선물로 가져가야 할 품목들은 대충 나온 셈이다.
“어딜 갈 건데?”
“F3구역 밖에 있는 발전소 자리에 있는 마을에 볼일이 있어.”
하룬의 말에 해란이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거기? 사이언스 마을을 말하는 거야?”
“알아?”
“그럼. 우리도 정기적으로 거래를 하고 있는걸. 그 마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종말 시대로부터 전해진 과학 기술을 배운 아우터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곳이야.”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기에 양아버지가 그곳에서도 인공지능을 가진 최상급 캡슐인 벨에 대해서 연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런 연구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사람이 좀 필요해.”
“사람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 때문에 그런데?”
“식료품과 의약품 등을 나를 짐꾼과 호위할 인원이 필요해.”
“당연히 있지. 일꾼이야 우리가 직접 구할 수 있고, 호위도 문제없어. 지난번에 만난 나인이네 마을의 전사들이 그런 일을 해.”
해란 때문에 생각보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 같았다. 좀 계산적이기는 하지만 그녀를 알아 둔 것이 무척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경매 완료를 알리는 안내음이 울렸다.
“뭐야? 경매를 한 거야?”
“응.”
“무슨 아이템인데?”
해란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보자! 매직 상급인 마법 지팡이는 320골드에 낙찰되었고, 레어 급인 천사의 팔찌는 551골드 그리고 전사의 투혼이라는 이름이 붙은 매직 상급의 배틀액스는 410골드에 낙찰됐네.”
“천사의 팔찌라고? 그거 나한테 팔지. 내가 600골드까지는 줄 수 있었는데. 안 그래도 신관도 없이 사냥하다 보니 치료 계통 아이템이 필요했단 말이야.”
아쉽다는 듯 뒷북을 치는 해란의 눈이 기묘한 빛으로 일렁였다. 어디서 그런 물건들을 얻었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하지만 하룬은 그녀의 호기심을 굳이 채워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네가 쓸 만한 마법 아이템을 남겨 두었으니 보고 제대로 가격이나 쳐줘.”
배리어 밖의 상황이나 아우터들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후한 인심을 가지게 된 하룬이었다.
그가 아이템 정보를 홀로그램으로 올리자 해란이 펄쩍 뛰었다.
“꺄악! 레어 급 마법 완드! 옵션이 마나 자동 충전과 140%의 마나 증폭이라니! 이런 귀한 물건을 어떻게?”
그녀에게 선보인 아이템은 후크란에서 어부지리로 건진 것들 중 가장 좋은 것이었다. 랭커가 쓰던 물건으로 보이는데 불운하게도 죽으면서 떨어뜨린 물건이었다. 애초에 마법사인 홀에게 주려고 했지만, 해란에게 일종의 뇌물로 팔기로 한 것이다.
“얼마 줄 거야?”
“으음, 이 정도면 시세가 아마 1,000골드는 될 거야. 하지만 친구인 나한테까지 그 엄청난 돈을 전부 받을 하룬은 아닐 테고……. 얼마면 되겠어?”
역시나 상인 기질을 어디 놓고 올 해란이 아니었다.
“모두 무기와 방어구로 받기로 하지. 배리어 밖을 나가려면 필요할 테니까. 물론 판매가에서 30% 정도는 할인해 주겠지?”
현실이나 비욘드의 수공품의 공임은 재료비와 비슷하거나 심하게는 몇 배나 되는 것이 일반적이니, 그녀에게도 손해일 리가 없다. 역시 그의 생각대로 해란이 휘파람을 불었다.
“코올!”
“좋아. 그럼 이따가 가게로 찾아갈게.”
“알았어. 미리 준비해 놓을게. 그리고 물건 구입은 얼마나 예상하는데?”
역시 눈치가 귀신인 해란이다. 그가 물어본 상품들을 구입할 준비를 하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결혼하면 가정 경제는 확실하게 불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거래한 돈을 모두 물건 대금과 운송 경비로 쓸 거야.”
암거래로 오늘 받을 돈 전부를 쓰기로 했다. 좀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벨의 가치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알았어. 그럼 대충 물건 대금만 2,500만 원 정도 하겠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맡겨 둬.”
해란이 신바람을 내며 세란이 들어간 캡슐을 힘차게 두드렸다. 그녀의 힘까지 빌릴 생각인가 보다.
하룬은 화상 통화를 종료하고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그의 아이템을 낙찰받은 휴먼들과 암거래 시장 근처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직접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자리가 귀찮았지만 현금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었다.
“에효, 비욘드가 그립다.”
빨리 비욘드로 가고 싶었다. 거래도 하고 그 돈으로 물건들을 구입해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이언스 마을도 들러야 하는데, 그 모든 게 귀찮기만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