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귀로歸路에 만난 하르크 (56/278)

《귀로歸路에 만난 하르크》

 하룬 일행은 힘들게 간 사이언스 마을에서 하루를 더 묵었다. 촌장으로부터 하룬의 방문이 뜻하는 바를 전해 들은 마을 사람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가 가져온 식량을 비롯한 물건들이 시기적절했기 때문에 바리처럼 이해를 해주었다.

 하룬은 마을에서 유일한 컴퓨터에 접속해서 벨에게 정보를 수집할 기회를 주기도 했고, 시설물을 돌아보는 시간도 가졌다. 또 마을 사람들과 만나 같이 식사를 하면ㅁ서 자신의 기억에도 별로 없는 양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기도 했다.

 양아버지의 무덤이 있다면 참배라도 할 텐데, 하르크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화장을 해서 바람에 날려 보내는 장례 풍습을 가지고 있어 그것은 불가능했다.

 시간이 더 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먹고사는지,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지 등 그 생활상을 경험하고 그들이 만든 기계류들을 보고 싶었지만, 바란 일행은 유니온에 돌아가 할 일이 있었다.

 하룬 역시 하르크 무리를 상대해야 한다는 엄청난 부담 때문에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촌장과 아리 그리고 바리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실망감 때문에 굳이 그를 더 잡지도 않았다. 사정을 안 이후로는 어쩐지 처음의 그 반가워하는 태도가 많이 없어진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자리를 마무리했지만 그들은 많이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룬이 다시 돌아와 하르크를 해치워 주리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가져온 엄청난 규모의 식료품을 비롯한 생필품을 마을 사람들 앞에서 자꾸 들먹이는 것을 보니 그 정도에 만족하려고 애를 쓰는 눈치였다.

 어린 시절부터 눈칫밥을 먹고 살아온 하룬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서운하긴 하지만 자신이 그들의 입장이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눈칫밥은 정말 사양이다. 이래저래 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돌아가는 길은 왔던 길보다는 수월했다. 일단 어깨를 혹사하게 만든 짐이 없었던 것이다. 짐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행은 한 줄로 늘어서서 이동했다. 해가 있는 동안은 워낙 기온이 높은 터라 무덥고 후끈하게 달아오른 공기로 힘들기는 했지만 별다른 위험이 없었다. 그럴 때는 무조건 앞사람의 발만 보고 걷는 것이 최선의 이동방법이었다.

 하룬은 이번에도 가장 후미로 쳐졌다. 이번에는 의도한 자리 배치였다. 사실 배리어 밖을 처음 여행할 때는 일행의 중간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야 그 사람을 기준으로 행군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고, 혹시 모를 위험에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행 중 누구도 하룬을 여행의 초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후미로 처지기는 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강한 지구력과 체력을 가지고 있음을 직접 확인했던 것이다.

 하룬은 의식 한 조각을 현실에 남겨 두어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르도록 하고는 자신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갔다. 메신저 워킹 스킬을 펼치며 정교한 루트로 기를 순환시키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뜨거운 성질의 기가 발을 통해 들어오고, 이미 축적된 기를 따라 몸을 순환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벨이 찾아낸 옛날 자료들을 보면 가부좌라는 특별한 자세를 취하고 수련을 하는 방법들이 주이지만, 그의 경우는 달랐다. 동작의 변화가 거의 없는 일정한 움직임을 반복적으로 취하면서도 기의 순환이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쉬운 것은 절대 아니었다. 처음에는 집중력이 조금이라고 흐트러지면 당장 순환이 멈추었던 것이다. 기라는 녀석은 너무나 예민해서 의지나 마음의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하룬은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강한 집중력으로 다시 시도하는 것. 그리고 몸과 마음에 새겨져 무의식중에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반복적으로 수련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비록 나흘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일단 길을 찾아낸 하룬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사이언스 마을에서도 그의 수련은 멈추지 않았다. 틈만 나면 메신저 워킹 스킬을 펼치면서 끊임없이 기를 순환시킨 결과, 유니온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보다 수월하게 기를 받아들이고 순환시킬 수 있었다.

 해가 뜨고 6시간을 꼬박 걸은 일행은 작은 숲이 만들어 준 그늘에 자리를 잡고 휴식 시간을 가졌다. 이곳에서 1시간 정도 쉬면서 식사를 할 예정이었다.

 아무리 짐이 현저하게 줄었다지만 마스크를 해제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줄줄 땀이 흐르고 있었다. 비록 얇은 방어구지만 땀을 흡수한 가죽이 몸을 조인 터라 숨을 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정말 대단하네요.”

 “그러게. 땀도 흘리지 않잖아.”

 마스크를 해제한 하룬이 물 한 모금을 마시는 사이, 다가온 해란과 나인이 말을 붙여 왔다. 하지만 빈말이 아닌 게, 실제로도 무척 놀란 얼굴이었다. 여행으로 성인식을 치르는 영흥 마을에서 자란 나인마저도 놀랄 정도로 하룬의 얼굴은 변화가 없었고, 숨소리도 편안했던 것이다.

 하룬은 그들의 경타에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그냥 미소만 지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몸이 강해질 수 있는 거야? 정말 궁금해.”

 “나도 궁금해요. 혹시 기氣라도 수련하는 건가요?”

 하룬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정작 나인이 한 말에 궁금해한 사람은 해란이었다.

 “기라니? 마나 같은 거니?”

 해란의 물음에 나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의하기가 힘들어서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육체의 한계를 극복한 이들이 사용하는 미지의 힘이라는 거야. 사실 아우터들 중에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휴먼들이 꽤 많아. 기라고 부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그 사람들의 능력은 놀라워서, 어떤 이는 무기에 기를 담아 하르크와 같은 무서운 변종 생물을 죽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를 사용해서 먼 거리에서도 위험한 존재들을 감지할 수 있어.”

 듣고 있던 하룬의 눈에서 빛이 났다.

 신기했다. 하긴 자신만 해도 그 지식과 스킬을 익히게 된 계기는 다르지만 어쨌든 비교적 수월하게 기를 느끼고 축적하며 아주 조금씩 사용할 수 있으니, 오랫동안 대를 이어 연구해 왔다면 실제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소문이긴 하지만 좀 더 북쪽 산악 지대에는 하르크나 오르그와 같은 피부 조직을 가진 변종 인간들도 있다고 해. 그들은 아무리 오래 햇빛에 노출되어도 암에 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마스크나 천으로 가리지 않고 공기를 직접 흡입해도 아무런 병도 걸리지 않는다고 해. 변화된 자연환경에 적응을 한 상태라는데, 휴먼에 비할 수 없는 엄청난 육체적 능력을 가지고 있대.”

 놀라운 이야기였다. 변종 생물뿐 아니라 변종 인간까지 있다니.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휴먼의 환경 적응성은 동물 중 가히 따를 종이 없으니까.

 “그건 소문이라 확인할 수 없지만 어쨌건 새로운 능력을 가진 휴먼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아우터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근근이 살 수 있는 거지. 종류는 좀 다르지만 우리 촌장님 같은 경우는 정신력을 이용해서 손을 대지 않고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전할 말을 머릿속으로 직접 전하기도 하는걸.”

 “와! 대단하다. 그럼 그거 초능력 아니야?”

 “뭉뚱그리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지. 촌장님 말이, 정신력을 사용하는 힘은 염동력이라고 하고 기라는 것은 다른 힘이래. 이전 문명에서도 그런 힘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지만 발현되는 힘의 크기가 미미해서 과학의 힘에 묻혀 버렸대.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대에는 그 힘이나 에너지가 충만해서 간간이 놀라운 능력을 가진 아우터들이 나타난대. 순간적으로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능력자도 있고,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자도 있는가 하면, 집중해서 의지를 발하는 것만으로 철판을 구부릴 수 있는 능력자들도 있다고 해. 하지만 반드시 그런 이상한 힘이 아니더라도 육체적인 힘이 한계를 넘는 사람들도 있지. 저기 로수 오빠만 해도 타고난 힘이 보통 사람의 서너 배는 되거든.”

 나인의 말을 듣던 하룬이 눈을 빛냈다. 그런 말은 처음 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리어 밖의 세상에는 기 혹은 에너지가 충만하다? 배리어를 나오고서 기가 급속도로 축적되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였나?’

 하룬은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는 의문을 떠올렸다. 하지만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틈이 없었다. 세란이 사이언스 마을에서 준비해 준 유동식을 들고 오고 있었다.

 “다들 식사해!”

 ‘일단 유니온으로 들어가 벨에게 물어보자. 녀석이 이제 접할 수 있는 정보처가 늘었다니 기대를 해 보자.’

 잠시 생각을 멈춘 하룬은 세란이 주는 유동식을 받아 들었다. 마치 죽처럼 혼합된 음식물이 담겨 있는 통의 마개를 막 따려는 순간이었다.

 “아악!”

 “하르크닷!”

 소변이라도 볼 요량이었던지 숲 안쪽으로 들어갔던 일꾼 두 명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두 사람의 바지춤은 제대로 추켜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하르크!”

 분명 두 사람을 뒤따르는 것은 하르크였다. 이전에 암시장에 나타났던 것과는 달리 이번 하르크는 다 자란 성체였다.

 4미터가 넘는 엄청난 거구의 하르크는 털 하나 없는 매끈한 황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놈의 몸은 완전히 역동적인 근육으로 뒤덮여 있는데, 손에는 무지막지하게큰 나무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급할 것 없다는 듯 뛰지도 않고 천천히 일꾼의 뒤는 쫓아 다가오는 하르크의 큰 입에는 무시무시한 송곳니와 톱니처럼 생긴 날카로운 이빨들이 보였고, 검게 반질거리는 손톱과 발톱은 그 길이가 10센티미터가 넘었다.

 육중한 몸 때문에 바닥에 깊은 발자국을 만들며 걸어오는 놈의 몸은 인간처럼 완전한 직립이 아니었다. 묘하게 상체가 앞으로 기울여져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벗겨 낸 것인지는 몰라도 가죽으로 치마를 만들어 하체를 가린 것으로 보아 상당한 지능을 가지고 있는 놈이었다. 옷이라는 개념이 형성된 것만으로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전에 유니온 시체 보관소에서 근무할 때 본 하르크는 이렇게 국부를 가리지 않았기에, 이런 사실은 처음 아는 것이다.

 크르르!

 놈이 기세 좋게 피어를 질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강한지 주변 대기가 진동할 정도였고, 범접하기 힘든 살벌한 살기가 깃들어 있어 일꾼들은 그 자리에 머리를 처박고 벌벌 떨었다.

 “다들 모여!”

 로수가 소리를 쳐 사람들을 모았다.

 그의 판단이 옳았다. 이곳은 작은 숲의 경계 부분, 일행의 뒤는 아무런 엄폐물도 없는 황무지였다. 정신없이 각자 도망치다가는 모두가 차례로 하르크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기를 각오하고 힘을 모아 놈을 상대하는 것이 유리했다.

 “무기를 조립해!”

 영흥 마을 전사들은 로수의 명령이 떨어지자 지체 없이 가지고 있던 무기의 자루 부분을 돌렸다. 순식간에 자루 부분이 두 배 길이로 변했다. 키가 크고 지체가 긴 하르크를 상대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한 무기인 것 같았다.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 나인이 의외의 행동을 보였다. 전에 없이 흥분을 한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하르크를 노려보았다.

 “저놈! 저놈이 우리 아버지와 전사들을 죽인 그놈이야. 저 부러진 송곳니를 우리 아버지가 부러뜨렸다.”

 나인이 비명처럼 쇳소리를 지르며 무작정 앞으로 내달렸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없었지만 그녀는 형언할 수 없는 분노로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그런 그녀를 잡은 사람은 바란이었다.

 영흥 마을에서 온 청년들은 길게 조립한 대검이며 칼을 들고 로수 주변으로 모였다. 그 모양은 반원이었다. 협공을 위한 진형을 잡고는 있지만 그들의 얼굴도 두려움으로 질려 있었다.

 하지만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지만 도망을 치거나 일꾼들처럼 바닥에 머리를 처박지는 않았다. 그들은 상행으로 생계를 유지해 가는 대상 마을 사람들답게 용감하고 강인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하룬은 언제든 뽑아 들 수 있도록 검 자루를 앞으로 내민 다음 예전에 새끼 하르크를 죽인 비수를 꺼내 들었다. 그가 위치한 곳은 일꾼들의 앞이었다. 사실 누구도 그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무방비로 노출된 일꾼들은 두 다리가 풀렸는지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우워어!

 하르크는 자신을 두려워하기는커녕 무기를 들고 대항하려는 인간들에게 분노했는지 끔찍한 피어를 지르며 천천히 달려왔다.

 쿵! 쿵! 쿵! 쿵!

 얼마나 육중한 몸을 가졌는지 대지가 요동을 치며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미리 수련을 했는지 영흥 마을 전사들이 놈을 가운데로 넣기 위해 양 날개 부분부터 움직였다. 하지만 그 시도는 너무나 허무하게 깨지고 말았다.

 우웅!

 놈이 휘두르는 몽둥이가 바람을 찢으며 날아오자 대경한 사람들은 마치 놀란 기러기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놈의 엄청난 힘이 들어간 몽둥이에 스치기라도 하면 최소한 중상일 테니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노옴!”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으로 몽둥이를 피한 바란이 용수철처럼 튀어 가까워진 하르크를 향해 쇄도했다.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그의 대검은 하르크의 가슴 어름을 베어 갔다.

 까앙!

 굉량한 소리에 막 후속 공격을 나서려던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틀림없이 베었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하르크의 왼손이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대검의 옆면을 후려갈겼던 것이다. 10센티미터가 넘는 손톱은 마치 검처럼 단단해 금속성까지 울린 것이다.

 “크윽!”

 혼신의 힘을 기울인 일격이기에 역도가 강제로 막히고 튕겨 버린 탓에 바란을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옆으로 밀렸다.

 엄청난 동체 시력을 가진 놈이었다. 날아오는 검의 옆면을 정확하게 가격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빠르고 정확한 눈을 가졌다는 이야기였다.

 그사이 길게 조립한 무기를 든 영흥 마을 전사들이 하르크를 둥글게 포위하자 로수가 앞으로 쇄도하며 소리를 질렀다.

 “한꺼번에 간다!”

 영흥 마을 전사들이 일제히 자신의 무기를 하르크를 향해 휘둘렀다. 길게 늘어난 무기들 때문에 하르크가 사정권에 제대로 들어와 있었다. 열 명이 동시에 하르크를 공격하는 모습에 해란과 나인의 얼굴에 기대가 떠올랐다.

 ‘바보 같은!’

 그러나 하룬은 내심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너무나 정직한 공격이었다. 놈이 가진 장점이 괴력인데 그 괴력에 맞서 힘으로 상대하려는 것과 다름없는 공격이었다.

 두려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원래 그럴 의도가 없었는지 공격이 너무 주먹구구식이었고, 타점이 모두 동일한 부위를 노리고 있었다.

 하룬의 예상이 맞았다. 사방을 포위한 인간들이 무기를 휘두르자 하르크가 서슬이 퍼런 흉광을 토해 내며 들고 있던 몽둥이를 한 바퀴 휘둘렀다.

 “크윽!”

 “윽!”

 놈이 휘두른 몽둥이는 두 명의 허리를 강타했을 뿐 아니라 달려들던 전사들로 하여금 황급히 공격을 멈추고 피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엎어지듯 상체를 접었다가 몽둥이가 지나간 직후 일어난 로수의 대검은 그 순간 하르크의 지척에 도착해 있어서, 마치 동료의 희생 덕분에 공격이 성공하는 듯했다.

 까앙!

 끔찍한 금속성과 함께 기세 좋게 대검을 찔러 가던 로수의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렸다. 역시 놈의 왼손 손톱이 그 공격을 감당한 것이다. 그래도 공격이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어서 손톱 하나가 부러져 있었다.

 우와악!

 하르크가 통증을 느꼈는지 입을 벌려 피어를 지르자 귀가 먹먹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분노 어린 놈의 피어에는 진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어느새 해란과 나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몸은 사정없이 후들거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다 죽는다.’

 싸움의 기본은 기세라는 것을 하룬은 잘 알고 있었다. 힘에서 달리면 기세라도 강해야 평수를 이룰 수 있는데, 지금은 일행의 주장인 두 사람이 무너지는 바람에 사기가 급속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입술을 질끈 하룬은 비수를 요대에 꽂고는 검을 빼 들었다.

 “타아앗!”

 하룬은 긴 기합성을 토하며 앞을 향해 쇄도했다. 메신저 스킬을 펼친 것도 아니지만 그의 몸은 늘여 두었던 용수철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빠르게 하르크를 향해 쏘아졌다. 마치 새의 부리처럼 놈의 머리를 향해 날아가는 강철검이 하얗게 빛났다.

 하지만 하르크의 동체 시력이나 기민한 동작은 하룬의 빠르기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놈의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오른 어깨 근육이 꿈틀했다.

 까앙!

 놈의 손톱이 찔러 가는 검의 옆면을 후려쳤다.

 하룬의 몸이 그 충격에 사정없이 옆으로 날아갔다. 오지게 바닥에 부딪힌 하룬은 오장육부가 제자리를 이탈하고 뼈가 흔들리는 심한 고통과 함께 피를 토해 냈다.

 ‘크윽! 럼프 오크 정도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네. 동체 시력이나 반응 속도가 장난이 아니구나. 이렇게 되면 비욘드에서 익힌 센스 소드는 사용할 수가 없어.’

 빠르기에서 밀리는 이상 상대의 공격을 막거나 피해 상대의 허점을 찾아 공격하는 검술은 효과가 없었다. 이 검술을 쓰려고 했다면 애초에 협공을 할 때 했어야 했다.

 마침 바란과 로수가 다시 달려들어 자신에게 잠시 관심이 멀어진 사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하룬은 꼭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래도 다행히 검은 놓지 않았지만 손아귀가 얼얼했다.

 머리를 흔들어 완전히 정신을 차린 하룬의 눈에 연속해서 하르크의 긴 손에 가격되어 날아가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 하룬의 뒤를 쫓으려는 하르크를 막으려고 미처 정상이 아닌 몸으로 달려든 탓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하르크를 한번 상대한 결론이었다. 육중한 체구에도 잔상이 남을 정도의 빠른 몸놀림을 가진 놈이다. 게임이라면 싸가지를 비롯한 정령의 힘을 쓰면 상대가 가능할 테지만 이곳은 현실이다.

 놈의 동체 시력과 반응 속도로 보건대 비수로 해치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것을 확실히 안 하룬은 나름 전략을 짰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르크는 가장 강할 것 같은 두 사람을 마저 처리할 태세였다. 이번에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무기까지 놓치고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타앗!”

 하룬은 다시 검을 앞으로 향한 채 도약했다. 검의 끝은 놈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까앙!

 여지없이 놈의 강철 같은 손톱이 검면을 후려쳤다.

 하지만 미리 예상한 일이었다. 하룬은 그 순간에 맞추어 검을 쥔 손에 힘을 풀고, 타격에서 발생하는 힘으 순순히 받아들이며 몸을 틀어 회전력을 더했다.

 게임이 아니라 실전이기에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정교한 노림수이자 힘의 안배는 첫 번째 시도치고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핑그르르.

 그는 공중에서 무려 두 바퀴나 돌며 튕겨 나가고 있었지만, 몸은 오히려 더 높이 올라갔다. 검면을 후려친 하르크의 힘이 위로 향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그의 두 다리가 어느새 하르크의 가슴까지 올라간 것이다.

 하룬은 미리 생각한 대로 몸이 회전하는 순간을 이용해 비수 두 자루를 빼들었지만 던질 여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 싸움에서 자신이 불리했다. 놈의 오른손이 자신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하룬은 급하게 공중에서 하르크를 향해 발을 걷어찼다. 놈을 차는 반동으로 놈의 전권을 빠져나가며 비수를 날리려는 생각이었다. 냉정한 하룬의 계산에 의하면 자신의 발차기가 놈의 후려쳐 오는 손보다 더 빨랐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그의 머리가 하르크의 손톱에 날아갈 것처럼 보였다.

 “안 돼!”

 해란이 비명을 질렀다.

 “오오오옷!”

 나인이 이상한 기합성을 토해 냈다. 있는 대로 힘을 준 주먹을 가슴 오름까지 올리고 두 다리를 말 타듯 벌린 그녀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곤두섰다. 그녀의 몸 주변에 둥글고 밝은 빛을 내는 구체가 형성되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 구체가 하르크의 몸을 격타했다.

 ‘뭐지?’

 하르크의 가슴 부분을 걷어찬 그의 발끝 부분이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강력한 전류에 휩싸였다. 다행하게도 감전된 것 같은 느낌은 잠시였다. 그의 몸은 뒤로 날아가고 있었다.

 ‘놈이 멈추었다.’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하르크의 몸이 순간 멈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때다!’

 하룬은 눈을 빛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하르크는 영화의 한 장면을 캡처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자신의 머리 위까지 온 하룬을 보았다. 그 순간 놈의 눈알이 움직였다. 드디어 조각상처럼 굳은 몸이 풀리는 징조였다.

 거듭된 충격의 여파로 내장이 진탕되어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 다가설 기회를 잡은 것을 놓칠 수가 없는 하룬이다.

 비수 두 자루가 아래에 멈춰 있는 하르크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ㄴ라아갔다.

 쉬익!

 바로 지척에서 날아오는 비수들을 하르크는 피할 수가 없었다.

 비수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예기를 민감한 감각으로 느낀 하르크는 다급한 나머지 머리를 뒤로 젖히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푸욱!

 끄아아아악!

 놈의 두 눈에 비수가 꽂혔다.

 비록 워낙 가까운 거리고 힘을 제대로 실을 수 없는 자세였지만, 날카로운 비수는 가장 약한 부분인 눈알에 박히면서 놈을 고통에 울부짖게 만들었다. 다음 순간 하룬은 놈이 고통에 본능적으로 허우적거리는 손에 맞아 멀리 날아갔다.

 “놈은 앞을 보지 못한다. 사방에서 에워싸고 공격해!”

 손아귀가 찢어지고 입에서 피를 흘리던 로수는 하룬이 만들어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마지막 힘을 내서 일어난 그의 명령에 영흥 마을 전사들이 사기가 올라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자신의 몸을 베고 찔러 오는 전사들의 공격에 하르크는 고통 속에서도 분노의 피어를 지르며 두 손을 휘둘러 댔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 그런 공격은 치명적이지 못했다.

 몇 명의 전사들이 엄청나게 빠른 놈의 손에 걸려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지만 놈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비록 질기고 단단한 가죽을 가진 하르크지만 몰매에는 장사가 없었다. 날카롭게 갈린 전사들의 무기는 놈의 전신에 셀 수 없는 무수한 상처를 만들었고, 눈이 보이지 않는 탓에 도망을 치지도 못했다.

 기운을 차린 바란과 세란까지 합세해서 놈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맹렬한 공격을 퍼부은 지 10여 분이 지나자 결국 하르크도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놈이 사람들의 공격을 무시하고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도망을 치는 과정에서 칼과 검에 깊이 베이기는 했지만 피가 흐를 정도는 아니었다. 공격하는 사람들의 전권을 벗어난 하르크는 순식간에 자세를 바꾸었다.

 맹수처럼 두 손까지 발로 사용해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째 서 있는 자세가 어정쩡하다고 생각했더니 이족 보행도 사족 주행도 가능한 모양이다. 네발을 사용해서 도망을 치는 하르크의 속도는 엄청났다.

 “쫓아가서 숨통을 끊어야 해요. 놈은 후각만으로도 우리를 다시 찾을 수 있어요. 복수심이 엄청난 놈이라고요.”

 나인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뒤를 쫓을 사람이 없었다. 그럴 힘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바란이나 로수 그리고 전사들 대부분이 크고 작은 타격을 받은 것은 물론 진이 빠질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 증거로 놈이 도망을 치자 전사들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인이나 전사들은 안타까웠다. 이제 놈은 자신들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수시로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몰살을 당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놈을 살려 보냈으니 두고두고 그 후환을 감당해야만 했다.

 원한을 품은 존재를 죽을 때까지 쫓아다니는 하르크 특유의 지독한 복수심과 끈질긴 증오를 잘 알고 있지만, 당장 놈을 쫓을 힘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사력을 다해 무기를 휘두른 것이다. 게다가 놈의 몽둥이나 손톱에 당한 전사들만 해도 여섯 명이나 되었다.

 “하룬!”

 곧 닥쳐올 하르크의 복수를 생각하며 질끈 눈을 감았던 나인은 해란의 고함에 눈을 떴다. 아까 하르크의 일격을 맞아 멀리 날아갔던 하룬이 언제 일어났는지 하르크의 뒤를 쫓고 있었다.

 “위험해! 혼자서는 안 돼요!”

 하지만 그녀의 경고는 뒤늦고 말았다. 하룬의 몸은 바람처럼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인과 전사 몇 명의 시선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하룬의 뒤를 쫓고 있었다.

 분명히 피를 토하는 심각한 내상을 입었음에도 하룬의 몸은 하르크에 못지 않은 속도로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네발로 달리는 하르크는 그 거대한 몸에도 굉장히 유연하고 민첩성이 뛰어난 변종 생물로 놈이 달리는 속도는 말보다 더 빨랐다. 하룬은 그런 하르크에 필적할 정도로 달려 놈을 쫓고 있었다.

 일행은 금방 작은 점으로 변하는 하르크와 하룬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나인은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맞아, 저 친구는 타고난 전사다. 제대로 싸울 줄 아는 위대한 전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어.”

 부상당한 몸으로 언제 나인의 옆까지 왔는지 모르는 로수의 말이었다. 그는 긴장이 풀렸는지 그 말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룬의 뒤를 쫓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내장이 진탕이 되는 충격을 연속해서 받으면서도 상대의 괴력을 이용하는 능력은 아무리 실전 경험이 많아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기와 투기는 물론 냉정하고 판단력이 빨라야 하는 것이다.

 “근데 아까 그건 뭐야?”

 한 고비를 넘기자 해란이 나인에게 물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사방으로 가닥가닥 살아서 뻗어 나갔던 나인의 머리카락이 원래대로 얌전히 자리하고 있지만, 얼굴은 한순간에 10년은 더 나이가 든 것처럼 창백하고 푸석푸석하기까지 했다.

 “텔레키네시스야. 염동력이라고도 부르지. 아직 능력이 약해 겨우 잠깐 동안 대상의 동작을 멈추게 할 수 있을 뿐이야.”

 나인의 말에 해란 남매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꽤 오래 알아 왔지만 그들은 나인이 영리하고 뛰어난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만 생각해 왔던 것이다.

 “너도 초능력자인 거니?”

 “그렇게 부르기도 창피할 정도야. 아까도 봤잖아. 고작해야 2, 3초 동안 대상자의 몸을 붙들어 둘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한걸. 이어 줘.”

 나인은 정말 창피한지 창백한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네가 아니었으면 하룬이 하르크의 두 눈에 비수를 박지 못했을 거야.”

 “웬걸. 이미 그 사람은 하르크를 걷어차고 뒤로 날아가던 참인걸. 내가 염동력을 쓰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성공했을 거야. 미리 머릿속에 계산을 다 하고 놈을 상대한걸.” 

 “그건 그렇지만…….”

 아까 금방이라도 하룬이 하르크에게 죽을 것 같아 찢어지는 쇳소리로 비명을 질렀던 해란은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창피해졌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일단 사람들부터 치료해야 해.”

 나인이 대화를 끊었다. 한가하게 이야기를 할 여유가 없었다. 로수를 포함한 모든 전사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멀쩡한 사람들은 해란 자매와 일꾼들이 고작이었다. 염동력을 쓴 나인은 간신히 서 있을 뿐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