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氣의 순환》
하르크를 상대한 모든 전사들이 부상을 입었다. 개중에는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자리에서 이탈한 중상자들도 있기에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하게도 영흥 마을 전사들이 이럴 때를 대비해서 효과 좋은 약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전사들을 다 치료하고 난 것은 족히 30분이 흐른 뒤였다. 그래도 하르크의 발톱이나 손톱에 뼈가 상하거나 장기가 꿰뚫린 사람은 없어 다행이었다. 뼈가 부러지고 놈의 손톱에 살점이 뭉텅이로 파인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바란이나 로수처럼 강력한 충격에 장기가 진탕된 경우인데, 이런 환자들은 바른 자세로 누워 쉬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이 먹은 환약에는 산삼을 비롯한 좋은 약재들이 들어가 그 치료를 도울 것이다.
“왜 이렇게 안 오지?”
나인이 걱정이 되는 듯 아까부터 자꾸 하룬이 사라진 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게. 혼자서 그놈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인데.”
“어떡하지? 내가 한번 가 보기라도 할까?”
힘을 별로 소진하지 않았던 세란이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리도 전혀 모르는 데다 어디로 갔는지 알고 혼자서 추격을 한단 말인가.
“악!”
갑자기 나인이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은 그녀의 비명에 또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그녀에게 모여들었다.
“왜? 왜 그러는데?”
해란이 방방 뜨는 나인을 붙잡고 물었다.
“마스크! 옷!”
“마스크와 옷이 왜?”
“그 사람, 하룬이…….”
순간 해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인이 하는 말을 이해했던 것이다.
“어떡해? 그 사람 방어구만 입고 하르크를 쫓아갔어.”
이런 뜨거운 햇빛에 30분 이상 살이 노출되면 급성 피부암에 걸린다. 거기다가 30분 이상 방사능이 함유된 대기를 마시면 폐 조직부터 시작해서 호흡기와 순환계 조직이 손상된다.
하룬 때문에 목숨을 부지한 일꾼들은 물론 같이 목숨을 걸고 하르크를 상대한 사람들은 애가 타들어갔다. 벌써 3분이 훨씬 넘었던 것이다.
“그냥 돌아오지.”
“그러게 말이야.”
“미치겠다!”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벌써 1시간이 흐르고 2시간이 되어 가지만 하룬은 소식이 없었다. 이제 휴먼들이 장비 없이 배리어 밖에서 버틸 수 있는 한계시간이 훌쩍 지난 것이다.
“죽었을까?”
일꾼 하나가 다른 동료에게 속삭였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하르크의 두 눈을 찌른 실력을 가진 전사가 이 정도로 죽겠냐? 자네 호상이 알지?”
“호상이라면 지난번 자네를 쫓아 같이 용광로 마을에 다녀온 그 고아 출신 애송이 아니야?”
“맞아. 처음 배리어 밖을 나온 그 멍청한 놈이 한 번은 주의 사항을 잊어버리고 1시간이나 마스크를 벗고 있었잖아.”
“그래? 죽었어?”
“아니, 한 이틀 고생하긴 했지만 멀쩡해지더라고. 모든 휴먼들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지. 몸 튼튼한 걸로는 그 호상이 놈을 따라갈 놈이 없거든.”
“음, 그런 경우도 있구나. 그럼 우리 은인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당연히 그럴 거야. 하르크를 상대한 전사인데…….”
두 일꾼의 대화를 듣던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을 보았다. 생생한 선례가 있지 않은가. 그 누구도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는 그 엄청난 놈과 일대일로 붙어 두 눈을 작살 낸 전사이니 희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포기하고 다시 이동해야 하지만 일행의 우두머리인 바란도 그렇고 로수마저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록 내상과 외상을 입긴 했지만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그들이라면 절대 이렇게 늘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애가 다 타들어 갈 때쯤 드디어 소식이 있었다.
부상을 입지 않아 자진해서 주변을 경계하기 위해 앞쪽으로 나가 있던 한 전사가 고함을 질렀던 것이다.
“온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시력을 잃긴 했지만 하르크는 그 뛰어난 후각만으로도 이곳까지 복수를 하기 위해 찾아올 지독한 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룬이다! 하룬이 온다!”
전사의 고함에 비교적 몸이 성한 사람들은 전사가 보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저 멀리서 하룬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글거리는 뙤약볕 속을 그는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좀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심한 부상을 입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룬이야!”
조바심을 내던 해란이 긴장이 풀린 듯 힘없이 소리쳤다. 세란의 얼굴에도 기쁜 웃음이 피어났다. 그녀는 직접 하룬을 향해 뛰어가기까지 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나인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 역시 해란처럼 잔뜩 걱정을 했다가 하룬의 안전을 확인하자 긴장이 풀린 것이다.
모두가 보는 가운데 조금은 흔들리는 걸음이지만 당당하게 귀환한 하룬은 한 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또 다른 것을 끌고 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제일 먼저 하룬의 얼굴과 방어구 밖으로 드러난 피부부터 체크했다.
“괜찮아. 물집도 없고 화상도 입지 않았어!”
이런 강렬한 햇빛에 2시간 이상 노출되었는데도 드러난 피부는 눈에 띄게 붉어진 것 말고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럼 황무지가 아니라 중간에 숲이라도 들어간 것일까?’
걱정하고 애를 태운 것이 억울할 만큼 하룬은 강인한 모습 그대로였다.
어쨌든 걱정을 벗어 버린 사람들의 얼굴에는 반가운 웃음이 떠올랐다. 기운을 차린 해란이 하룬을 미소 띤 얼굴로 맞이하다가 물었다. 그가 끌고 온 엄청나게 큰 자루 같은 물건과 다른 손에 쥐인 크고 검붉은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뭐야?”
“하르크의 머리와 가죽.”
“정말? 그럼 기어코 놈을 쫓아가 죽인 거야?”
하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루를 내려놓았다. 해란과 나인 그리고 전사들이 일제히 그가 끌고 온 물건을 확인했다. 확실히 하르크의 가죽이 맞았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가늘고 짧은 솜털이 밀생했지만, 외관상으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매끈해 보이는 하르크의 가죽이 맞았다.
“정말 놈을 죽였구나! 어떻게 한 건데? 그리고 이 가죽은 어떻게 도축한 거야?”
한번 벌어진 해란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눈이 보이지 않는다지만 그 무서운 하르크를 쫓아가서 어덯게 죽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가죽을 벗겨 냈는지 알 수 없었다.
모두들 하룬에게 궁금해하는 시선을 던졌지만 하룬은 잘라 낸 하르크의 머리통을 잡아 나인 앞에 놓았다. 역시 가죽이 통째로 벗겨진 것이다.
“선물이요!”
그 말과 함께 하룬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무척 피곤해 보였다.
그런 하룬에게 더 이상 사정을 물어보는 만행을 저지를 사람은 없었다.
평소에도 표정이 거의 없고 필요한 말만 겨우 하는 과묵한 하룬이기에,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지금 누구보다 심하게 힘든 상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흐흑, 아빠.”
나인이 오열하며 하르크의 머리통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뒤로 로수를 비롯한 전사들이 화염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원수의 머리통을 쳐다보았다.
한참 동안 울던 나인은 품속에서 날가로운 비수를 꺼내 하르크의 머리통을 두 번 찔렀다. 복수를 위한 예식일까? 전사들도 경건한 모습으로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해란 남매와 일꾼들은 그 모습을 보며 그들의 감정을 헤아려 봤지만 전혀 추측할 수 없었다.
하룬은 뜨거운 열기 속에서 놈을 쫓아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용해 입안에 검을 찔러 넣어 겨우 해치울 수 있었다. 그 과정 중에 위험한 순간도 몇 번 겪었지만 놈의 장단점은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놈의 사체를 도축한 하룬은 놈의 가죽과 머리통을 끌고 오면서 메신저 워킹 스킬로 기를 받아들이고 순행시켜 겨우 이곳까지 올 수는 있었지만,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강한 의지력으로 쓰러지고 싶은 것을 극복하고 기어코 돌아와 잠이라도 한숨 자려고 눈까지 감았지만 너무 큰일을 겪어서 그런지 잠은 잘 수 없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그 고통은 점차 더 커지고 있어 신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기 시작했다.
‘정말 죽을 거 같아.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아파.’
하룬은 안간힘을 쓰며 고통을 참으려고 했지만 뜨거운 열기를 흡수한 피부는 화염 속에 빠진 듯 뜨겁게 타기 시작했고, 뼈와 근육 그리고 장기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억눌러 놓았던 통증을 호소했다.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니야?’
퍼뜩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하룬은 불안감과 고통을 잊으려고 다른 생각을 해 보려고 했지만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게임 속에서도 그렇게 현실에서도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적은 없었다.
‘지지 않아. 이제는…….’
이를 악문 하룬은 의식을 마나 오션, 즉 기로 따지면 단전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집중했다.
극렬한 고통 속에서 활화산의 용암처럼 들끓고 있는 기가 보였다. 이전과는 달리 단단하게 뭉친 고형이 아니라 액체로 풀어진 기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기마저! 정말 위험한데.’
아무래도 기의 상태가 심상치가 않았다. 이렇게 끓어오르다가 터지기라도 하면 전신을 산산조각으로 만들 것 같았다.
하룬은 머리칼이 쭈뼛 설 정도로 위기감을 느끼며 기에 의지를 심기 시작했다.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더 끓기 전에 식혀야 하는데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기를 순환시켜야 했다. 기를 순환시키면 그 성질이 순후해진다는 것을 짧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어서! 움직여!’
파밧!
윗니에 씹힌 아랫입술이 살점까지 터지며 붉은 핏물을 흘렸다.
단정하게 앉은 하룬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던 해란이 쇳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왜 그러는 거야?”
해란은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두 손을 비볐다. 하룬을 주시하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해란은 급한 마음에 하룬에게 다가갔다. 나인도 마찬가지였다.
“안 돼!”
로수가 낮게 소리를 질러 해란의 발길을 잡았다. 해란과 나인이 로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로수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무척 위험한 상태인 것 같으니까 저대로 놔둬.”
“왜 위험한데?”
이해가 가지 않는 나인이 물었다.
“저 친구, 우리가 모르는 능력을 가진 전사다. 분명히 자신만의 방법이 있을 거야. 정신을 잃었다면 모르지만 그게 아니라면 혼자서 해결을 하도록 방해하면 안 돼.”
그의 말에는 강한 확신이 묻어 나왔다.
“맞다! 뭔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친구야. 로수의 말대로 그냥 놔두는 것이 낫겠어.”
바란까지 거들자 더 이상 하룬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의 상태가 걱정인 사람들은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안타까운 시선으로 하룬을 응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룬은 그런 상황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내부로 깊이 침잠해 있었다.
‘제발 움직여! 제발!’
아무리 애원하고 부탁하고 달래 보아도 기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한층 더 강렬한 기세로 끓어오르기만 했다. 하룬은 본능적으로 조금만 더 지나면 기가 터져버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꿈쩍도 하지 않는 기 때문에 하룬은 어느 순간부터는 고통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오로지 기에 온 정신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룬은 어느 순간 기를 움직이려는 것을 포기하고 완전히 방관자가 되어 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환상적이었던 것이다. 왜 자신이 기를 움직이려고 했는지조차도 잊은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의식이 기에 스며들어 갔다. 일단 의식이 끓고 있던 기와 섞이기 시작하자 기의 성질을 느낄 수 있었다.
‘어! 뜨겁지 않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끓고 있는 기지만 뜨거움은 느낄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끓고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뜨거운 열기가 단전으로 계속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너무 미세해서 모습도 볼 수 없는 열기가 어느 곳에서 이곳으로 들어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기가 끓고 있는 것은 그 열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그는 단전의 아래쪽으로 뚫린 통로를 볼 수 있었다. 그곳은 비록 큰 통로는 아니지만 아래로 활짝 열려 있었다. 이렇게 좁은 곳에서 갈 곳을 모르고 부대낀다는 생각이 든 하룬의 의식이 그 구멍으로 향하는 순간 막 폭발을 하려던 기가 순식간에 그곳으로 향했다.
하룬은 기와 함께 맹렬한 속도로 구멍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여긴 내 성기 근처네.’
그랬다. 성기 근처의 한 경혈이었다. 끓어오르며 에너지를 극대화시킨 때문인지 다시 비스듬히 뒤쪽으로 쏟아져 내린 기는 꼬리뼈 근처를 지났다.
기는 잠시 그곳에 멈추었다가 위를 향해 뚫린 길로 움직였다. 아래로 떨어지며 위치에너지를 축적한 덕분에 똑바로 위를 향해 난 길이지만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게다가 그 길은 익숙한 길이었다.
척추를 옆에 두고 위로 오르던 기는 뒷목과 뒷머리를 거쳐 정수리까지 이르렀다. 그곳에서 잠시 외계의 기운과 공명을 일으키던 기는 이마와 인중 그리고 혀뿌리와 목을 거쳐 명치 안쪽에서 다시 멈추어 외계의 기운과 공명을 했다.
그것도 잠시, 다시 아래로 향한 기는 익숙한 단전으로 돌아왔다.
‘이건 내가 발견한 기의 행로잖아.’
기는 폭발 일보 직전에 의식과 하나가 되어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진 순환로를 타고 움직인 것이다. 상체의 정중앙을 앞뒤로 잇는 작은 순환로를 거친 기의 상태는 처음보다 많이 누그러졌지만, 계속 유입되는 열기 때문에 다시 그 기세가 살아났다.
‘가자!’
하룬은 그것이 자신의 의식인지 아니면 기 자체의 명령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명령에 기는 순순히 한 번 지났던 길을 따라 이전보다 안정적인 상태로 순환하기 시작했다.
순환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단전으로 계속 유입되는 열기가 기가 순환하며 만든 진공 때문에 꼬리를 물고 기의 순환을 따른 것이다. 기는 유입되는 열기를 받아들여 한 덩어리로 만들었고, 순환을 통해 그 성질을 순화시켰다.
기의 순환은 더 이상 유입되는 열기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자신이 어느 곳에 어떻게 있는지조차도 잊은 하룬은 이제는 완전히 안정적인 상태로 변한 기를 느끼며 순환을 멈추었다.
그렇게도 움직여지지 않았던 기가 마치 자신의 수족처럼 쉬이 그 의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신기했다.
얼마 전까지는 자신의 몸 안에 존재하고 있지만 자신의 일부라는 자각은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자신의 손과 발에 다름없는 자신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기의 형태도 바뀌었다. 딱딱한 고체처럼 여기던 기가 이제는 끈끈한 액체로 익식되었다. 그 액체 상태의 기는 언제 끓어올랐냐는 듯 단전에 찰랑거리며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기의 상태가 안정되자 하룬의 의식은 다시 외계로 향했다.
눈을 떴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누구는 걱정에 가득한 눈길을, 또 어느 누구는 놀란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어! 더 이상 아프지 않네.’
그러고 보니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화끈거리던 열기로 타들어가던 피부 역시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룬은 스트레칭으로 몸의 상태를 점검했다. 특별히 스트레칭을 계속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몸은 유연하게 움직였다. 고통이 느껴지는 것도, 불편한 곳도 전혀 없었다.
몸은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신선한 활력으로 가득했다.
‘설마 만 하루 동안 이런 상태로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하룬은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은밀하게 눈치를 살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은 것 같아 안도했다. 자신 때문에 일정이 늦추어지진 않은 것 같았다.
‘정말 이너가 맞는 거야? 한 번도 배리어 밖을 나가보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이야?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다가 30분도 안 돼서 정상으로 돌아온 넌 대체 정체가 뭐야, 하룬?’
짧은 시간 동안 앉은 자세로 미동도 없이 쉰 것만으로 멀쩡한 모습이 되어 버린 믿기 힘든 변화에 놀란 나머지, 해란은 하르크를 쫓아갔다가 살아 돌아온 하룬에 대한 반가움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반가움을 표현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나인이 채 마르지도 않은 피와 먼지로 더러워진 방어구를 입고 있는 하룬의 품으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아아앙! 엉엉!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살아와줘서 고마워요.”
하룬은 말없이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지금 이 순간은 나인이 보살펴 주고 달래 주어야 할 존재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 사이 로수가 다가왔다. 내장이 심하게 흔들리는 부상을 입은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힘겹게 걸어와 그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맙네. 자네가 죽인 그놈이 나인과 우리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였어. 우리 마을의 뛰어난 전사 열두 명과 전사장이었던 나인의 아버지가 그놈에게 죽었어. 상행을 끝마치고 돌아오다가 계곡에서 급습을 당한 거지. 힘없는 사람들이 피신할 시간을 주기 위해 상대가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놈을 막다가 그만……. 휴우, 그분들은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놈에게 잡아먹혔지.”
“그랬군요.”
하룬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품에 안겨 울고 있는 나인을 꼭 안아 주었다.
“사실 저놈을 잡기 위해 자네를 우리 마을에 초대하려고 했어. 다음 대 전사들인 우리가 미처 선대분들의 전투술이나 기예를 다 전수받기도 전에 사고가 나는 바람에, 우리 실력으로는 놈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거든.”
하룬은 이제야 나인이 자신에게 하려고 했던 부탁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힘을 합쳐 아버지와 전사들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던 것이다.
“자네에게 정말 큰 은혜를 입었네. 지난번도 그렇고 이번에도 자네 때문에 많은 목숨이 살아났어.”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전사들이 먼저 하르크를 상대하며 놈의 이목을 흐리지 않았다면, 또 나인이 이상한 능력을 발휘해서 놈의 몸을 꼼짝 못 하게 묶어 놓지 않았다면 도박과 같은 제 공격이 먹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야 마무리를 한 것이지, 사실 원수는 여러분들이 갚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룬의 대답에 로수와 전사들은 말없이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겸손 따위는 아예 단어도 모르는 그들이지만, 하룬의 말은 부상을 입고 사기가 떨어진 전사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세워 주었다.
“언제든 말만 하게. 우리 마을의 전사들은 자네를 돕기 위해 목숨이라도 던질 테니까.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수련을 받기 시작한 우리지만 머지않아 유니온을 오가며 용맹을 떨쳤던 전사들로 태어날 거야.”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형제의 힘이 필요하면 반드시 부르겠습니다.”
하룬의 말을 들은 로수와 전사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형제라는 말이 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그 말은 뜨거운 전사의 피를 가진 그들에게 하룬을 단순한 은인 이상의 존재로 각인하게 만들었다.
“하하하! 맞아,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 우리는 형제나 다름없지. 하하하! 이건 내 목걸이야. 이걸 보는 우리 마을 사람들은 날 보듯 자네를 대할 거야.”
하룬은 망설이지 않고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화통한 그들 때문에 자신도 화통해지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언제라도 제 힘이 필요하면 바란 형에게 연락하십시오. 어디든 형제들의 힘이 되겠습니다.”
사실 그가 배리어 밖을 나올 일이 또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순간에는 다른 생각이나 의도 없이 그들의 성의를 받고 또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하하! 이거 서운한데. 나도 같이 싸웠으니 한 형제인데 말이야.”
언제 왔는지 바란이 와 있었다.
로수처럼 심한 내상을 입은 그의 얼굴도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눈빛만은 강렬했다. 풍기는 기세 역시 로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대장장이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천생 전사가 되어야 할 성격을 가진 바란이었다.
“좋아! 우리 친구 하세.”
이제까지 데면데면하게 서로를 대하던 바란과 로수가 힘차게 상대를 포옹했다.
“윽!”
“큭!”
몸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기분을 내다가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붙자마자 떨어지는 두 사람을 보는 사람들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