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의 땅으로 향하는 길》
우여곡절 끝에 타니엘라와 도네이스가 합류한 일행은 저마다 천막을 치고 식사를 준비해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대원들과 함께 헤니가 준비한 식사를 하면서 보니 모두 용병대를 빼고도 네 무리나 되었다.
아레스와 매그럼 그리고 초른은 미리 구입한 육포를 건조시킨 양념과 함께 물에 끓여서 부드럽게 푼 즉석 스튜에 빵을 곁들인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반과 샤니 그리고 수행원인 동시에 호위 무사인 묘는 빵과 과일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딜런과 두 젊은 남녀는 마법 배낭에서 꺼낸 일종의 도시락을 먹고 있었고, 가장 늦게 합류한 타니엘라와 도네이스 역시 빵과 물로 저녁을 해결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하룬은 사람들을 한자리로 불러 보았다. 이제야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내일부터 강행군을 해야 합니다. 테베 백작령을 통과해서 고요의 땅으로 가는 일상적인 길도 험하기로 소문났지만, 우리는 일정을 단축하기 위해 깎아지른 돌산 지대와 습지 그리고 바다처럼 넓은 호수를 건너야 합니다.”
강행군이라는 말을 했지만 사람들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일 뿐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아반이 물었다.
“그럼 일정은 얼마나 단축이 되는 건가?”
“원래 형성되어 있는 길로 가면 걸어서는 두 달 이상, 말을 탄다고 해도 테베 백작령의 관문인 아이리드 산맥은 걸어서 가야 하니 최소한 한 달 이상이 걸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길이 없는 곳을 똑바로 관통해서 보름에서 이십 일 안에 고요의 땅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고요의 평원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모두들 자신의 체력을 잘 배분하시기 바랍니다.”
“휴우, 죽었다고 복창해야겠군. 나 같은 늙은이는 뼈마디가 남아나질 않겠어.”
엄살을 떠는 아반이지만 다른 사람들도 이제야 실감이 나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긴 노정을 최소 3분의 1로 줄일 수 있는 길이 어떨지는 대충 짐작이 가는 것이다.
“대장, 우리가 가는 길에는 어떤 몬스터들이 있습니까?”
매그럼이 물었다.
“지금 예상이 이틀 후에 나타날 돌산 지대는 길 자체도 위험하지만 바람의 계곡이라는 절벽 중간에 난 소로를 지나야 하오. 그곳은 다킬이라고 부르는 독사들과 와이번들의 영역이오. 그다음에 건널 습지는 리자드맨들과 독충들 그리고 악어들의 영역이오. 마지막으로 건너는 데만 사흘은 걸릴 거대한 호수는 프레데터 시걸이 공중을 장악하고 있고 물 아래는 폭식성을 가진 흉포한 성정의 블랙 돌핀들과 베코라고 부르는 거대 고기가 있소.”
하룬의 설명에 일행들의 얼굴이 확 질렸다. 가는 길만 험한 줄 알았는데 몬스터들이 그득했던 것이다. 그런 길을 어떻게 갈지 눈앞이 캄캄했다.
하룬은 사람들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 사람들은 돌아가세요. 난 내가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했을 뿐, 다른 사람들의 능력까지 고려한 것은 아니니 분명 도태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될 겁니다. 혹시 이중에 이방인이 있으면 당장 부활 장소를 요른 성으로 바꾸는 게 좋을 겁니다. 죽은 장소 근처에서 부활한다면 혼자 힘으로는 절대로 통과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하룬으로서는 일종의 마지막 시험이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도 따라나선다면 그만한 의지가 있는 것이니 충분히 동행할 자격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추측하기 힘든 하룬의 입장에서 판단했다는 말은 그 길이 최악의 난이도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면 난 상관없소.”
일행 중에서는 외톨이나 다름없는 타니엘라가 주름살 가득한 노안과는 어울리지 않는 강인한 눈빛으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온 거 아닌가요?”
아반의 호위 무사인 묘였다. 평소에는 거의 말이 없던 그녀지만 한번 입을 열자 사람들의 감정을 훅 끌어 올렸다.
“하긴, 용사만이 미녀를 얻는다는 말도 있으니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아레스도 결코 묘에 지지 않았다.
“우리야 당연히 대장을 따라갑니다.”
매그럼과 초른은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단호한 태도로 의지를 불태웠다.
“우리 역시 위험하다고 포기할 수 없지요.”
딜런의 말에 두 젊은 남녀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다들 의지가 대단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하룬은 일행의 태도에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 힘든 길을 떠나는 마당에이렇게 의견이 일치되는 것은 좋은 징조로 보였다.
하룬은 선물을 꺼내기로 했다. 일행의 안전을 어느 정도 담보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의뢰 내용이 단순한 길 안내에 그친다면 굳이 필요 없지만, 안전하게 호위를 하자면 티노와 자신 단둘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었다.
눈짓으로 티노에게 마법 배낭을 부탁한 하룬은 그가 가져온 배낭에서 럼프 오크 방어구를 꺼냈다.
타우스트 성의 가죽 장인 타림과 그 아들들이 한 마법사의 힘까지 동원해서 만든 필생의 역작이었다. 대원들에게 배신을 당한 탓에 고스란히 배낭에 잠자고 있던 귀물이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게 뭐요, 대장?”
타니엘라가 풍성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물었다. 다들 대장이라고 부르니 한참이나 연배 차이도 나고 그 경지가 높음에도 하룬을 그렇게 부르는 타니엘라였다.
“모두들 나름대로 방어력이 뛰어난 방어구나 수단을 가지고 있을 줄은 알지만 안전할수록 좋은 법이니 무력이 약한 분들만 착용하십시오. 우리 돌풍 용병대 전용 방어구입니다. 가볍고 착용감이 높아 지금 착용하고 있는 것 안에 입으면 될 겁니다.”
티노가 돌아다니며 하룬이 말한 사람들에게 방어구를 나누어 주었다.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방어구의 정보를 확인하던 아레스, 초른, 아반, 샤니, 타니엘라, 사예 그리고 헤니의 입에서 연속적으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럼프 오크 방어구(세트)
등급: 유니크
구성: 모자형 투구, 상하의 분리형 하드 레더, 부츠, 장갑
뛰어난 가죽 장인들의 공동 작업으로 탄생한 명품으로 럼프 오크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다. 와이번처럼 일곱 겹의 층으로 이루어진 럼프 오크의 가죽은 방어력이 뛰어나서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베이거나 타격을 입지 않는다. 거기에 생체 마나석의 일종인 럼프와 미스릴을 이용한 마법 처리를 하여 마법 방어력까지 높였다.
세트 효과: 힘 +5, 체력 +5, 민첩 +5
옵션: 3서클 마법 공격까지 방어할 수 있다.』
“허억! 이건 유니크 급 방어구잖아!”
“세상에! 3서클 마법까지 막아 낼 수 있다니. 이런 물건이 대원용이란 말이야?”
“물리 방어력이 무려 200이야. 플레이트 메일에 비해 별로 손색이 없잖아.”
그들은 방어구와 하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 손으로도 세트 전체를 가볍게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무게는 물론, 손에 착 감기는 그 촉감은 마치 부드러운 면 소재의 옷처럼 느껴졌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돌려주는 조건으로 주는 겁니다. 우리도 수량이 많지 않아 드리거나 팔 수 없는 물건입니다.”
“당연한 일이오. 이런 물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소. 악마 오크로 알려진 럼프 오크의 가죽에 미스릴과 마법 처리까지 하다니. 고맙소. 잘 입겠소.”
마법사인 타니엘라는 연방 감탄을 하며 더없이 기쁜 얼굴이었다. 비록 그가 입은 로브도 평범한 물건은 아니지만, 체력을 깎아먹지 않을 정도로 가벼우면서 방어력을 엄청나게 올려주는 방어구의 존재는 여벌의 목숨 하나를 더 가지게 된 것과 다름없었다.
“젠장! 대장이 난생처음 검을 잡은 것을 후회하게 만드는군.”
딜런이 부러운 눈길로 방어구를 받은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사예가 받은 방어구의 정보를 확인하곤 무척 놀랐던 것이다. 이 정도라면 그가 입은 두 겹의 금속 방어구보다 더 좋으면 좋았지 떨어지지 않는 품질을 가지고 있었다.
묵묵히 싸늘한 눈으로 하룬과 티노를 쏘아보던 도네이스도 이때만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 역시 타니엘라가 입은 방어구의 정보를 확인했다.
‘일반 대원들이 이런 높은 품질의 방어구를 입는단 말인가? 단순하게 소문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무서운 존재들이군.’
사람들은 새삼 하룬과 돌풍 용병대에 대해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 정도 옵션을 가진 방어구라면 최소 1,000골드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런 물건을 이렇게 쉽게 내줄 수 있는 배포를 가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휴우, 도대체 얼마나 자금력이 좋기에 이런 물건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는 거야? 일개 대원들이 이런 명품을 입을 정도라니. 차라리 용병단에 가입할 걸 그랬나? 게다가 이거 한 번도 입지 않은 신품이네. 아무튼 대단해. 내 선택이 맞았어. 하룬 대장만 따라가면 내 목숨은 물론이고 떼돈을 벌 수 있을 거야.’
아레스는 처음 대하는 유니크 아이템에 입이 귀에까지 걸려 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너무 애처럼 감정을 다 드러내는 그 모습을 보며 초른은 한심하다는 듯 비웃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모습도 그리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 바로 갈아입으세요. 자동 맞춤 마법까지 걸려 있으니 사이즈는 상관없습니다. 속옷 위에 입으면 됩니다.”
“고맙소, 대장!”
타니엘라를 선두로 방어구를 받은 사람들은 분분히 감사 인사를 하고는 천막으로, 혹은 나무 뒤로 움직였다. 헤니는 샤니와 함께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검사들은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차마 자신들도 달라고 할 입장은 아니었다.
“티노도 가서 갈아입어요.”
“아닙니다. 전 필요 없습니다.”
배신을 한 이래 하룬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티노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결국 자신을 뒤따라왔으면서도 한순간 자신을 배신했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 기가 죽어 지내는 것이다. 그만큼 인성이 순수한 티노였다.
“우리는 저기 바위 뒤로 갑시다. 사실 비밀인데 우리 둘밖에 없는 용병대이긴 하지만 명색이 대장과 부대장인 우리 두 사람이 입을 방어구는 저 사람들에게 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명품 중의 명품입니다.”
타림 부자는 알아서 방어구 두 벌을 따로 제작했다고 했다. 당연히 일반 대원들이 입을 것과는 그 기능이나 옵션이 다를 것이다.
“허억! 이런 물건을 어찌…….”
“쉿! 비밀입니다.”
하룬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티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하룬의 강권에 못 이기는 척하며 럼프 오크 방어구를 착용하고 낡은 방어구를 그 위에 입은 티노는 몇 번 움직여 보더니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른다.
쉭! 쉭!
주군인 데브론으로부터 메신저 스킬을 쉽게 풀이한 메신저 무빙 스킬을 전수받아 원래부터 날렵하던 그의 몸이 마치 새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사람 키의 두 배는 넘을 것 같은 바위를 한 번의 도약으로 오르기도 하고 거기서 뛰어내려 가볍게 착지하는 티노를 보니 하룬이 다 기분이 좋았다.
티노의 입이 귀까지 찢어져 있었다.
타우스트 성에서 이 방어구를 받기는 했지만 대원들과 같이 입을 생각에 아직 한 번도 착용하지 않았던 하룬도 타림 부자가특별히 만들어 준 속옷과 함께 방어구를 착용했다. 입자마자 몸에 착 달라붙는 착용감도 그렇지만 특별히 더 껴입은 것 같지 않은 가벼움이 일단 마음에 꼭 들었다.
그 위에 기존에 입고 있던 아이언 스네이크 방어구를 착용하자 몸에 생생한 활력이 넘쳐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 오랜만에 상태 창이나 확인해 볼까.’
하룬은 상태 창을 열었다.
『이름: 하룬
종족: 인간
직업: 검사
레벨: 76
칭호: 와이번 슬레이어(외 8개)
생명력: 3,120
마나: 3,490
정령력: 1,140
힘: 95(+30) 체력: 100(+10)
지식: 40 지혜: 78(+5)
행운: 44 민첩: 92(+20)
지구력: 40 심안: 25
집중: 38 의지: 6
S.P.: 880 명성: 3,140
통솔력: 320 카리스마: 18(+10)
물리 방어력: 400
마법 방어력: 450
남은 보너스 스텟: 38』
상태 창을 확인한 하룬의 눈이 커졌다.
아이템 착용으로 인한 스텟치 상승도 그랬지만 생명력과 마나량이 놀라울 정도로 급격하게 상승했다. 그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나야 마나 플로를 돌리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늘었고, 정령력도 귀속 정령을 얻은 효과라고 이해하면 되지만 다른 항목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간 잡은 몬스터라고는 새끼 아이언 스네이크 두 마리와 와이번 한 마리 그리고 블랙 오크들이 전부였다. 그 정도만으로 레벨이 뛴 것도 신기했지만 행운을 제외한 전 스텟 항목이 고루 큰 폭으로 상승한 것은 신기한 것을 넘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태 창을 살펴볼 시간은 없었다. 이유는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남은 스텟을 행운에 10 그리고 가장 부족한 지식에 전부 배정했다.
상태 창을 닫은 하룬은 제자리에서 한번 뛰어 보았다.
슈육!
그의 몸은 단숨에 바위보다 더 높이 솟구쳤다. 그런 하룬의 모습을 본 티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하룬은 몸을 한 번 회전시켜 가볍게 착지했다. 손을 흔들면 마치 새처럼 날 수 있을 것처럼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역시 괜찮군요.”
“후욱! 괜찮은 정도가 아닙니다. 이건…….”
티노는 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코끝이 찡해진 티노의 눈이 금세 벌겋게 변했다.
비록 말단부터 시작해서 각고의 노력 끝에 2급 용병까지 올라온 그였지만 이런 귀한 아이템은 처음 입어 보는 것이다. 방어구 한 벌을 더 입은 것만으로도 자신의 능력이 두 배는 더 올라간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면 럼프 오크를 혼자 상대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잡다한 스킬은 많이 익혔지만 정작 검술이 약한 그로서는 무엇보다도 힘과 체력이 올라간 것이 기뻤다.
두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모닥불가로 갔지만 아무도 그들 주변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새로 입은 방어구의 효과를 몸소 체험하는 데 정신이 팔린 것이다. 심지어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여서 노구의 타니엘라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껑충거리며 주변을 달리고 있을 정도였다.
흥분을 겨우 가라앉힌 티노가 일행을 위해 찻물을 끓이고 다 따라 놓았을 때에야 겨우 사람들이 모두 돌아왔다.
“대장! 이거 굉장한 놈이군요.”
“굉장한 정도가 아니라 최곱니다. 이런 귀한 물건을 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허허허! 내 한 10년은 젊어진 것 같소, 대장. 대장 덕분에 회춘을 한 듯하오.”
사람들은 방어구를 받았을 때보다 훨씬 더 흥분해서 하룬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그 방어구들은 나중에 돌려줄 물건이니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일단 자리에 앉아서 차를 드세요.”
하룬의 말에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들 중 돌풍 용병대 전용 방어구를 입은 이들의 표정이 묘했다. 이런 물건을 돌려주려니 벌써부터 안타까운 것 같았다.
“일단 한 일행이 되었으니 정식으로 인사를 나눕시다. 물론 나야 대충 여러분의 정보를 알지만 그래도 험한 길을 힘을 합쳐 뚫고 가려면 서로의 장단점 정도는 알아야 하니 다른 분들을 위해 자세한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타니엘라 님이 가장 연장자시니 먼저 시작하시지요.”
하룬은 타니엘라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가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지만 마법사답지 않게 재미있는 말도 잘하는 좋은 성격을 고려한 것이다.
“험! 이 나이에 자신을 소개하려니 조금 쑥스럽군. 난 타니엘라, 라잇트루 마탑 소속으로 겨우 6서클에 턱걸이한 능력 없는 마법사요. 특기는 마법진과 공격 마법 중 윈드 계열이오. 단점은 나이 때문에 발생하는 체력 문제인데 그것은 방금 대장의 호의로 대충 해결이 됐소.”
6서클 마법사라니 대단하다.
유저들 중에는 이 비욘드에 접속한 지 채 6개월도 안 되어 4서클을 마스터한 마법사들도 간혹 있지만 5서클은 다르다. 4서클까지는 그 노력에 따라 비교적 쉽게 올라갈 수 있지만 깨달음이 필요한 5서클로 올라가는 것은 그야말로 바늘귀에 밧줄을 꿰는 것에 비유된다.
더구나 60이 넘는 나이를 고려할 때 단순한 6서클 마법사로 보면 오산이다. 마법사의 경지는 보통 그 서클에 따라서 결정이 되지만 노련한 마법사들은 1, 2서클 정도는 우습게 극복할 수 있다.
마법의 운용능력 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가장 적절한 마나량의 주입과 주문을 외우는 속도 그리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본능적으로 깨달은 그 응용력은 단순한 서클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 특히 마법사인 아레스와 초른은 선망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저는 아니겠지? 그런데 어째 느낌이…….’
경지로 보아서는 절대 유저일 리가 없는데 이 세계의 마법사들과 달리 말이나 행동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자유로운 사고와 폭 넓은 지식이 느껴진다. 하지만 하룬이 지근거리에서 지켜보았던 NPC 마법사는 없었으니 그건 그냥 의심으로 접어 두어야 했다.
타니엘라의 옆에 앉은 관계로 도네이스가 자기를 소개했다.
“다카린 용병단 부단주 도네이스예요. 오랫동안 궁술을 익혀 왔고 저격에 이은 돌파와 난전이 특기며 단점은 피만 보면 흥분하는 겁니다. 차후에 대장이 잘 이끌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도네이스는 자신을 소개하며 하룬에게 각별한 부탁까지 곁들였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호승심과 함께 투기가 솟아 나오고 있었다. 아직 검술이나 전투 장면을 보지는 못했지만 상당한 실력자임에 틀림없었다.
“상인인 아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옆은 딸인 샤니라고 합니다. 우리 부녀는 이 세계에 온 것이 얼마 되지 않고 상인이라 장사 말고 다른 특기 같은 것은 없습니다. 대신 여기 있는 묘는 익스퍼트 급 검사입니다.”
아반이 간략하게 자신과 샤니를 소개하자 묘가 나섰다.
“묘라고 합니다. 이분들의 호위를 맡고 있습니다. 특기는…… 휴우, 특별한 것이 없군요.”
그녀의 소개에 남자들이 일제히 눈을 빛냈다. 8등신의 굴곡 있는 몸매와 뛰어난 미모 그리고 약간은 허스키한 목소리와 익스퍼트 급이라는 아반의 소개에 강렬한 호기심을 느낀 것이다.
이번에는 딜런과 동행한 두 젊은 남녀 중 여자였다. 이상하게도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기이한 얼굴을 가진 그녀는 소개를 할 때는 20대로 보였다.
“사예라고 해요. 정체는 불분명이라고 해 두지요. 특기는 잠입, 수색, 탈출, 암살이에요. 이번에 하룬 대장에게 받은 방어구로 그 능력이 대폭 올라갔답니다. 저 역시 지구력이 달리는 것이 단점이었는데 이번에 해결이 되었어요. 근데 이 물건, 어떻게 구입하면 안 될까요?”
소개와 함께 귀엽게 웃으며 부탁을 하는 사예였다. 그동안 딜런에게 모든 것을 맡겨 두고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막상 입을 열기 시작하니 붙임성도 좋은 편이었다.
“원래 그 물건을 입을 사람은 우리 용병대원밖에 없습니다.”
그 말에 들어있는 하룬의 의사를 짐작했는지 사예는 혀를 쑥 내밀고는 뒤로 빠졌다. 그녀의 곁에 앉은 젊고 잘생긴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밝혔다.
“발트랑입니다. 검사이며 나 역시 자세한 정체는 밝힐 수 없습니다. 특기는 마상전과 개인 기사전입니다. 단점은…… 뭐, 일단은 생각나는 것이 없군요.”
발트랑은 묵직한 저음으로 자신을 간단하게 소개했다.
“호호호! 그럼 다 잘한다는 거네요. 대단해요.”
그가 합류한 이래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주의를 기울이던 샤니가 너무 짧은 발트랑의 소개가 서운한지 작은 시비를 걸었다. 하지만 발트랑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켰고, 대신 곁에 있는 딜런이 나섰다.
“하하하! 그렇게 이죽거리지 마시지, 귀여운 아가씨.”
“흥! 누구세요?”
“난 딜런이라고 하오. 나이는 좀 먹었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소.”
그는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말 속에는 강한 패기와 자신감 그리고 여유까지도 느껴졌다.
역시 심상치 않은 인물이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딜런이지만 가끔 드러나는 깊고 강렬한 눈빛과 무의식중에 보여 주는 강한 기세는 그의 실력과 신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아레스라고 합니다. 4서클 전투 마법사로 이방인이며 정보를 다루고 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아, 어쌔신 스킬을 몇 개 익힌 적이 있습니다.”
“매그럼입니다. 이방인 출신 검사며 모든 면에서 부족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매그럼은 날고뛰는 사람들을 대하며 기가 조금 눌린 모습이었다. 나름 GM으로 상당한 메리트를 가지고 게임을 시작했지만 하룬을 만나고 나서는 부쩍 수련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저 역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이방인 출신으로 4서클 마법사인 초른입니다.”
초른은 겸손하게 자신을 소개했지만 얼굴은 여유가 있었다. 성격이 밝고 적극적인 그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일단 이들의 목적지는 고요의 땅이지만 그들의 최종 목적지가 고대 던전이라는 것은 다들 짐작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동료가 될지 아니면 적이 될지 가늠하는 사람들의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다음은 헤니였다.
“돌풍 용병대원 헤니라고 해요. 중급 치료사로 여러분의 혹시 모를 부상을 성심성의껏 돌봐 드릴게요.”
헤니가 합류한 이래 그녀에게 각별한 관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아레스가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와! 최상의 파티로군.”
“그러게. 이 정도 전력이면 C급 던전이라도 문제없겠어.”
아레스와 매그럼이 죽이 맞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말대로 드러난 실력만으로도 대단한 파티가 되었다. 4서클 마법사 두 명에 6서클 마법사 한 명씩이 포함된 이 전력이면 C급 던전은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근데요, 대장과 저분의 소개만 빠졌거든요.”
사예의 말에 해산을 말하려던 하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굳이 자신들까지 소개할 생각은 없던 하룬이지만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소래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저분은 우리 용병대의 부대장 티노입니다. 길을 찾아내고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은 어디가도 빠지지 않는 분이지요. 다른 특기는 빠른 발과 독침술 그리고 응급 치료술입니다.”
하룬의 설명에 나중에 합류한 몇몇 사람들은 새로운 눈으로 티노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오는 동안 그가 부지런히 척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보긴 했지만 설마 용병대의 부대장일 줄은 몰랐다.
돌풍 용병대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그가 가진 능력도 대단할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이 일해에게 부족한 치료에 관한 스킬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룬이 입을 열었다.
“난 용병대를 맡고 있는 하룬입니다. 특기는 암기술과 정령술입니다. 검술은 보통 수준입니다.”
“정령사였어요?”
하룬이 되도록 짧게 자신을 소개했는데도 대번에 여러 사람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미 타니엘라와 초른 같은 마법사들은 정령의 향기와 그 흔적을 살아 있는 듯 움직이던 암기를 통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정령의 존재를 본 적이 없는 나머지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그들의 경지로는 정령의 향기를 맡기에 무리였다.
정령사는 그만큼 희귀한 존재였다. 마법사와는 또 다른 다양한 힘을 가진 정령을 부리는 정령사는 희귀한 만큼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 알려지길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기사는 천 명에 한 명꼴이고, 마법사는 일만 명에 한 명꼴, 정령사는 십만이나 백만 명 중 한 명꼴로 태어난다고 했다. 노력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다고들 하지만 마법사와 정령사는 천부적인 자질이 없으면 결코 될 수 없는 직업이다.
특히 정령사는 자질을 가진 자를 찾기도 힘들지만, 체계적인 정령술의 부재로 인해 인간 중에서는 중급 정령사의 존재는 테론 제국의 1,000년 역사 속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희귀했다.
“정령술을 부리는 검사라. 언제 날 잡아서 진하게 이야기나 한번 합시다, 대장.”
당장 마법사 타니엘라가 면담을 청해 왔다. 단순한 정령사가 아니라 검술까지 쓰는 정령 검사를 나이가 지긋한 그도 아직 만나본 적이 없었다.
“굳이 이런 자리에서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목적지까지는 내 말을 잘 따라주어야 합니다. 혹시 그럴 의사가 없는 분은 없겠지만, 전장에서는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대장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이번 여정 동안에도 그래 주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내일 새벽에 출발해야 하니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마법사들은 차례를 정해 숙영지와 100보, 50보 떨어진 곳에 알람 마법을 설치해 주기 바랍니다. 티노는 나와 함께 함정을 설치합시다.”
하룬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