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드워프의 의뢰 완수 (87/278)

《드워프의 의뢰 완수》

 이른 아침 드워프들이 모여들었다. 그래 봐야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는 드워프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어린 드워프들과 여자 드워프들도 근육이 잘 발달한 덩치를 가지고 있어서 없는 것보다는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도끼를 들고 어른 둘이 안아야 할 정도로 거대한 나무를 대하니 앞이 막막하다. 옆을 보니 딜런도 곤혹스러운 모양이다.

 “딜런 경, 도끼질은 해 보셨습니까?”

 “아니네, 대장. 다만 검을 쓰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있네.”

 “저도 도끼질은 처음인데…….”

 그래도 무기의 한 종류라 쓰는 방법이야 비슷할 거 같았으니 일단 해 볼 수밖에. 난감한 상황에 일족을 이끌고 온 원로가 나섰다.

 “도끼질하는 것은 내가 좀 아네.”

 노구임에도 도낏자루를 잡은 원로의 팔에는 단단한 근육이 불끈 솟아 있었다.

 “도끼질은 어깨를 중점으로 한 일종의 원심력을 이용하는 것이네. 먼저 나무의 앞뒤에 목표로 하는 선을 정해야 하네. 그래서 그 선에 맞추어 나무를 찍되 도끼질하는 방법은 도끼날이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향하게 찍고, 어느 정도 틈이 벌어지면 이번에는 아래에서 위쪽을 향해 비스듬히 찍는 것을 반복하면 되네. 그렇게 나무의 앞뒤를 적당하게 찍은 다음 넘어뜨릴 방향과 반대 방향에 나무토막을 끼우고 마무리를 하면 되네. 물론 이론은 그렇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을 걸세.”

 그 원로는 짧은 설명에 이어 직접 시범을 보였다. 계곡 근처라 수분을 많이 머금은 나무는 생각보다 질기고 강해 한참 도끼질을 했지만 큰 변화가 없었다.

 “자, 우리도 해 보지요.”

 워낙 큰 나무라서 두 그루만 베어 내면 몇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티노와 딜런이 먼저 도끼질을 시작했다.

 쿵! 쿵!

 둔탁한 도끼질 소리와 함께 거대한 나무에 도끼날이 박히고 조금씩 나무의 속살이 드러났다. 도와주겠다고 따라 나온 드워프들은 인간들이 서투르게 도끼질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한 10분 정도 도끼를 휘둘렀을까, 티노의 얼굴에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가 도끼질한 나무는 3분의 1 정도만 속살을 드러냈을 뿐이다.

 “비켜 봐. 남자가 이렇게 허약해 가지고 어따 쓰겠어.”

 도네이스가 티노에게 수건을 내밀더니 도끼를 뺏었다.

 “도끼질은 집중이라고. 목표한 곳에 정확히 도끼날을 찍어야만 빨리 나무를 넘어뜨릴 수 있단 말이야.”

 언제 나무를 해 본 적이라도 있는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도네이스는 손바닥에 침을 한번 뱉어 비비더니 도낏자루를 힘차게 잡았다.

 퍼억! 퍼억!

 소리가 달랐다. 역시 힘은 타고난 도네이스였다. 티노가 10분 동안 공략했던 나무는 불과 몇 분 만에 절반 이상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엔 티노처럼 헤매던 딜런 역시 요령을 알았는지 이제 절반 정도 속을 드러낸 나무에 강력한 일격을 날리고 있었다.

 “잠깐!”

 좀 떨어져 용병들의 도끼질을 구경하던 드워프 원로가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 소리를 질렀다.

 “그대로 끝까지 도끼질을 하면 안 되네. 뒤쪽도 해야지. 안 그럼 도끼가 나무 틈에 끼거나 예고 없이 아무 방향으로나 쓰러진단 말일세.”

 겉보기에는 젊지만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딜런이기에 이종족의 이런 추궁에 기분이 나빴을 법도 한데 그는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듣고만 있었다.

 드워프 원로는 직접 도끼를 들고 반대편으로 가서 도끼질을 시작했다. 이미 딜런이 절반 가까이 찍어 놓은 터라 10분 동안 도끼질을 하자 나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도끼로 찍은 부위는 딜런의 것보다 더 높았다.

 “조심해!”

 경고와 함께 도끼 등으로 몇 번 후려치자 나무는 굉음과 함께 딜런이 찍은 방향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두께가 두 아름이나 되는 나무이다 보니 그 높이가 거의 30미터 가까이 되었다.

 “휴우. 아무래도 마나를 사용해야겠네, 대장.”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한 그루를 자르는 데 벌써 30분 가까이 걸린 것이다.

 드워프들이 모두 달려들어 드워프 원로의 지휘를 받아 잔가지를 정리하고 모두 힘을 합쳐 나무를 치우는 사이 굵은 땀을 흘리는 도네이스 대신 이번에는 하룬이 도끼를 잡았다.

 파악! 파악!

 앞서 한 사람들처럼 순수한 근력으로 나무를 찍어 보았다. 질긴 나무 속살은 수줍은 듯 그 속내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도끼날에 마나를 불어 넣어 보았다. 처음에는 검과 달라 쉽지 않았다. 도끼날에만 마나가 들어가야 하는데 두꺼운 도끼 전체에 마나가 퍼지거나 한 군데로 몰리는 등 한참 동안 시행착오를 한 끝에야 겨우 목적했던 날 부위에만 마나를 주입할 수 있었다.

 이미 마나 운용에 능숙한 딜런의 도끼날은 주황색 오러에 감싸여 있고, 한 번의 풀스윙에 속살이 뭉텅이로 파였다. 역시 괜히 익스퍼트 최상급이 아니었다. 불과 몇 분 만에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고 있었다.

 하룬도 뒤질세라 도끼질을 시작했다. 마나 운용이 서툴러 도끼날에 마나를 안정적으로 주입하는 데 심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순수한 근력으로 하는 도끼질에 비해 몇 배는 더 효과적이라 금방 나무를 잘라낼 수 있었다.

 시작은 그렇게 힘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무가 쓰러지는 속도는 빨라졌다. 익스퍼트에 막 발을 얹은 티노와 도네이스의 도끼질은 갈수록 매서워졌고, 하룬과 딜런은 이제 완전히 요령을 깨달았는지 가볍게 휘두르는데도 나무들이 연방 비명을 질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티노와 도네이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나가 완전히 바닥난 것이다. 무리하게 마나를 사용한 후유증으로 완전히 지쳐 버렸다. 헤니가 두 사람을 위해 자신이 제조한 포션을 주었지만 마나 포션이 아니기에 쉬는 것이 약이었다.

 계속 나무를 베기 전에 하룬이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 허리에 오는 나무의 아랫부분을 뿌리와 함께 처리하는 일이었다.

 “라이피, 소환.”

 -이제야 내가 할 일이 생겼군.

 “저 나무뿌리까지 다 헤쳐 줄 수 있겠어?”

 -가능해. 이젠 예전의 라이피가 아니라고.

 라이피는 자부심이 가득한 미소와 함께 허리 높이만 남은 나무 두 그루를 지반과 함께 뒤집어 버렸다.

 -지속적으로 해야 하니 한 번에 다 하지 않고 두 그루씩 할게.

 원소력을 흡수해서 능력이 올라간 후 변한 것은 능력뿐이 아니었다. 자의적인 판단 능력까지 올라간 모양이다. 그녀는 한 번에 두 그루씩, 얼마 지나지 않아 잘린 나무들을 지반과 함께 뿌리째 뒤집어 버렸다.

 그 모습에 대원들은 물론 드워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령의 형상은 볼 수 없지만 분명히 정령 마법이 펼쳐진 것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구간의 땅을 나무뿌리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곳까지 뒤집어엎는 모습은 무시무시했다.

 “티노, 다른 대원들하고 드워프들의 도움을 받아 이 나무뿌리를 작은 도끼로 잘라 옮기세요.”

 “네, 대장.”

 드워프들은 무시무시한 정령 마법을 본 후 두려운 얼굴로 티노를 비롯한 대원들의 지시를 고분고분하게 받으며 헤쳐진 땅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를 자르고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떨어져 나간 후에도 하룬과 딜런은 도끼질을 계속했다. 물론 하룬은 중간 중간 마나 포션을 먹고 짧게나마 마나 플로를 운용해야 했다. 딜런 역시 하룬에 비해 세 번에 한 번꼴로 마나 포션을 마시거나 특정한 동작으로 검술을 펼쳐 마나 플로를 돌렸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두 시간 정도 더 도끼질을 하자 길이 뚝 끊겼다. 옆쪽은 깎아지른 절벽, 이제 길을 바꾸어야 했다. 개울 건너편에 나무가 자라고 있으니 다리를 만들어야 했다.

 다리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무 자체가 워낙 크고 지름이 1미터가 넘기에 두 그루만 제대로 넘어뜨리고 그 위에 드워프들이 다듬은 나무를 박으면 그게 바로 다리가 되었다. 그렇게 계곡 양편에 지그재그로 나무다리를 만들어 가며 길을 내었다.

 절벽에 잔도를 만드는 작업도 모두의 힘을 합쳐 해결할 수 있었다. 다만 절벽에 받침목을 박는 것은 하룬과 딜런이 맡아서 해야 했다.

 먼저 하룬이 가볍고 날렵한 몸놀림으로 절벽을 옆으로 움직이며 이동할 수 있는 작을 발받침을 만들었다. 물론 때때로 위신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러면 딜런이 적당한 곳에 마나가 깃든 검으로 깊은 구멍을 파고 하룬이 끝을 뾰족하게 깎은 긴 버팀목을 깊숙이 집어넣는다. 그다음 알맞은 크기의 돌들과 다양한 크기의 나무토막으로 주변의 홈에 끼워 박으면 단단한 버팀목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 위에 드워프들이 톱질해서 세로로 길게 자른 두꺼운 판자를 걸치고 버팀목과 연결된 부위에 못을 단단히 박으면 잔도가 완성된다.

 그나마 그런 구간은 채 100미터가 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룬도 다른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리 마나를 사용한다지만 그의 손은 갈라지고 터져 있었고, 쉴 새 없이 마나 플로를 돌리며 라이피에게 원소력을 흡수하게 만들어야 했다.

 작업은 보름이 꼬박 걸려서야 끝났다.

 계류의 발원인 작은 폭포까지 연결된 새 길은 비록 허접스러웠지만 일정한 레벨 이상인 사람들은 별 어려움 없이 지날 수 있을 만큼 튼튼했다. 이제는 자잘한 나무들만 베어 내면 끝이다.

 “고생하셨습니다, 딜런 경.”

 “아니네, 대장. 대장이 정말 수고 많았지. 내 정령 마법의 위력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네. 그리고 섬세한 마나 운용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니 얻은 것이 많았네.”

 그건 딜런의 말이 맞았다. 분명 검술을 수련한 것도 아닌데 하룬의 마나 운용 능력은 일취월장해서 이제 원하는 양만큼만 마나를 움직일 수 있는 정도까지 발전한 것이다.

 라이피 때문에 수시로 마나 플로를 운용한 결과 마나량과 정령력 역시 큰 폭으로 늘어났고, 라이피를 소환해 정령 마법을 펼치는 능력도 몇 단계는 올라간 느낌이다.

 자질구레한 것들이 남았지만 가장 많은, 중추적인 역할을 해낸 딜런과 하룬은 작은 폭포로 뛰어들어 기분 좋은 수욕을 즐겼다. 그런 모습을 보는 드워프들의 눈에는 감탄과 경외심이 가득했다.

 “수고했네. 급한 마음에 의뢰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에 훌륭한 길을 만들어 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네.”

 “붉은 모루 부족이 성심으로 도와준 덕분입니다.”

 공사가 완료된 날, 저녁 식사에 돌풍 용병대를 초대한 타루가와 원로들은 뜻밖의 성과에 무척 고무된 얼굴이었다. 잔치라도 벌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임시 거주지로 쓸 동굴을 파느라 그건 나중으로 미뤘다.

 드워프들은 여태 접해 본 용병들이나 상인들 중에 이렇게 강자를 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흥분한 상태였다. 특히 마나를 주입해서 도끼질하는 것과 절벽에 잔도를 만드는 놀라운 일을 목격한 전사들의 경우는 가감 없는 호감을 드러내며 연방 술잔을 권해 딜런과 티노는 얼큰하게 취해 버렸다.

 “내 한눈에 실력이 짱짱하다는 건 눈치챘지만 정령사라는 것만은 상상하지 못했네. 보아하니 엘프들의 정령 마법과 흡사하던데 그들과 인연이 있는가? 우리의 말을 알아듣는 것도 그렇게 정말 자넨 신기한 인물일세.”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정령 마법은 인연이 있어 배우게 되었지만 엘프들과는 상관없습니다. 다만 엘프들의 정령 마법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그들과 정령 마법에 대해 토론하고 싶긴 합니다.”

 “껄껄껄. 내 나중에 자리를 잡으면 꼭 그들과 인사를 시켜주지. 성정이 폭급해서 그렇지 이곳 주인인 다크 엘프들도 꽤 괜찮은 종족들이라네.”

 타루가는 한참 동안 하룬을 붙잡고 늘어지더니 딜런과 티노가 결국 인사불성이 되어 헤니와 도네이스의 부축을 받고 돌아간 후에야 보수를 내밀었다.

 “원래는 방어구를 주려고 했네. 그런데 살펴보니 자네 대원들이 입은 방어구가 우리 것보다 품질은 떨어지지만 꽤 좋은 것이기에 고민을 좀 했지. 그래서 자네들을 유심히 살핀 끝에 이 물건들을 골랐네.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네.”

 타루가가 내놓은 아이템들은 모두 달랐다.

 “이것은 저 딜런이라는 대원이 쓰면 좋을 마법 검이네. 화염 마법이 인챈트된 검으로, 하루 세 번 파이어 소드를 날릴 수 있네.”

 정보를 확인해 보니 유니크 등급이다. 아마 딜런이 기뻐할 것이다. 은근히 검에 욕심을 내던 그였다.

 “이건 오래전 엘프들의 부탁으로 만들었던 활들일세. 세 개가 한 세트인데 사거리별로 나뉘어있네. 크기가 가장 큰 것은 복합궁인데 미스릴과 몇 가지 마법을 인챈트해서 사거리가 무려 1,000미터가 넘는 명품이지.”

 세 개의 활과 서른 개의 화살통은 도네이스에게 주면 될 것이다. 그것 역시 유니크 등급이니 그녀의 입이 찢어질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방어구 안에 겹쳐 입을 수 있는 일종의 속옷이네. 방어력과 민첩성을 증가시켜 주는 것은 물론 실드 마법을 인챈트한 아이템이네. 그 명석한 치료사에게 주면 좋을 걸세.”

 정보를 확인하니 방어력 +100에 민첩 스킬 +15, 집중 +5의 옵션도 끝내주지만 하루에 실드 마법을 세 번이나 발동할 수 있어 무력이 약한 헤니에게는 최상의 아이템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여행에 지치고 병이 난 드워프들을 성심껏 치료해준 선물일 것이다.

 “그리고 이건 자네를 위한 걸세. 정령석이지.”

 정령석이란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게 구하려고 했던 물건이었는데 이걸 보수로 받을 줄은 몰랐다. 주먹 크기의 정령석은 광채도 흐릿하고 그 모양도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정보를 확인한 하룬은 뛸 듯이 기뻤다.

 원석이긴 하지만 최상급이었던 것이다. 정령석을 받아 드는 순간 마치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짜릿한 감응感應이 있었다. 그 발원지는 명치의 원소석들이었다. 라이피와 나이아가 활성화시킨 상태의 원소석들이 정령석과 교감하는 것 같았다.

 “우리야 어떻게 이 정령석을 쓰는지 모르지만 엘프들이 무척 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아 자네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네.”

 하룬은 감격한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비록 보름 동안 체력과 마나 그리고 정령력을 수십 번 이상 바닥까지 비웠다가 채우는 과정을 반복하며 의뢰를 수행했지만 이런 귀한 물건을 보상으로 받을 줄은 몰랐다.

 지금의 그에게는 돈보다도 더 귀한 물건이었다. 이것은 싸가지를 위한 것이다. 녀석이 정확히 어떤 것을 하는지 모르지만 이 물건은 그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인간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우리 거주지를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일 걸세. 한 보름 정도면 거주지가 완성될 테니 그때 다시 우리를 찾아주게. 정식으로 초대하겠네.”

 “알겠습니다. 길을 내며 마치 한 가족처럼 지냈는데 모른 척할 순 없지요.”

 물론 자신이나 딜런의 경우는 아니었다. 둘은 길을 내는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드워프들과 교류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헤니와 티노 그리고 도네이스는 부수적인 일들을 드워프들과 함께 수행했기에 아주 친하게 지냈다. 특히 헤니의 경우 허브 치료법의 뛰어난 효과 때문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드워프들에게 인기 폭발이었다.

 돌아가 이 물건들은 받고 좋아할 대원들의 얼굴을 생각하니 입을 다물 수가 없는 하룬이었다. 들떠서 그런지 아니면 술을 먹어서 그런지 숙영지로 돌아가는 하룬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회색 로브를 입은 노인이 자리에 착석하자 원탁 중앙의 수정구 불빛이 약해졌다. 상석에 앉은 황금색 튜닉을 입은 비대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모두 오래간만이군.”

 그가 입을 열어 형식적인 인사를 했지만 누구도 대답하지는 않았다. 아홉 명이나 앉아 있음에도 실내는 음침하고 괴괴한 적막에 잠겨 있었다.

 “텐 원로, 웬 비상 회의요? 본부도 아니고 이 먼 테베에서 말이오.”

 매부리코를 가진 노인의 얼굴이 흐릿한 수정구 빛에 잠시 보였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철판을 긁는 것처럼 듣기가 불편했다.

 “세븐은 오래 황도를 떠나 있어 잘 모를 수도 있겠군.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번에 던전의 자세한 위치가 노출되었소.”

 “벌써 말이오? 우리 조직에는 아직 그런 정보가 올라오지 않았는데…….”

 세븐이라는 숫자로 불리는 매부리코 노인의 목소리가 순간 뾰족해졌다.

 “포가 가진 비선 조직을 통해 정보가 들어왔기에 회의를 소집한 거요. 이번에도 이방인들 쪽에서 정보가 노출되었소.”

 “그럴 리가?”

 “사실이오. 은밀하게 확인한 결과 지난번 던전의 존재를 찾아낸 이방인들이 이번에도 던전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낸 것으로 드러났소.”

 “그 기자인가 뭔가 하는 어수룩한 이방인들이 말이오?”

 텐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알아냈다는 거요? 난 제국, 아니 대륙에 우리 길드와 비견될 정보 조직이 있다는 건 믿지 못하겠소.”

 “그건 나도 그렇소. 하지만 그 이방인들이 정확한 던전의 위치와 그곳까지 가는 빠르고 안전한 루트를 공개한 것은 사실이오.”

 “또 그 돌풍인가 하는 놈들과 연관된 거요?”

 세븐의 날카로운 코가 벌름거렸다. 마치 사냥할 대상이라도 찾는 듯.

 “이번에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소. 물론 고요의 땅으로 향하는 루트는 돌풍에 동행을 의뢰한 이방인들이 공개한 것이지만.”

 텐의 말에 좌중은 조용해졌다. 격렬한 반응을 보였던 세븐도 눈빛이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명색이 정보의 최고봉이라는 제국 정보 길드에서 그 정보의 원천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답답했다.

 텐은 좌중의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는다고 생각한 듯 화제를 돌렸다.

 “파이브, 현재 황자들의 움직임은 어떻소?”

 질분을 받은 파이브는 마법사 복장을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안개처럼 일렁여서 자세한 모습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네. 사대 강자인 1황자와 1황녀, 3황자 그리고 11황자의 전위 세력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고요의 땅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보름 정도면 모두 던전이 위치한 트레저 분지에 들어설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황자 진영도 대부분 아이리드 산맥을 지나 이곳 테베를 지났거나 이곳으로 오는 중이니 앞으로 한 달 안에 거의 전 세력이 트레저 분지에 모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호오! 대단한 파티가 열리겠군. 게다가 이번에는 이방인들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어.”

 “그렇습니다. 소드 유저 상급 이상, 3서클 마법사 이상으로 대충 삼십만에 가까운 인간들이 트레저 분지에 모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파이브의 말에 좌중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 정도로 던전이 태풍의 핵이 될 줄은 애초에 정보를 판 자신들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 정도면 제국의 패권이 거기서 결정되겠군. 그 돌풍 놈들 때문에 막대한 이익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아깝지만 형세를 잘 조종하면 이후 천 년은 우리 길드의 세상이 될 것이오. 좋소. 그쪽은 다들 자신의 라인을 통해 확인하는 것으로 하고 넘어갑시다. 자, 그럼 스리 차례요.”

 텐의 질문을 받은 인물은 탁자 위에 가늘고 긴 손가락만 보였다. 드러난 손가락만 보면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최고 귀족 회의에서는 대규모 기사단 파견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역시 손가락에서 드러나는 대로 중년으로 추측되는 목소리였다.

 “그렇겠지. 황실 도서관 사서들과 현자들 사이에 은밀하게 퍼지는 소문을 듣고 무심하게 그냥 바라볼 수만은 없겠지. 규모는 얼마로 예상하시오?”

 “다섯 개의 기사단과 두 개의 마법 병단이 파견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압도적인 무력행사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멍청한! 그까짓 전력으로 압도적인 무력행사라? 던전으로 모여드는 세력들과 그 실력을 생각하면 그곳에서 아예 이번 골든 배틀이 확정될지도 모르는데 겨우 그 숫자란 말인가? 아골라스 공작이 그렇게 머리가 나빴던가 아니면 딴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최고 귀족 회의 의장을 그렇게 매도하는 텐이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 정도의 말을 할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제국의 어둠을 지배하는 제국 정보 길드의 아홉 원로 중 최고 원로였기 때문이다.

 “식스, 그쪽은 어떻소?”

 식스는 텐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지만 그는 탁자와 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탓에 모습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원로원은 이 기회에 던전을 차지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던전을 발견한 매스 기사단의 후발대로 열 개의 기사단과 네 개의 마법 병단을 그곳으로 출발시켰습니다.”

 “역시 티론 공작은 동작이 빨라.”

 텐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대답하는 것 이외에는 여전히 침묵을 유지했다.

 “에이트, 군부는 어떻소?”

 “황도의 중앙군과 남부군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다만 동부군의 가이로스 후작가와 북부군의 요른 백작가의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에이트는 군부 쪽 인물인 듯했지만 그 목소리는 침착하고 맑았다.

 “수상하다?”

 “가이로스 후작은 11황자의 장인입니다. 제국 동북부의 아런 평야를 포함한 아이크 지방은 비록 직할령이긴 하지만 이미 300년 이상 그의 가문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습니다. 그쪽 지부에서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번 가을에 수확한 곡물을 은밀하게 비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전까지 그가 벌인 수상쩍은 행동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내란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11황자라면 황자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영명한 재목이니 혹시 골든 배틀에서 탈락하면 독립할지도 모르겠군. 가이로스 후작의 유일한 후계자이고, 영명함까지 갖추었으니 욕심이 날 수밖에. 다른 골든 배틀이었다면 당연히 황좌에 앉을 자격이 있는 황자들이 무려 넷이나 되는 상황이니.”

 “문제는 그들의 움직임이 우리의 눈과 귀를 벗어나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제하는 것도,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미 우리 조직이 알려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번 골든 배틀에서 우리 길드가 조절할 수 없는 변수들이 너무 많아집니다.”

 문제는 그것이었다. 제국 정보 길드는 언제나 골든 배틀에 상당한 수준까지 관여해왔다. 미리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판을 짜서 적절히 관여하는 방식으로 골든 배틀을 관리해왔던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상 그들이 민 후보가 떨어진 경우는 몇 번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발휘해 온 것이다.

 “1황녀의 배경인 탈라스 공작가의 움직임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지.”

 이번에는 텐이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을 꺼내는 자가 나왔다. 힘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나른한 목소리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을 품고 있었다.

 “투께서 그렇게 봤다면 확실하겠군요. 이미 몇 년 전부터 예견된 일이지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텐의 공손한 말로 보아 그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투였다.

 “탈라스 공작의 영향권에 있는 두 개 상단이 이번에 각종 군수품과 식량을 대거 사들이고 있소. 덕분에 동남부에서는 철괴와 곡물 가격이 꽤 올랐지.”

 “흠. 역시 그쪽도 여차하면 독립할 생각이 있는 거로군요. 하긴 제국 체제가 너무 오래되긴 했지요. 포, 어떻게 생각하오?”

 포라는 인물은 여자였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의자를 앞으로 끌어 탁자 위에 두 팔을 올리고 깍지를 끼었다. 이 중에서 유일하게 길드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보 분석국에서 최근까지의 골든 배틀 현황을 조사한 자료를 보면 예전 골든 배틀과 판이한 어떤 움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판이한 움직임이라면?”

 “강력한 후보군들 중 우리의 통제나 이목에서 벗어난 세력들이 벌써 세 곳이나 나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더구나 일부 황자들은 암중에 연수한 느낌이 듭니다.”

 “흐음. 변수야 항상 있었지. 그것은 더 상황이 진행되면 정보 때문이라도 우리에게 손을 벌릴 테니 그때 다시 의논하기로 하고, 황자들의 연수가 더 신경 쓰이는군. 그래서 예전이라면 벌써 난리가 났을 하급 귀족 영지들의 영지전이 잠잠한 것이오?”

 “분석국에서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예전에는 각 황자들이 골든 배틀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우리나 원로원 그리고 최고 귀족 회의와 손을 잡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이번에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골든 배틀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보유한 황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우리를 비롯한 세 세력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도 없는 것이 그들이 거금을들여 던전에 대한 정보를 사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보를 산 것은 이방인들입니다. 물론 그들이 정보를 사고 던전을 찾은 근본적인 목적은 골든 배틀에서 공적을 쌓기 위한 것이지만 분석국은 그들의 움직임에 유사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좋소. 일단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대응책을 마련하도록 하시오. 골든 배틀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합시다. 파이브, 이번 정보 누출 건에 대해 말해 보시오.”

 파이브는 일렁이는 일루전 마법으로 전신을 감싼 인물이었다. 목소리 역시 마법으로 특징을 감춘 탓에 무미건조하게 들렸다.

 “일단 그 정보의 발원지가 이번에는 돌풍 용병대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알려진 바도 그렇지만 돌풍 용병대원과 조우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테베 백작령 지부장 타우론에 따르면 돌풍은모르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흠, 그럼 우리가 모르는 다른 정보 조직이 존재한다는 건데 그게 가능한 건가?”

 매부리코 노인의 말에 파이브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골든 배틀 기간은 늘 그렇듯 소소한 정보를 쥔 개인 정보 상인들이 암약하는 상황이니까요. 심지어 이방인들 중에도 이런 조직들이나 개인들은 많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우리의 눈길 밖에 그런 자들이 존재한다는 거요. 뭐, 그들이야 이제까지 해 온 대로 척살 조의 활동을 강화시키는 수밖에.”

 텐의 말에 파이브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돌풍의 인원 구성과 전력은 어느 정도인지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소, 포?”

 텐의 물음을 받은 포가 자신 앞에 높인 서류에 손을 잠시 갖다 대었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알려진 것은 대장과 부대장이 고작입니다. 그마저도 신빙성이 무척 떨어지고요. 아무래도 그들은 이방인들이 조직한 소형 용병대인 돌풍의 이름을 빌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이목을 피하기 힘들 테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들과 돌풍 용병대의 실체가 겹치는 건 사실입니다. 두 번의 암살 시도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테베 백작령 지부가 붕괴된 걸 보면 분명 연관이 있습니다.”

 머릿속에 돌풍 용병대장이 이방인이며 4급 용병이라는 정보가 떠오른 순간 그는 그 사실을 지워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현재 어디에 있소?”

 “아직 트레저 분지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시간상으로 보면 충분히 도착했을 텐데 중간에 어디로 샌 모양입니다.”

 “음, 골치 아픈 존재로군. 어디로 튈지를 전혀 모르겠으니.”

 “그래서 예상했던 두 개 루트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라츠 용병단과 크리센트 어쌔신단에 트레저 분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잘했소. 이렇게 되면 그곳에 어느 정도 사람들이 집결했을 때 손을 보는 수밖에 없군. 때가 되면 기어 나올 테지. 그때 제대로 처리하도록 하시오. 좋소! 그럼 돌풍 용병대에 대한 사항은 계속 포가 맡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는 고요의 땅에 있는 던전과 골든 배틀 세력에 힘을 집중해 주시오. 던전에 있는 마법서는 반드시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그쪽 일은 포와 함께 내가 그곳으로 가서 직접 맡겠소. 나머지 사항은 투께서 맡아 주십시오.”

 제국 정보 길드를 실질적으로 끌고 나가는 텐이 직접 던전 쪽으로 움직인다는 말에 잠시 실내 분위기가 흔들렸다.

 “텐이 그렇게까지 하겠다면 본부는 내가 맡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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