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엘프와의 협상 (94/278)

《엘프와의 협상》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엘프들이랑 한판 붙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러게. 그런데 아무도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서로 눈치만 보고 있어.”

 대부분의 유저들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긴장만 높아지고 있을 뿐 전위 세력들이 꼼짝을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하룬을 위시한 협상단이 드워프 마을을 경유해서 엘프들과 접촉하려고 한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죽든지 살든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 말이.”

 큰 세력들이 이끌고 있는 기사들의 경우는 신중한 반면 호전적인 유저들은 모이기만 하면 던전을 바라보며 투기를 올렸다. 그러나 그들 역시 웬만한 세력이 아니고서는 엘프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답답할 뿐이다.

 그러는 와중에 기이한 일들이 일어났다.

 한밤중에 사람들이 실종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두 명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수십 명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1황자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황사께서 보고해 주시오.”

 회의를 소집한 1황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얼굴이었다.

 “어젯밤 자정을 전후해서 루바인 자작을 비롯한 열두 명의 기사들이 숙영하고 있던 막사 전체가 사라졌습니다.”

 “익스퍼트 급 기사 열둘이 밤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떻게 말이오?”

 1황자의 날 선 물음에 힐튼은 식은땀을 흘렸다. 대답할 마땅한 이유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게…… 거짓말처럼 막사 전체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허어! 어떻게 이런 일이!”

 라인트 공작 역시 힐튼 자작과 함께 기사들이 사라진 곳에 다녀왔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회의에 참석한 기사단장들과 귀족들 역시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1황자의 의문에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회의장에 참석한 이들의 면면을 살피던 1황자의 시선이 결국 힐튼에게 멈추었다. 란트렐이 돌풍 용병대를 따라간 힐튼 자작은 황사에 갈음하는 존재였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만 벌어진 것은 아닙니다. 은밀하게 조사를 해 봤더니 다른 진영들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실종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힐튼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1황자에게 보고했다.

 “사흘 전에는 7황자 측 웨이브 기사단의 마법사들 열 명이 사라지는 바람에 그날 낮에 그들과 시비가 붙었던 11황자 측과 무력 충돌 일보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충돌 일보 직전이 아니라 어느 정도 충돌해 양측에서 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 바로 직전에 두 황자가 직접 회동해서 충돌을 막았던 것이다.

 “흠, 실종 사건이 전 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건데…….”

 “네. 원인을 알 수 없는 실종은 기사나 마법사는 물론이고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테론 정보 길드의 조사에 따르면 약 15일 전부터 일어난 실종 사건의 희생자가 이미 삼백 명이 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흔적이 없었다?”

 1황자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보고하는 힐튼 역시 같은 표정이었다.

 “네. 우리의 루바인 자작과 수행 기사들의 경우도 다른 실종 사건들처럼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막사 전체와 그 안에 있던 인원들이 증발한 것입니다.”

 “혹시 다른 세력에서 은밀하게 납치한 건 아닐까?”

 1황자의 말에 몇몇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이렇게 모여 있으면서 아무런 충돌이 없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다. 이곳에 모인 세력들은 황제 위를 놓고 피 터지게 싸우는 상대들이 아닌가. 아무리 엘프들이 억지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오래된 경쟁 때문에 원한 관계에 있는 자들은 많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도 있습니다만 그걸 미리 생각해서 구획별로 포진하고 경비를 삼엄하게 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최근 격화되고 있는 다른 세력들의 충돌 원인도 그렇게 생각해서 일어난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

 힐튼의 말대로 최근 트레저 분지에는 심각한 몇 번의 충돌이 있었다. 물론 다른 세력들에 어부지리를 주지 않기 위해 수뇌부들이 나서 덮긴 했지만 이런 실종 건으로 또 다른 형태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긴 했다.

 “그럼 자작의 말은 또 다른 세력의 짓이 아니라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이곳에 모인 세력들끼리는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 세력의 약화를 노린 어쌔신들의 짓은 아닐까?”

 1황자는 자꾸 타 세력의 짓이라고 의심했다.

 ‘긴장 상태가 너무 오래되고 있어. 이러다가는 엘프들에 앞서 우리 인간들끼리 전쟁을 벌이게 될 거야.’

 자신이 모시는 1황자만 해도 이곳에 도착해 제법 많은 시일이 흘렀는데도 아무런 소득이 없자 마음이 급해졌다. 힐튼은 1황자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을 감지하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추측을 내놓았다.

 “실종된 루바인 자작의 실력은 익스퍼트 중급이었습니다. 어쌔신에게 피살당했다면 모르지만 그 정도의 실력자가 열한 명의 수하들과 함께 납치당했는데 아무런 소음도 나지 않았고, 흔적도 없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힐튼 자작의 말이 맞습니다.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모두 죽인다면 모르지만…….”

 라인트 공작도 황사의 말에 동의했다. 확실히 이번 실종건은 이상한 점들이 많았던 것이다. 지난번 황자들의 회동에서 엘프들을 상대할 수 있는 안은 끌어내지 못했지만 일단 잠정적인 협력 관계와 서로에 대한 공세는 중지하기로 의견일치를 보지 않았던가.

 “다만…….”

 힐튼은 사람들을 한번 쓸어보며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닫았다.

 “뭐요?”

 힐튼이 망설이는 것을 본 1황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치밀한 성격의 힐튼이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을 리가 없다. 뭔가 알아낸 것이 있다는 확신에 1황자가 닦달했다.

 “막사가 있던 자리의 바닥이 좀 이상했습니다.”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그는 이런 과도한 관심은 사절하고 싶었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막사를 정리한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막사를 지지하는 지지대가 꽂혔던 네 귀퉁이의 구덩이가 흔적으로 남았을 텐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덮은 것처럼 말입니다.”

 “흐음. 그건 정말 이상하군. 기사들이 내 명령도 없이 움직였다는 것도 믿기지 않지만 막사까지 깨끗하게 정리했다고는 더더욱 믿을 수가 없소.”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닥이 다른 곳과 비교해 높이나 밀도가 달랐습니다. 바닥 전체가 한번 뒤집어진 듯 색깔도 다르고 부드러웠습니다.”

 “뒤집어진 것 같다고요?”

 “네, 전하!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바닥만 보면 그랬습니다. 숙영지는 숙영을 준비하는 와중에 많이 다져진 상태지만 막사가 사라진 바닥은 다져지지 않은 부드러운 상태였고, 마치 겉과 속이 바뀐 듯 색깔이 달랐습니다. 바닥의 높이도 달랐고요.”

 힐튼의 말에 다들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감이 오질 않았던 것이다.

 “마치 대지가 꺼졌다가 다시 채워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어진 힐튼의 설명에 다시 한 번 땅을 쳐다본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뭐요? 그럼 그 말은 엘프들이 관여했단 말이오?”

 놀란 라인트 공작의 말에 힐튼이 자신 없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이 일부러 정령 마법으로 야습을 했다고 생각하기엔 개연성이 거의 없는 상태지만 흔적은 틀림없이 정령 마법으로 보였던 것이다.

 “흠. 이건 확실히 이상하군. 이제까지 선공은 절대 없었던 엘프들이 야음을 틈타 우리 인간들의 전력을 조금씩 줄인다? 그건 말이 안 되는데.”

 1황자만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숙영지 전체에 알람 마법을 비롯해 경계 마법을 광범위하게 펼친 상태입니다. 엘프들이 왔다면 경계를 맡은 우리 마법사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라인트 공작 역시 황자의 말에 동조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정황으로 보면 대지 속성의 정령 마법이 펼쳐진 것 같은데 그 흔적에서는 마법의 향기가 나질 않습니다.”

 힐튼 역시 그 말에 동의했기에 혼란스러웠다. 실종 사건은 더욱더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할 수 없소. 일단 경계를 두 배로 강화하시오. 이거 빨리 돌풍 용병대가 엘프들과 협상하고 돌아와야 할 텐데…….”

 1황자의 눈은 막사 너머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면 엘프들을 상대하기에 앞서 자중지란에 빠질 공산이 컸다. 마치 자신들이 화약고에 모인 화약들처럼 느껴졌다. 화기가 높아져 누군가 작은 불꽃 하나만 피워내면 단숨에 터질 그런 화약들 말이다.

 타루가의 안내를 받아서 향한 곳은 던전을 기준으로 동북 방향의 한 숲이었다. 던전의 동쪽에서 좀 떨어진 곳일 것이다.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숲의 외곽은 결계가 펼쳐진 듯 흐릿한 막으로 감싸여 있었다. 일행이 가까이 가자 그 속에서 엘프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살이 매겨진 활을 들고 허리에는 갈렵한 검을 찬 엘프 전사들의 기세는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다행히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전에 앞장선 타루가와 드워프 원로들이 엘프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적의 어린 시선을 숨기지 않는 엘프 전사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손짓을 하고서야 일행은 드워프들의 뒤를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몇 겹의 결계가 쳐진 숲은 엘프 마법사들의 손짓에 따라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길을 드러냈고, 드워프들과 인간들은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몇십 보 간격으로 나무 위와 바위 등 엄폐물에 매복한 엘프 전사들을 지나쳐 두 시간여를 걸은 후에야 겨우 목적한 곳에 도착했다.

 적의가 가득한 엘프 전사들의 숲을 통과해서 가는 길은 딜런과 같은 실력자에게도 오금이 저리는 일이었다.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익스퍼트 급 전사들 수천 명이 보내는 기세는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던 것이다.

 ‘대단하군!’

 바늘로 온몸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엘프들의 적의는 대단했다. 하룬과 동행한 협상단은 눈빛만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일부러 이런 자리를 기획했을지도.’

 인간들의 투기를 꺾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것인지는 몰라도 꽤 먼 거리를 지나느 동안 양편에서는 엘프 전사들이 살벌한 살기를 보냈고,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게 기세가 죽어갔다.

 “다 왔네.”

 타루가의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들의 앞에는 마치 현실의 닭장처럼 고층 아파트를 연상하게 만드는 거대한 나무 몇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울창한 가지의 넓은 나뭇잎 때문에 짙게 그늘진 그 나무 밑에는 거대한 구멍이 있고, 그 속에서 꽤 많은 숫자의 엘프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앞으로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엘프가 나와서 타루가를 맞이했다.

 “로드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직접 나서 이렇게 반겨 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불칸의 후예를 다시 만나 반갑소. 환영하오!”

 먼저 타루가가 앞으로 나서 인사하자 중간에서 통역을 맡은 한 엘프가 말을 전했다. 그러자 엘프들 중 로드라고 불린, 귀밑머리가 황금색인 엘프가 인사를 받았는데 깊게 파인 주름살과 심유한 눈빛 그리고 장중한 기도로 보아 나이가 굉장히 많은 것 같았다.

 헤니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불칸은 드워프들의 신화에 나오는 대장장이 신으로, 드워프들의 조상이라고 한다.

 “로드의 양해로 우리 일족이 이곳에 새로이 터를 잡았으니 이 은혜는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어차피 우리도 당신들이 만드는 물건들이 필요하니 그대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오. 다만 초대받지 않은 자들과 어찌 동행을 했는지는 궁금하군.”

 로드는 드워프들에게는 반가운 얼굴이면서도 인간들을 향해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하룬은 그런 시선에 주눅 들기보다는 다른 것에 놀라고 흥분했다.

 ‘역시 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구나!’

 희한한 일이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자신만 이런 능력을 가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능력 때문에 돌풍과 자신의 가치가 상승한 것만은 뿌듯했다.

 “이들 중 우리 부족의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인간들과 엘프들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해서 정착에 따른 인사도 할 겸 찾아왔습니다.”

 “친구라고요?”

 엘프 로드는 드워프 부족장의 말에 많이 놀라는 눈치였다. 그의 주변에 있던 엘프들 역시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비록 자급자족 형태의 폐쇄적인 생활을 하는 자신들과 달리 인간들과 제한적인 거래를 하는 드워프들이지만 인간을 친구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이종족에게 인간은 근본적으로 적이니까 말이다.

 “하룬이라고 합니다. 용병이지요.”

 엘프 로드의 눈이 타루가의 시선을 따라, 그 옆으로 나서는 하룬에게 향했다.

 “용병 하룬이 로드께 인사드립니다.”

 하룬은 팔뚝을 앞으로 내밀며 허리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런 하룬을 보는 엘프 로드와 뒤에 서 있던 다른 엘프들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났다. 그들은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데도 하룬이 하는 말의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드의 곁에서 통역하던 엘프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감정 표현이 별로 없다는 엘프치고는 굉장한 반응이었다.

 그들이 놀라는 것을 타루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 역시 경험했던 바였다.

 “이 친구는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더군요.”

 타루가의 설명이 있었지만 엘프들의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다. 로드를 비롯한 모든 엘프들은 놀란 눈으로 하룬을 몇 차례나 살펴보았다.

 하프 엘프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프 엘프의 명맥이 끊어진 지도 오래지만 하프 엘프의 경우 순종 엘프들과는 언어가 어느 정도 달랐기에 그것도 가능성이 없었다. 엘프들의 눈에 점점 더 강한 호기심과 의혹이 차올랐다.

 하지만 로드와 몇 명의 엘프 원로들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확실히 기이한 일이지만 이해를 못할 바도 없지. 그럼 그대가 초월자란 말인가?”

 로드가 직접 물었지만 하룬은 초월자가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했다.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 어떻게 저에게 이런 능력이 생긴 것인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초월자란 각성을 통해 각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를 말하는 걸세.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사물의 본성과 그 질서를 알게 되는 자를 말하지.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뇌의 파동으로 혹은 의지로 다른 종족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네. 그런 자들의 운명은 언젠가는 일족의 로드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네.”

 이제는 호감마저 느껴지는 부드러운 로드의 설명이지만 하룬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초월자가 아니었다. 각성을 한 적도 없고, 배우지 않고서는 사물의 본성과 그 질서를 알지도 못한다. 엘프 로드가 그를 오해하고 있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런 하룬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로드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자신도 모르게 각성 과정을 겪었거나 특이한 의식을 치른 모양이군.”

 역시 뜻 모를 이야기였다.

 하지만 로드의 말에 일프들의 궁금증은 해갈이 된 듯 놀란 표정들은 사라졌다. 하룬으로서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행인 것은 이제 하룬을 보는 시선이 노골적인 적의에서 작으나마 호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호오, 기이한 일이군. 그대에게 정령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지는데 그대는 정령사인가?”

 로드가 뭔가에 놀란 듯 흥미로운 눈빛으로 하룬을 보았다. 그 곁에 있 엘프들 역시 놀란 눈으로 하룬을 다시 보았다.

 “그렇습니다. 운이 닿아 정령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하룬의 말에 로드와 엘프들은 깜짝 놀랐다. 초월자에 이어 정령사인 인간을 보는 그들의 시선은 경악 그 자체였다. 특히 친구라는 말에는 어지간히 놀랐는지 로드조차 잠시 말을 잊을 정도였다.

 잠시 후 로드가 기묘한 눈빛과 표정으로 물었다.

 “소환 관계가 아니라 친구 관계란 말인가?”

 “운명의 실로 묶인 계약이긴 하지만 정령들은 제 친구들입니다.”

 “허어! 이런 인간이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군. 더구나 운명의 실로 묶였다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하룬은 알지 못했다. 로드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묻는다고 제대로 설명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튼 자네는 우리가 인정할 만한 인간이군. 타루가 부족장이 친구로 인정할 자격이 충분하네. 그런데 아까 정령들이라고 했나?”

 “네. 정령 친구들이 몇 명 있습니다.”

 “흠. 그래서 진한 정령의 향기들이 섞여 있었군.”

 로드는 연방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룬에게 우호적인 미소를 던졌다.

 “드워프의 친구이며 초월자에 정령과 우정을 나누는 인간이라면 우리와 대화할 수 있는 자격이 있지. 일단 용건이나 들어보지. 마농, 자리를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로드.”

 로드의 곁에 있던 키가 유달리 큰 엘프가 대답했다.

 조화의 종족이라는 엘프답지 않게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과 날카롭게 솟은 코, 얇은 입술을 가진 마농은 굉장한 근육질 몸매를 가진 엘프였다. 검붉은 피부에 긴 귀의 끝에 검은 반점이 선명한 그의 전신에서는 숨이 막힐 것 같은 파괴적인 투기가 넘실거렸다.

 마농은 서늘한 눈빛으로 인간들을 한번 쓸어 보고는 손을 들었다. 주변에 있던 엘프들 중 일부가 나무 사이에 긴 나무 탁자와 의자를 준비하고, 음료까지 준비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앉게.”

 로드의 말에 따라 하룬이 자리를 잡자 같이 온 일행이 의자에 앉았다. 일행은 로드를 비롯한 엘프들의 말은 알아들응ㄹ 수 없었지만 하룬의 말과 엘프들의 반응을 통해 어떤 말이 오가는지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잘못하면 만나지도 못하고 쫓겨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룬 덕분에 이렇게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것을 다들 짐작할 수 있었다. 엘프들이 하룬을 보는 시선은 자신들과 달리 무척 친근했다.

 이렇게 되면 협상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정말 용병이 맞는 거야? 분명히 우리 인간들의 말이었는데 어떻게 엘프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거지?’

 마법사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엘프들의 언어를 아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쓰는 언어로 말하면서 상대의 언어를 알아듣는다는 것이 신기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그래, 우리를 찾아온 용건이 뭔가?”

 나무의 수액인 듯 맑고 향긋한 차를 한 모금 마신 하룬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로드의 질문에 역시 핵심을 이야기했다. 인간들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엘프들과 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곳에 모인 인간들은 던전에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던전? 아! 그곳을 인간들은 던전이라고 여기나 보군.”

 뜻밖의 말에 하룬의 눈이 커졌다. 던전이 아니라니 그럼 뭐란 말인가?

 “그곳은 던전이 아니네. 인간들의 언어로 던전이라 함은 뛰어난 마법사들의 연구실이었거나 혹은 보물을 숨겨 둔 장소라고 하던데, 맞나?”

 로드의 상식은 정확했다.

 “네. 의미 차이는 좀 있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그렇다면 잘못 찾아왔네. 그곳은 ‘라’ 제국 때부터 존재하던 일종의 시험 장소이네. 일명 ‘황제의 계단’이라고 부르지.”

 “‘황제의 계단’요?”

 “그래. 그곳은 입장한 인물이 황제가 될 자질이 있는지 시험하는 장소라네.”

 로드의 설명을 들은 하룬의 눈매가 좁아졌다. 자신의 생각한 것과 일정 부분은 맞고 일정 부분은 달랐다. 그런데 어떻게 엘프들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하룬의 요청에 로드는 어려울 것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라 제국은 이 대륙 전체를 무려 4천 년 동안 통치하던 대제국이었네. 고서에 전해 오기를, 라 제국은 모든 종족이 힘을 합해 이룩했고, 합의와 조율을 통해 이 땅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고 하네.”

 ‘4천 년? 한 제국이 그 정도나 존속할 수 있단 말이야? 그것도 한 종족도 아니고 모든 종족이?’

 하룬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놀란 표정과는 상관없이 로드의 설명은 이어졌다.

 “각 종족은 당시 공동의 적을 맞이하고 있었네. 당시 중간계는 마계와의 차원 통로가 닫힌 상태가 아니어서 강력한 힘을 가진 마족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고, 그때마다 모든 종족은 드래곤을 중심으로 힘을 합쳐 그들을 물리쳐야만 했지. 각 종족은 각기 자치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었고, 이곳 고요의 땅에 존재하던 공동 구역에서는 모든 종족이 어울려 살았다고 하네. 초기에는 드래곤들이 그 중심에 있었지만 한때 가장 많이 벌어졌던 차원의 통로를 통해 마왕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드래곤들은 거의 멸망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그들의 희생 덕분에 차원의 통로가 좁아지면서 마왕들의 재침입은 사라졌지. 하지만 마왕이 아닌 마족들의 침입에도 세상에는 혼란과 학살이 일어났고, 모든 종족은 힘을 합쳐 그들을 물리쳐야만 했네. 그렇게 만들어진 제국이 바로 라 제국이지.”

 인간들의 역사에서 사라진 라 제국의 역사가 엘프들에게는 남아 있었다. 그들의 오랜 수명 덕분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인간들에게는 인간들의 제국으로만 알려졌던 라 제국의 실체는 충격적이었다.

 ‘이건 거의 신화네.’

 하룬은 비욘드라는 가상현실을 만든 인공지능 컴퓨터들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관이 정말 방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크들도 그중 하나였습니까?”

 미개한 오크 종족들이 다른 종족과 어울려 제국을 이루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룬의 질문에 로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지. 그들은 마족들과의 혼혈로 지능이 약해진 대신 흉포함과 욕망에 사로잡힌 현재의 혼혈 오크가 아니라 순혈 오크라네. 털이 없는 매끈한 피부에 몸에 태생적으로 마나를 쌓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종족과 견줄 수 있는 높은 지적 능력을 가졌다네.”

 로드의 말을 듣다 보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혹시 럼프 오크?”

 럼프 오크의 던전에 들어갔을 때 잘 구획된 생활공간과 질 좋은 무기와 방어구를 본 기억이 났다. 당시에는 인간들에게 빼앗은 것으로 생각했지만 듣다보니 그들이 직접 그런 물건들을 만들었을 확률이 높았다. 후크란 산맥을 나오지 않는 이상 그런 물건들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럼프 오크? 아! 혹이 있는 오크를 인간들은 그렇게 부르는군. 혹이 있다면 맞네. 그들은 주로 머리 부위에 마나가 뭉쳐진 혹을 달고 있다고 하네. 교류가 끊어진 지 너무 오래 되어 나 역시 그들을 본 적은 없네. 다만 그들의 후예들 역시 극히 소수만  살아남아 우리처럼 깊은 산속에 사는 것으로 알고 있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인간들이 악마 오크라고 부르는 럼프 오크가 실은 드워프나 엘프들처럼 고도의 지능을 가진 이종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반 오크들은 마족과의 결합에서 탄생한 혼혈 몬스터이고 말이다.

 “그럼 이곳이 모든 이종족들이 힘을 합쳐 세운 라 제국이 건립한 건물은 맞는 겁니까?”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에 말이 옆으로 샜기에 하룬은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왔다.

 “당연하지. 모든 종족의 지식과 기술 그리고 당시 번성했던 마법 과학이 총동원되어 건설된 거물이라네. 그렇기에 라 제국의 멸망을 가져온 대형 지진과 해일 그리고 대형 화산들의 연쇄 폭발에도 견딜 만큼 견고했고, 지금까지도 그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상태라네.”

 로드의 설명에 또 궁금한 것이 생겼다. 나중에 헤니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럼 그 번성했던 라 제국이 멸망한 것은 자연재해 때문이었던 겁니까?”

 “그렇다네. 고서에는 그렇게 전해지네. 다만 자연재해라고 부르기에는 그 강도가 너무 커서 가히 재앙이라고 부를 정도였다네.”

 그러고 보니 트레저 분지를 본 순간 떠올렸떤 어떤 가정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트레저 분지라고 부르는 이곳은 분화구란 말씀인가요?”

 하룬의 물음에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당시 라 제국을 이룬 모든 종족의 대표들이 거주하던 이 광대한 지역은 지진과 연이은 화산 폭발로 인해 솟아올랐고, 모든 건물들과 생명체들이 갈라진 땅속으로 묻혀 버렸네. 이 지역뿐 아니라 지저로 연결되어 있던 열두 개의 대형 화산이 연쇄적으로 폭발했고, 대륙 전체의 지반이 마치 파도처럼 격렬하게 요동쳤지. 당시 라 제국의 거의 모든 도시가 파괴된 것은 물론 총인구의 70%가 죽었지.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이었어. 공중으로 올라간 화산재가 하늘을 가려 그 후유증으로 400년 이상 이 땅은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암흑시대를 겪어야만 했지. 기온은 떨어져 매서운 추위가 찾아왔고, 햇빛을 보지 못한 과실은 썩어버렸네. 대재앙에서 살아남은 생명들은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하나둘씩 죽어갔지. 그렇게 영화를 누리던 라 제국의 최후였지.”

 하룬은 로드의 시원스러운 대답에도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던전이……?”

 “그것은 ‘황제의 계단’이 원래 지상에 있던 것이 아니라 공중에 뜰 수 있는 부양 건물이었기 때문이라네.”

 “네에?”

 부양 건물이라니? 그럼 저 거대한 건물이 하늘 높이 뜰 수 있단 말인가?

 눈을 부릅뜬 하룬의 표정이 재미있게 보였는지 로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황제의 계단은 현재 우리의 수준으로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최고의 마법과 학문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건물이네. 이 건물은 시험받고자 들어온 존재들을 상하게 하지 않고, 그 지닌바 능력에 따라 다섯 단계로 표식을 주어 일종의 워프 마법으로 밖으로 내보낸다네.”

 정말 신묘한 건물이 아닐 수 없었다. 로드의 말이 맞다면 그야말로 골든 배틀에 안성맞춤인 건물이다. 그렇게 되면 피를 흘릴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황제의 계단의 기능 때문에 대재난 당시 재앙을 피해 건물 안에 들어갔던 우리 부족은 하늘로 올라가 그 화를 피할 수 있었네. 당시 황제의 계단으로 피신했던 1,320명이 바로 우리 일족의 선조라네.”

 내용을 믿을 순 없지만 로드의 말은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엘프들 중에도 여러 종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 다크 일족은 라 제국에서 수호자와 감독관이라는 직종에 주로 종사해 왔네. 조화와 평등을 추구하되 강인한 체력과 특수한 능력은 물론 원칙을 중요시하는 단호한 성격이 제국의 각종 행사에 있어 관리 감독이나 사법 부분에 잘 맞았던 거지.”

 그래서였던가? 이들은 보통 알고 있는 엘프들과는 다른 강인한 기질과 놀라운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다른 게임에서 다크 엘프들이 마족과 결함한 혼혈 엘프로 알려진 것과는 많이 달랐다.

 “특히 우리의 선조이신 라후라께서 라 제국의 황제가 반드시 겪어야 하는 이 황제의 계단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으신 이후 우리 부족은 대대로 황제가 될 자를 기다리며 이곳에서 살아왔네.”

 놀랍긴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이미 라 제국은 멸망한 지 무려 3천 년이 넘었다. 그런데 아직도 라 제국을 잊지 못하고 수행할 수 없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니.

 하룬의 눈을 통해 그런 마음을 읽은 것일까? 로드가 눈매를 좁히고 웃는 듯했다.

 “모든 이종족이 힘을 합쳐 이룩했고 번영을 구가하던 라 제국에는 예언이자 전설이 하나 내려오네. 그것은 대현자의 칭호를 받은 마흐라다할이 한 예언으로, 제국의 종말과 새로운 부활에 관한 이야기지. 제국이 천재지변으로 멸망한 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한 종족을 초월한 존재가 나타나 다시 황제가 되어 만년 제국을 열 거라는 전설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만년을 지속할 제국이라니. 그것도 종족을 초월한 존재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인간은 채 100년을 살지 못하는 존재라서 내 말이 믿기질 않을 거야. 하지만 대현자를 비롯한 현자들의 예언은 빗나간 적이 없었네. 우리는 전설이 실현될 거라고 믿고 있네.”

 로드가 예언에 가지고 있는 확신 앞에서 하룬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들의 용건을 생각해 냈다.

 “그럼 그 황제의 계단에 도전하려면 특별한 자격이 있어야 하는 겁니까?”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만약 인간들이 그곳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면 협상이고 뭐고 다 부질없는 것이다.

 “자격은 없네. 다만 우리가 판단하기에 적당하다고 인정하는 자와 그 일행이라야 하겠지.”

 하룬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기준이 너무 애매했다.

 “인간들은 황제의 계단을 던전으로 생각하긴 하지만 다행히 자격이 되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호오! 자격이 된다? 엘프들을 강간해서 죽이는 자들 따위가 어찌 자격을 가졌단 말인가?”

 그 이야기가 나오자 당장 로드를 비롯한 엘프들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하룬은 엘프들이 인간들을 적대하는 이유 중 하나를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그놈의 메스 기사단!’

 NPC와의 성관계가 원칙적으로 금지된 이방인들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으니 메스 기사단의 짓일 것이다. 하룬 역시 그 소리는 들은 바가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들 중에도 쓰레기들은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어찌 그런 곳에 들어갈 자격이 있겠습니다. 그들은 곧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대상들은 현재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황제의 자식들입니다. 또한 최고 귀족들이지요.”

 쓰레기라는 말과 곧 처벌받을 거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로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굳었던 얼굴을 조금 풀었다.

 “하긴! 우리네의 그린 일족처럼 동족의 발을 걸고 넘어지는 쓰레기 같은 존재들이 인간들 중에 없지는 않겠지. 인간들이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는 것은 우리도 알고 있네. 흐음, 인간 황제의 자식들이라.”

 로드의 눈치를 보아하니 마음이 동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임무는 황제가 될 자질을 가진 이들을 선별해서 황제의 계단을 걷게 만드는 것. 지난 몇천 년 동안 대상자가 거의 없었을 테니 그들 대에서 시험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제왕학을 비롯해 황제가 익혀야 할 품행과 지식을 습득한 이들입니다. 그들이 황제의 계단을 걸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흐음.”

 로드는 단박에 거절하지 않고 망설였다. 그것으로 미루어 성공할 가능성이 보였다.

 “일단 일족의 장로들과 의논해 보겠네.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려주게.”

 하룬은 내심 환호성을 질렀다. 심하면 엘프들과 싸우다가 죽는 경우까지 예상했었다. 이 정도면 생각한 것보다 더 좋은 반응이었다.

 “알겠습니다.”

 “여기 인간들에게 식사를 준비해 주게.”

 로드는 주변에 배석한 엘프들 중 일부에게 지시를 내리고는 원로로 보이는 일단의 인물들과 함께 아까 나왔던 거대한 나무 구멍으로 들어갔다.

 일단의 엘프들이 적의를 숨기지 않은 채 멀건 죽을 사람들 앞에 놓고 멀찌감치 물러났다. 주변의 엘프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자 하룬을 따라온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하룬 대장, 무슨 이야기를 한 거요? 보아하니 라 제국의 이야기와 던전에 대한 것 같은데.”

 랄트렐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라 제국에 대한 대충의 역사와 이 던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서 얘기를 좀 해 주시오.”

 사람들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주제이니 당연한 반응이리라.

 “우리가 던전으로 알고 있던 곳이 실은 라 제국 시대에 능력을 검증하는 일종의 시험 장소라고 합니다.”

 굳이 황제의 계단이라는 소리는 할 필요가 없었다.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그 소리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던전이라고 확신했던 곳이 다른 용도의 건물이었다니. 묘하게도 지금 고요의 땅에는 골든 배틀을 치르는 이들이 거의 모두 와 있는 상태였다.

 “시험 장소란 말입니까?”

 “네. 정확한 유래나 역사야 알 수 없지만 그렇다는군요. 이 엘프들로 이 장소를 수호하는 임무를 수천 년 이상 수행해 왔다고 합니다.”

 “허헛! 정말 믿기 힘든 말이군.”

 하지만 굳이 엘프들이나 그 말을 전한 하룬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던전이 아니라는 것에 실망감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어쩌면 그들에게는 더 좋은 일일 수도 있다.

 하룬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의 눈빛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어쩌면 이곳이야말로 골든 배틀을 치르는 황자들에게 가장 적당한 장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시험 방법은 뭐라고 합니까?”

 “그건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 역시 그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이들은 메스 기사단이 자신들 일족의 처녀를 강간하고 살해한 것에 분노한 상태지만 황자들이 직접 이곳에 왔다고 하니 입장할 자격은 되는 듯 자기들끼리 회의를 해 본다고 하더군요.”

 “후유, 잘되었으면 좋겠는데…….”

 랄트렐이 긴장을 조금 풀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너무 살기가 등등해서 바짝 얼어 있었다. 6서클 마스터인 자신의 실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살기에 원초적인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그 미친놈들이 잘못하면 일을 망치겠군. 기사의 명예를 실추시킨 놈들을 이참에 정리해야 해!”

 아인델프는 같은 기사로서 아무리 이종족이라도 계율을 어기고 강간과 살인을 저지른 메스 기사단을 씹었다.

 “그게 무슨 망발이오. 저놈들은 인간이 아니라 저열하고 천한 이종족들이오. 기사의 명예를 손상시킨 것이 아니란 말이오.”

 아인델프의 말에 원로원 소속의 보든 기사단장 스윈들러가 당장 반발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는 나서지 않는 것이 좋았을 뻔했다.

 “이런 뻔뻔한 작자들이 다 있나. 저들도 지성을 가진 존재들인데 함부로 강간하고 살해한 것이 잘한 짓이라는 것이오?”

 “어떻게 기사단장이라는 분이 그런 참혹한 일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오?만약 협상이깨진다면 1차적인 책임은 메스 기사단과 원로원 쪽에서 져야 할 것이오.”

 “맞소! 기사의 명예를 더럽힌 메스 기사단이 그 책임을 다 져야만 하오.”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에게 책임을 모는 사람들의 행태에 스윈들러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하지만 이미 명분에서 밀린 터라 더 이상 반박할 말은 없었다.

 ‘빌어먹을! 그 개 같은 새끼들은 왜 그런 짓을 해 가지고. 돌아가면 아주 박살을 내 주겠다!’

 그러나저러나 그들이 일방적으로 알고 있던 엘프들과는 생김새가 판이하게 달라 이상하기는 했다. 그들이 듣기론 엘프들은 조화의 종족답게 남녀를 불문하고 그 미모가 뛰어나며, 희로애락이 거의 없는 담백한 성품이라고 한다.

 한데 이들은 엷기는 하지만 검붉은 피부에 살기에 가까운 호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그 용모도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그들이 다크 엘프라서 그렇다고 치부했다. 인간들도 종족의 차이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엘프들이 식사를 내왔다. 사람들은 엘프들이 내온 정체불명의 주스와 죽으로 식사를 해야만 했다. 다행히 맛이 좋아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그 와중에 거대한 나무속에서 아까 엘프들을 통솔했던 마농이란 엘프가 나와 하룬을 찾았다.

 “그대는 날 따라오시오.”

 하룬은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회의에서 뭔가 결정 난 것이 틀림없었다.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하룬을 따라나설 만큼 담이 큰 사람은 없었다. 아직도 그들은 몇 겹이나 되는 엘프 전사들의 보호(?) 속에 있었다.

 나무속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수십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거대한 탁자와 의자들이 나무와 분리되지 않은 채 살아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예컨대 그 탁자들과 의자들 역시 아직 나무의 일부인 듯했다.

 하룬은 마농의 안내를 받아 다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로드 옆에 앉았다.

 “식사는 잘했나?”

 “네. 덕분에 진귀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로드는 진심이 깃든 하룬의 대답이 기꺼운 눈치였다. 밝은 눈빛을 보아하느 다른 엘프들과의 이야기도 잘 풀린 듯했다.

 “각 부족의 대표들과 회의를 했네.”

 그의 말에 하룬은 엘프들의 면면을 다시 확인했다. 아까와 비교해 미세하게나마 외형이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이들은 현재 트레저 분지로 몰려온 각 부족의 대표자들이었다.

 “힘든 회의였네. 비록 만장일치는 아니었지만 인간인 그대들에게 황제의 계단을 걸을 자격을 주기로 했네. 본래 황제의 계단은 결격 사유만 없으면 원하는 자에 한해 그 종족을 가리지 않고 걷게 해 주는 것이 우리 일족의 임무이니 말이네.”

 “감사합니다.”

 정말 다행이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엘프들의 적대 어린 눈길 때문에 일언지하에 거절당할 줄 알았던 것이다.

 “다만 조건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무슨 조건이라도 들어주어야 한다. 그 길이 엘프들과 인간들의 대규모 전쟁 없이 평화롭게 일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엄청난 전투력을 가진 엘프 대군과 전쟁을 원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먼저 우리 엘프들을 강간하고 참혹하게 죽인 살인자들과 연루된 자들의 목을 주게. 희생자가 나온 푸른하늘 일족의 분노를 풀려면 그 일에 연루된 모든 자들의 생명이 필요하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이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 직책과 대우만큼의 큰 책임을 가진 기사가 강간한 일은 인간들의 법에 따라서도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상위자들까지도 감독 책임을 혹독하게 지니 말이다.

 물론 그 법 집행이 제대로 되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하룬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로드를 비롯한 엘프들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밝아졌다.

 “다른 한 가지 조건은 좀 어려울 것이네. 황제의 계단을 걷고자 하는 자들은 볼카웜 성체 한 마리를 잡아 그 증거를 가지고 오게.”

 “그런데 볼카웜이라면?”

 볼카웜이라니 어떤 것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름으로 보아 몬스터인 것 같은데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황제의 계단이 위치한 분화구의 지하에는 엄청난 체구에 그 무엇도 삼켜 버리는 무서운 몬스터가 서식하고 있네. 수천 년 동안 황제의 계단을 지키며 살아온 우리 일족을 사냥해 온 무서운 놈들이지.”

 그런 놈이 트레저 분지에 서식하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그런 사실을 몰랐을까? 아무튼 이 정도라면 엘프들과의 대대적인 전쟁보다는 훨씬 쉬운 조건이었다.

 “반드시 잡겠습니다.”

 “좋네.”

 엘프 로드는 시원스러운 하룬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급기야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하룬은 다시 한 번 로드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아니, 감사할 것 없네. 난 인간들이 그놈들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로드의 말을 들어보니 예사 괴물은 아닌 모양이다. 로드 주변에 있는 엘프들은 신분상 보통 엘프들보다 능력이 월등히 뛰어날 텐데도 로드가 그 이름을 입 밖에 꺼낸 순간 움찔거리며 인상을 찡그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반드시 잡겠습니다.”

 하룬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이곳에 모인 인간들은 테론 제국 최강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아닌가.

 “그대와 같은 능력을 지닌 인간들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또한 만약 성공한다고 해도 몇 가지 알아야 할 사실들이 있네.”

 “뭡니까?”

 혹여 무슨 꼬투리라도 잡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계단은 혼자 걸어도 되지만 역대로 혼자 걸어서 그 끝을 본 존재는 없다고 하네. 우리 일족이 그곳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는 있지만 그 길에 어떤 시험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자세히 모르지.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그 계단을 걷고자 하는 이는 혼자라도 상관없지만 최대 299명의 조력자와 함께 할 수 있다고 했네. 그대들이 볼카웜 성체 한 마리를 잡는다는 조건으로 총 스무 팀의 입장을 허가하겠네. 한 번에 삼백명 씩 입장할 수 있으니 총 스무 번의 기회를 준다면 우리도 많이 양보하는 것이네.”

 “알겠습니다.”

 도대체 볼카웜이란 놈이 얼마나 무섭기에 전투라면 이골이 난 다크 엘프들이 저리 자신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엘프 군단과 정면 승부를 하지 않고 던전에 입장할 수 있다면 다들 최강자들을 내놓을 것이다.

 “내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인데, 일단 볼카웜들이 뚫어 놓은 지하통로의 위치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황제의 계단 지하에는 놈들이 수천 년에 걸쳐 뚫어 놓은 통로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지. 우리도 몇 번 놈들을 토벌하기 위해 지하로 들어가 보았지만 그 통로들 때문에 막대한 피해만 보았으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미 생각해 놓은 바가 있었다. 드워프들에게 부탁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볼카웜은 어떤 몬스터입니까? 조금만 자세히 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룬의 질문에 로드의 팽팽했던 피부가 깊이 접혔다. 그 표정 변화만으로도 놈이 얼마나 강력한 몬스터인지 알 것 같았다.

 “볼카웜은 거대 웜의 일종이라네. 사막 지대나 황무지 지대에 많이 서식하는 샌드웜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존재지. 볼카웜은 인간들의 언어로 고요의 땅, 우리말로는 황제의 대지에만 서식하는 특별한 몬스터네. 우리도 잘은 모르지만 이 지역은 과거 화산 활동이 있었던 곳, 추측건대 불 속성의 마나를 흡수하여 거대한 신체를 가지게 된 거 같아. 놈들의 주특기는 미세한 대지의 진동만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능력과 땅굴 파기, 마나를 머금은 무기와 견줄 수 있는 강력한 이빨 그리고 급할 때는 화염 브레스를 내뿜을 수 있다는 것이네. 놈들의 몸은 마법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기까지 해서 지난 세월 동안 우리 일족도 몇 마리밖에 잡지 못한 극히 위험한 괴수지.”

 “놈들의 이빨이 마나가 깃든 검과 비슷하단 말씀입니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로드의 말이 맞는다면 익스퍼트 급의 검사들도 쉬 상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수천 년 동안 우리 엘프 전사들 수천이 놈에게 당했네. 그중에는 로드 후보자들도 상당수 있었지.”

 로드는 그 말을 끝으로 굳게 입을 다물고 인상을 찡그렸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던 것을 떠올리면 그것은 굉장한 마음의 동요를 말해 주었다.

 ‘제길! 얼마나 강한 놈이기에.’

 그래도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최강의 팀을 구성해서 볼카웜을 잡아야만 했다. 아무리 놈이 강력한 몬스터라도 그것이 엘프들과의 정면 승부보다는 쉬우니까.

 하룬의 얼굴 표정이 수시로 변하는 것을 보고 엘프들은 공연히 마음을 졸였다. 그들이 어려운 조건을 내건 것 같아 편치가 않은 것이다.

 “우리 일족은 이 땅에 위대한 황제가 탄생하기를 간절하게 바라네. 모든 종족을 아우를 수 있는 위대한 존재가 탄생한다는 것은 중간계의 축복이니까. 부디 그대 인간들 중에 황제의 자질을 갖춘 이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네. 실전된 마법을 복원했고 정령 마법을 홀로 익힐 정도로 잠재력이 뛰어난 자네와 같은 인간들이니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로드의 눈빛은 강렬했다. 수호자의 짐을 지고 수천 년을 살아온 그들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기다리던 일일 것이다.

 “전 반드시 이곳에 온 인간들 중에 황제의 자질을 가진 이가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일단 볼카웜부터 잡아서 자격이 있음을 보이게. 당분간 제한 경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인간들의 활동은 신경 쓰지 않겠네. 물론 경계 안으로 들어오는 인간들에게는 죽음으로 경고하겠지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하룬은 로드와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인간들이 던전으로 알고 있는 황제의 계단에 대해서 상세하고 일고 싶었다. 그것은 순수한 호기심의 발로였지만 들을수록 라 제국은 이상에 가까운 나라였다는 것에 감탄하고 말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하룬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럼 잘 가게. 오랜만에 만난 인간이었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네. 나중에 따로 시간을 마련해서 정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고 싶군.”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혼자 익힌 터라 부족한 점이 너무 많거든요. 꼭 다시 들르겠습니다.”

 “그러게. 자네라면 언제든 환영이네. 정령을 친구로 둔 자는 우리 일족이나 다름없으니 말이야.”

 로드는 물론이고 원로들도 진심과 기대 어린 얼굴로 하룬을 배웅했다. 하지만 그중에는 의심스러운 감정이 담긴 눈초리도 은밀하게 섞여 있었다.

 ‘뭐지, 이 기분은? 엘프들은 거짓말을 못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어딘지 찜찜한 기분이 들어.’

 분명 엘프들의 표정과 말은 진심으로 느껴졌지만 하룬은 중간에 몇 번이나 자신을 향한 적대감과 비웃음 같은 기분 나쁜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마나를 느끼고 정령들과 친구가 된 이후 예민해진 그의 감각이 뭔가 불안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가?’

 인간에게 해를 입었던 엘프들로서는 당연한 감정일지도 모르지만 자꾸 신경에 거슬렸다.

 죽과 과일 그리고 수액 주스로 식사를 마친 일행들이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해 했지만 용무가 끝난 후 엘프들이 내쫓듯 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엘프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역 밖으로 나와야 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밖으로 나오자마자 란트렐이 참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몇 가지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좋은 자리였습니다. 자세한 것은 트레저 분지로 돌아가서 말씀드리지요.”

 “그…… 알겠습니다.”

 다들 궁금한 눈치였지만 다소 심각한 표정의 하룬을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모두가 모인 곳에서 공개할 내용이고 들으면 놀랄 테니 두 번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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