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불의 정령 피닉스 (108/278)

《불의 정령 피닉스》

 하룬은 짠한 마음으로 그레이브 시티를 떠나 비수의 진동음이 더욱 강해지는 쪽으로 이동했다. 이제 확연하게 진동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서는 멀지 않은 곳에 유물이 있는 것 같았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뚫린 통로가 없어 이리저리 이동하며 오르락내리락해야만 했다.

 하루 정도를 더 이동한 하룬은 꽤 깊은 지하로 들어와 있었다. 그동안 그레이브 시티와 유사한 거대한 공간도 발견했고, 붉은 열천이 솟거나 흐르는 공동도 꽤 많이 지나쳤다.

 그러다가 찾은 곳이 바로 볼카웜의 해처리(부화장)였다. 진수가 말한 바로 그곳이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는 것이 파괴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곳이 몇 군데 있을지도 몰랐다.

 “멋지잖아!”

 부드러운 붉은 흙이 모래처럼 곱게 깔린 거대한 공동에 거대한 타원형의 붉은색 알들이 줄지어 놓인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비록 흉포하고 끔찍한 볼카웜이지만 알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천장에 박힌 거대한 붉은 발광석 때문인지 아니면 붉은색 열천 주변 몇 곳에 나누어 있는 알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든 것이 다 붉은색 광채를 발하는 공동의 수많은 알들은 이곳이 놈들의 부화실임을 알려주었다.

 공동의 곳곳에는 볼카웜들이 뚫어 놓은 거대한 통로들이 기괴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하룬은 알들을 파괴할 작정을 하고 공동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볼카웜 특유의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끄르르!

 끄륵끄르륵!

 “이런!”

 익숙하지만 강한 불쾌감을 유발하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본 하룬은 깜짝 놀랐다. 열천 주변의 붉은 땅이 들썩이더니 열 마리의 볼카웜이 침입자로부터 알들을 보호하겠다는 듯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새끼다!’

 동체의 길이는 7미터 정도에 붉은색으로 빛나는 볼카웜들이었다. 놈들은 몸을 수축시켰다가 확장하며 하룬을 향해 빠른 속도로 기어오고 있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이빨만큼은 제 얼굴 크기보다 더 큰 녀석들이 긴 촉수들을 허공으로 뻗어 연방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은 정말 기괴했다.

 하룬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본 소드를 쓰는 대신 비수를 꺼냈다. 블리츠 대거를 써 볼 생각이었다.

 대거에 집중하는 순간 어퍼 오션의 마나가 순간적으로 대거로 향했다.

 “블리츠 컨트롤!”

 기합과 함께 대거를 날렸다. 끈끈하면서도 번개의 성질이 혼합된 마나가 하룬의 손을 떠나 날아가는 대거의 꼬리에 매달렸다.

 파악!

 블리츠 대거는 단숨에 한 녀석의 머리통에 깊이 박혔다. 녀석의 동체와 비수의 날을 생각하면 별 타격이 될 것 같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놈의 동체가 시퍼런 뇌전에 감싸였다.

 끄륵! 끄으윽!

 끔찍한 비명과 함께 뇌전에 휩싸인 볼카웜 새끼가 경련했다. 그러고는 이내 까맣게 변해갔다. 삽시간의 놈의 동체 전체가 뇌전에 타 버린 것이다.

 슈욱!

 또 하나의 비수가 날아갔다. 어둠의 비수였다. 목표물이 너무 커서 맞히는 것은 쉬웠다. 어둠의 비수 역시 블리츠 대거처럼 정확하게 놈의 머리통을 파고들었다. 정보를 볼 수 없었지만 발버둥치는 볼카웜의 반응으로 보아 굉장히 고통을 주는 것 같았다.

 “돌아와!”

 블리츠 대거와 연결된 마나에 의지를 실자 블리츠 대거가 살아있는 듯 놈의 머리통에서 빠져나와 하룬의 손으로 돌아왔다. 아직 거리가 있으니 검을 쓸 필요는 없었다.

 “블리츠 컨트롤!”

 다시 날아가는 블리츠 대거의 검신에서는 시퍼런 뇌전이 흐르고 있었다.

 끄르륵!

 머리통에 블리츠 대거를 꽂은 볼카웜 새끼가 역시 경련하며 뇌전에 휩싸였다. 다른 놈들은 그런 동료들을 의식하지 못하는지 변함없는 속도로 그를 향해 돌진해왔다.

 “위신느, 나와서 저 녀석을 갈기갈기 찢어 줘.”

 소환된 위신느가 커다란 바람 칼을 만들어 날아갔다. 빠르게 회전하는 바람 칼은 단숨에 한 새끼의 동체를 난도질했다. 아직 새끼라 가죽은 바람 칼을 막을 정도로 질기지 못했다.

 “나이아, 워터 밤을 몸 안에서 터트려.”

 나이아는 소환되자마자 수십 개의 워터 밤을 날렸다. 새끼 두 마리의 이빨이 고속으로 회전하고 있었지만 어느 틈에 그 속으로 들어간 워터 밤들이 큰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꽈앙! 꽝!

 끄르륵! 끄륵!

 강력하게 압축한 물 폭탄이 터지자 새끼들의 연약한 속살은 물론이고 비교적 약한 동체까지 폭발의 여파로 갈기갈기 찢어졌다.

 “라이피, 소일 스파이크를 날려!”

 소환된 라이피는 수백 개의 소일 스파이크를 나머지 새끼들에게 쏘았다. 손바닥 길이의 소일 스파이크는 볼카웜 새끼들의 동체에 빼곡하게 박혔다.

 끄르르.

 끼이익.

 징그럽고 끔찍한 볼카웜 새끼들의 비명이 공동을 울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벌써 죽어 버린 녀석들도 있었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 했다. 놈들의 급소는 단단한 뼈로 보호되는 뇌였다.

 어느 순간 새끼 몇 놈의 입에서 엄청난 속도로 뭔가가 하룬을 향해 날아왔다. 거의 머리통만한 그 물체를 빠른 발로 피하고 보니 끈적끈적한 액체 덩어리였는데 그것이 닿은 부분은 금방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타액이나 혹은 화염 브레스와 관련이 있는 분비물일 것이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그 액체 덩어리가 날아왔지만 하룬은 발을 몇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 그것들을 피할 수 있었다.

 하룬은 본 소드를 꺼냈다.

 그동안 틈날 때마다 수련했던 메신저 검술을 펼칠 준비를 했다. 혹시 공격하는 동안 강산성의 체액이 튈지 몰라 나이아에게 부탁했다.

 “나이아, 몸에 방어막을 부탁해.”

 -네, 하룬.

 나이아는 하룬의 몸을 안았다. 싱그러운 감촉과 함께 그의 몸에 마치 잘 맞는 옷과 같은 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타앗!”

 부드러운 흙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기고 하룬이 몸을 날렸다.

 푸욱!

 소일 스피어에 맞아 몸추림치던 한 새끼의 머리통에 본 소드가 정확하게 박혔다. 메신저 검술을 시험해 보려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따로 검술이 필요가 없다. 오로지 정확하게 급소를 찌르고 손목을 크게 돌려 뇌를 곤죽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단지 조심을 해야 했다. 몸부림치는 상황에서도 고속으로 회전하고 있는 여덟 개의 이빨에 걸리기라도 하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소일 스피어가 박힌 상처에서 분수처럼 뿜어 나오는 체액들과 타액 공격, 혹시 모를 화염 브레스도 조심해야 했다.

 처음에는 조금 굼뜨던 하룬의 몸이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움직였다. 본 소드는 정확하게 급소를 찔러 놈의 작은 뇌를 휘저어 곤죽으로 만들었다.

 마침내 열 마리의 볼카웜 새끼를 모두 처리했다. 아직 경련을 하거나 몸을 꿈틀거리는 녀석들이 있기는 했지만 체절의 신경이 살아 있는 탓이니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휴!”

 긴 한숨을 쉬며 헉헉대는 하룬의 눈이 놈의 체액과 타액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워터 실드에 닿았다. 나이아가 직접 변한 워터 실드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새끼들은 성체처럼 화염 브레스를 뿜는 대신 체액보다 훨씬 더 강한 독성을 함유하고 있는 액체를 입으로 뱉었던 것이다.

 “나이아, 고마워.”

 -아니, 나도 좋았어요. 이렇게 하룬과 한 몸이 되니 정말 기분이 야릇하면서도 좋았어요.

 후드득 지저분한 것들을 바닥으로 털어버린 나이아가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나이아가 이번에는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무리 그녀가 정령이라도 하룬은 마음이 진탕되었다.

 -헤엥. 나도 열심히 했는데.

 어느새 위신느가 날아와 하룬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위신느도 수고했어. 바람 칼의 위력이 정말 끝내줬어. 고마워.”

 -헤헤. 그럼 뽀뽀.

 위신느는 자신이 키스하는 대신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

 “응? 해달라고?”

 -응, 하룬. 난 하룬이 해주는 게 내가 하는 거보다 더 좋아.

 “하하! 알았어.”

 마치 나이아를 질투하는 듯 보이는 위신느의 표정이 너무 귀여웠다.

 쪼옥!

 위신느의 입술에 뽀뽀한 하룬은 발그레해진 그녀의 얼굴과 어느 틈에 감긴 눈을 보며 묘한 감흥을 느꼈다. 이제까지는 마치 벨을 대하듯 귀엽기만 했던 위신느에게서 강렬한 유혹이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야릇해지자 하룬은 라이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상하게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몸이 더웠다. 오늘따라 위신느와 나이아가 단순한 정령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라이피도 수고했어. 너 때문에 이 녀석들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어.”

 -도움이 되었다니 나도 기뻐, 하룬. 그런데 조심하라고. 아무래도 이 두 녀석이 하룬에게 딴마음을 먹고 있는 거 같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여성체로 할 걸 그랬나?

 라이피의 말에 하룬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예전에는 안 그러더니 라이피도 조금씩 짓궂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세 정령이 돌아가자 안내음이 연속으로 울렸다.

 -레벨이 4 상승합니다.

 -정령력이 100 증가합니다.

 -S.P.를 50 획득합니다.

 -H.P.를 150 획득합니다.

 -친화력의 상승과 정령의 호감으로 정령 합체 스킬이 가능해졌습니다.

 ‘정령 합체 스킬은 뭐지? 예전 그거와는 다른 건가?’

 뜻밖의 안내에 하룬은 스킬을 열어 보았다.

『정령 합체 스킬

정령을 받아들여 하나가 되는 스킬로, 정령의 능력과 본인의 능력을 함께 사용할 수 있다.

소모 마나: 초당 10

소모 정령력: 초당 100

옵션: 정령에게 허락받은 존재』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굉장한 스킬이었다. 단순히 비수와 같은 신외지물에 정령을 합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정령을 합하는 것이다. 정령과 자신의 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으니 정말 최고의 스킬이 아닐 수 없었다.

 유사한 스킬로 빙의가 있는데 그 스킬을 최소 중급 사령술사들이 사용한다. 하지만 빙의의 단점은 본인의 의지나 의식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빙의되는 동안 시전자는 자신의 몸과 정신을 빼앗기는 것이다.

 하룬은 내친김에 한번 스킬을 써 보려다가 처참한 꼴로 죽은 볼카웜 새끼들의 사체를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성체만큼은 아니지만 꽤 큰 이빨들이 눈에 들어왔다. 강철보다 더 단단한 재료 아이템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래도 새끼들이라 아직 뼈가 단단하지 않아 이빨을 분리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것들을 모두 아공간에 넣고 사체에서 회수한 두 비수는 방어구 안쪽에 찔러 넣었다.

 막 자리를 떠나려던 하룬의 눈에 이상한 현상이 보였다. 타액으로 여겨지는 하얀 액체가 서서히 아지랑이처럼 기화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상한걸. 휘발성을 가진 액체라? 어라! 가만, 혹시 이 액체가 화염 브레스를 발생시키는 재료가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 점성이 강한 액체는 마치 새벽의 겨울 호수처럼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볼카웜의 살점을 조심스럽게 집어 액체에 닿게 했다. 닿는 것만으로는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응? 아무 이상이 없는걸. 도대체 이 액체는 뭐지?’

 정말 궁금했다. 그렇게 잠시 그 액체를 보는 사이 안내음이 들렸다.

 -심안이 30 이상입니다. 한 사물에 10초 이상 집중했기 때문에 자동으로 심안 스킬이 발동되어 대상물의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대상물은 볼카웜이 위급한 상황에서 분비하는 특별한 물질로 강한 휘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충격이나 압축에 화염으로 변하는 물질입니다.

 ‘호오. 심안 스텟에 이런 묘용도 있었구나.’

 심안 스텟이 30이 넘자 이런 좋은 면이 생겼다. 일정 시간 대상물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 정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거 잘만 사용하면 유용한 아이템이 되겠는걸. 어떻게 가져가지?’

 잠시 궁리하던 하룬은 이마를 손으로 치며 빈 포션 병을 꺼냈다. 인벤토리에 빈 포션 병이 가득했던 것이다. 원래 빈 병도 가지고 가면 잡화점 같은 곳에서 일정한 돈을 내주기에 버리지 않았다.

 하룬은 조심스럽게 포션 병에 볼카웜 새끼가 분비한 액체를 넣고 코르크 마개로 단단히 막았다. 그리고 포션 병에 정신을 집중하고 잠시 쳐다보자 정보가 보였다.

『화염병

등급: 레어(하)

볼카웜의 분비액은 강력한 화염을 만들 수 있는 물질이다. 약한 충격으로도 반경 2미터를 약 2분 동안 태울 수 있는 강력한 화염이 발생한다.』

 ‘오케이!’

 별다른 작업 과정이 없었음에도 원료가 뛰어나다 보니 레어 아이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반경 2미터를 2분 동안 태울 수 있는 화염이라니, 굉장한 물건을 얻은 셈이다.

 하룬은 빈 포션 병에 볼카웜의 분비물을 담고는 조심스럽게 아공간에 넣었다.

 빈 포션병으로 화염병을 다 만든 하룬은 아직도 많이 남은 분비물이 아쉬웠다. 하지만 더 이상 분비물을 담을 용기는 없었다.

 “아! 놈의 가죽이라면 가능해!”

 다른 것은 몰라도 제 가죽은 녹이거나 태우지 못했으니 그것으로 분비물을 담을 생각이었다. 하룬은 비수 한 자루에 마나를 주입시켜 날에 오러를 생성시켜 가죽을 벗겨냈다.

 꽤 크게 원형으로 잘라낸 가죽을 한데로 모으니 엉성하나마 뭔가 담을 수 있는 모양이 되었다. 모아진 부분을 적당하게 접어 끝을 한곳에 모으니 마치 커다란 만두 모양의 자루가 되었다.

 “이제 제대로 조이는 것이 문제로군.”

 하룬은 남은 볼카웜의 분비물을 즉석으로 만든 조잡한 가죽 자루 안에 넣고 그 끝부분을 역시 볼카웜의 가죽을 길게 잘라 만든 끈으로 단단하게 조였다. 혹시나 샐까 싶어 주둥이 부위를 세 번이나 묶어 아공간에 넣었다.

 “이제 저 알들을 처리할 차례군.”

 인간은 물론이고 생명체를 해치는 백해무익한 몬스터이니 세상에 남겨 둘 필요는 없었다. 일단 눈에 띈 이상 남겨 둘 수가 없었다.

 하룬은 알을 하나씩 깨는 대신 좋은 방안을 생각해 냈다.

 우선 놈의 남은 분비물을 적당하게 자른 가죽 위에 떠서 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조심스럽게 뿌렸다. 몇 번 그 작업을 반복하자 수백 개의 알들과 그 주변에 분비물을 모두 뿌릴 수 있었다. 몇 군데로 나뉜 알들 사이에도 분비물을 뿌렸다.

 “이제 쇼 타임이다!”

 화염병을 하나 꺼내 한 곳에 던졌다.

 화악!

 순식간에 강렬한 화염이 발생했다. 엄청난 열기를 가진 화염이 연쇄적으로 일어나 알들은 물론이고 공동을 가득 채웠다. 더구나 알들이 연쇄적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어쩌면 열천 때문에 볼카웜의 알이 불 속성의 마나를 흡수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잘하면 이 화염병으로 볼카웜들을 처리할 수도 있겠는걸.’

 놈의 분비물로 만든 화염이라면 녀석들을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아무튼 열기가 얼마나 강한지 하룬은 급기야 지하 통로 안으로 깊이 들어와야 했다.

 -레벨이 5 상승합니다.

 -아이템이 주어집니다.

 -S.P.를 800 획득합니다.

 -H.P.를 2,000 획득합니다.

 그 후로도 지하 통로들을 헤맸지만 특별히 의심가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갈수록 비수의 진동음은 점점 더 커졌지만 유물이 있을 곳으로 추측되는 곳은 나오지 않았다.

 반나절을 더 헤맨 끝에 하룬은 거대한 볼카웜 한 마리를 상대하다가 그만 놓쳐 버리고 말았다. 세 정령까지 소환했지만 놈을 완전하게 죽일 수가 없었다.

 ‘위험했어!’

 간담이 서늘했다. 놈과 싸울 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놈의 촉수조차 자르지 못했다.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영활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엄청난 놈이 분명해.’

 분명 안면 상단부가 오러 소드에 의해 쩍 갈라진 것을 보았는데도 놈은 기민하게 움직여 결국 도망치고 말았다. 분명 보통 볼카웜은 아니었다.

 세 정령들에게 치명타를 입으면서도 놈은 위력적인 공격을 했다. 정령력과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상대했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놈이 도망쳤기에 망정이지 계속 덤볐다면 오히려 하룬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비록 육포와 곡물 가루를 물에 푼 것에 불과했지만 영양 높은 식사와 휴식으로 완전하게 회복한 하룬이 놈이 남긴 흔적을 쫓아서 도착한 곳은 그레이브 시티만큼은 아니지만 꽤 큰 지하 공간이었다.

 열천 정도가 아니라 제법 큰 호수가 그 공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그 주변은 부드러운 흙과 작은 자갈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은 시뻘건 색을 띤 날카로운 바위들이 악마의 이빨처럼 솟아 있었다.

 열천의 크기가 커서인지 공동 안은 엄청난 열기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천장이 높았고 강렬한 열기가 수증기까지 말려 버리는 듯 시야는 비교적 깨끗했다. 그런데 유물이 있을 법한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휴우, 이곳도 아니군.”

 대충 눈으로 판단을 내리고 돌아서려던 하룬은 비수의 진동이 거의 최고조에 달한 것을 느꼈다. 가슴이 뛰었다. 이곳이 틀림없는 것이다. 세밀하게 다시 공동 전체를 살펴보던 하룬은 호수 건너편의 높은 벽에 난 통로를 발견했다. 주로 직선으로 뚫린 지금까지의 통로와는 달리 위를 향해 심한 기울기로 뚫린 그 통로를 보는 순간 하룬의 눈이 커졌다.

 ‘인공적인 흔적이다.’

 틀림없었다. 다른 통로들은 볼카웜의 강력한 이빨들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뚫은 것이라 거의 완벽한 원형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눈에 들어온 통로의 입구는 원형이 아닐뿐더러 거칠게 깎아 낸 흔적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하룬은 기대와 설레는 마음을 누르고 공동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그의 발이 닿은 곳은 날카롭게 솟은 바위 지대였다.

 “핫! 뜨거워.”

 부츠를 신었음에도 민감한 발바닥으로부터 화끈한 열기가 밀려들어왔다. 이젠 습관적으로 메신저 워킹 1단계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스킬 사용을 멈추자 겨우 열기가 덜해졌다.

 하룬은 꺼내든 비수의 진동과 색조를 따라 천천히 지하 공동의 중심에 있는 붉은 호수로 향했다. 의아한 점은 호수가 아닌 곳으로 향하면 그 진동이 약해지고 색깔까지 연해졌다는 것이다. 마치 호수에 비수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한 현상이었다.

 ‘가보면 알겠지.’

 엄청나게 강한 열기 때문에 처음에는 용암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호수와 가까워질수록 땀이 흐르고 방어구 밖으로 노출된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뜨겁기는 했다.

 “대단하군. 도대체 이 양반은 이런 곳엔 왜 온 거야?”

 혼잣말을 하며 하룬이 호수와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거리로 접근했을 때였다.

 푸앗!

 뜨거운 물을 사방으로 튀기며 호수 속에서 뭔가 그를 향해 쇄도해 왔다.

 “볼카웜!”

 하룬은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점핑 스킬을 써서 뒤로 튕기듯 날아갔다.

 꽈앙!

 방금까지 걷고 있던 하룬의 근처에 있던 바위들이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고, 놈의 머리통이 몇 미터나 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놈은 하룬이 어떻게 할 생각도 하기 전에 몸을 몇 번 수축했다가 확장시키더니 바닥에 파묻힌 머리통을 꺼냈다.

 분명히 그의 본 소드에 머리 부분에 상처를 입은 놈이 맞았다. 그 증거로 아직 상처 부위가 선명하게 선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깊게 베여 덜렁거렸던 그 부위는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흉터는 있었지만 거짓말처럼 붙어 있었다.

 그르륵!

 놈은 습격이 실패한 것에 화가 났는지 옆에 있던 거대한 바위 하나를 그 무시무시한 이빨로 뚫고 갈아 버렸다. 순식간에 거대한 암석에 큰 구멍이 뚫리며 산산조각 났다.

 정말 어마어마한 놈이다. 통로에서 놈을 상대했을 때와는 달리 이곳은 툭 터진 곳이라 이번에는 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꼬리 부위가 아직 물속에 있어 그 길이는 알 수 없었지만 몸통 직경은 약 7미터 정도에 드러난 길이만 해도 무려 40미터가 훨씬 넘는다.

 정령들을 소환할까 했지만 아직 정령력은 바닥이라 본신의 능력으로 놈을 상대하기로 결심했다. 이미 한번 상처를 입혔던 놈이라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룬은 본 소드에 마나를 주입했다. 본 소드가 하얗게 빛나자 점핑 스킬로 높이 날았다가 떨어지며 메신저 검술을 펼쳤다.

 한순간에 열 개의 본 소드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메신저 검술 특유의 마나 플로로 검의 속도가 번개처럼 빨라져 일시에 열 곳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다른 볼카웜의 그것과는 달리 무척이나 기민하고 빠르게 움직이던 촉수 네 개는 쾌속한 그 움직임까지는 포착하지 못하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던 하룬을 따라 위로 향해 하늘거리고 있었다.

 싸악!

 네 촉수가 밑동까지 잘리는 동시에 놈의 안면과 두부에 새하얀 오러가 일렁이는 본 소드의 날이 거의 시차 없이 파고들었다.

 파밧!

 그 순간 놈의 안면과 두부에서 하얀 액체가 튀어 막 착지하는 하룬의 방어구를 덮쳤다.

 치이익! 치익!

 하얀 액체에 맞은 럼프 오크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가 순간적으로 녹아들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나이아라도 소환했을 텐데 포션으로 금방 회복되는 마나와는 달리 정령력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꾸으윽!

 기괴한 신음과 함께 놈의 몸이 수축을 시작했다. 비록 붙긴 했지만 이번 공격으로 아까보다 더 깊이 베인 놈이 다시 도망치려는 것 같았다.

 “이놈!”

 푸욱!

 마나가 주입된 본 소드는 시원한 파육음과 함께 놈의 가죽을 뚫었다. 하룬은 옆걸음질 치며 자루만 남길 정도로 깊이 들어간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꾸르윽!

 볼카웜은 나름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꿈틀거렸다. 본소드가 가른 부위에 시뻘건 살과 하얀 뼈가 보이고 그 사이로 하얀 액체가 뭉클뭉클 새어 나왔다.

 하룬이 다시 더 베려고 했을 때 볼카웜의 몸 뒷부분이 빠르게 앞부분과 겹친다 싶더니 쑥 빨리듯 뒤를 향해 물러났다. 아니, 날아가듯 그렇게 빠르게 뜨거운 호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바람에 하룬의 몸이 본 소드와 함께 한참 옆으로 내동댕이쳐질 정도였다.

 “뭐야?”

 그 거대한 동체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마치 늘어났던 용수철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엄청난 빠르기였다.

 재빨리 열수 쪽으로 가봤지만 열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다. 유유하게 흐르는 열수는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기포만 보일 뿐 놈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하룬은 일단 뒤쪽으로 물러났다. 견디기 힘든 열기 때문에도 그랬지만 아까 도망쳤을 때처럼 놈이 빠르게 덮쳐 온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 그의 반사 신경이 뛰어나고 그쪽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놈의 밥이 될 수도 있었다.

 ‘제기랄!’

 잠시 쉬면서 호수 쪽을 예의 주시했지만 더 이상 이상한 움직임은 없었다.

 하룬은 공동을 벗어나 한 통로 입구에 자리를 잡고 앉아 휴식을 취했다. 열수와 거리가 있어서인지 한결 시원했다. 육포와 물을 먹으며 체력을 되찾은 그는 공동을 다시 한 번 면밀하게 탐사했다.

 너비 30미터 정도의 붉은색 열수로 채워진 호수 말고는 특이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 호수와 연결된 지반을 파고들어갔다면 찾을 길은 없었다.

 ‘일단 돌아갈까?’

 하지만 그것도 문제였다. 정신없이 놈의 기척만 느끼며 달려온 터라 수없이 많은 동굴 중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그 동굴들이 어디로 뚫려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완전한 미로에 빠진 것과 다름없었다.

 하룬은 충분히 쉬고 정령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다음 나이아를 소환했다.

 “나이아, 몸을 좀 씻겨 주고 방어구도 세탁해 줄래?”

 -알았어요.

 나이아는 이전보다 훨씬 더 쉽고 빠르게 그 일을 마무리해 주었다. 얼마 전 착용했지만 럼프 오크의 방어구는 엉망이었다.

 -이건 강력한 소화액이네요.

 “응. 볼카워이라는 녀석의 체액인데 무척 강력한 산성인가 봐.”

 -조심해요.

 안타까운 듯 녹아 버린 부위를 만지며 말하는 나이아는 진정으로 하룬을 염려하고 있었다. 이전까지와는 달리 묻는 것 말고 처음으로 하는 말이기에 왠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혹시 저 열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저곳으로요?

 나이아는 하룬이 가리키는 열수를 보더니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왜, 안 되겠어?”

 사실 그렇게 기대를 한 것도 아니었다. 하룬은 그저 티넌 호수를 건너올 때 나이아가 만든 물로 이루어진 구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런 상태로 호수 속을 살필 생각이었다. 혹시 비수가 그 속에 있을지도 몰랐던 것이다.

 -안 되는 것은 아닌데…… 저의 속성보다는 불의 속성이 더 강해서…….

 그녀는 좀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말을 흐렸다.

 “불의 속성이 강하다니. 뜨겁기는 해도 저건 물 아니야?”

 -그 말이 맞긴 한데요. 정령계는 그런 것이 드물지만 이곳 물질계는 두 속성이 충돌하는 것들이 많아요. 얼어붙은 땅이나 늪은 물의 속성과 대지 속성이 충돌하고, 뜨거운 대지는 불의 속성과 대지의 속성이 충돌하지요.

 “음,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그런 경우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런 경우는 두 속성 중 더 강한 속성의 정령이 관장하게 되어있어요. 물론 약한 속성의 정령이라도 정령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불안정하거나 온전한 위력을 펼치기에는 제약이 좀 있어요.

 “그렇구나.”

 하룬은 그렇게 별 뜻 없이 말을 하다가 문득 이 열수라면 아직 귀속시키지 못한 불의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룬은 나이아를 돌려보내고 정령력이 다 회복될 때까지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마침내 완벽한 상태를 회복한 하룬은 열수 가까이로 갔다. 말끔하게 씻었지만 금세 속옷이 땀으로 젖어 들었다. 이러다가는 몸의 수분이 금방 다 빠져나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며 참고 손바닥을 열수 바로 위까지 뻗었다.

 뼈까지 타 버리는 것처럼 후끈한 열기가 손은 물론이고 금세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이글거리는 화염 구덩이에 빠져든 것처럼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혼몽해질 정도였다.

 하룬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는 정령을 소환했다.

 “불의 정령이여, 내게 모습을 보여 주겠니?”

 불의 하급 정령은 카사라고도 하고 샐러맨더라고도 하는데 그 외형이 도마뱀 형상이라고도 하고 새 형상이라고도 했다. 운디네와 실프 그리고 노움과는 달리 판타지 소설마다 다른 설정을 하기 때문에 이미지를 쉽게 떠올릴 수 없어서 이름 대신 불의 정령을 소리 내어 불렀다.

 그사이 열수에서 전해지는 열기는 한층 더 강해져 이제는 온몸이 용광로에 빠져 뼈와 살이 타서 녹아버리는 것 같고 정신마저 아득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강력한 의지로 불의 정령을 소환했다.

 눈 위로 줄줄 흐르는 땀방울에 투영된 한 존재가 보였다. 땀 때문에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불새가 있다면 저런 형상이 아닐까 싶었다.

 순간 정신이 들었다. 하룬은 불새를 보는 순간 멋진 이름이 생각났다.

 “난 하룬, 네게 피닉스라는 이름을 줄게. 내 친구로 언제나 내 곁에 머무르고 싶다면 이름을 받아주지 않을래?”

 눈으로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형상이 자꾸 흐릿해졌지만 자신의 눈에는 틀림없는 불 속에서 태어나 불을 다스리다가 불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피닉스와 똑같이 생긴 멋진 정령이었다.

 -피……닉……스. 마음에 들어.

 들뜬 목소리였다. 목소리에도 그 색이 있다면 피닉스의 목소리는 정열과 흥분을 뜻하는 붉은색일 것이다. 그만큼 순수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들리더니 어느새 그를 괴롭히던 열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땀마저 순식간에 말라버려 몸이 보송보송해졌다.

 이제야 앞이 제대로 보였다.

 -난 피닉스. 앞으로 친구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그대의 운명과 하나가 되어 피닉스로 살아갈 거야.

 “반가워!”

 비록 땀 때문에 좀 흐릿했지만 불꽃이 피어오르는 날개가 있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새였다. 활활 불타오르는 화염 날개를 가진 피닉스의 눈이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전부터 계약을 기다렸는데 이제야 불러 주네.

 “그랬어?”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각성하고 진화할 준비가 된 아이들은 다들 계약을 하려고 벼르고 있었거든. 그래도 내가 그동안 열심히 수련한 덕분에 가장 빨리 나올 수 있었어.

 피닉스는 활짝 웃으며 자랑스러워했다. 나긋나긋하고 여성스러운 나이아와 달리 튀면서도 강한 열정이 가득한 피닉스는 아이처럼 천진하고 호기심이 많아 보였다.

 “각성? 진화? 그게 무슨 소리야?”

 나이아에게 비슷한 말을 듣긴 했지만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하급에서 중급이나 상급 혹은 최상급으로 계급이 상승하는 것을 진화라고 해. 그와는 달리 새로운 능력을 가지면 각성한다고 하지. 원래 대부분의 정령들은 소멸할 때까지 한 계급에 머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극히 소수의 정령들은 어떤 연유로 오랜 시간 정령력을 쌓고 수련한 끝에 새로운 능력에 눈을 뜨는 각성을 하면 계급과는 상관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이제야 뭔가 좀 알 것 같았다. 분명히 싸가지의 전직으로 생긴 부가 효과로 주인인 자신은 하급 정령을 부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부름에 응답해 나타난 정령은 하급이 아니었다. 모두 각성한 정령들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정신이 또렷해졌다. 몸 상태도 쾌적해서 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열기는 네가 없애준 거니?”

 -헤헤. 당연한 말씀이 아니고, 불의 정령을 소환하면 그 자체로 불에 대한 내성이 생기거든. 그러니 이 정도 열기쯤은 전혀 느낄 수 없는 거지.

 “그렇구나.”

 생각해 보면 나이아를 소환했을 때 물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위신느를 소환했을 때 역시 그 광풍이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때 불기 시작한 바람도 굉장히 편안하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이제야 정령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런데 피닉스, 이 열수 속으로 들어가도 될까?”

 -당연하지. 나와 함께 가면 돼.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수영을 해보겠어. 그런데 잠시라면 몰라도 꽤 오래 움직이려면 아마 나이아도 불러야 할걸.

 “그렇겠지?”

 하룬은 피닉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뜨거운 물이니 양쪽 속성이 차이는 있을망정 둘 다 있어야 안정적일 것이다.

 하룬은 나이아를 소환했다.

 -그새 친구가 하나 더 늘었네요.

 나이아가 다정하게 웃으며 다시 만난 그를 반겼다.

 “응. 인사해, 새로 사귄 친구요. 피닉스라고 해.”

 -이미 알고 있어요.

 둘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웃음 지었다.

 -사는 곳은 다르지만 각성한 존재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거든.

 피닉스가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물속으로 들어가지? 그냥 들어가면 되나?”

 -후후후! 정령 합체 스킬을 사용하면 돼. 그럼 하룬의 의지대로 우리의 힘을 쓸 수 있어.

 하룬은 잠시 고민하다가 정령 합체의 대상을 피닉스러 정했다. 아무래도 물속에서 힘을 쓰는 것은 나이아가 더 나을 것 같았지만 일단 열기에 적응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룬은 피닉스에게 손을 대며 스킬을 펼쳤다.

 “정령 합체!”

 피닉스가 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뭐랄까, 후끈한 열기가 몸속으로 들어오며 뭔가 다른 존재가 된 느낌이었다.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나이아, 넌 내 주변에 막을 쳐 줘.”

 -알았어요.

 나이아는 이내 하룬의 몸을 안았고 그의 몸 주변에 수막을 형성했다.

 “자, 그럼 열수 속으로 들어가 볼까?”

 하룬은 이제는 더 이상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열수 속으로 들어갔다.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현실에서도 수영장은 있었지만 그는 이용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신분으론 이용하는 데 너무 비쌌던 것이다.

 처음에는 좀 불안했지만 팔과 다리를 조금씩 움직이자 방향은 잡을 수 있었다.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의 몸은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물속은 온통 붉게 보였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희미하게나마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열수는 폭만 넓은 것이 아니라 깊이도 꽤 깊었다. 하긴, 그러니 그 거대한 볼카웜이 숨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그는 호흡을 위해 물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었다. 피닉스는 굳이 호흡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유영하며 열수 안을 살피던 하룬은 결국 볼카웜은 찾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나있는 깊은 지하 동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직경이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동굴에 가까이 가자 물이 빠져나가는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호수를 샅샅이 훑었지만 지하에서 보글거리며 올라오는 작은 물줄기들과 열수가 빠져나가는 동굴 외엔 특별한 곳이 보이질 않았다. 비수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진동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이 안에 있어. 할 수 없지. 그럼 저 동굴에 들어가는 수밖에.’

 하룬은 마음을 정하고 동굴 안으로 유영해 갔다. 동굴은 생각보다 깊고 넓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넓어져서인지 유속도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볼카웜이 있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한 하룬은 유속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 안쪽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유속이 빨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이상한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주위가 갑자기 좁아지고 있었다. 몸이 빠르게 앞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본 소드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뭘 어쩌기도 전에 몸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자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간 움직였을 때 하룬의 눈에 아래위로 분리된 두 동굴이 들어왔다.

 동굴 아래는 사람 하나가 간신히 빠져나갈 정도로 좁았지만 그 위의 동굴은 입구부터 꽤 컸다. 입구에서 약간 위쪽으로는 물이 없었다.

 하룬은 물이 없는 부분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볼카웜의 체액을 볼 수 있었다. 보는 순간 그 동굴로 볼카웜이 도망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룬이 팔을 휘저으며 물을 박차자 몸이 마치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것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동굴 입구로 뛰어 올랐다. 피닉스와 합체한 것을 고려하더라도 기민하고 날렵한 움직임이었지만 막상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입구에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위를 향해 경사가 져 있었고, 금방 물을 벗어날 수 있었다. 물을 벗어난 지점부터 안쪽으로 쭉 이어진 볼카웜의 체액을 볼 수 있었다.

 언제 어떤 식으로 놈이 급습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잔뜩 긴장한 상태로 안으로 들어가던 하룬의 눈에 거대한 공동이 들어왔다.

 끄르르르.

 공동 안으로 들어가자 볼카웜의 신음이 들렸다. 안쪽에는 거대한 동체를 가진 볼카웜이 바닥에 머리통을 처박은 상태로 몸통을 수축했다 팽창하고 있었다. 놈의 머리가 박힌 바닥은 다른 곳과 달리 따듯한 열기가 느껴지는 진흙이었는데 그 주변에는 거대한 크기의 이빨들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나이아, 워터 밤을 터트려 줘.

 -알았어요, 하룬.

 나이아가 자신의 몸에서 떼어 낸 수십 개의 물 덩어리가 볼카웜을 향해 날아갔다. 볼카웜의 항문을 통해 워터 밤이 들어간 직후 놈은 어떤 징후를 느꼈는지 바닥에서 머리통을 뺐다.

 “어!”

 분명히 안면 부위를 가르고 머리통에 본 소드를 깊이 박았었는데 어느새 그 상처 부위들이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저 바닥이 뭐기에 그만한 상처가 다 나은 거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워터 밤!

 꽈앙! 꽝! 꽝!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한 폭음과 함께 거대한 볼카웜의 동체가 터질 듯 연속적으로 팽창했다.

 “이런!”

 실패다. 안의 속살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가죽은 무사했다. 하룬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볼카웜의 유달리 길고 굵은 촉수가 폭발적으로 움직였다.

 위기를 감지한 걸까, 볼카웜은 이빨을 회전시키는 것을 멈추고는 속 주둥이를 동그랗게 모으고 공기를 빨아들였다.

 전에는 몰랐지만 몇 번 볼카웜을 상대하고 난 하룬은 그것이 화염 브레스를 뿜어내기 바로 전 동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닉스, 놈의 입안으로!”

 급하게 피닉스에게 지시한 하룬은 화염병을 꺼내들고 바닥을 박찼다. 몇 번 바닥을 강하게 차자 하룬이 몸이 새처럼 볼카웜을 향해 날아갔다. 위신느를 소환할 여유가 없어 직접 움직임 것이다.

 볼카웜의 입안이 제대로 잘 보이는 곳에서 있는 힘을 다해 화염병을 놈의 입안에 투척한 하룬은 뭘 어쩔 여유도 없이 한순간에 머리부터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꽈앙!

 굉렬한 폭발음과 함께 주위가 후끈해졌다. 순간적으로 볼카웜의 머리 부위에서 화염이 솟구치더니 이내 몸 전체가 화염이 휩싸였고 반경 20여 미터가 불바다가 되었다.

 -하룬!

 -괜찮아요?

 두 정령이 화염 밖으로 물러나 하룬을 찾았지만 불바다 속에서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피닉스는 불바다로 날아가 안쪽을 뒤졌지만 하룬을 찾을 순 없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이아는 뭘 생각했는지 주변의 수분을 있는 대로 빨아들였다.

 화염을 물로 끌 생각인지 있는 대로 몸체가 커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공동의 천장에 닿을 정도로 몸집을 키웠던 나이아는 뭘 감지했는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몸을 원래대로 돌렸다.

 -어디로 간 거지? 하룬은 안전한데.

 -모르겠어. 분명히 불 속에는 없어.

 두 정령은 하룬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좀 더 편해진 얼굴로 화염이 꺼지기를 기다렸다. 기세를 올리며 타오르던 화염은 주변 공기를 다 빨아들인 탓에 오히려 금세 사그라졌다.

 불바다가 되었던 바닥은 까맣게 변해 있었다. 볼카웜의 거대한 동체는 단단한 몇 개의 뼈들과 이빨들을 남기고 모두 타 버렸다.

 꿈틀꿈틀.

 갑자기 까맣게 타 버린 바닥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잠시 후 하룬의 몸이 두 발부터 땅속에서 빠져나왔다. 어느새 소환한 것인지 라이피가 하룬의 몸을 밖으로 빼내기 시작한 것이다.

 “휴우, 바닥이 물렁한 진흙이어서 살았다.”

 지면 밖으로 나온 하룬의 얼굴과 몸은 온통 진흙으로 범벅이었다. 하지만 더럽거나 불편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응? 이 흙이 특별한 건가?”

 -하룬, 이곳은 순수한 대지의 마나와 물의 마나가 가득한 곳이야.

 그를 진흙 밖으로 끌어낸 라이피는 정확하게 이곳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볼카웜이 머리를 이 흙 속에 박고 있었던 것만으로 그 심한 상처가 다 나은 거였어.”

 대지 속성과 물 속성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대지보다는 물의 정령이 더 강한 치유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놈이 화염 브레스를 내뿜기 직전에 화염병이 터져서 정말 다행이다.”

 -호호! 멋진 타이밍이었어요.

 나이아가 웃으며 하룬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근데 이곳은 어디지?”

 -아마 상처를 입은 볼카웜들이 찾아오는 곳이니까 혹은 죽을 때가 되어 찾아오는 묘지가 아닐까?

 “그럴듯한 소리인데. 라이피가 정확하게 파악한 거 같아. 이빨의 크기를 보니까 보통 볼카웜들은 아닌 거 같아.”

 라이피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라이피는 하룬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 듯 얼굴에 진한 웃음을 떠올리며 다른 두 정령을 보았다.

 “가만! 아까 안내음이 들렸는데. 확인해 보자.”

 -볼카웜 킹을 해치웠습니다.

 -볼카웜 킹 슬레이어 칭호를 얻었습니다. 칭호의 효과로 전 스텟이 2 상승합니다.

 -레벨이 3 상승합니다.

 -아이템 2개를 획득합니다.

 -S.P.를 500 얻었습니다.

 -H.P.를 1,000 얻었습니다.

 ‘대박이다!’

 워낙 크고 강한 놈이라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만 설마 볼카웜 킹인 줄은 몰랐다. 그간 꽤 레벨 업을 한 상황에서도 단숨에 3레벨이나 상승했고, 아이템도 두 개나 얻었다. 인벤토리에 들어온 아이템이 궁금했다.

 “정보 창 오픈!”

『볼카웜 본 소드

등급: 유니크

볼카웜의 이빨은 강철을 능가하는 강도를 가지고 있으며 마나 전도율이 미스릴에 버금갈 정도이다. 화염 속성을 지니고 있어 화염계마법을 인챈트하면 한 등급 더 높은 아이템으로 바뀔 수 있다.

옵션: 체력 +5, 지혜 +5, 민첩 +5

제한: H.P. 500 이상』

『볼카웜 본 비수 세트

등급: 유니크

볼카웜의 이빨 뼈로 만든 비수 세트이다. 마나 전도율이 높아 마나를 주입하면 마나의 성질에 따라 다양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옵션: 힘 +5, 민첩 +5, 심안 +3

제한: 마나 사용자』

 정말 끝내주는 아이템들이었다. 정보를 확인한 하룬은 입이 떡 벌어져 다물어질 줄 몰랐다. 특히 볼카웜 본 비수 세트는 하룬에게 최상의 아이템이었다. 아직 비도지존의 유물을 다 찾지 못한 상태라 그 정보를 자세하게 알 수 없어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비수는 최상의 선물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정신을 차린 하룬은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볼카웜의 이빨들을 아공간으로 집어넣었다. 아마 드워프들이 보면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장인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최고의 재료 아이템인 것이다.

 어쨌든 생각한 것보다 훨씬 소득이 많았지만 기대했던 비도지존의 유물은 없었다. 이빨들을 수거하며 모든 곳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비슷한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가야겠다.”

 -하룬, 잠시만요.

 나가겠다고 생각한 순간 나이아가 소리쳤다.

 “왜, 나이아?”

 -이곳에 잠시만 더 머무르면 안 될까요? 워낙 순수한 마나여서 좀 흡수하고 갔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친구.

 라이피까지 나섰다. 정령들이 욕심낼 정도로 순수한 속성 마나들이 가득한 곳이란 사실에 하룬도 욕심이 났다. 이런 곳에서 마나 플로를 수련한다면 그 효과가 클 것이다.

 -나도, 나도요. 여긴 열천 때문에 내 속성의 마나가 풍부한 곳이에요.

 “그래, 그러자고. 그런데 내 정령력으론 너희들을 그리 오래 소환할 수 없는데.”

 하룬은 자신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정령들의 태도에 기분이 좋은 한편 아쉬웠다. 셋을 동시에 소환하기에는 정령력이 약했던 것이다. 그 순간 문득 원소석이 생각났다. 예전에 나이아가 원소력을 흡수한 적이 있지 않은가.

 ‘이런! 그럼 명치 부위에 있는 마나가 혹시?’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반 정도로 작아져 버린 원소석과 함께 명치 부위의 마나 오션에 자리를 잡았지만 하룬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던 그곳의 마나는 어쩌면 원소석이 뇌전에 녹으면서 생성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야 마나와 정령력이 급증한 것이 개연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 기회에 다른 원소석도 흡수하게 하자.’

 “나이아, 지난번에 내 몸속에 들어와 흡수했던 원소석 기억해?”

 -당연히 기억하죠. 언젠가 또 흡수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하룬과 일체화되는 것도 기분이 좋았어요.

 “나이아가 내 몸속으로 들어와 원소석의 원소력을 흡수할 때는 마나와 정령력의 소모가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어요.

 “좋아. 그럼 이곳의 마나를 흡수하다가 적당할 때 들어와 원소석의 원소력을 흡수해.”

 -정말요? 너무 기뻐요!

 나이아는 반색하며 하룬의 목을 끌어안았다. 하룬의 몸과 맞닿은 그녀의 몸이 쑥 들어가 특유의 상큼하고 약한 비린내가 섞인 체취가 느껴졌다. 전과 달리 체취까지 느껴지는 것을 보면 그사이 또 성장한 것 같았다.

 -친구, 나도 그래도 되지? 지난번에 흡수한 양이 너무 적었거든.

 라이피가 기대 어린 눈으로 하룬을 보았다.

 “그럼, 당연하지. 그런데 원소석들이 많이 작아졌는데 괜찮을까?”

 -어디.

 라이피가 바닥으로 스며들더니 순간적으로 발바닥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왔다. 한 줄기 이질적인 기운이 발바닥에서 명치까지 솟아올랐다. 아마도 라이피일 터였다. 녀석은 잠시 그곳 주변에 머물다가 들어왔던 곳으로 나와 연기처럼 다시 하룬의 앞에 나타났다.

 -와아! 하룬, 대단해! 원소석은 작아졌지만 대신 강하게 농축되었던 원소력이 흡수하기 좋은 형태로 변환되었어. 물론 아직은 친구가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풀어진 것은 아니지만 나이아와 난 이전보다 훨씬 쉽게 흡수할 수 있을 거야.

 근육질의 몸을 가진 역사力士의 모습을 하고 있는 라이피는 얼굴에 측량할 수 없는 환희의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좋아. 그럼 위신느까지 불러야겠다.”

 약초 마을 촌장에게 받은 원소석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령 친구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뿌듯했다. 위신느까지 소환한 하룬은 불과 바람 속성의 원소석을 삼켰다.

 이미 뭔가 알고 있었는지 위신느와 피닉스는 기대 어린 눈으로 하룬을 지켜보았다. 두 원소석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명치 부위의 마나 오션으로 이동했다. 하룬은 이제 총 네 개의 원소석과 액체로 느껴지는 마나를 인지할 수 있었다.

 “이제 됐어. 들어와서 원소력을 흡수해.”

 -끼약! 우리 하룬 최고! 나도 나이아처럼 근사한 여자가 되어서 돌아올게.

 -크크, 내 몸이 어떻게 변할지 나도 궁금해. 하룬과 친구가 된 건 정말 행운이야.

 위신느는 온몸의 피부를 통해, 피닉스는 손바닥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두 정령의 움직임은 이질적이면서도 전혀 불쾌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나이아와 라이피는 어느새 부드러운 바닥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다른 정령들보다 더 많은 정령력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나도 그럼 오랜만에 마나 플로나 수련해 볼까.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

 명치 부위의 마나 오션은 마나 로드 상에 있었기에 걱정이 좀 되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지난번 나이아와 라이피가 정령력을 흡수할 때는 스킬을 수련하거나 지혜의 파편을 꺼내 영상 강의를 듣고 있엇던 것이다.

 하지만 정령석 때문에 자신의 정령력이 늘어났다는 것을 안 순간 새로운 시도를 해 보고 싶었다. 단지 알려진 대로 각 속성의 마나가 풍부한 곳에서 명상을 하거나 정령들과 친화력을 높이는 것만으로 정령력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마나처럼 축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어디!’

 하룬은 정좌하고 하복부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마나 오션에 정신을 집중했다.

 하룬이 데브론에게 새로 배운 메신저 스킬 특유의 마나 플로는 누군가 몸을 건드리기만 해도 상당한 내상을 입는다고 했다. 운행 경로가 복잡한 만큼 집중도도 높아야 하고, 방해 요인도 없어야 했다.

 그가 알고 있는 또 한 가지의 마나 플로가 있었다. 자신 스스로 발견한 이 마나 플로는 운행 경로가 짧은 대신 마나 축적 효율이 낮은 단점이 있다. 하지만 안전하기로는 따라올 것이 없었다. 웬만한 외계 충격으로도 내상을 입거나 하지 않는다.

 하룬은 상체를 앞뒤로 연결하는 마나 로드를 따라 마나를 운행했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마나가 넓게 뚫린 마나 로드를 타고 시원하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미 넓게 뚫린 마나 로드라서 거칠 것이 없었다.

 순식간에 마나는 경로를 다 돌고 마나 오션으로 돌아왔다. 느껴지는 변화는 미미했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해 미세하게나마 마나량이 늘었고, 그 성질이 순수해졌을 것이다.

 ‘이번에는 마나 오션을 지나칠 때 시간을 끌어 보자.’

 이제까지는 마나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의식을 분리해 어퍼 마나 오션과 명치 부위에 존재하는 마나 오션에도 신경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의지를 받아들인 마나는 미처 멈출 여유도 없이 쾌속하게 질주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하룬은 몇 번이고 의식을 나누어 다른 두 마나 오션에도 정신을 집중했고, 그 결과 미세하지만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변화를 감지했다.

 ‘됐다!’

 전혀 다른 성질의 마나임에도 어퍼 마나 오션에 자리 잡은 뇌전의 마나가 조금씩 본류의 후미에 따라붙기 시작했다. 아직 섞이거나 다른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움직여서 다행이다.

 명치 부위에 있는 마나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씩 본류에 따라붙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씩 그 양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룬은 금방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잊었다. 자신의 몸속에 자리하고 있는 정령들의 존재도 잊고, 시간의 흐름도 잊어버렸다. 심지어는 자신이 현재 게임을 하는 중이란 사실도 잊어버렸다. 완벽한 무아지경이었다. 그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하룬이 무아지경에서 깨어난 것은 다급한 나이아의 경고음 때문이었다.

 -하룬, 그만해요! 제발 멈춰요!

 ‘뭐지?’

 집중이 풀리자 자연스럽게 의식이 돌아왔고 운행하던 마나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나이아?

 -휴우, 다행이다. 우리까지 빠르게 운행하는 하룬의 마나에게 끌려갈 뻔했어요.

 -으응? 그게 무슨 소리야?

 -하룬의 마나 흐름이 너무 강력하고 빨라서 원소력을 흡수하던 우리까지 원소력과 함께 마나의 흐름에 휩쓸릴 뻔했다고요.

 희한한 일이다. 그는 마나 플로를 운행하면서 특이한 현상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일단 모두 원소력 흡수하는 것을 멈추고 나와 봐.”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하룬, 나 왔어요.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위신느였다. 그녀를 보는 순간 하룬은 숨이 턱 막혔다. 네 쌍의 날개를 등에 단 그녀는 원소력을 얼마나 흡수한 것인지 그와 비슷한 크기로 성장했고, 숨 막히는 염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때요?

 부끄러운 듯하면서도 자부심이 느껴지는 그녀의 물음에 기대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지만 하룬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것에도 교태와 사랑스러움이 물씬 배어 나오는 그녀를 본 순간 심장이 거칠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이건 완전히 천사잖아!’

 -히잉. 대답도 안 해주고, 미워.

 살짝 눈을 흘기는 위신느의 폭발적인 염기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다. 십 대의 풋풋함과 이십 대의 발랄함과 청순함 그리고 삼십 대의 성숙함이 모두 섞인 위신느의 외모와 행동은 이제까지 그가 현실과 게임에서 만났던 모든 여인들 중 단연 발군이었다.

 “너…… 위신느가 맞는 거야?”

 -푸훗. 바보 같아. 하룬이 날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 난 하룬이 원하는 여성상으로 진화했을 뿐이라고요.

 자신이 그런 여성상을 원했던 건가? 어쩌면 잠재의식에서 그렇게 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정령 주제에 보는것만으로 마음이 진탕되고 기분이 야릇해지는 이런 염기라니.

 -내가 성장한 모습이 마음에 드는 거죠? 싫으면 안 되는데. 이젠 바꿀 수도 없단 말이에요. 하룬이 날 싫어하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하룬의 굳은 얼굴이 걱정스러운 듯 바람으로 만들어진 반투명 윈드 드레스를 팔락거리며 그의 앞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위신느의 얼굴은 불안하기만 했다.

 “조, 좋아! 너무 나음에 들어. 단지…….”

 -호호, 정말이죠? 내가 마음에 드는 거죠? 나도 하룬이 너무 좋아요.

 하룬의 말에 만개한 꽃처럼 폭발적인 웃음을 지으며 목을 감고 안기는 위신느에게선 진한 꽃향기가 흐르고 있엇다.

 ‘흐읍! 뭐야?’

 하룬은 위신느의 불룩한 가슴이 전하는 부드럽고 풍만한 감각과 강렬한 체향에 눈을 부릅떴다. 정령에게 이렇게 생생한 물리적인 감각을 느끼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하룬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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