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힌 입구》
이튿날 브리엘라 황녀 일행은 하룬이 제공한 전투마와 보급품을 가지고 광산 지대로 떠났다.
"제길! 시원하네. 귀족이니 기사니 거들먹 거리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런데 전투마들은 왜 끌고 간 거야?"
"제기랄! 죽 쑤어서 개 준 꼴이군. 저희들이 무슨 공을 올렸다고 저 비싼 전투마까지 가져가는 거야?"
"놔둬라! 차라리 저치들은 빨리 떠나는 편이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어차피 저 숫자의 전투마로는 우리에게 큰 도움도 되지 못하니꺼 투덜거리지 마."
용병들과 이방인들은 떠나는 황녀 일행을 두고 불만을 토로했지만 대부분은 시원하다는 얼굴이었다.
밤사이 아반 부녀처럼 전투를 앞두고 로그아웃했던 이방인들이 합류했지만 하룬은 굳이 그들을 배척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런 질책이 없다는 것에 안심했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그들을 마음속 동료 명단에서 빼 버린 상태였다.
하룬은 부담을 주던 원인이 사라지자 조금은 편한 기분이 되었다. 출발 준비를 마친 사람들은 하룬을 비롯한 용병들의 수뇌부를 주시했다.
"여기서부터는 프레스 님이 리더입니다."
"무슨 소리요? 대장이 계속 이끄시오."
프레스는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리더 자리를 양보하는 하룬을 쳐다보았다.
"아닙니다. 그동안은 브리엘라 황녀와 데브론 경과의 관계 때문에 할 수 없이 나이도 어리고 경륜도 부족한 제가 리더 자리를 맡았지만 이제는 우리밖에 없으니 용병계의 관행대로 가장 큰 무리의 수장이신 단장님이 우리를 이끌어야지요. 저와 돌풍은 우리의 특기인 정찰을 맡겠습니다."
"허어!"
프레스는 탄성을 질렀지만 굳이 고사하지는 않았다. 하룬의 말이 맞았다. 사실 제국의 10대 용병단 중 하나인 그의 위상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게. 하룬 대장의 말이 맞네. 자네가 아니면 누가 우리 일행을 이끌겠나?"
"나도 찬성이야."
피엘과 나바스론의 말까지 더해지자 프레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제국 10대 용병단 중 하나를 맡고 있는 자신이 하룬을 보좌하는 것에 불편한 마음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좋아! 그렇게 하지."
곧 프레스가 이 일행의 새로운 리더가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용병들은 수뇌부의 결정에 만족했다.
"역시 난 용병은 달라!"
"그러게. 능력은 물론이고 마음 씀씀이도 예사롭지 않아. 능력을 갖추고도 겸손하게 처신하는 것을 보면 용병계의 영웅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
"이를 말인가. 능력마능로 보면 용병들 중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선배 대접을 깍듯하게 하는 것을 보면 품성도 최고야. 가히 여웅ㅇ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지."
용병들은 하룬의 처신을 칭찬했다. 사실 용병들은 그 무엇보다도 능력을 우선시했다. 능력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용병들의 위험한 생활 때문에 생겨난 관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관습이라는 것은 무시할수 없어서 젊은 용병이 과도하게 나서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프레스는 돌풍 용병대의 티노와 도네이스를 척후로 하고 하룬에게 후미 정찰을 맡겼다. 어제까지 일행의 리더였기에 그런 위험한 임무를 주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들이 원한 일이기도 했고, 사실 그 어느 용병들도 그들의 빠른 발을 따라갈 자는 없었다.
막 하룬이 정찰을 위해 후미로 빠지려던 때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꽈아앙! 꽈아아앙!
굉음과 함께 대지가 몇번이나 흔들렸다.
"뭐, 뭐야?"
"지, 지진이닷!"
사람들이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이 하룬의 깊은 눈은 트레저 분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쪽에서부터 전해지는 강한 충격파가 발을 통해 감지되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트레저 분지 지하의 그레이브 시티에 은신하고 있는 그린 엘프 일족과 붉은 모루 부족 드워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어쨌든 그와는 깊은 우정 관계를 맺게 된 이들이었다.
워낙 끔찍한 고생 한 곳이라 사람들이 많이 놀랐지만 충격파는 한 번으로 끝났다. 흔들리던 대지도 고요하게 제자리로 돌아왔고, 굉음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다만 트레저 분지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하늘에는 짙은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검증의 관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옆에 있던 엘저가 물었다. 제법 오래 쉰 덕분에 얼굴이 많이 좋아진 그녀였다.
"그럴 수도 있지. 저건 분명히 강력한 폭발의 흔적이야."
피엘의 대답에 하룬은 마음이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돌아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생각이었다. 추격자도 있을 상황에서 많은 역할을 수행하는 자신이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사라지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그저 마음속으로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잠시 행렬을 멈추고 추후의 변화를 지켜보았지만 대지는 아무 일 없었따는 듯 고요해졌고, 먼지구름도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따.
"자, 다시 출발하자고! 다크 엘프 놈들이 볼카웜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검증의 관이라도 폭파했나 보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가자고!"
프레스의 말에 선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룬도 그제야 메신저 스킬을 펼쳐 후미로 달려갔다.
후미 정찰을 맡은 하룬은 비로소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숙영지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숲에 도착한 그는 그늘에 앉아 위신느를 소환했다.
"위신느, 나와."
-후후.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물질계는 정말 아름다워요. 할 일이 없어도 좀 불러 줘요. 나 하룬이 있는 이곳이 좋단 말이에요.
"알았어. 그러도록 하지. 일단 정찰을 부탁해."
-후훗. 금방 다녀올게요.
위신느는 습관처럼 하룬의 입술에 뽀뽀하고는 돌개바람을 일으켜 하늘로 올라갔다.
정령석으로 위신느의 능력이 많이 올라간 덕분에 꽤 넓은 범위의 정찰이 가능했다. 일단 위신느를 소환해서 부채꼴로 약 5킬로미터 범위를 정찰한 결과 별다른 특이 사항을 찾을 수 없었다.
"흠. 그럼 이제 확인을 좀 해볼까?"
하룬은 아공간을 열어 세 개의 아이템을 꺼냈다. 황자 연합으로부터 의뢰 대금으로 받은 것이었다. 그동안 내내 궁금했는데 개인적인 시간이 나질 않아 확인하지 못해싿.
"팔찌와 구슬 그리고 나침반이네."
한눈에도 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고풍스로운 문양이 새겨진 미스릴 필찌의 정보를 확인했다.
『마법 팔찌
등급 : 유니크
고대 유물 중 하나로, 8서클 마스터인 카리타크가 제작한 마법 아이템이다. 하루에 한 시간 동안 소지자의 몸과 소지물에 투명 마법을 걸 수 있다. 투명 마법과 함께 사일런스 마법이 같이 발현되어 소지자의 기척을 숨겨준다.』
"흠, 대단한 물건이네."
아마 현실에서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유내온 뱅크라도 털어서 단숨에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목숨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쓰면 더할 나위 없니 좋은 아이템이었다. 아니, 어쌔신들이 사용하면 최상의 무기가 될 것이다.
흐뭇한 얼굴로 당장 팔찌를 찬 하룬은 다음 것을 보았다. 나침반처럼 생긴 물건으로, 세월의 풍상이 그 기품을 더해 주고 있었다.
『서칭 파인더
등급 : 유니크
제작자 미상의 아이템으로, 원하는 물건을 찾는 데 유용하다. 중간에 있는 홈에 찾는 대상의 일부분을 넣으면 바늘이 그 방향을 가리킨다. 다만 그 거리는 알 수 없다.』
"호오, 이건 쓸 만하네."
그랬다. 언뜻 보았을 때는 나침반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바늘 끝이 하나였다. 거리를 알 수 없다는 단점은 있지만 그 대상이 무엇이든 흔적만 남아 있다면 반드시 찾을 수 있는 물건인 것이다.
'진수 형한테나 줘야겠다.'
파인더인 진수라면 유용하게 잘 쓸 것이다.
하룬은 그 물건에는 더 이상 관심을 끊고, 마지막 구슬에 주의를 기울였다.
『디톡시케이션 마블(해독 구슬)
등급 : 유니크
인간에게 유해한 독성을 흡수해서 해독해 주는 구슬이다. 마나를 사용하면 해독 속도가 더 빨라진다.』
"대박이닷!"
하룬은 탄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찾던 물건을 드디어 손에 넣은 것이다.
"이제야 싸가지를 제대로 소환할 수 있겠어."
비록 해독약이 있긴 하지만 트레저 분지 지하에서처럼 습격당했을 때는 소용이 적으니 이 아이템이야 말로 하룬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기쁜 마음에 당장 싸가지를 소환했다.
-웬일이야, 주인? 별일도 없어 보이는데.
의뭉스럽게 주절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하룬의 손에 들린 구슬을 응시했다. 비록 안내음은 비활성 상태였지만 하룬은 중독의 기미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해독단을 복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녀석을 소환할 때면 늘 있었던 마비 증상도 없고 찌릿한 감각도 없었다.
"흐흐흐."
절로 괴소가 흘러나왔다.
-무슨 물건인데 그렇게 음침하게 웃는 거야? 혹시 저걸로 날 어떻게 하려는 거야?
하룬에게 당한 것이 있어서 그런지 대번에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하지만 하룬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비로소 녀석의 눈에서 불안한 빛이사라지고 호기심이 떠올랐다.
"해독구슬이다."
-해독 구슬?
싸가지는 두 눈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 해독 구슬에 손을 대었다.
스르르.
싸가지의 몸에서 흐릿하지만 거뭇한 연기가 흘러나오더니 구슬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엇! 정말이네.
싸가지의 얼굴이 환해졌다. 주인에게는 뻥을 쳤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켜켜이 쌓인 독성을 제거하거나 분리시키는 것이 요원했는데 그것이 풀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지고 들어가."
-흐흐흐. 끝내주는 아이템이야. 고마워 주인.
싸가지는 입을 다문지 못하고 자신의 아공간으로 돌아갔다.
'이제 녀석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겠구나. 과연 어떤 모습일까? 저 녀석도 다른 정령들처럼 의지대로 모습을 구현하는 걸까 아니면 원래 모습이 있는 걸까?'
그동안은 손을 쓸 수 없어 포기했지만 방법이 생기자 싸가지에 대한 생각이 줄줄이 떠올랐다. 사실 제일 먼저 거둔 정령이라 그 정이 남달랐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녀석의 원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젠 게임보다 현실에 더 많이 신경을 쓰려고 했는데.'
그런 마음을 먹은 참에 내내 마음에 걸리던 것이 해결될 기미가 보인 것이다.
'조금만 더 게임을 즐겨 볼까?'
녀석 때문에라도 그래야 할 듯했다. 사실 수련을 생각하면 현실과 이곳을 정기적으로 오가야 한다. 동화율이 70%라고 본다면 시간상으로 세 배 차이니 이곳에서 수련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물론 현실 적응성 면에서 현실에서의 수련도 무시할 수 없기에 따로 시간은 내야 했지만 말이다.
황녀 일행과 헤어진 하룬 일행은 나흘을 꼬박 강행군한 후에야 원래 목표인 트롤의 숲에 도착했다. 비록 이름은 트롤의 숲이지만 고요의 땅에 들어온 인간들에게 벌써 상당수가 죽고 나머지는 북쪽으로 도망친 터라 숲은 안전했다.
이제 겨우 해가 중천에 오른 시간이었지만 워낙 강도 높은 행군을 했기에 용병들과 이방인들은 숙영지를 만든 후 바로 휴식에 들어갔다.
비록 지치기는 했지만 돌풍 용병대원들은 휴식 대신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앞으로의 상황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설마 다크 엘프와 북부군이 고요의 땅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건 아닐까요?"
고요의 땅 입구가 하루 거리였지만 티노의 얼굴은 잔뜩 굳었다. 이틀의 거리를 두고 맹렬히 추격해 온다는 추격자들도 신경이 쓰였지만 입구 쪽의 상황도 낙관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마 그럴 걸세. 작정을 했으니 그냥 보낼 리가 없지."
타니엘라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물론 본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엄청난 숫자의 군대는 어지간한 실력이나 숫자가 아니고서는 상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이번에 확실하게 알았다.
"아마 대회전이 될 걸세. 이쪽 입장에서도 잘못하면 양쪽에 끼여 압살당하는 수가 있으니 전열을 정비할 시간도 없이 입구를 막고 있을 연합군을 뚫고 나가는 수밖에는 없지."
딜런의 말에 대원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다들 본능적으로 이제는 본격적인 대단위 전쟁이 코앞에 닥쳤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으 얼굴에 늘어띌ㄴ 채 생각에 잠긴 하룬에게 미루스가 물었다. 타니엘라와 마찬가지로 마법사치고는 온후한 기질을 가진 미루스는 별 어려움 없이 용병대에 녹아든 상태였다.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까지 굳이 전장에 낄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룬의 낮고 굵은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확 쏠렸다. 심지어 그들은 하룬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뜨거운 관심을 표명했다.
"그, 그럼 고요의 땅 입구가 아니라 다른 길을 통해서도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까?"
티노가 반색하며 물었다. 싸우지 않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면 더할 바 없이 좋은 일이다. 어차피 테론 제국이나 파이론 제국이나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에게 전쟁이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일이다.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일 때문에 하루 정도는 이 주변을 정찰해봐야겠습니다."
하룬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이제까지 하룬을 경험한 대원들은 그가 가볍게 말을 내뱉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 이야기했으면 이곳을 벗어날 무슨 수가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당장 티노가 나섰다. 원체 몸이 빠르고 지형을 파악하는 데 뛰어난 티노인지라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나서려다가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요, 부대장은 여기 계세요. 혼자 다녀오지요."
"안 됩니다, 대장. 이곳은 혼자 다닐 정도로 안전하지가 않습니다."
당장 티노가 말리려고 나섰고 다른 대원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비록 트롤같은 몬스터들은 없다고 해도 연합군이 어디까지 전찰대를 보내고 있을지 모른다.
"대장, 내 생각에도 혼자서 행동할 상황은 아닌 것 같네. 티노 부대장뿐 아니라 나도 같이 가겠네. 아니면 차라리 대원들에게 맡겨주게."
딜런의 말에 다들 자신도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사실 어느 용병대장이 위험한 일에 직접 나서겠는가. 하룬이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대원들의 기세를 보니 영 혼자 보내 줄 의향이 없는 듯했다.
'곤란한 걸.'
어제 늦게 캡슐로부터 아즈만의 전언이 왔다. 나인을 비롯해 영흥 마을 전사들이 주문한 물건들을 가지고 온다는 소식이었다. 그동안 제작한 사이보그 몇 기는 있지만 그들을 맞아 물건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나가 봐야만 했다.
'역시 벨이 빨리 분화해야 해.'
과거에는 벨이 거의 모든 일을 처리했기에 게임을 하고 있는 그에게 따로 전언이 오는 경우가 없었지만 지금은 벨이 분화 중이라 그에게 직접 전해진 것이다.
그렇다고 이방인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 대원들 앞에서 사실을 밝힐 수도 없으니 곤란한 노릇이다.
'할 수 없지. 또 거짓말을 해야겠구나.'
하지만 선의의 거짓말이니만큼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는 않았다.
"사실 다른 특수대원이 이 임무 때문에 오랫동안 주변을 정찰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보고받길,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찾았다고 했으니 가서 확인하고 와야 합니다."
하룬의 말에 대원들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했다.
"다른 대원요?"
"으음. 그렇군요. 대장은 벌써 이런 상황을 예측해서 다른 대원을 파견시켜 놓았군요."
"대장, 도대체 우리 용병대에는 숨겨진 대원들이 얼마나 더 있는 겁니까?"
대원들은 다시 튀어나온 새로운 대원이라는 존재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안 그래도 믿을 수 없는 실력과 기지로 불가능에 가까운 의뢰들을 성공시켜 다들 신비의 용병대로 생각하는 상황이다.
"때가 되면 모두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하룬의 말에 대원들은 애써 호기심을 눌렀다. 그러면서 강한 안도감을 느꼈다. 용병대의 대원으로서 그 신비와 비밀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미리 안배한 대원들이 있으니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도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하룬은 대원들의 얼굴에서 묘한 감정을 확인했다. 드러나지 않은 비밀스러운 부분에 대해 자신들이 알지 못한다는 점에 불만을 가진 것 같았다. 이런 일은 빨리 수습해야만 한다.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비공식 계약관계를 가진 대원들이라 아직은 소개를 시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처럼 능력이 검증된 상황이 아니거나 혹은 정체가 드러나면 곤란한 신분을 가진 경우가 많아 대원들에게도 공개할 수 없는 점을 양해해 주십시오. 여러분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그것을 원하기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미리 말하지만 이렇게 따로 은밀하게 활동하는 대원들의 숫자는 꽤 많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대원들은 이제야 비밀 대원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한 것 같았다.
'귀족들이나 기사 출신들도 많겠군.'
그런 이들이라면 용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하룬 대장은 그들이 마음에 차지 않아 정식 대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룬의 말을 들은 대원들은 이제껏 몰랐던 용병대의 비밀을 한 겹은 벗겨 낸 기분이었다.
대원들은 그제야 서운함이 풀리면서 자긍심이 들었다. 어쨌건 자신은 정식 대원이니 능력만큼은 검증을 받은 것이다.
하룬의 말이 제대로 먹혔는지 대원들은 더 이상 동행을 고집하지 않았다. 이제는 가끔 이루어지는 비밀스러운 하룬의 행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확실하게 파악한 것 같았다.
"어쨌든 몸조심하게, 대장. 대장이 무사해야 우리 용병대가 무사하니 말일세."
딜런의 말에는 진정(眞正)이 깔려 있었다. 데브론이 그랬듯 마음을 나누기 시작하자 애틋한 부정(父情)까지 주고 있는 딜런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올 테니 그동안 부대장과 함께 주변 상황에 대처해 주십시오."
"걱정 말게. 우리 전력이면 어지간한 기사단은 상대할 수 있으니까."
딜런의 자신감 섞인 말에 하룬은 안심이 되었다. 사실 익스퍼트 최상급 검사에 6서글 마법사 둘 그리고 특급 궁사가 포함되어 있고, 예민한 감각과 임기응변이 강한 대원들이라면 큰 위험이라도 잘 대처할 것이다. 거기에 더해 뛰어난 용병들이 수천이나 있으니 소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으로 보아도 무방했다.
하룬은 엘저와 피엘 등 다른 용병들에게도 자신의 일을 잘 설명해 줄 것을 부탁하고는 길을 나섰다.
'굳이 고요의 땅 입구로 갈 필요는 없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약초꾼 길드에서 받은 지도책을 살펴보았던 하룬은 두세 군데 고요의 땅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 놓은 상태였다. 비록 그 길이 무척 위험하고 일행의 숫자가 좀 많기는 하지만 다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용병들이니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빼고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트레저 분지를 떠나기 전 1황자를 비롯한 황자들이 고요의 땅 입구 근처에서 만나자고 청했지만 하룬은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은 이방인, 테론 제국에 충성심도 없거니와 더 이상 엮일 생각도 없었다.
의뢰 대금은 챙길 만큼 충분히 챙겼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거금을 벌었으니 더 이상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다.
하룬은 현실로 돌아가기 전에 넓은 범위를 정찰할 생각으로 트롤의 숲 남단으로 향했다.
하룬은 트롤의 숲 남단에서 정찰을 내보낸 위신느를 기다리고 있었다. 숙영지가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이곳에서 고요의 땅 입구까지는 약 하루가 안되는 가까운 거리였다.
이곳까지 오는 사흘 내내 틈틈이 정령들을 소환해 센트럴 오션으로 들어간 정령석의 힘으로 흡수하게 한 결과 위신느의 정찰 범위는 한 번에 약 30킬로미터 이상으로 확장되었다. 물론 그사이에 꽤 많이 늘어난 정령력을 모두 소진해야 했지만 대신 안전하고 빠른 정찰을 할 수 있었다.
약간 어지러운 기분이 드는 것을 보니 정령력이 바닥까지 내려간 모양이다. 수치를 확인하려던 하룬은 위신느가 돌아 온 것을 느꼈다.
-나 왔어요, 하룬.
"수고했어. 상황은 어때?"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입구에 모인 숫자가 꽤 많아요. 인간들과 엘프들이 함께 있ㅇ요.
역시 예상대로 고요의 입구는 연합군이 틀어막고 있었다.
"숫자가 대충 어느정도야?"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었어요. 다만 엘프들의 숫자가 인간들보다 훨씬 많았어요.
위신느의 능력이 크게 향상된 상태지만 아직 구체적인 숫자까지는 알지 못했다. 위신느는 바람으로 만든 막대기로 땅에 자신이 관찰한 것을 그려 상대의 진영 분포를 알려 주었다.
"다른 곳은 어때?"
하룬의 물음에 위신느는 세 무리로 갈라진 황자 진영이 모두 고요의 땅 입구에서 하루의 거리에 있는 집결지에 거의 도착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쫓는 추격자들이 이삼일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이렇게 되면 추격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공격을 해야겠군."
잘못하다가는 협공을 달할 수도 있으니 한순간에 방벽을 뚫고 나가야만 했다. 위신느의 능력이 부족해 그 숫자까지 알 수 없는 것이 좀 아쉬웠다. 피해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 이곳까지 얼마의 인원이 도착했는지를 알아야 자세한 상황 파악이 될 텐데 말이다.
"수고했어. 돌아가서 쉬어."
-호호. 그럼 오늘도 대가를 받아야지.
위신느는 하룬의 입술에 싱그럽고 촉촉한 입술을 대었다. 장난처럼 위신느의 혀가 하룬의 입속에서 쏘옥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하룬은 순간적으로 사라진 위신느의 뒷모습을 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위신느의 입술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너도 만만치 않군.)
'이러다간 진짜 변태가 되겠군.'
이젠 노골적으로 인간 여성처럼 행동하는 위신느와 나이아의 행동이 하룬에게는 고역이었다. 전설로 전하는 정령 마법사들 중에서 귀속 계약을 한 정령들과 사랑을 나눈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하룬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 너무 일천했던 것이다.
이 세계에서의 생활이 아무리 생생해도 하룬에게 이 비욘드의 세상은 가상현실에 불과했다. 하룬은 정령의 존재 역시 NPC의 변화형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무튼 하루 정도는 아무일도 없을테니 나갔다 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