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전투》
전투를 앞둔 전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이 높아졌다.
다프란 왕국의 엘프 전사 십만과 파이론 제국의 북부 군단 오만은 고요의 땅 입구를 틀어막은 상태에서 전방으로 부채꼴을 이루어 포진했다. 중앙은 북부 군단의 절반이 맡고 그 오른쪽에 북부군의 절반과 다크 일족 그리고 퍼플 일족이 포진했다. 왼쪽으로는 화이트, 오렌지, 옐로우, 블루 일족의 전사들이 배치되었다.
원래는 혼성군이었지만 전투 직전에 개최된 회의에서 각 일족의 특성과 전투력을 최고조로 올리려면 분리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맏아들여진 것이다.
그들에게 맞서는 황자 진영은 역시 세 파트로 나뉜 상태였다. 1황자는 직접 중앙군을 맡아 참전했으며, 왼쪽은 검증의 관에서 두각을 나타낸 7황자가 그리고 오른쪽은 1황녀가 맡았다.
황자 진영의 막사는 암살을 피해 일반 막사의 형태를 유지했다. 열 개의 일반 막사 사이의 천을 들어낸 급조한 대형 막사 안에는 황자 진영의 최고 귀족들과 기사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우군을 맡은 아그리아는 엘프들과 자리를 바꾸는 즉시 중앙을 포위하고 강하게 압박해야 한다. 좌군을 맡은 테슬론은 격렬하게 막지 말고 그들이 빠져나가려는 대로 남쪽으로 길을 열어 주어라.”
“네, 오라버니.”
“알겠습니다, 황자 전하.”
최고 지휘관 회의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이미 작전은 미리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하룬 대장이 최고의 수훈을 세우는 것이군요.”
7황자는 대규모 전투를 눈앞에 둔 지금도 그리 큰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하하! 이런 기발한 수를 생각해 내고 성공시켰으니 당연하지.”
1황자는 벌써부터 큰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알면 알수록 대단한 인물이에요. 왜 용병을 고집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예요. 그의 역량이라면 능히 제국의 백작이나 공?후작 자리를 맡을 수 있을 텐데…….”
1황녀의 말에 황자들도 이번에는 순순히 동의했다. 이번 작전은 하룬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세워질 수도 없는 단순한 것이었다.
같은 동료들의 배신으로 당황하는 적들을 압박하는 한편 퇴로를 열어주어 도망치게 만드는 것이 이번 작전의 요체다.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동료들이 전투 한 번 하지 않고 도망친다면 남은 자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안 봐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상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특히 북부 군단을 상대할 테슬론은 각별히 휘하 기사들에게 이 점을 주지시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7황자는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눈빛은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황사께서는 마법사들에게 일러 대규모 실드 마법과 범위 공격을 책임져 주시오.”
하룬에게 들어 겨우 안 사실이었지만 이곳은 고요의 땅 외곽이라 불안정한 마나의 유동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제야 인간들의 장기인 대단위 공격 마법이나 수비 마법을 어느 정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숙부께서는 원로원과 최고귀족회의 귀족들을 각별히 보호해 주십시오.”
“명심해서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전하.”
라인트 공작은 원로원과 최고귀족회의 출신의 귀족들을 돌아보았다. 이들은 파이론 제국의 등장으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으니 각별하게 관리해야 했다. 골든 배틀에서 한 발 물러나 있던 것이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는 큰 단점이 되고 말았다. 이들은 곧 어느 세력에든 투항해야만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들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파이론 제국을 무너뜨리지 못해도 또 다른 제국을 건국하는 것은 문제없다.’
라인트 공작은 절대 이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황자들의 거점은 대영지를 기반으로 한 공?후작들이지만 이들 대부분은 영지는 있지만 주 거주지가 황도이기에 벌써 많은 것들을 상실한 상태였다.
심지어는 영지에 10년 이상 내려가 본 적도 없는 이들이니 영지 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들의 효용가치는 바로 토지와 명분이었다. 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얌전하게 있는 것이다.
“하룬 대장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냐?”
1황자의 시선이 베론 자작에게 닿았다.
“곧 올 겁니다.”
“어서 그가 와야 작전 계획을 세부적으로 세울 수 있을 텐데.”
1황녀도 기다리기 힘든지 초조해하는 표정이었다.
하룬이 차지한 역할을 새삼 느끼며 베론은 아랫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도대체 그 작자는 어디서 정보를 얻는 거지? 아니, 엘프들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은 거지?’
하룬만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지는 베론이다. 버처리비크를 이용한 정찰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가진 것은 물론 엘프들과의 공조를 이끌어 낸 능력은 그야말로 소름끼칠 정도로 두려웠다.
‘헤르쉬가 그 작자를 홀리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그 생각을 하던 베론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원숙에 가까운 헤르쉬의 마력과도 같은 유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가 경험한 하룬이라는 인물은 그녀의 유혹에 넘어갈 만한 자가 아니었다.
‘젠장!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아무튼 빨리 이 고요의 땅을 벗어나고 볼 일이다.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무너진 길드를 다시 세우려면 한동안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나마 적으로 여기고 살수까지 사용했었던 하룬 때문에 무사히 이곳을 떠날 수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모두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 마침내 그 주인공이 등장했다.
“다녀왔습니다!”
마치 아카데미라도 다녀온 듯 자연스럽게 인사하며 들어오는 하룬이었다.
“오, 어서 오게!”
1황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하룬을 맞았다. 고귀한 1황자가 보일 행동은 아니지만 지금 그것을 의식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작전에서는 하룬의 중요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래, 어떤가?”
“역시 예상대로였습니다. 변수가 있긴 하지만 큰 영향은 없을 것 같습니다. 먼저 적진에 다녀온 결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황자들과 고위 귀족들이 임시로 만든 거대한 지도 주변으로 모였다. 지도에는 작은 나뭇조각으로 급조한 적들과 아군의 인형들이 늘어서 있고, 주변 지형이 비교적 꼼꼼하게 그려져 있었다.
둥! 둥! 둥!
거대한 북소리가 세 번 울렸다. 새벽의 달빛이 아직도 선연한 시간이었다. 밤사이에 막사를 정리하고 휴식을 취한 황자 진영의 십만 군세는 투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오천여 마리의 전투마를 탄 기사들은 노획한 마상창을 옆구리에 끼고 돌격을 준비했다. 비록 일만에 달하는 적의 기병대에는 못 미치지만 개개인이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실력자들로 구성된 기병대의 기세는 십오만에 달하는 적을 종잇장처럼 단숨에 찢어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약 2,500미터 떨어진 전방에 포진한 연합군도 이미 전투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수비 진형을 갖추고 일만의 기병대를 시기적절하게 응용한다는 전략을 세운 연합군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고요의 땅 끝에 자리한 탓에 밀리면 바로 벼랑으로 떨어져 죽는 수밖에 없으니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야만인들이나 몬스터들과의 전투로 단련된 북부 군단의 기세가 차분하게 화살을 날릴 준비를 하는 엘프들과 대비되었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불덩어리가 연합군 측으로 날아가는 순간 울리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사용해 구현한 6서클의 거대한 파이어 쉘 열두 개는 빠른 속도로 날아가 연합군의 중심부를 직격했다.
“메가 실드!”
“실드!”
북부 군단에 배속된 종군 마법사들이 서둘러 실드를 펼쳤지만 공격 마법에 특화된 그들은 설마 이런 범위 마법이 펼쳐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힘을 모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피햇! 누가 이곳에선 범위 마법이 발현되지 않는다고 한 거야?”
이제 와서 아무 소용도 없는 불만을 토해내는 마법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실드를 펼쳤지만 이내 엄청난 굉음과 열기에 귀가 먹먹해지고 시야가 불투명해졌다. 일부 마법사들은 파이어 쉘에 직격당해 호위 병사들과 함께 순간적으로 시커멓게 타 버리고 말았다.
꽈아앙! 꽈아앙!
“으악!”
“끄아아악!”
한 번의 공격으로 연합군 진영의 중심 부위를 흔들어 놓은 마법 공격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제 파이어 쉘은 중심은 물론 진형의 왼쪽까지 날아가고 있었다. 연거푸 날아가는 파이어 쉘은 금방 직격한 곳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기병들은 움직여라! 공격!”
“달려랏!”
방어를 위주로 포진했건만 이래서는 제자리에서 전멸하게 생겼으니 연합군의 수뇌부도 도리가 없었다. 생로는 오직 공격뿐이었다. 엘프들의 장기인 화살의 사거리라도 확보해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궁수 앞으로!”
1황자의 명령은 란트렐의 증폭 마법으로 전군에 시달되었다. 전 방향으로 돌진해오는 일만 기병대의 발목부터 잡아야 했다. 일단 기병들이 진형 안으로 난입하면 곤란했다.
전원 수준 이상의 궁술을 보유한 다카린 용병단의 용병들이 앞으로 나왔다. 그 수는 천을 헤아렸다. 일만에 가까운 기병들을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 전력이지만 드워프가 제작한 활에 철시로 무장한 용병 궁사들은 긴장과 함께 화살을 적 진영에 날릴 준비를 했다.
이미 하룬은 위신느와 나이아를 통해 사거리를 표시해 두었다. 물기가 젖어 달빛을 반사하는 곳이 긴 띠를 이루고 있었다.
두두두두!
일만에 달하는 전투마는 고요한 대지를 뒤흔들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끼요오!”
“끼이이야!”
야만인들을 상대하며 전력을 키워 온 북부 군단의 기병들이 기묘한 소리를 지르며 투기를 끌어 올렸다. 달빛에 드러난 그들의 돌진은 무서웠지만 미리 물로 적셔 준비해 둔 선을 넘는 순간 다카린 용병단원들이 당기고 있었던 시위를 놓았다.
슈욱! 슈슈슉!
철시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싶더니 곧 기마대의 선두 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철시의 위력은 북부군 기병대 대부분이 착용한 하드 레더나 체인 메일 정도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물론 부분 마갑을 쓴 전투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용맹한 북부 군단의 기병들은 선두 열이 무너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방을 향해 돌격했다.
슈욱! 슈욱! 슈슈슉!
가속한 전투마들은 궁사들이 철시를 평균적으로 대여섯 번 날리는 동안 벌써 지척까지 달려왔다. 철시를 날리는 것은 보통 힘이나 기술 가지고는 요원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다카린 용병들은 멋지게 그 일을 해냈다.
“궁수 뒤로! 방패수와 창수 앞으로!”
“한 번이면 된다!”
전리품으로 획득했거나 급조해서 만든 거대한 나무 방패 뒤로 참전한 이방인들과 용병들이 달라붙었다.
그 방패들 사이로는 창수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그들 역시 대부분 이방인들과 용병들이었다. 그들 넷이 같이 잡고 있는 창은 급조해서 만든 나무창이거나 혹은 전투 도중에 획득한 마상창을 개조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공히 8미터 이상의 길이를 가지고 있었다.
“창 앞으로! 후미 앞으로 밀착!”
뒤에 있던 이방인들과 용병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창을 45도 각도로 올려 잡은 동료들의 등과 어깨에 두 손을 뻗어 지지했다. 방패 뒤로도 이방인들과 용병들이 달라붙었다.
“한 번이다! 한 번만 막으면 된다!”
용병들의 뒤편에 있는 기사들이 긴장한 사람들에게 외쳤다. 그들 대부분의 손에는 방패가 들려 있었다.
꽈앙! 꽈앙!
선두 열은 이미 철시 공격으로 전멸한 터라 중간 부위의 기병들이 가장 먼저 방패와 부딪쳤다. 나무 재질의 방패가 거대한 힘에 의해 부서지거나 뒤로 밀리며 그 뒤에서 지지했던 이방인들과 용병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방패에 앞서 8미터나 되는 창에 의해 전투마와 기병이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히히이잉!
창에 찔린 전투마들이 비명과 함께 앞발을 높이 올리며 기병을 떨어뜨렸다.
“커헉!”
비록 나무창이지만 달려가던 속도가 있어 단숨에 창에 꿰뚫린 기병의 몸이 높이 들렸다.
기병들은 창수들이 든 창의 길이가 무려 8미터가 넘는다는 것은 지척에 도착해서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창의 두께가 보통 마상창의 두 배에 달하는 데다 생나무로 만든 것이라 단단하다는 것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황자 진영의 선봉과 부딪친 것도 중간과 오른쪽에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왼쪽의 기병들은 다른 곳에 비해 절반도 도착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뒤쪽 외곽에서 날아간 철시의 존재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에 그 피해는 컸다.
먼저 기병대로 공격하는 바람에 엘프들와 철시 공격의 위력을 극대화시키지 못한 연합군은 기병의 꼬리를 겨우 따라 잡았지만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위협적인 범위 마법으로 인해 제대로 자세를 잡고 화살을 날릴 수가 없었다.
인간 마법사들은 우직하게 파이어 쉘 마법 하나만을 날리고 있었다. 7서클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미세하게 조절해서 거리를 조정했고, 하위 마법사들은 돌아가며 마법진에 끊임없이 마력을 주입하고 있었다.
그들과 다르게 마법을 펼치는 마법사들도 있었다. 그들 역시 마법진을 이용해서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따. 엘프들이 사거리를 확보한 것이다.
“실드를 펼쳐라!”
증폭 마법으로 총사령관인 1황자가 명령을 내리자 일군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실드 마법을 펼쳤다.
“메가 실드!”
“브로드 실드!”
마법진을 이용한 광범위 실드가 황자 진영의 머리 위로 생겨났다.
슈슈슉! 슈욱!
살 떨리는 철시 소리가 잠시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었지만 이내 막을 뚫지 못하고 튕기는 소리에 안색이 풀렸다.
“이익! 이럴 수가!”
“철시 공격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이곳이 범위 마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빨리 난전으로 돌입해야 합니다!”
연합군 지휘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기대했던 기병대의 돌격도 큰 효과를 보지 못한 데다 엘프들의 철시 공격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일단 발이 묶인 기병들은 철시를 직사로 날리는 용병 궁수들의 쉬운 먹잇감이 되고 만 것이다.
“철시도 소용이 없습니다!”
“돌격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저들을 분리시켜야 합니다.”
엘프들의 철시마저 본격적으로 범위 마법을 펼치는 인간 마법사들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이제 쓸 수 있는 전략이라고는 개별 부대가 한 덩어리로 돌진해 단단한 진형을 흔들거나 찢어 놓고, 가장 위협이 되는 마법사들을 흩어 놓는 것밖에는 없었다.
“좋아!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적 진영에 난입합시다.”
연합군 수뇌부의 결정에 지휘부는 서둘러 흩어져 자신들이 지휘할 곳으로 달려갔다.
뿌우우! 뿌우우!
뿔나팔 소리와 함께 연합군은 세 방향으로 나뉘어 상대에게 돌진해 갔다.
“총공격하랏! 총공격하랏!”
증폭 마법으로 외치는 1황자의 명령에 이제까지 수비하던 용병들을 헤치고 기사들이 달려 나갔다. 일시에 달려 나오는 수만 명의 무기에 마나가 깃들어 오러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본 연합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룬은 1황녀 휘하의 기사들과 함께 앞으로 달려 나가며 아직 살아있는 기병들의 목을 베었다. 말에서 떨어진 기병들은 물론 말을 탔더라도 속도의 이점을 가지지 못한 기병들은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기사들의 검을 감당하지 못했다.
‘차라리 기병대 전력을 한 방향으로 모았다면 한 곳쯤은 뚫렸을 텐데.’
하룬은 어느새 기병들이 사라진 공간으로 달려갔다. 미리 약속한 대로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네 엘프 일족의 전사들은 조우하는 순간 심하게 방향을 꺾어 황자 진영 기사들의 가운데나 옆으로 달려 나갔다. 하룬은 그중에서 다일리아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연합군의 수뇌부는 이제 지휘부를 모두 이탈해서 개별 부대를 지휘하는 상태였기에 이런 심각한 변화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휘권이 결정되지 않은, 급조된 연합 세력의 단점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단번에 옆면이 노출된 북부 군단은 속수무책의 상황에 빠져 버렸다.
“아악!”
“왼쪽이 완전히 뚫렸다!”
“도망쳐!”
중간에 포진했던 북부 군단은 앞과 측면에서 가해지는 기사들의 공격에 초토화되고 있었다. 일대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무력을 가진 기사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인해 공포에 질린 북부군은 오른쪽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연합군의 왼쪽을 맡은 7황자는 측면을 비운 채 전방만 압박했다. 이미 기병들은 다 해치운 상태였고, 철시를 날리는 까다로운 엘프들의 공격을 막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엘프와 북부군이 뒤섞인 전력은 다른 때라면 위협적이겠지만 범위 마법과 강력한 수비 마법의 지원을 받은 상태에서 조금씩 전진하는 상태라 큰 피해는 없었다.
비록 엘프 정령사들이 정령 마법으로 땅을 파헤치거나 불과 물 그리고 바람으로 만든 화살을 날려 왔지만 한 덩어리가 되어 메가 실드의 보호를 받는 그들에겐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젠장! 도망쳐야 해!”
“밀린다! 한쪽은 벌써 무너졌어!”
철시를 날려도, 정령 마법을 펼쳐도 뚫리지 않는 적의 거대한 보호막에 질린 연합군 전사와 병사들은 오러 소드를 만들어 그 무엇이든 잘라버리는 무위를 가진 익스퍼트 최상급 이상 기사들의 도살에 우르르 물러나고 있었다.
“주, 죽고 말 거야!”
“살고 싶어!”
전의를 잃자 바로 찾아와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원초적인 공포와 두려움에 잠식된 엘프 전사들과 북부군 병사들은 하나둘씩 전장을 이탈해 활짝 열린 왼쪽 측면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황자 연합 진영은 이런 전황의 변화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공적을 쌓는 전투가 아니다. 또한 최대한 자신들의 세력을 보존해야 하는 전투이니 무리하게 도망치는 적을 쫓을 생각이 없었다.
다만 특수 임무를 받고 적들에게 난입한 상급 기사들은 공포를 더하기 위해 무자비한 도살을 벌이며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그렇게 전투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끝나가고 있었다. 무려 이십오만이 격돌한 전투치고는 허탈할 정도로 어이 없었다.
“경하드립니다, 황자 전하!”
라인트 공작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이 일제히 1황자에게 승전을 축하했다.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1황자 역시 본격적인 전투는 이미 끝났음을 알고 있었다. 멀리 흙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남쪽으로 도망치는 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십오만에 달하던 연합군 패잔병들의 숫자는 수만에 불과해 보였다.
“최대한 멀리까지 쫓아야 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투마를 확보한 기사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라인트 공작의 말이 맞았다. 기존의 인원에 더해 추가로 전투마를 확보한 기사들이 패잔병들을 쫓아 연방 그 후미를 공격하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어떤 함정이나 매복이 있을지 모르니 서두르셔야 합니다.”
“알았네. 자네도 수고했네.”
1황자는 대승으로 기분이 좋아진 듯 베론 자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정찰에 따르면 자신들을 추격하는 무리는 이제 반나절이 조금 넘는 거리까지 왔을 것이다. 밤에도 이동했다면 어쩌면 몇 시간 거리일지도 모른다.
“하룬 대장은 어디 있나?”
주위의 기사들에게 묻는 1황자의 얼굴에 조급함이 살짝 드러났다. 전투 결과가 확인된 순간 지휘자들은 거의 다 이곳으로 집결했는데 하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물음에 1황녀가 다가오면서 보고했다.
“하룬 대장은 용병들과 함께 입구 쪽으로 갔습니다. 전하께 승전을 경하드리며 혹시 모를 함정이나 매복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고요의 평원으로 내려간다고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오! 역시 하룬 대장다운 행동이군!”
명령에 앞서 할 일을 찾아 하는 하룬의 행동에 1황자는 바로 앞에 있다면 업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의뢰이긴 하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해 의뢰를 이행하려는 하룬의 행동은 무한한 신뢰를 주고 있었다. 그 엄청난 의뢰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자, 어서 갑시다! 앞길은 하룬 대장과 돌풍 용병대가 열 테니 우린 편하게 가기만 하면 될 것이오.”
1황자는 몇 명의 기사단장에게 전장의 정리를 맡기고 지휘부를 떠났다. 그의 뒤를 황자들과 고위 귀족들이 기사들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따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