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혀지는 GG의 촉수》
짧은 기간이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충원된 기지는 활발하게 돌아갔다.
대원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무력조들은 기지 밖을 오가며 오염된 환경에 적응력을 키우는 한편, 연무장에서는 조장들과 함께 체력 단련은 물론이고 무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한 가지 문제를 제외하면 수련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문제는 세 조장과 대원들이 익힌 무슬이 너무 차이가 난다는 것에 기인했다.
로수가 익힌 무기술은 하르크를 상대하기 위한 장병기술과 오르그를 상대하는 단병기술로 나눠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비욘드 게임을 통해 로수와 대원들이 익힌 것이다. 하지만 가장 실력이 높은 로수 역시 제대로 다른 이를 가르칠 정도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기에 자신감 있게 지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르크가 별로 없는 남쪽 지방에서 살았던 철웅의 경우 나름대로 정리를 한 유서 깊은 검술을 익히고 있었지만, 기를 축적하고 사용하는 면에 있어서는 효율이 낮았다. 기를 사용하기 전에는 상대가 같은 휴먼이나 맹수라면 몰라도 오르그를 상대하기에는 단순하고 위력이 떨어지는 것이 단점이었따.
대산의 경우 각종 무기술에 대한 지식을 아즈만에게 주입받았지만 수련하는 가운데 기를 축적하고 발현하는 무기술은 익히지 못했다. 사이보그 특유의 강력한 육체적 능력을 이용한 그들의 무기술은 영흥 마을 전사 출신들이나 해무검관 수련자들에게는 그림에 떡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대로 수를 내어 조에 관계없이 원하는 것을 조장들에게 찾아가 배우거나 자신이 익힌 것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으로 수련하고 있었다.
‘이거 수련을 위해 대원들을 비욘드에 접속시켜야 하는거 아니야?’
아직 초기이기에 다른 해결책을 궁리하고는 있지만 무력조의 수련에 하룬은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헤니는 황 박사와 함께 주민들의 교육에 대한 프로그램을 짜는 데 공을 들이고 있었다. 영흥 마을 출신으로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의 숫자는 일흔두 명이었고, 나머지 주민들에게도 알맞은 직업에 대한 교육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유니온과 교류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웬만한 것들은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기치를 내세운 기지는 집행부는 성인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제출받고 참모부와 상의해서 공방을 비롯한 생산조를 만들 생각이었다.
우암 촌장은 연륜도 있는 데다가 생각보다 추진력도 강하고 일할 때는 똑 부러지는 면이 있어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의 지도력과 달변으로 인해 주민들은 거의 완전히 달라진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돌풍 기지의 주민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조직 중 가장 활력 있게 움직이는 것은 쏘우가 이끄는 연구조였다. 그는 미처 벨과 아리가 준비하지 못한 많은 생활용품을 조원들과 함께 밤낮으로 땀을 흘려가며 만들어 내고 있었다.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연구조의 인기는 엄청났다.
“카하하! 이런 시설이라면 뭐든지 다 만들 수 있다고.”
쏘우는 벨과 아리가 미리 마련해 준 연구실과 각종 제작 시설에 크게 만족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그의 타고난 천재성과 재능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었다. 전투에 대한 것 말고 추가적으로 과학과 각종 기술에 대한 지식을 주입받아 태어난 네 사이보그 대원들과 기존 주민들 중 쏘우에게 그 손재주와 재능을 인정받은 여섯 명의 주민은 새로운 대원이 되어 그를 보조하고 있었다.
차후 연구조는 생산조에게 생산 기술을 전수하고 연구에만 전념시킬 생각이었다.
쏘우를 즐겁게 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정말 대단한 분이야. 나도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로 천재일 줄은 몰랐어. 내가 구상한던 것을 이미 현실화시키다니.”
쏘우가 혀를 내두르는 대상은 바로 하룬의 양부인 청일 박사였다. 청일의 다이어리와 함께 연구 과정이 담겨 있는 태블릿 PC의 내용을 전해 받은 그는 일과 후에는 새로운 기술을 이해하고 실험하는 데 푹 빠져 살고 있었다.
벨과 아리가 자신에 못지않은 과학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쏘우는 시간이 날 때마다 참모실에 들러 두 사람을 붙들고 못살게 굴었다. 그의 태도가 얼마나 집요하던지 얼마 후에는 벨과 아리가 그를 피해 도망을 다닐 정도였다.
하룬은 당연히 바빴다. 이 모든 일들의 중심에 그가 있었기에 결재할 것도, 의논할 것도, 의견을 듣고 결정을 해야 할 것도 수없이 많았다. 벨과 아리가 곁에서 보좌를 해주지 않았다면 도저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게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해.’
그전에도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를 했지만 지금은 하루에서 수백 번씩 그 생각을 했다. 피해 의식에 휩싸여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려고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아야 했다고 말이다.
덕분에 하룬은 앞으로 할 일 중에 하나를 뭐든지, 누구에게든지 배우겠다고 마음먹을 정도였다. ‘배워서 남 주랴’ 하는 말이 이렇게 가슴에 다가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도 기지가 활발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면 흐뭇하고 기뻤다. 처음에는 단순한 마음으로 시작했고 이것을 위해 현실에서 모은 모든 것을 다 털어버리고 말았지만, 자신의 결정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하면서 생활하는 것을 보니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보람과 자긍심을 느끼게 되었다.
비록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지만 이제까지 살아온 그 어느 나날보다 보람 있고 행복한 시간들이었기에 벨과 아리를 스승 삼아 많은 것들을 처리해 가고 있었다. 그래도 머리가 완전히 굳은 것은 아니었는지 조금씩 복잡한 서류나 돈의 단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르고 오늘도 하룬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연구조에서 올린 자금과 설비 신청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오빠!”
“마스터!”
간만에 시간을 내서 호수 중심의 기지에 갔던 벨과 아리가 부숴 버릴 듯한 기세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그동안 그녀들이 이렇게 흥분한 것을 보지 못했던 하룬은 상기된 얼굴로 눈을 빛내고 있는 벨과 아리의 얼굴부터 살폈다. 혹시 그녀들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 아닌지 걱정을 했지만 그녀들은 흥분한 듯 상기된 얼굴일 뿐 안 좋은 징후는 없었다.
“드디어 찾았어요!”
기다렸다는 듯 외치는 아리의 말이지만 하룬은 금방 그 내용을 짐작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벨이 나서서 부연 설명을 했다.
“오빠! 그 나쁜 놈들의 본거지를 찾았다고.”
“나쁜 놈들?”
“오빠를 실험체로 이용하고 납치하려던 놈들 말이야. 그 글로리 가이아.”
“아!”
하룬은 탄성을 질렀다. 자신을 실험체라고 부르던 그 정체불명의 조직을 말하는 것이었다.
“어디야?”
대뜸 장소부터 물었다. 가만 놔두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배운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을 했지만 종일 집무실에서 서류와 회의, 면담으로 질릴 대로 걸린 하룬은 당장 놈들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여기에 왔던 놈들의 짐과 움직인 로우취가 집결지의 통신 센터에 잠입했어. 로우취들이 그곳에 잠입한 이래 그동안 통신이 없었는데 어제 드디어 그곳을 수신으로 하는 통신이 왔어. 통신은 두 개 조에 대한 명령으로 파토 조는 헤븐 컴패니로 가서 물건을 인수해서 배달하라는 것과 미트라 조는 유니온 제 3 포스트로 귀환해서 대기하라는 내용이었어. 그래서 우린 그 고유 주파수를 추적해서 발신지를 추적했어. 발신지는 유니온 안이지만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었어. 유니온은 배리어 때문에 위성으로도 탐색을 할 수 없거든. 그런데 통신 내용을 아즈만을 통해 정밀하게 체크한 결과 통신음에 섞인 소음을 분석해 봤더니 대화 내용이었어. 그 내용으로 판단하건대 S구역에 있는 임페리얼 컴패니 제 3 연구소로 확인되었어.”
“흠. 정말로 그곳과 연관이 있었던 거구나.”
쏘우의 말로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가 말한 대로 GG와 HG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완전히 GG의 손에 넘어간 것 같았다.
‘양아버지가 근무하던 곳도 거기고, 다이어리에 나오는 그들 조직에서 양부에게 특혜를 준 곳도 그곳이었어. 게다가 쏘우 형의일로 인해 그곳은 GG가 장악한 것이 틀림없어.’
“어떻게 할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언니? 당장에 쳐들어가서 박살을 내야지.”
“박살?”
벨의 말에 하룬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귀여운 얼굴의 소녀가 하룬과 관계된 일이라면 전혀 다른 인격을 보이는 것이 흐뭇하면서도 걱정스러웠다.
“일반 대원들은 빼더라도 전투 사이보그들과 세 조장 그리고 태가사남매의 전력이라면 어지간한 세력은 그냥 짓뭉갤 수 있다고.”
“얘는! 그곳이 어떤 곳인데. 명색이 유니온 직영 연구소야. 보안이나 경계 상태는 최고 수준일 테고 강력한 방어 무기들이 줄줄이 있을 텐데.”
“어차피 일반인들은 모르는 암중 조직인데 드러내 놓고 세력을 양성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아무려면 내가 연구소 벽을 넘겠다고 생각했을까. 뒤가 구린 놈들이니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각개격파를 하면 될 일이야. 청일 님의 다이어리를 보면 그들과 상대하는 조직도 있고, 원로원에 혹시 끈이 있는지는 몰라도 장악한 거 같지도 않은데, 뭐.”
흥분한 것 같았지만 나름 일리가 있는 주장을 펴는 벨의 말에 하룬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다이어리의 내용을 다 본 거야?”
“응, 오빠. 아! 그러고 보니까 내용을 파악한 것을 아직 오빠에게 말을 안 했구나.”
벨이 자신의 머리를 작은 주먹으로 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하죠, 오빠.”
아리는 은근슬쩍 하룬을 오빠라고 부르며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하룬의 반응을 보는 아리의 모습에 하룬은 실소를 터트렸다. 식사를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조리팀은 이미 음식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 오빠. 나 배고파.”
“그러자.”
하룬은 정말 배가 고픈 듯 쪼르르 아리의 뒤를 쫓아가는 벨을 보며 혀를 찼다.
‘벨은 예전보다 몇 살 더 먹었다고 생각하면 적응이 되는데 아리는…….’
전혀 다른 인격을 가진 존재가 되어 버린 탓에 영 적응이 되질 않았다. 게다가 처음과는 달리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은근히 그에게 반말을 하거나 애교를 부리는데, 그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아직은 받아들이기에 어색했다.
‘하지만 그게 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상이라니. 쩌업!’
아즈만이 한 말에 의하면 아리는 하룬이 무의식중에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여성체로 분화했다고 했다. 그게 바로 지금의 아리 모습이다.
자신보다 한두 살 정도 어린 나이에 청초한 외모에 지혜로우면서도 신념이 강한 여자. 하지만 자신에게만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육감적인 몸매에 야하며 귀엽고 애교가 많은 성격이라니. 거기에 잘 단련된 육체와 강한 전투력을 가진 그런 모습이 바로 자신이 무의식중에 바라던 여자라니!
그런 다양한 면을 가진 여자가 자신의 이성상이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아즈만의 말이 틀릴 리는 없었다.
‘정말 아리가 그럴까?’
아직 몇 가지밖에 못 봐서 정말 그런지는 모르곘다. 아무튼 자신이 바라는 이성상이 되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많은 것을 학습하고 뒤늦게 세상에 나올 정도였으니 기대가 되긴 했다.
‘이런 것을 보면 나도 늑대의 성질을 가진 평범한 남자가 틀림없는데.’
하룬은 고개를 저으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식사는 샌드위치와 주스로 단출했다.
“아버지는 어디까지 알고 계셨던 거야?”
그게 제일 궁금했다.
“글로리 가이아라는 조직의 코원 지부의 수뇌부까지는 알고 계셨던 것 같아.”
입 안에 든 샌드위치 조각 때문에 양 볼이 불룩해진 벨이 새는 발음으로 말해 주었다.
“수뇌부까지? 혹시 아버지도 그들 조직의 일원이었던 거야?”
“그건 아닌 것 같아. 다만 그들 조직으로부터 다양한 의뢰를 받아 수행해 주면서 이런저런 반대급부를 챙긴 거겠지. 아무튼 유니온의 원로들 중 한 명이 GG의 코원 지부장인 것은 확실해. 쏘우 조장의 말을 듣지 못했다면 과학국을 장악한 소 원로를 의심했겠지만 그는 확실히 아니야. 원로에 대해서는 정보가 거의 없어 잘 모르겠어.”
“반대급부?”
“응. 최초에는 임페리얼 컴패니의 입사부터 시작해서 각종 실험에 필요한 자금과 재료들, 마지막에는 내 본체였던 캡슐을 제작하기 위한 각종 희귀 재료들까지 그들로부터 받아낸 것 같아.”
그럼 조직원은 아니더라도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다이어리에 그런 내용이 있었어?”
“응. 청일 님은 그들과 거래를 하면서도 늘 불안해 하셨던 것 같아. 양심에 반하는 요구들이 꽤 있었던 것 같거든. 그들이 의뢰한 물건들을 만들어 주거나 정보를 준 것을 후회하는 내용도 있었고, 중간에는 그들과 사이가 나빠져 임페리얼 컴패니를 퇴사하고 결국 사이언스 마을까지 도망을 치기도 했을 정도니까.”
“사이언스 마을로 간 것이 그들 때문이었다고?”
“응. 다이어리의 내용에 의하면 청일 님은 그들의 협박 때문에 여러 무기들을 비롯해서 다양한 기자재를 만들어 준 것 같아. 내 본체였던 캡슐의 프로토 타입에 대한 기술도 넘긴 것 같고. 그것들이 어떻게 쓰일지 몰라 항상 전전긍긍한 것이 다이어리에 다 나와 있어.”
겨루의 경우를 듣고 어쩌면 양부가 그 캡슐을 만든 것은 아닌지 의심한 적이 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프로토 타입 기술을 넘겨주었다면 그걸 토대로 다른 캡슐 기술자가 만들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어찌 되었건 좋은 놈들은 절대 아니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오빠를 실험체로 여기는 것만 보아도 좋은 무리는 절대 아니야.”
대화는 하룬과 벨이 나누고 있었지만 막 샌드위치를 다 삼킨 아리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벨에게 이미 말은 들었지만 하룬을 실험체로 여긴다는 말에 분노가 치민 것이다.
“오빠를 해치려는 나쁜 놈들을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주먹을 쥔 아리의 몸에서 숨 막히는 살기가 흘러나왔다. 눈앞에 글로리 가이아라는 조직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맹렬하게 적의를 불태우는 아리였다.
‘왠지 나랑 관계된 일에 있어서는 이성을 잃는 것 같아. 그 정도로 날 좋아하는 건가?’
역시 적응이 되질 않는다. 자신을 위해 살기까지 내뿜는 아리지만 하룬은 전의 아즈만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아 낯이 설기만 했다. 사실 그 괴리감 때문에 아직 아리를 휴먼으로서, 여자로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진정해, 아리. 다른 내용은 없었어?”
“다이어리의 내용으로 파악한 사실은 이래.”
벨이 잠시 머리를 정리한 다음 입을 열었다.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암중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큰 힘이 두 개가 있어. 하나는 글로리 가이아라는 조직이고, 그들과 적대적인 또 하나의 조직은 휴먼 가드라는 조직이야. 이 두 조직은 전 유니온에 널리 퍼져 있으며 암중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같은데, 청일 님의 다이어리로 보아서는 이 두 조직의 실체나 최종적인 목적은 알 수가 없어. 휴먼 시대, 아니 어쩌면 종말 시대까지 거슬러 갈지도 모르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 조직은 암중에서 서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어.”
하룬은 실망했다. 그 정도라면 이미 쏘우를 통해서 하룬도 인지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직 벨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싸워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접점 중의 하나가 바로 넥컴월이 개발한 비욘드야.”
“비욘드가 왜?”
비욘드는 가상현실 게임일 뿐이다. 설마 넥컴월의 뒤에 그들의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기라도 한 걸까?
“넥컴월은 오빠도 아는 것처럼 전 유니온의 자금과 각종 지원을 받아서 비욘드라는 가상현실 게임을 개발했어. 다이어리의 내용을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게임의 개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 해. 그러니까 넥컴월은 일단 두 조직과 관련이 없거나 최소한 두 조직의 영향력에서 중립을 지킨다고 봐야 해.”
“그건 다행이네.”
“오빠 말대로 다행이지. 지금 비욘드라는 게임은 폐쇄적이던 유니온 경제에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중이니까. 비욘드를 무대로 많은 유니온들이 닫혀 있던 빗장을 풀고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야.”
그런 경제적인 것까지야 하룬이 알 리가 없었다. 아무튼 한 유니온 안에서만 유통되던 재화가 전 유니온으로 확대가 되고 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게임 머니가 현실에서 막강한 화폐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내가 실험체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지 다이어리를 통해서 알아냈어?”
그건 지난번에 벨에게 부탁한 일이다.
“응.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오빠와 같은 인공 수정체들을 탄생시키는 신인류 프로젝트는 원래는 휴먼 가드라는 조직에서 추진했던 것 같아.”
“그래? 그럼 그들 역시 별로 좋은 놈들은 아닐 거 같은데.”
부모의 동의도 없이 정자와 난자를 수집해서 그런 실험을 했다면 좋은 무리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지. 비인도적인 실험이니까. 그래서 결국 그 실험을 주도한 전지구위원회가 실각을 하고 말았으니까. 그런데 글로리 가이아라는 조직 역시 프로젝트에 암중에 관여하여 뭔가 수상한 짓을 했어.”
“수상한 짓?”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 청일 님에 따르면 일부 수정체의 유전자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확실한 내용은 그분도 몰라.”
“그럼 내가 그 수상한 짓을 당한 수정체라는 말이군.”
“아마도.”
그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하룬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유니온에서 수차례 정밀 테스트를 통해 무능력자로 판정받은 자신에게 슈퍼 캡슐을 보내서 그 동태와 모종의 자료를 수집했을 리가 없었다.
“제길!”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세상에 나오고 싶어 나온 것도 아닌데 거기에다가 유전자 조작까지 당했다고 생각하니 열이 뻗혔던 것이다.
종말 전쟁으로 인해 거의 멸망 직전까지 이르러 놓고도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형태는 여전했다. 하룬은 별로 배운 것이 없었지만 생명은 적어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잔뜩 인상을 찡그린 하룬이 조용한 것을 느끼고 눈을 들어 보니 벨과 아리가 자신을 측은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왠지 창피해지는 동시에 마음이 따듯해졌다. 자신의 아픔을 이해해 주는 이가 이제는 둘이나 되는 것이다.
“미안! 공연히 속이 뒤틀려서 말이야. 그런데 캡슐은 어떻게 된 거야?”
하룬은 이제 양부 청일이 자신에게 벨이라는 특수 캡슐을 보낸 것이 그 메시지의 내용처럼 애틋한 부정父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 예전 본체는 청일 님이 오랫동안 연구해 온 작품이었어. 청일 님이 배리어에 갇혀 사는 휴먼들에게 가상현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다 더 생생하게 경험하게 하는 한편 현실의 육체도 그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레벨의 캡슐을 개발하려는 오랜 꿈을 가지고 있었어. 그것을 글로리 가이아라는 조직이 알게 되고 후원을 한 거지. 그들은 전 유니온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캡슐 과학자들을 후원했는데 청일 님의 기술력이 가장 우수했나 봐. 그래서 언제부터인가는 회사 연구실로 출근하는 것도 막고 거의 감금하다시피 해 놓고 감시를 하기 시작했는데, 청일 님이 운 좋게 탈출을 한 거지.”
“그랬군. 그래서 사이언스 마을로 가게 된 거로군.”
“응. 그런 거 같아.”
벨은 그러면서도 콧등을 찡그려 주름을 만들었다.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
하룬은 말 대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청일 님은 이전의 나를 비욘드가 출시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완성을 한 거 같아. 다이어리도 사망하기 훨씬 이전에 끊어져 있고.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맞았다. 그가 언뜻 다이어리의 마지막 날짜를 확인했을 때는 분명히 휴먼력 120년이었다. 들은 대로라며 사망할 때까지는 시간이 꽤 비는데다가 벨이 어떻게 자신에게 전해졌는지도 궁금했다.
“한번 알영 촌장이랑 통신을 해봐야겠다. 촌장님이라면 뭔가 알겠지.”
“지금 해볼까?”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아리가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알영 촌장이 아는 것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건 그렇고 통신 내용은 뭐였어?”
“헤븐 컴패니라는 곳으로 가서 정기 업무를 수행하라는 거였어.”
“헤븐 컴패니? 뭔가 지독한 냄새가 나는걸. 정기 업무라는 게 뭘까?”
하룬의 질문에 벨과 아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눈길을 피했다. 그녀들이 알 리가 없었지만 궁금해서 한번 물어본 것이다.
“우리 로우취 사이보그가 제대로 임무를 수행한 모양이네. 이럴 때는 휴먼들보다 훨씬 낫네. 떠나는 놈들에게 하나 정도씩은 붙여 놓은 거지?”
“그럼, 당연하지.”
“그나저나 지금까지 파악된 GG의 아지트는 어디야?”
“응. 여길 봐.”
벨은 식탁 위에 홀로그램 영상으로 지도를 띄웠다. 벨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유니온과 약 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이곳이 집결지였어. 이곳처럼 지하 기지로 추정이 되는데 각종 방어 무기와 숙식 시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디펜스 포인트를 활용한 것 같아.”
디펜스 포인트는 원래 유니온과 근거리에 설치된 방어 기지였다. 현재는 가동이 되지 않지만 유니온 건설 초기에는 방어군들이 상주하면서 근처에 모여드는 변종 생물을 1차적으로 막았던 곳이다. 하지만 변종 생물들이 더욱 강력해지고 그 숫자가 증가하면서 지금은 대부분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곳이라면 전력으로 가면 하루 정도는 도착할 수 있었다. 하룬은 그곳을 공격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공연히 놈들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노출시킬까 두려워 포기하고 말았다. 통신 센터에 로우취가 대기하고 있으니 그곳에 모여드는 놈들의 하부 조직에 대해서는 장기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리라.
“아까 이야기한 대로 미트라라는 이름의 조에게 어제 유니온으로 들어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어. 위성이 로우치가 보내는 신호를 통해 그들의 이동경로를 추적했고 지금 그들의 위치는 이곳이야.”
지시봉의 붉은 광선이 향한 곳은 F-3-3구역의 중심 부근이었다.
“저곳은?”
하룬은 그곳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맞아. 확실치는 않아도 저곳은 F-3구역의 트레쉬 스트리트야. 그것도 가장 중심 구역이야. 마약 조직들과 폭력 조직들이 완전히 장악한 곳이고. 아마도 마약을 취급하는 것 같아.”
“아마 저 마약 조직이 그들의 자금원이 아닌가 싶어요.”
만약 빅 유니온마다 마약 조직들과 창녀촌을 GG가 장악하고 있다면 그 부는 노블들에게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비록 금전 감각이 떨어지는 하룬이지만 마약과 섹스 산업이 얼마나 부가가치가 큰지는 알고 있었다.
“그럼 놈들이 유니온 상층부뿐 아니라 하층부까지 파고들었단 말이군.”
단순히 그들의 종적이 그곳에 있다고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너무 성급할 수 있었지만 예감이 그랬다.
“저들의 자금원은 다양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저곳에서 나오는 자금이 가장 큰 것으로 생각돼요.”
하룬은 글로리 가이아라는 조직이 휴먼들에게는 오염된 환경이나 오르그와 같은 변종 생물들보다 더 위험한 존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단순히 자신을 실험체로 여기고 납치하려고 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유니온을 병들게 만들고 휴먼들을 불행한 삶을 살게 만드는 데 일조를 하거나 그 주체 세력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쩌면 노블 중에 상당수가 그들 조직원인지도 모르지.’
안 그래도 배리어에 갇혀 살면서 노블들의 착취 때문에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절망적인 삶을 강요하는 요소는 바로 암흑 조직들이었다. 그들은 마약과 환락으로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삶의 의지까지 빼앗고 있었던 것이다.
‘힘! 힘이 있어야 해!’
이제 비욘드를 통해 어느 정도의 힘을 얻었지만 그것은 자립에 필요한 최소한이었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에 희망을 주려면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더 강한 힘과 능력 그리고 조직이 필요했다.
‘그래!’
하룬은 이를 악물었다.
작게는 자신을 실험체로 여기는 나쁜 무리를 제거하는 일이 될 것이고, 크게는 배리어에 갇혀 희망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 될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노블들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들을 없애는 것은 휴먼들에게 더욱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아리, 쏘우 조장과 같이 연구하고 있는 버그형 사이보그의 생산을 서둘러야겠어. 되도록 많은 정보를 얻어야겠어. 이번에는 도청뿐 아니라 영상까지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일단 그들의 조직이 어느 정도이며 어디까지 촉수를 뻗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가능해요. 아즈만의 기술력을 지원받을 수 있으니 나 혼자라도 버그형 사이보그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극초소형 카메라를 내장한 마스퀴토 사이보그라면 촬영도 가능할 거예요. 다만 그러려면 일단 유니온으로 누군가 잠입해서 그쪽 근처까지는 가야 해요.”
“그건 별문제가 없어. 누군가는 유니온에 수시로 물품 구입을 위해 가야 하니까.”
다행이었다. 아리와 쏘우가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곤충형 사이보그의 개발이 끝나면 이런 상황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모기처럼 작은 곤충형 사이보그를 제작할 수 있다면 그들의 동태를 살피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GG에게 한발 더 가까이 가고 있었다.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