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코추 마탑의 의뢰>>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아니네. 덕분에 차를 제대로 즐길 수 있었네."
후버론은 그 나이만큼이나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저 부유한 노상인처럼 보이는 외모에 기도마저 잘 드러나지 않으니 누구도 그가 제국 최고의 마법사로 알려진 파코추마탑의 전대 탑주임을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한 번도 이렇게 느긋한 모습으로 살아 보지 못한 하룬으로 서는 부럽기만 했다.
"할 일이 많은 것 같으니 이제 용건을 말하지."
"네. 말씀하십시오."
"사실 1황녀 전하의 부탁이 있기도 했지만 난 공식적으로 마탑의 의뢰를 하려고 자네를 찾아왔네."
하룬은 전대 탑주가 직접 찾아 의뢰를 할 정도의 사안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아까 대규모의 실종 사건이 일어났다고 했는데 어쩌면 이 일도 그것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네. 사실은 마츠 평원 근처에서 흑마법의 흔적이 발견되었네."
흑마법이라는 소리에 하룬의 눈이 커졌다. 예전에 후크란 산맥에서 흑마법사로 추정되는 인물과 한 번 조우한 적이 있을 뿐 그 후론 흑마법사의 존재를 보거나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흑마법이라면?"
"몇 달 전의 일이네. 마츠 평원의 외곽을 지나 신 테론 제국으로 향하던 일루젼 마탑의 마법사들과 일단의 상인들이 생명력을 비롯한 모든 정혈精血이 빨린 미라 상태로 발견되었네."
그런 일이 있었던가? 헤르쉬가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면 정보 길드에서도 알아채지 못한 은밀한 이동이었나 보다.
"그들은 1황자, 아니 신 테론 제국의 초대 황제인 가르반폐하에게 전하는 귀중한 물건들을 호송하고 있던 중이었네. 정해진 기한에 물건이 도착하지 않자 은밀하게 조사대가 그 행적을 추적했네. 면밀한 조사 끝에 땅속에 허술하게 매장된 그들의 사체를 발견할 수 있었지.
사체들을 조사한 조사대는 그들이 흑마법에 의해 모든 정혈을 빨린 것을 알아냈네. 알지 모르겠지만 뼈와 가죽만 남기고 나머지 살들과 정혈을 모두 흡수하는 흑마법은 6서클 경지이네."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까?"
마법 그 자체에 대해서도 많이 알지 못하는 터라 흑마법에 대한 지식은 더욱더 부족한 하룬이다. 다만 6서클 정도라면 대원들인 타니엘라와 미루스의 경지이니 파코추 마탑에서 이렇게 중요시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어 이상할 뿐이다.
하룬의 반응을 통해 그가 흑마법에 무지한 것을 알아차린 후버론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졌다. 제국에 위명이 쟁쟁한 돌풍 용병대장에 대해 1황녀가 말해 준 것에 의하면 그는 따로 정보 조직을 운용하고 있으며 무척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했었다. 이런 사람도 흑마법의 두려운 점을 알지 못할 정도로 세상은 흑마법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 흑마법은 마기라고 부르는 마계에서부터 유입된 마나와 죽은 자들의 사념死念과 원념怨念 등 마이너스 성질을 가지는 포스를 가공해서 펼치는 마법이네. 대표적인 흑마법으로는 좀비나 구울부터 시작해서 마계의 마왕까지 이르기까지
사자死者나 사악한 존재들을 물질계로 소환하는 소환계열과 어둠의 마나에 길들여져 사악한 의지와 생명력을 가지게 된 사념체를 이용하는 저주 계열, 인간의 몸에 몬스터의 지체肢體를 붙여 새로운 존재로 만드는 키메라 계열, 강력한독을 이용하는 독 계열,
대상물의 골수와 정혈을 흡수하여 그 힘을 키우는 흡수 계열, 그리고 상대방을 세뇌하거나 무의식에 시전자의 의지대로 만드는 명령을 심는 정신 계열이 있다네. 물론 독 계열이나 정신 계열의 경우 꼭 흑마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백마법에도 비슷한 것들이 있으니까.
그렇기에 흑마법사로 오해를 받아 죽어 간 마법사들도 꽤 많다네. 자네도 알겠지만 백마법을 익힌다고 꼭 심성이 바르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이 양반, 마음에 드네.'
마법에 무지한 자신을 상대로 백마법계의 비리까지 털어 놓는 것을 보면 솔직 담백한 성격인 것 같았다.
"아무튼 마츠 평원에서 죽은 자들은 흡수 계열의 흑마법에 그렇게 비참한 꼴로 죽었다네. 또한 그들을 중독시킨 듯 독의 흔적도 발견되었고, 정상 결로를 한참 이탈한 것으로 보아서는 환각 계통의 마법도 펼쳐진 것 같다고 하더군.
근처에는 다 삭아 가는 뼈다귀들이 무더기로 나와 소환 마법의 흔적까지 있었지. 이렇게 다양한 흑마법이 한꺼번에 나타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일세. 우리 마탑에서는 이것이 지하로 숨어들었던 흑마법사들이 대거 출현하는 전조가 아닌가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네.
알겠지만 흑마법은 300여 년 전에 대륙의 모든 국가에서 금지되었네."
그건 알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그 음습한 수련 방법에 사악한 용도로 사용되는 일이 잦았던 터라 원래부터 배척을 받아 오던 흑마법은, 백마법사로 흑마법에 빠져들어 결국은 미쳐 버리고 말았던 한 마법사 때문에 공식적으로 그 수련이 금지되었다.
지금은 사라진 베베토 공국의 왕실 마법사 출신으로 타키닌이라는 이름의 그 마법사는 자신의 흑마법 실험을 위해 수만 명에 달하는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납치해서 실험을 하는 만행을 자행했고, 결국은 그 사실이 알려져 공국의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대거 나섰다.
하지만 놀랍게도 타키닌은 흑마법으로 7서클에 오른 자였고 그를 토벌하기 위해 나선 공국의 기사단과 마법사들은 그에게 참혹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흑마법에 의해 죽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데스 나이트와 데스 매지션으로 만들어 오히려 공국을 공격했다.
공국은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그가 거느린 사자死者의 군대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왕실이 멸망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공국 전 익누의 3분의 1이 살해되어 다시 사자의 군대에 합류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공국의 상국인 테론 제국은 마탑들의 부추김이 없더라도 명분을 위해 타키닌의 소굴로 변해버린 공국을 토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타키닌은 죽음의 군대를 이끌고 대륙 남부로 도망을 쳤다.
당시 대륙의 패권을 쥔 세 제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약소국이긴 하지만 남부 특산의 각종 향신료 거래와 해안의 항구 도시를 기반으로 성장한 해양 7국은 동맹을 맺어 세 제국 사이를 오가면서 외교전을 펼치는 터라 군침을 흘리던 세 제국도 쉽게 침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타키닌이 이끄는 죽음의 군대는 남부의 7개국을 한 달 만에 모두 폐허로 만들었다. 대륙 곳곳에 숨어 명맥을 이어 오던 흑마법사들이 그의 휘하로 몰려든 것이다. 그중에는 백마법사로 위장하고 있던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타키닌과 그 휘하에 결집한 흑마법사들이 변변한 무력을 가지지 못한 남부 7개국을 전멸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죽음의 군대는 무려 50만에 육박했고 데스 나이트 기사단과 데스 매지션의 마법병단은 그 수가 100개가 넘어갔다.
세 제국은 공동전선을 펼쳐 타키닌과 죽음의 군대를 상대했고 최고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정의를 지킨다는 명분 하에 출전했다. 그 전쟁은 무려 1년이 넘게 이어졌다. 죽여도 다음 날이면 다시 살아나는 좀비 군대를 상대하는 것은 아무리 세 제국의 강병이라고 해도 쉽지 않았다.
결국 대륙 전체의 신전들까지 참전하게 되었다. 타키닌으로 인해 죽어간 생명이 300만이 넘었던 것이다. 신전에서 제공한 성수와 자신의 생명을 태우는 기도로 저주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사제들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결국 세 제국은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현세의 악마로 불린 타키닌도 대륙 10대 마탑 탑주들의 합공에 의해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이 전쟁의 후유증은 너무나 컸다. 참전한 연합군 170만의 절반이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이다.
그 일로 인해 대륙 전체에 흑마법사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이루어졌다. 흑마법사들과 연관된 수많은 장소들이 파헤쳐지고 연관된 이들이 조사되었으며 많은 흑마법서들이 불태워졌다.
이 과정 중에 수많은 마법사들과 죄 없는 이들이 흑마법사로 몰려 죽어갔다. 누군가가 흑마법사로 의심하고 입 밖에 올리는 순간 아무 항변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사지가 찢어지고 참혹하게 불에 태워져 죽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만큼 흑마법사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일반인들에게 있어 흑마법사들은 악마 그 자체로 여겨질 만큼 두려운 존재들이었고, 특이한 능력을 가진 많은 이들이 죄 없이 살해되었다.
후일 이 일에 대해 신전에서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지만 그때는 이미 100여 년이 지난 후였다.
‘그렇다면 마탑에서 긴장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우리 마탑은 돌풍 용병대에게 이 일의 조사를 의뢰하겠네.”
“조사라고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미 흑마법에 의해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무슨 조사란 말인가?
“증거가 없네. 남은 흔적을 통해 확신은 하지만 구체적으로 흑마법이 어떻게 쓰였는지, 어떤 흑마법사들이 그들을 공격했는지는 오리무중이네. 이 정도 사실만으로는 경각심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대대적으로 힘을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네. 대부분의 마탑들은 세월이 흐르며 정치에 깊이 관여된 상태라서 말이야.”
“설마?”
마탑 조사대가 그것들을 조사할 수 없었다면 답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흑마법사로 추정되는 무리가 마수가 득실거리는 데빌 산맥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하룬 대장이 생각하는 것이 맞네. 물건이 끌린 흔적을 찾아 쫓았지만 그 흔적은 데빌 산맥으로 향하고 있었네. 조사대 중 일부가 보고를 위해 돌아오고 나머지는 추적을 했찌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네. 아까 이곳 길드의 서브마스터가 말한 대규모 실종 사건의 조사대처럼 말이지.”
“으음.”
이제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파코추 마탑은 본격적으로 모든 마탑을 동원하기에 앞서 흑마법의 확실한 증거를 돌풍 용병대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다.
“조사대의 전력은 어떠했습니까?”
혹시 몰라 하는 질문이었다. 그래야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크험! 6서클 셋에 5서클 여섯, 4서클 열둘에 마탑 기사단이 동원되었네.”
‘빌어먹을!’
그 정도 전력이면 어지간한 영지의 기사단 서너 개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전력이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흔적 없이 소식이 끊겼다면 이 일은 너무 위험했다. 비록 그 조합이 뛰어나다고 해도 돌풍 용병대의 전력으로 데빌 산맥에 들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조사대의 행방과 흑마법의 증거만 찾아주게. 본 마탑에서는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네.”
답답했다. 이건 덥석 물 수 있는 건수가 아니었다. 자신과 돌풍 용병대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곧 황실에서도 의뢰가 올 것이라는데 이왕 받아들일 거라면 못 받아들일 것도 없었다. 단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을 고려해야만 하지만 말이다.
“일단 고민을 좀 해보겠습니다. 대원들의 의견도 들어야 하고 근처 지형이나 마수들을 비롯한 기본 정보를 더 모야봐야 의뢰를 받을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게. 난 이곳 지부에 머무를 테니 결정이 되는 대로 찾아와 주게.”
“알겠습니다. 신중하게 판단하도록 하겠습니다.”
용건을 마치고 걸음을 옮기던 후버론이 고개를 돌렸다.
“아그레시아 전하께서는 자네의 능력을 굳게 믿는다고 하셨네.”
혼자 남은 하룬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이 의뢰를 받아들여야 해!’
파코추 마탑과 황실 보고에 있는 지혜의 파편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둘 다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금지禁地이니만큼 나중에 다른 기회가 올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들이 알아서 그가 원하는 것을 내놓게 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하아! 비욘드에서 암약하는 글로리 가이아와 휴먼 가드도 찾아내서 어떻게든 게임 속에서 처리를 해야 하는데.’
하룬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은 그들을 상대하기에 너무 제약이 많았다. 더구나 지금은 제대로 된 무력이나 기반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다. 무조건 먼 후일을 위해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마음은 이미 적으로 규정된 글로리 가이아를 어떻게든 찾아내 처리를 하고 싶었다. 당장에 닥쳐오는 의뢰는 그 일과 무관했지만 오랫동안 손에 넣고 싶던 지혜의 파편 두 개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고민되지 않을 수기 없었다.
‘아니지. 데빌 산맥으로 숨어들어간 자들은 필시 글로리 가이아와 연관된 자들일 테니 따로 생각할 일이 아니야. 좋아! 일단 대원들을 이곳으로 소집하자. 대원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을 하자.’
이런 위험하고 큰일을 자신 혼자서 결정을 하는 건 대원들에게 안 될 일이다. 죽든지 살든지 모두의 의견을 들어 결정을 해야 한다. 대원들이 수련과 각자 볼일로 바쁜 것이 걸리기는 했지만 모두 소집을 해야만 했다.
‘어차피 마정석 때문에 부르려고 했으니…….’
마음을 굳힌 하룬은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희끗한 수염과 머리칼을 가진 사내의 얼굴은 위엄이 가득했지만 금박을 입힌 식탁의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하는 젊은 여인에게는 따듯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차갑고 냉철한 눈이 특징적인 아가씨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로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사내는 입맛이 없는지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그 아가씨가 식사를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망막을 통해 들어오는 모습은 얇은 얼음이 끼어있는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그는 그 깊은 곳에 다정하고 자애로운 마음이 숨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셔벗의 맛은 어떠냐?”
“아주 맛있어요.”
“조리장이 신경을 써서 만들었으니 많이 먹거라.”
“네, 폐하!”
여인의 말에 귀티가 나는 노년의 사내는 짐짓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허허! 아버지라고 부르라니까.”
“그래도 어떻게…….”
“괜찮다, 이벨린, 네가 이방인이면 어떠냐? 난 오래전부터 널 내 친딸로 여기고 있고 네 어미 역시 그러하니 자꾸 거리를 두려고 하지 말거라.”
“감사합니다.”
아가씨의 말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는 파이린 제국의 황제인 피노세 폰 알포니스였다.
“이 제국도 결국은 너와 널 돕는 사람들이 세운 것이나 다름없다. 이 아비의 능력으로는 결코 그 기초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난 내년 건국제에서 널 내 수양딸로 공포할 생각이다. 그러니 너도 더 이상 거부하지 말고 준비하거라.”
“전하! 그것은 너무…….”
피노세 황제는 손을 들어 이벨린의 말을 끊고 근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것은 내 결정이기도 하지만 널 만나 삶의 희망을 찾은 네 어미의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차대 황제로서 후계 수업을 받아야 해.”
황제의 말에는 감히 거역하기 힘든 위엄과 단호함이 깃들어 있어 이벨린은 입은 열었지만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달리 황제가 아닌 것이다. 말 한마디에도 수 톤의 무게가 실려 있어 감히 대꾸를 하기 힘들었다.
“넌 이미 누구보다 뛰어난 황재皇材를 지니고 있어. 비록 이방인이긴 하지만 모든 점에서 우리와 아무 차이도 없으니 그 사실을 밝힐 필요도 없다. 내 나이가 있으니 적어도 10년 안에는 양위가 이루어질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준비하면 될 것이야.”
이벨린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했다. 황제와 황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황실 정보국까지 맡는 것도 다른 이에게 넘겨라. 네가 맡기엔 위험하고 고된 일이야. 비록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이제는 제국의 기틀이 잡히고 있으니 나머지는 이 아비가 맡아서 하마.”
“아,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아버지!”
이벨린은 급한 나머지 아버지란 호칭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러자 피노세 황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나며 입매가 꿈틀거렸다.
“하하하! 그렇게 아버지라고 부르니 얼마나 좋으냐, 이벨린. 하하하!”
호칭이 크게 만족스러웠는지 드물게 보이는 호탕한 웃음까지 터트리는 황제를 보며 이벨린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뭔가 강렬한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말 날 아끼고 있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하고 따듯한 사랑이 그 웃음과 눈빛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진다. 현실의 부모에게도 전혀 받아보지 못했던 한없는 자애로움과 따듯한 사랑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까지 솟으려고 했다.
“하하하! 그럼 그렇게 하려무나. 하지만 제국의 정국이 안정되고 있으니 오래 시간은 줄 수가 없구나. 빨리 막중한 업무에서 벗어나 우리 부부의 사랑스러운 딸이 되었으면 좋겠다.”
“알았어요, 아버지.”
가없는 사랑에 감동해서 그런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애교 섞인 대답에 이벨린의 눈이 커졌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거니와 자신도 그럴 줄은 몰랐던 변화에 놀란 것이다.
“하하하! 이제야 내 딸 같구나. 네 어미가 지금 네 모습을 보았더라면 눈물을 쏙 뺐을 텐데 아쉽구나. 네 드레스를 고른다고 저녁도 거른 채 재단사들과 씨름을 하고 있으니.”
이벨린은 자신에게 입힐 드레스를 직접 고르겠다며 황실 재단사들을 재촉하고 있을 베르샤트 황후를 떠올리며 찔끔 눈물을 흘렸다.
‘엄마!’
이제까지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말이지만, 푸근한 미소와 뚱뚱한 몸으로 자신에 관계된 일이면 어디라도 간섭을 하고야 마는 베리샤트 황후를 떠올리면 항상 부르고 싶었던 말이다. 기억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몇 번 불러보지 못한 그리운 말이었다.
‘내가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건지…….’
그녀의 눈가가 아련해졌다. 대공 부부를 만난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 것이다.
비욘드의 베타테스터였던 시절, 남들이 정해진 구역에서 플레이할 때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조직의 거대한 힘을 이용해서 황도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녀와 동료들이 맡은 임무는 오염되고 변종 생물들의 위협으로 위기에 빠진 현실 세계를 구할 수 있는 힘이나 방안을 찾는 것이었다. 그 힘이 무엇인지는 자신들에게 슈퍼 캡슐과 상당한 이점을 암중으로 지원해준 조직 상층부에서도 모르고 있었다.
각자 흩어져 그 힘을 찾던 와중에 그녀는 제국 정보 길드와 부딪혔고 곧 그들의 습격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3서클 마법사에 불과했던 그녀의 실력으로는 제국 정보 길드가 파견한 어쌔신들을 당해낼 수가 없어 수없이 도망을 쳐야만 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위기를 피한 끝에 도착한 곳은 직할령 중 피노세 대공의 성이었다. 대공의 성에 잠입한 이벨린은 내성 깊숙한 곳으로 더 깊이 숨어들었고 그곳이 바로 베리샤트 대공비의 방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를 추격했던 어쌔신들은 대공의 친위 기사단에 의해 모두 척살되었지만 그녀 역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대공비는 당시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대공이 문제인지 아니면 대공비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후손을 잉태하지 못한 대공비는 우울증이 심해져 심신이 고목처럼 말라갔고 신관의 치유 기도를 포함한 모든 치료 수단이 소용없는 상태였다.
대공비는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도피의 와중에 많은 부상을 입은 그녀는 마음 편하게 치료를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눈을 뜬 대공비는 그녀의 상황을 알아채고는 포션을 비롯한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이벨린의 부상은 심각해서 꽤 오랫동안 치료를 해야 했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대공비와 한 방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공작가의 영애로 태어나 대공에게 시집을 온 대공비는 세상을 단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세상에 늘 궁금함을 가지고 살았는데 이벨린이 그녀에게 세상에 대해서 뿐 아니라 다른 세상에 대한 것까지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이벨린이 들려주는 세상의 이야기는 심한 우울증으로 죽어가던 대공비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빵 하나 때문에 아귀다툼을 벌이는 노예들 이야기를 들을 때면 눈물을 지었고, 풍년이 들어도 60퍼센트가 넘는 세금과 각종 부역으로 하루 한 끼밖에 먹지 못하는 평민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분노했다.
자유롭게 상대를 골라 연애를 하는 남녀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아련한 눈빛이 되었고, 몬스터를 상대하고 얻은 아이템을 팔아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주먹을 꼭 쥐며 상기된 얼굴을 했다.
그렇게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여러 계층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공비는 심각한 우울증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대공비는 서서히 건강을 회복해 갔고, 마침내 대공도 이벨린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한동안 중병을 앓던 아내가 급속하게 건강을 회복하는 것을 기뻐하며 연락 없이 성으로 돌아온 대공이기에 미처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공은 아내가 건강을 회복한 이면에 이벨린이 있음을 금방 간파했다. 비록 골든 배틀을 치르진 못했지만 대공은 황제만큼이나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대공은 이벨린이 대공비와 공식적으로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내성 총관의 자리를 그녀에게 내려 주었다. 뜻한 바가 있었기에 그녀는 대공의 성으로 자신의 팀원들을 불러들였다. 그녀는 현실에서 노블의 신분이었고 조직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간부의 자제였기에 팀장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조직 상층부에서도 정확히 무엇을 비욘드에서 얻어야 하는지 알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일단 거점을 잡아야 했는데, 대공령은 그녀에게는 그야말로 적합한 곳이었다.
내성 총관이 된 그녀가 주목한 것은 주민의 교육이었다. 직할령은 대대로 골든 배틀에서 탈락하고도 살아남은 황가의 인물들이 살아온 곳이라 교육 수준이 높아 평민들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안정된 세율과 곡창지대로 인해 주민들의 수준은 무척 높았다.
이벨린은 자신을 따르는 일단의 조직원들을 교수로 삼아 사사로이 대공성에서 교육을 실시했는데, 그 내용이 심오한 정치 철학처럼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각종 기초 통계학과 기술처럼 실생활에 밀접한 것들이었다.
직할령의 행정관들은 귀족가와 아무 연관이 없는 평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골든 배틀에서 탈락한 황가의 인물들이었기에 직할령은 그들의 세력이 커질 것을 두려워해서 아무런 힘도 뒷배도 없는 평민 출신의 행정관들을 파견하는 것이 상례였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둘 이벨리의 열린 사고에 감복했고 다투어 그녀의 붙가으로 해당 지역에서 평민들의 교육에 뛰어들었다. 안정된 생활이 가능한 직할령이기에 평민들이 교육을 받을 여건이 되었던 점도 큰 이점이었다.
직할령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이벨린에게 주목한 대공은 그녀에게 더 많은 권한을 위임했고 직할령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발전을 이뤄가고 있었다. 그런 변화에 놀란 대공은 그녀와 많은 대화를 통해 나름대로 새로운 뜻을 품게 된다.
세습 귀족도, 노예도 없는 세상.
노력한 대로 그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정직한 세상.
그런 세상이 온다면 주기적으로 수많은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 황실은 외교와 국방에만 치중하고 내정의 대부분은 능력이 있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분권 정치체제를 확립한다면, 과도하게 황제에게 쏠린 권력으로 인한 골육상쟁을 벌일 필요도 없이 안정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후손이 없기에 굳이 황위에 미련이 없었던 대공이지만 이벨린의 열린 사고를 들은 순간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막연하지만 자신이 늘 고민하던 새로운 정치와 나라의 모습이 그녀가 한 말속에 있었던 것이다.
대공은 이벨린을 참모로 삼아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 첫걸음은 황실의 비밀 중 하나로 내려온 고요의 땅에 존재하는 검증의 관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대공은 자신이 과연 새로운 세상을 열 자격이 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4관을 힘겹게나마 통과한 대공은 두 권의 마법서를 얻을 수 있었고, 이벨린의 활약으로 다크 엘프족과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대공이 군부를 장악한 이래 가장 공을 들였던 북부 군단도 완벽하게 장악했다. 애초 다른 군단과는 달리 귀족가의 영향력이 미흡했던 북부 군단이었기에 가장 강력한 무력을 지닌 북부 군단의 합류는 그의 기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벨린은 비욘드의 정식 서비스에 맞추어 황도로 향했다.
그녀가 황도에 와서 처음으로 한 것은 자신과 악연을 맺었던 제국 정보 길드를 손보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국 정보 길드의 세력은 유력 귀족 가문보다 더 강하고 단단헀다. 황실마저 그들의 영향권에 들어가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이벨린은 작전을 바꾸어 제국 정보 길드의 요인들을 회유하기로 했다. 제국 정보 길드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대공에게 꼬리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대공으로 하여금 제국 정보 길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수뇌부의 자리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를 바탕으로 제국 정보 길드의 요인들 중 한 명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제국의 귀족들과 기사들 중 절반 가까이가 고요의 땅으로 향한 것도 그녀의 작품이었다. 그렇게 모든 이의 이목을 고요의 땅으로 돌린 이벨린과 대공은 제국 정보 길드에 대한 작전이 마무리되자 전격적으로 혁명을 일으켰다.
비록 짧은 기간에 준비한 것이지만 대공의 인물됨에 감복한 수하들의 능력은 그들이 대부분 평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뛰어나 거사는 성공할 수 있었다.
다만 생각지도 못하게 글로리 가이아의 떨거지들이 그들의 거사를 막았지만 준비된 대공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놈들은 거사가 실패하자 대공령을 침범해 대공 저택을 털어 도망을 쳤다.
황도의 거사가 성공하자 거칠 것이 없었다. 대공이나 이벨린은 험준한 산맥이나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오지까지 차지할 의사는 애초에 없었다. 가장 기름진 땅과 도로가 잘 발달된 영토 정도면 족했다.
기존 테론 제국의 중앙과 동북부로 이루어진 새로운 영토는 험준한 산맥이나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경계를 지니고 있었고 그 안쪽은 이미 상당히 발달된 상태이니 굳이 다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결정의 이면에는 개국 초기에 안정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명제 하에 일부러 나머지 황자들에게 내분을 유도하는 것은 물론 그 황자들이 새로운 나라를 개국하고 안정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고려가 들어 있었다.
신분제의 폐지와 귀족가가 소유하고 있던 각종 권리의 몰수는 전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북부군에서 차출된 강병들과 함께 새로운 곳으로 배속된 직할령의 행정관들은 짧은 시간이지만 기본적인 행정 지식을 배운 보좌관들과 함께 자신들이 맡은 지역의 혼란을 수습했다.
기존 귀족들의 영지를 몰수해서 노예였던 자들과 소작농이 대부분이었던 평민들에게 고루 분배하는 작업이 최우선으로 이루어지자 나라의 근간이 될 평민들의 혼란은 금방 잦아들었다.
많은 피가 흐르고 그중에는 억울한 죽음도 없지 않겠지만 결국 혁명은 성공했다. 파이린 제국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고 각종 후속 조치들이 이어졌다. 성이 시티로 변하고 상업이 장려되었으며 물물교환 대신에 화폐 사용이 급속하게 늘었다.
교육 체계도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평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하급 아카데미들이 시티 단위마다 세워지고 학과목은 실생활에 밀접한 것들로 바뀌었다. 관리 임용은 임용 시험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승진은 복수 심사관들의 종합 평가로 결정되는 등 능력 위주로 바꾸었다.
제국의 정책은 제국민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방인들을 위한 정책들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타운 단위 이상의 도시는 무조건 광장의 반을 이방인에게 개방하도록 했고, 이방인들을 위한 시설을 국가에서 무료로 설치했다.
신탁에 의해 보장된 이방인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하자 그들의 영향으로 공업은 물론 상업 활동이 크게 증가되어 이전보다 낮은 세율을 적용했음에도 세수는 급속하게 늘었다. 국가 재정도가 증가되고 건전해지자 군비는 강화되었고, 북부 군단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의 전투력은 단기간에 크게 증강되었다.
이제 일이 년만 지나면 피노세 황제가 일부러 포기한 지역에서 개국한 신생국가들의 무력으로는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견고한 제국이 될 것이다.
이 모든 변화는 바로 이벨린으로 인해 시작된 것이었다.
“특별한 정보가 있느냐, 이벨린?”
자애로운 황제의 물음에 이벨린은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오래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일은 무척 드문 일이었기에 그녀의 얼굴은 보기 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창피함을 감추려고 일부러 딱딱하게 보고를 했다.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이틀 전에 들어왔던 미요스 신의 대리인에 대한 것이고…….”
“호오, 어떤 소식이더냐?”
황제는 최근 파이린 제국이 펼치고 있는 각종 정책에 당위성이라도 부여해 주듯 평민들 사이로 급속하게 퍼져 나가는 미요스 신의 사자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미요스 신의 사자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 그것참 안타까운 일이군.”
미요스 신의 사자가 출현하여 힘없고 불쌍한 백성들을 살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잔학한 짓을 벌이던 불온한 무리를 지옥으로 끌고 간다는 소식에 환호하던 황제는 아쉬움이 큰 것 같았다.
“사실은 반역도들이 사라졌어요.”
“엥, 그게 무슨 소리냐? 얼마 전만 해도 각 시티에서 토벌대를 파견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치지 않았느냐?”
“그랬지요. 한데 허브 시티와 데모 시티 사이의 험준하고 외딴 지역에서 암약했던 수천 명이 차례로 신의 징벌을 받자 반역에 동참한 병사들은 속속 자수를 해왔고 귀족들과 기사들은 은밀하게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하하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경하드립니다, 폐하! 이것이 다 폐하와 파이린 제국의 존재에 대한 정당성이 신계도 인정을 받은 덕분입니다.”
“하하하! 안 그래도 조만간 각 시티에 미요스 신을 모시는 작은 신전을 건립할 생각이다. 미요스 신이 평민들이나 노예들이 주로 믿던 존재여서 기존의 다른 신전들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쁘겠지만 그들이 할 말은 없을 것이다.”
“탁월한 판단이세요. 그렇게만 된다면 제국의 백성들은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일이 널려 있는데 신의 사자에 대한 건은 정말 반가운 소식이지. 그래, 다른 정보는 무엇이냐?”
“돌풍 용병대가 데모 시티에 들어와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답니다.”
“돌풍 용병대? 하룬인가 하는 잡놈이 대장으라는 용병들이 말이야?”
“네, 폐하!”
이 건을 공적인 일이었기에 피노세 황제는 자신을 폐하라고 칭하는 이벨린을 탓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이름을 들은 것이 불쾌한지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그놈들을 당장 잡아들이도록 해! 감히 어딜 기어들어 오는 거야!”
황제는 격노한 얼굴로 명을 내렸다. 하룬이 이끄는 돌풍 용병대가 고요의 땅에서 어떤 짓을 했는지 이미 보고를 통해 잘 알고 있는 황제로서는 잠재적인 적의 수뇌부를 말살할 수도 있었던 작전을 수포로 돌린 돌풍 용병대를 적으로 보고 있었다.
“폐하! 제게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다른 생각?”
피노세 황제는 이벨린의 지모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딸이 아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처리를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들을 지금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어차피 독 안에 든 쥐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거야 그렇지.”
“용병이란 자들은 계약에 의해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비록 폐하의 심모원려가 깃든 중대한 일을 방해했다고는 하나 그 일로 그들을 단죄하는 것은 제국에서 활동하는 많은 용병들의 불만을 살 수도 있어요.”
이벨린의 말에 황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모습은 ‘감히! 용병 따위가!’하고 말하는 것 같아 이벨린은 긴장해야만 했다. 평소에는 온후하지만 속에 불을 담고 있어 한번 폭발하면 거칠 것이 없는 황제의 성정을 잘 아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고요의 땅에서 떨친 위명이나 그간 해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 파장은 적지 않을 거예요. 하룬과 돌풍 용병대는 일반 주민들에게도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기에 그런 식으로 처리를 하는 것은 피해야만 해요. 설사 처리를 하더라도 안정기에 들어서고 있는 본 제국으로서는 당장은 피해야 해요.”
“그럼 네 의견은 일단은 지켜보다가 나중에 처리를 하자는 것이냐?”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다만 제 생각에는 그들의 능력이 알려진 것과 같다면 이번에는 제국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어떨까 합니다. 그들도 자신들이 제국의 행사를 방해했던 일을 생각하면 제국의 의뢰를 절대로 거부하지 못할 거예요.”
“호오!”
황제는 기묘한 눈빛으로 이벨린을 바라보며 작은 탄성을 토했다. 그녀의 배포가 생각 이상이었던 것이다. 파이린 제국은 자신의 제국이기도 하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는 그녀의 제국이기도 하다. 그런 제국에 엄청난 피해를 준 당사자를 단죄하지 않고 이용할 생각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 이번에 그들을 만나 그 능력을 확인하고 데빌 산맥으로 숨어든 가이아 팔로워라고 자칭하는 다크니스 건을 의뢰할 생각이에요.”
“흐음, 그건 좋은 생각이군. 하지만 가능할까? 조사대들도 흔적 없이 사라졌는데.”
“소문의 절반만 사실이라도 의뢰를 할 가치는 있어요.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확신했던 고요의 땅에 마련한 안배마저 무용지물로 만든 작자니 드러나지 않은 능력이 더 있을 테지요. 용병대 규모조차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몇 사람만으로 그런 일들을 해냈다는 소리는 숨겨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겠어요?”
“그렇겠지. 쉽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위명이 허명이 아니라면 우리로서는 큰 힘이 되겠어.”
자신의 금고를 털어 금지된 마법서를 가져간 것은 물론 최근 실종 사건과도 연관된 것으로 알려져 제국의 수뇌부를 골치 아프게 만드는 다크니스 문제를 그들에게 맡기는 것은 얼른 생각해도 절묘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적으로 적을 막는다. 허허! 우리 이벨린은 제왕학도 공부한 적이 없으면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을까? 과연 내 딸이로다.’
황제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제국에 미안함을 느끼고 있을 돌풍 용병대로 하여금 제국에 반하는 반역 도당을 상대하게 하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통쾌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빨리 움직여야 한다. 황실 정보국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 대장이라는 자의 움직임은 신출귀몰하다더구나. 새처럼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허황된 소문까지 돌고 있다니 말이야.”
사실일 리는 없지만 모처럼 제대로 쓸 대상을 찾았으니 기민하게 움직여야 한다. 더 이상 제국의 정예들이 상하면 제국으로서도 큰 타격이 될 것이다.
“알겠어요. 빨리 처리를 할게요.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그들을 부리는 데는 많은 재물이 든다고 하는데…….”
“의뢰비는 원하는 대로 주어라. 능력이 있는 자를 부리는 데 재물을 아끼면 안 된다. 그건 이벨린, 네가 짐에게 자주 했던 말이 아니냐?”
황제의 농이 섞인 말에 이벨린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작게 웃었다.
원대한 꿈을 품고 그 준비를 할 때 이벨린은 대공이었던 황제에게 숱하게 그 소리를 했다. 뇌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작은 영지밖에 없어 재정이 탄탄하지 않은 대공이 돈 문제만 나오면 난색을 표명하자 이벨린이 그 소리를 해가면서 그를 설득했던 것이다.
“그럼 빨리 움직일게요, 폐하.”
이벨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위대가 따라가겠지만 부디 몸조심해야 한다, 이벨린. 넌 언제나 짐과 황후가 사랑하는 딸이며 다음 대의 황제니라.”
“……알겠어요, 아빠!”
이벨린은 황제의 따듯한 부정에 왈칵 터지는 눈물을 간신히 삼키며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아빠라는 호칭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러고 보았다. 황제가 채신머리없이 활짝 웃으며 앙천대소를 터트리는 것을 말이다.
“으해해햇! 캬캬캬!”
‘칫! 아빠는!’
입술을 삐죽이며 돌아서는 이벨린의 가슴은 달콤한 감정으로 채워졌다.